극악서생 2부 – 6-1화 : 만화곡(萬花谷)? 만화곡(漫畵谷)?(1)
- 만화곡(萬花谷)? 만화곡(漫畵谷)?(1)
비화곡을 나선 지 5일 째의 날.
아직은 적들이 나타날 징후도 없었고, 이제 어느 정도는 더위가 계절 전선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참이어서 여행은 더욱 쾌적한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야 어쨌든 본래 목적은 ‘시간 끌기’인 관계로 나는 여유롭게 경치를 즐기다가 점심때쯤에는 한적한 강가에 마차를 세우게 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한가하게 흐르는 강가의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자니, 가짜 극악이고 뭐고 그냥 이대로 계속 놀러만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게는 외당의 행불자 확인의 의무가 있으니 그럴 수는 없겠지만…
“…대교야.”
“웁, …옙!”
내 옆에 서서 비연대와 혈랑대 인원들의 행동을 점검하며 한편으로는 도시락으로 준비한 만두를 우물대던 대교가 급히 입안의 것을 삼키고 대답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피식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론 그러지 말라고 일부러 불러봤어.”
“예……?”
“그렇게 계속 긴장해서 비연대 대장으로써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 우리가 뭐… 유유자적 놀러 다니려고 나온 건 아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좀 편히 지내자구.”
“아, 예. 하지만……”
“너희 자매들의 비연대 말고도 혈랑대 백인장(百人長) 만도 다섯이야. 다른 애들도 교대해가며 경계하라고 하고 특히 지휘자인 너는 좀 쉬며 즐기라구. 부대 지휘자는… 본래 그래도 돼.”
내 막가파 식 지휘자 정의에 대교는 풋-하고 콧김을 뿜었다.
“정말 진심이세요?”
“몰랐니? 나도 본래 그런 놈이잖아.”
“알겠습니다! 대교도 앞으로는 곡주님과 함께 여행의 묘미를 즐기겠습니다.”
짐짓 주어진 명령을 따른다는 딱딱한 말투의 대답이었지만 표정으로 보아 내 뜻을 충분히 이해한 듯했다. 사실 줄인다고 많이 줄였지만 그래도 우린 결코 적지 않은 병력이었다. 대교 자매들로 이루어진 비연대 대장 진이 우선 네 명이고, 대교와 소교의 직속 부관 격인 소녀 무사들이 각각 두 명, 소령이와 미령이도 자신들이 선발한 1급 무사들을 각각 세 명씩 데리고 나왔다. 혈랑대 역시 백인장 다섯에 그 밑에 각각 다섯 명의 십인장이나 1급 무사들이 포진해 있다. 가급적 눈에 안 띄려는 목적과 기타 효율성을 위해 본대와 선발대, 후위대로 나뉘어 각각 서로 일행 아닌 척하고 일정 거리를 두고 있어서 마차의 직접적인 호위는 열 명 정도지만 그 적은 인원의 수준이 무지 높은 것이다.
우선 화천루(花天樓)의 후계자와도 맞짱 뜰 수 있는 대교는 젖혀놓고라도 그 아래 자매들 모두 지금은 혈랑대의 백인장 정도의 수준으로 내공이 높아진 상태이다. 혈랑대의 백인장 수준이라는 건 다른 부서의 당주들과 정식으로 자웅을 겨루어도 결코 쉽게(총관 말로는 2000초 이내) 지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과거 외당 당주 고시리가 화산파의 장문인과 대결하여 비록 아깝게 밀리긴 했지만 자그마치 10시간이나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쳤다고 하니까 대충 비교치가 나올 것이다. 물론, 만일 실제로 대 문파의 장문인 정도의 초고수들과 싸움을 벌인다고 하면 무공의 이해도, 경험치 같은 거 때문에라도 어린 대교의 동생들이 훨씬 불리하겠지만 말이다.
“…아직은 이른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신수성녀가 갑자기 돌아가지 않는 한 전처럼 내가 가는 곳마다 풍파가 일지는 않을 것 같아.”
내 말에 대교도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신수성녀가 나를 예비 ‘사돈’으로 여기고 정파인들을 모아 놓고 가능한 한 나와 충돌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얘기는 전부터 들었었다. 그 말의 즉각적인 효과는 비화곡 주변에 항상 일정 인원이 파견되어 동태를 살피던 정파 쪽 첩보원들이 대다수 철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다만 문제는 정파의 유력 인사들도 무한정 그녀의 말에 따르겠다고 한 건 아니어서 나에 대한 적대 행위를 금하는 건 신수성녀가 강호에 남아있는 동안만이라는 조건을 붙였다는 점이었는데… 이건 신수성녀가 고맙게도 현재까지 사라지지 않고 게기고 있는 것으로 해결해 주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강호 그 자체도 아니고 원판의 적은 그 부류도 다양하니 무조건 안심하는 건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신수성녀를 소녀는 가까이 목도하지 못했습니다만, 지극히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뭐, 좀 그렇긴 하더라.”
공주라고 다 동화 속 백설공주 같은 건 아니겠고, 실제로 과거 유럽의 공주들은 많지도 않은 왕족끼리의 근친 결혼이 거듭되어서 그런지 진짜 거지같은 용모가 많았다는 얘기도 듣긴 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신수성녀는 숨겨진 ‘황실의 공주님’이라는 신분이 아니더라도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라는 명성에 시비를 걸기 어려울 만큼의 미모와 지성을 가진 여자였다.
“…전에 곡주님께서 그 백아(白鵝, 신수성녀의 배에 붙은 애칭.)에 오르셨을 때, 곡주님도 잠시… 아니 두 분 다 서로에게 남다른 느낌을 받으시는 듯 보였습니다만……”
“응? 그거야 뭐……”
무심코 그때 내가 느꼈던 ‘동병상련’에 대해 말해주려고 했지만 나는 일단 나오던 말을 끊고 대교의 눈치를 살폈다. …훗~! 대교 이 녀석, 어째 말투가 이상하다고 했더니 제 딴에는 상당히 망설이다 꺼낸 말인 듯 고개를 숙여 내 시선을 피한 채 공연히 죄 없는 왕 만두 하나를 집어들고 조물딱거리고 있다. 한 번도 대교가 말을 꺼내지 않아서 생각 못했는데 내가 신수성녀를 만났을 때 대교는 멀리 떨어진 배 밖에서도 그 장면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이지? 흠~ 네 말대로
우린 그 때, 정말 첫 눈에 서로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꼈지.
그 후 얼마간 백아를 타고 장강을 내려가는 동안… 우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
“그, 그러셨어…요?”
오~ 대교 손안의 만두가 찌그러지기 시작한다.
“응. 그 때 우리가 함께 선실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아니?”
“그, 그걸 소녀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 때, 소녀의 머리 속에는 장청란과의 비무 밖에 없었답니다.”
“흐음… 내가 그녀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 덕에 그녀와 난 정말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었는데에~?”
“궁금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기어이 참살(?) 당하는 만두 군의 명복을 빌며 나는 괜히 혀를 차 보였다.
“쯧~! 질투하는 구나, 너?”
“무…슨 말씀을! 제가 무슨 질투를 한다고 그러십니까!”
“에이~ 질투하는구먼, 뭐… 그럼 너하고도 신수성녀와 보낸 시간과 같은 시간을 가지면 되겠지?
좋아, 당장 마차 안으로 가자.”
나는 불쑥 일어서며 대교의 손을 잡아끌었고
대교는 당황하여 입으로는 “어머! 안돼요!”를 연발했으나
웬 일인지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마차 안까지 힘없이 끌려왔다(?).
“어이-! 소교야. 차 두 잔, 마차 안으로 부탁해~!”
내가 그렇게 소리치고 마차 문을 닫자
대교가 여러 가지 의미로 달아오른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차, …요?”
“응, 차. 너도 차 마시는 거 좋아하잖아.”
“그거,야… 저기, 설마 신수성녀와도 선실 안에서 함께 차를 드셨다는… 말씀입니까?”
“응. 알다시피 그 여자나 나나 몸이 무지 허약하잖아.
그땐 날이 추워서 항상 선실에서 차를 마셨지.
음… 그녀와 한 걸 똑같이 하려면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하나?
오 그래. 대교, 너 혹시 역병(疫病)의 초기 증상이 뭔지 아니?”
“그, 글쎄요…? …그럼 곡주님이 신수성녀와 보낸 시간이라는 것이… 그런 의학에 대한 논의…뿐,이었습니까?”
평소엔 너무나 똘똘하고 어른스러운 녀석이 가끔 이렇게 처음 만날 당시의 순진한 성품을 드러내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지만 나는 시치미를 떼고 대꾸했다.
“응, 그럼 뭐 했는 줄 알았어?”
“예…? 전, 다만… 너, 너무 하세요. 결국 또 소녀를 놀리셨군요!”
“당연하지. 핫하하~!”
이번엔 며칠 전처럼 금주, 금연의 반격도 못하고 민망해하는 대교를 보며 나는 한참을 웃어댔다.
“후후~ 우리 대교가 대체 뭘 바라고 여길 들어왔을꼬?
좀 전에 너… ‘이런 대낮에 어떻게’ 뭐, 그런 소리도 했지?
대낮에는 차 한 잔 마시면 안 되는 거였나 아~?”
쿠쿡…! 여전히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대교 녀석,
목덜미까지 붉은 기가 돌고 있는 걸로 보아 정말 ‘야한 상상’을 했었나 보다.
하긴, 아직 실전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비취각(翡翠閣) 근무 당시 온갖 성교육을 최우수 성적으로(?) 마스터했다고 하니…
어… 이런,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더 계속 저런 태도의 대교를 보고 있으면 나까지 이상해지겠다.
차 배달(?) 왜 이렇게 늦는……
“어, 야! 왜 그냥 가?”
차를 가지고 와서 마차 문을 열었던 비연대 여자대원이 한 명이 황급히 다시 문을 닫는 바람에 나는 서둘러 다시 불러야 했다.
음… 이번 장난은 확실히 재미있었지만 대교의 대장으로서의 권위도 생각해서
앞으로는 대교 부하들 앞에서의 장난은 좀 자제해야겠다.
오후에 다시 출발한 마차 안에서 나는 웬지 계속 기분이 좋았다.
단순히 장난 자체의 재미는 금방 잊혀졌지만
대교가 단지 날 자신의 주인으로서만 섬기는 것이 아님을 새삼 확인한 것이 더 기분 좋았다.
요즘 들어 대교를 상대로 한 장난이 심해지는 이유를… 정작 본인이 알고 있으려나…?
후… 난 현재 처음과는 달리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가더라도 대교 저 아이까지 데려가는 계획을 신중히 검토해 보고 있다.
현실적인 첫 번째 난관은 미래 여자 진이 과연 협조해 줄 것인가 일테고,
두 번째는 나의 마음인데 내 경우는 소위 ‘타임씨’에게 배째라 모드로 대하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대교이니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셈이다.
나, 진유준! 비록 볼 거 없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예비 역이다만,
마음만은 타임 패러독스고 나발이고 오직 사랑하는 여인을 되살리기 위해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날아버린 슈퍼맨이다.
근데… 또 어려운 문제는 대교 저 녀석이다.
과연 대교가 날 따라 1000년 뒤의 세계로 날아가는 걸 감수할 정도로 내게 마음이 있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저 녀석이 좋아하는 건 과연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이 뺀질한 원판 놈의 육체뿐일까?
아니면 나라는 남자 그 자체일까?
아니… 녀석은 과연 원판의 육체에 가려진 나 진유준이란 영혼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있는 걸까……?
…우오오~ 원론적으로 파고드니까 이번엔 갑자기 기분 엿 같아지려고 한다.
대교는 물론 상대의 신분과 용모 같은 걸로 누굴 좋아하고 말고 하는 싸가지 여자 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으… 제기, 솔직히 자신은 없군.
상대의 신분과 용모를 따진다고 해서 다 싸가지 없다고 표현하는 것도 좀 그렇고…
“음…? 뭐지?”
현실 도피… 아니 이 경우는 오히려 생각 도피인가…?
나는 마차가 천천히 멈추어서는 것을 느끼자마자
나 자신에게 들려주듯 더 크게 마차 밖으로 “무슨 일이지?”를 외쳤다.
“잠시 선발대가 주변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대답한 것은 마차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고 있던 미령이었다.
마차 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을 보니 우리 일행은
지금까지의 넓은 도로가 막 좁아지며 길 양옆으로 산등성이가 올라붙은 어떤 계곡의 입구에 멈춰선 상태인 것 같았다.
“만화곡(萬花谷)인가?”
내가 지난밤에 지도상으로 확인했던 지명을 말하자 미령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희가 길을 잘 못 들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인데…
이상하게 계속 입구에 다른 지명이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다른 지명?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별로 헷갈릴 만한 갈림길은 없었던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마차를 좀 더 접근시키도록 해보니
내 눈에도 계곡 옆의 커다란 바위 위에 새겨진 희미한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만화곡(漫畵谷).
흠… 발음은 같지만 뜻이 다르군.
직역하면 흐트러진 그림 계곡…? 뭐야 그게.
“아, 근처에서 만화곡(萬花谷) 본래의 표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저건 과거의 지명이었던 모양입니다.”
미령이의 보고와 함께 우리 일행은 다시 이동을 시작하여 계곡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지도상으로도 계곡 안에 꽤 많은 마을이 있다고 나와있더니만
그래서 그런지 구불구불한 계곡 길치고는 마차로의 이동도 용이할 정도로 잘 닦여져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난 왜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지?
계곡 안으로 접어들면서부터 웬지 좀… 흠… 나쁜 예감이 라던가 그런 건 아니고,
굳이 나누자면 좋은 쪽 느낌 같지만…
하여간 뭔가 주변의 공기랄까, 기운이랄까 그런 게 바뀐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게 바뀌었다고 해도 우리 일행 중 가장 내력이 깊은 대교도 별로 이상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데 내가 무슨 개 코도 아니고…
“진짜 개 코… 아니 몽몽. 뭔가 스캔된 거 없니?”
[ …현재로서는 특별히 보고 할 정도의 사항은 없습니다.
주변 스캔의 항목을 좀 더 늘일까요? ]
“그래 줄래? 그냥 기분 탓일 뿐이라면 좋겠지만……”
계곡에 들어선 지 30분 정도의 시간 동안 절로 지어지는 쓴웃음을 없애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대던 나는
내가 탄 마차가 길옆으로 살짝 난 샛길 하나를 지날 때쯤 급히 손을 들어 마차를 멈추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로에서 빠져나가 어떤 마을로 접어드는 입구로 보이는 그 샛길 자체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극히 평범해 보이는 샛길 옆의 나무에 매달려 있는 작은 나무 표지판…
거기에 새겨진 마을 이름이 내게는 웬지 결코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문제의 마을 이름은 ‘순정촌(純情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