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6-3화 : 만화곡(萬花谷)? 만화곡(漫畵谷)?(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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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6-3화 : 만화곡(萬花谷)? 만화곡(漫畵谷)?(3)


  1. 만화곡(萬花谷)? 만화곡(漫畵谷)?(3)

아직도 이 만화곡(漫畵谷)이란 곳의 특성이 실감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나는 신중하게 마을 이름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지도상에는 좀 전에 떠나 온 고막수촌 만이 크게 나와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잘한 마을들이 꽤 있었다.

고믹 (COMIC?)촌, 두라마(DRAMA?)촌 등등… 다행히 처음의 순정촌처럼 따로 샛길을 이용해야 들어갈 수 있는 마을들이 대부분이어서 이름의 수상한 정도를 떠나 그냥 지나쳐 갈 수 있었다.

뭐… 솔직히 어떤 마을을 지날 때는 조금 망설이기도 했지만… 음… 애로촌(愛路村) 같은 경우는 그 쪽에서 알아서 서비스(?)를 해왔다.

길가 언덕에 앉아서 나물을 캐고 있던 그 마을 여인네들은 뭐 그리 하나같이 섹시 글래머스런 몸매에 옆이 탁 터진 치마와 가슴이 깊게 패인 복장만 하고 있는지 원……

“곡주님, 이번 마을은 학원동(學院洞)입니다.”

학원동이라… 고막수촌 만은 못해도 꽤 규모가 커서 마차가 지날 만한 규모의 메인 도로를 끼고 앉은 마을이라 어쩔 수 없이 가로질러 가는 수밖에 없겠다.

게다가 이름대로 ‘학원’이라면 뭐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

“…일단 멈추지 말고 지나가자.”

혹시나 해서 내린 멈추지 말라는 내 명령은 마을로 접어들자마자 씹히고 말았다.

물론 마차를 모는 부하의 잘못은 아니어서 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며 마을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건 뭐…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별로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 마을에 뭔 불량 학생(?)들이 이리 많은 건지 두 패로 나뉜 어린 소년들이 길을 사이에 두고 모여 서서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대치하고 있었고 양쪽의 짱으로 보이는 녀석 둘이 마주서서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흑의(黑衣)의 험상궂은 소년이 상대 백의(白衣) 소년을 손가락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 이놈! 네가 감히 우리 사천왕(四天王)들을 차례로 쓰러트렸느냐? 후후~ 하지만 넌 아직 나의 무서움을 모른다. 이제라도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면 용서해 주마.”

흑의 소년에 비하면 핸섬한 용모인 것 같기는 했지만 만만치 않게 불량기 어린 분위기의 백의 소년이 이 글거리는 눈빛으로 받아친다.

“애초에 네가 우리 애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다. 게다가 넌 저 가려진 소녀를 상처 입혔으니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백의 소년이 가리킨 곳을 보니까 하늘하늘한 몸매의 소교스러운 소녀 하나가 걱정을 담은 눈빛으로 넋 나간 듯 백의 소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뭐, 한 눈에 스토리가 훤히 드러나는 전형적인 대사와 상황이라고 할까…?

일단 대사만 보면 백의 소년이 ‘정의의 영웅’ 쪽인 것 같았지만 난 웬지 그 백의 소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방에 부서진 기물이 늘어져 있는 것도 그렇고, 여기 저기 보수도 못한 집들이 늘어선 마을 꼬라지를 보면 이건 아무래도 애들이 가끔 또래들끼리 토닥거리는 정도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을 밖에서 우리 일행이 들어 온 것 정도는 아랑곳도 없는지 흑백의 소년들은 곧 싸움을 시작했다.

이런… 불 구경과 더불어 인류 볼거리 역사 속에서 불후의 인기를 자랑하는 것이 싸움 구경일진데, 어째 저 녀석들 싸움은 재미보다는 좀… 그러니까, 웬지… 추하군.

“받아라, 백이십팔타(百二十八打)~!”

한참을 엉켜 싸우다가 결국 상대를 깔고 앉아 연타 찬스를 잡은 백의 소년이 외친 무공명(?)이다.

난 정말 무슨 새로운 무공인 줄 알았다.

근데… 나참, 그냥 마구잡이로 때리면서 소리내어 수를 세고 있었다.

23타, 24타, 25타……

연타의 효율은 그렇다 치고, 어느 세월에 128타를 다 치겠다는 거며 그거 다 칠 체력이 받쳐 준다고 해도 그렇지 무슨 저글링, 아니 펀치 러쉬도 아니고……

“흥~! 겨우 이 정도냐? 넌 내 파와를 당할 수 없어. 에잇~!”

30타쯤 맞다가 상대를 뿌리치고 일어선 흑의 소년이 느닷없이 ‘영어’를 쓰는 바람에 순간 놀라고 말았다.

저 놈도 나처럼 20세기에서 날아 온 놈인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마차 문을 열고 튀어 나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파워’가 아니라 ‘파와(破瓦)’였던 모양인지, 어이없게도 흑의 소년은 품에서 기왓장을 연달아 꺼내면서 그걸로 백의 소년의 마빡을 까버리며 싸움의 형세를 역전시키고 있었다.

…몽몽… 이 녀석, 대체 번역을 어떻게 하는 거야?

“후후~ 이제 니 수피두(手皮頭)도 형편없어 졌구나.”

자꾸 영어 비슷한 단어를 쓰는 흑의 소년의 말은 앞뒤 문맥을 잘 살펴야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의 ‘스피드’ 비슷한 발음의 ‘수피두’는 아마도 ‘주먹’을 뜻하는 이 동네 양아치들의 은어인 것 같았다.

암튼, 흑의 소년의 비웃음에 백의 소년은 오히려 더 여유 있는 미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흥~ 너야말로 이제 더 이상은 파와식을 못 쓰겠지? 아니… 난 이미 네가 쓰는 기왓장들 길이의 순서를 파악했다. 단, 장, 장, 중, 단, 장, 중, 중……”

“헉~!”

“각오해라, 내 박장(搏掌)의 위력은 너의 뼛속까지 스며들어 골육(骨肉)이 분리되는 아픔을 줄 것이다~!”

난 잘 모르겠지만 백의 소년의 말이 무지 위협적이었는지 흑의 소년은 비로소 매우 쫀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이제야 싸움의 결말이 났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헌데… 갑자기, 그리고 뜬금없이 흑의 소년 패거리들 사이에서 새로운 소년… 아니 복장만 다른 소년들 가운데 웬지 나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녀석이 나타났다.

“크핫핫~! 사천왕을 차례로 쓰러트리더니 결국 내 오른 팔인 ‘비혈마’까지 꺽다니…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선 이상 이제 네 놈도 힘든 일이 만발할 것이다.”

“헛~! 네 놈은 몇 년 전 이 학원동에서 쫓겨났다던 ‘막강해’…? 으- 네 놈이 바로 흑막이었다니… 하지만! 네놈들의 비열한 폭력에 신음하던 내 친구들과 사랑스런 그녀가 날 지켜보고 있는 한, 나는 결코 지지 않는다!”

새로이 전의를 다진 백의 소년은 예의 폭력에 신음하던 친구들과 사랑스런 그녀의 전폭적인 지지의 시선 속에서… 지들 딴에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온갖 이상야릇한 이름을 무공명처럼 붙여서 소리치며 시전하는… 내가 보기엔 그냥 개싸움을 또 시작했다.

“…곡주님! 후방에서 거리를 두고 오던 무사들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대교의 보고를 들으며 나는 이 개싸움이 끝나길 기다리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가 앉으며 말했다.

“대교…! 양쪽 다 정리해. 실시!”

“예, 실시!”

뭐… 예상대로 조폭 중에서도 최강의 행동대장이라 고 할 수 있는 혈랑대가 우르르 공사(목표물을 아작 낸다는 뜻의 조폭 전문 용어?)에 들어가니 전체를 정리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하품 몇 번 하는 사이 상황은 종료되어, 내가 탄 마차는 진짜 조폭들에게 걸려 박살이 난 흑백의 애송이 양아치들이 주욱 무릎을 꿇은 사이를 천천히 통과해 갔다. 한참 폼 잡다가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고 쓰러져 신음하던 백의 소년이 마차 안의 나를 향해 외쳤다.

“대, 대체 누구기에 이런 짓을-?”

그냥 지나쳐가려던 나는 문득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떠올라 마차를 멈추게 했다.

“야, 너… 원래 이 마을 녀석 아니지? 실은 전에 있던 마을에서도 대장이었는데 여기 와서 처음엔 얌전히 살려고 했었지? 그치?”

“그, 그걸 어떻게 알았지? 넌 대체 누구냐?”

“그건 알 거 없고… 그보다 말까지마, 새꺄! ‘궁댕이에 멍 자국 찍힌 인 놈’이 어따대고 반말을 찍찍거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몽몽이 내 욕과 은어가 뒤섞인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녀석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지만 미령이는 대충 눈치로 알았는지 어쨌는지 녀석의 뒤통수를 퍽~하고 후려치며 지나갔다.

“다음, 너 막강해인지 뭔지. 보아하니 네 부하들인 사천왕을 저 녀석과 매번 한 명씩 싸우게 했지? 그리고… 너도 끝이 아니지? 네 뒤에 또 누구 있지? 너 보다 조금 강한 놈.”

“그걸 어떻게… 호, 혹시 산채(山砦)의 큰 형님을 아시는 분입니까?”

“내가 그 딴 놈을 어떻게 알아? 하여간 너 바보냐? 누구 좋으라고 한 명씩 보냈냐? 앞으로는 처리할 놈 있으면 악당답게 부하들 한꺼번에 다 보내서 없애버리란 말야, 알겠어?”

“옛-! 명심하겠습니닷!”

제기, 비화곡 생활 1년 만에 나도 마도인 다 되었다. 저런 한심한 유형의 악당에게 굳이 그런 충고(?)를 해줄 마음이 들다니… 아니, 결국 내가 싫어하는 건 ‘의미 없이 전형적인’ 그 자체일려나?

학원동을 통과해 계속 나아가는 마차 속에서 나는 웬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학원동에서 목격한 상황을 생각하면 만화곡이 우리 시대의 만화 세계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내 불안감이 많이 가시기 때문이었다. 전학생 주인공이 많은 학원 액션물의 패턴이야 옛날부터 비슷했지만 싸울 때 이상한 무공명 같은 걸 지껄이는 건 만화께나 밝혔던 나도 본 적 없었다. …아니, 잠깐, 설마…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저런 재기발작(?)의 학원물이 유행이 된 건 아니겠지? 음… 휴가 때 술 마시느라 바빠서 만화가게를 제대로 못 갔는데… 이런, 몽몽에게 있는 20세기의 만화 데이터는 지난 번 정리 작업 때 3패턴(복구 가능 삭제 단계 중 하나. 숫자가 1에 가까울수록 복구 시간이 오래 걸림.)으로 지워서 큰 동영상 몇 개 지우기 전에는 확인하기 어렵겠는걸?

[ 경고! 이동을 멈추십시오! 경고! STOP! }

응? 뭐, 뭐야?

“모두 멈춰!”

느닷없는 몽몽의 경계 방송(?)에 놀란 나는 다급하게 외쳐 마차를 멈추게 했다. 내가 탄 마차는 지금까지 지나온 길보다도 조금 좁은 협곡(峽谷)으로 접어들려던 참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곡주님.”

“설명할 틈 없다. 모두 마차 뒤로 물러나라고 해, 실시!”

마차보다 앞서 가던 이들까지 모두 철수시킨 후 마차에서 내린 나는 최첨단 산사태 경보기 몽몽이 협곡 양쪽의 가파른 절벽을 정밀 스캔하는 동안 마치 직접 주변의 기운을 살피는 듯 태도로 어슬렁거리는 생쇼를 한 다음 모두에게 말했다.

“여긴… 현재 언제고 무너질 수 있는 상태야. 일행을 몇 개로 나누어 협곡을 통과한다. 실시!”

내 말에 대교는 물론이고 모두들 불안한 눈으로 협곡 양쪽의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혈랑대가 먼저 신중한 걸음으로 협곡을 가로질렀고 그들 다음에는 대교 자매와 함께 나도 걸어서 통과했다. 마지막으로 비연대 몇 명이 빈 마차를 끌고 협곡에 들어섰을 때, 저 위 어디선가 작은 돌맹이 하나가 굴러 내려오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소리를 울려댔다.

그 얼마 후……

음… 다행이다. 몽몽의 스캔 데로라면 약간의 충격으로도 무너질 위험이 있던 협곡이 모두 통과할 때까지 얌전히 있어주어서 다행이었고, 근본적으로 몽몽이란 놈이 내게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행이었다. 지금까지도 무수하게 많은 도움을 당연한 듯 받아 온 몽몽에게 새삼 감사할 정도로 이번 잠깐의 ‘산사태 위협’은 내게 정말로 섬뜩한 경험이었다.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난 어쩐지 무서운 적에게 습격 당하는 것보다도 산사태나 기타 자연재해에 의한 사고가 더 끔찍하고 싫었다. 비슷한 수준으로 다치거나 죽는 상황이라도 더 거역하기 힘들고 분노할 대상도 불확실한… 그래서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뭐…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직접 겪은 자연재해라면 여름 수해 때 집에서 물 퍼내던 기억 정도이긴 했지만 말이다.

협곡을 통과한 후에는 그를 보상하기라도 하듯 매우 아름다운 산세가 좌우로 펼쳐진 길이 십여 분 정도 계속되었다. 차츰 마음이 안정되니까, 문득 그 협곡 입구에 ‘산사태 주의’라는 푯말이라도 세워 놓아야 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우리 올 때 달리 오가는 사람들은 안 보였지만 지도상으로 보면 그게 만화 곡의 유일한 출구니까 분명히 또 다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멈춰!”

처음엔 마차 유턴 시키려고 했었는데 막상 전부 세우고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한 명을 보내고 기다리…려고 했다. 근데 그 전에 엄한 일이 생겼다.

[ 주인님, 주변에 다수의 인체가 탐지되었습니다. 총 12명이며 현 위치로 접근 중입니다. ]

응…? 이제 만화곡을 거의 빠져 상태고 주변에 마을도 없는데 갑자기 웬 떼거지?

“곡주님, 주변에 누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공 출중한 우리 대교가 인간 중에는 적 탐지가 가장 빨랐고… 이윽고 몇 십 미터 앞 숲을 헤치고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나자 대교는 빠르게 그들의 성분(?)을 관찰하여 보고했다.

“일견 모두 특별한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은 자들입니다. 다만……”

나타난 12명의 남녀들 중에서 대교가 찍은 수상한 인물은 몽몽의 스캔으로도 유일하게 내공 수치가 혈랑대 십인장에 가까운 젊고 잘생긴 얼굴의 남자였다. 그러나 그들 일행을 대표해 나서서 마차 옆에 서 있는 나와 대교에게 다가온 것은 다소 경박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생긴 건 좀 그래도 그 역시 내공 수치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어서 조금 긴장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 중년인은 포권하며 말했다.

“저희는 수상한 자들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몽환수사(夢幻搜査) 무이’라고 합니다.”

[ 몽환수사 무이. 현 42세.
무공 등급 C-급으로 추정.
특기 사항은 하급 무관(武官) 출신으로, 최근 3년 이내의 기간 동안 37건의 크고 작은 범죄를 해결하여 명성이 높은 민간 밀정(密偵). ]

밀정…? 저 띨~한 인상의 아저씨가? 음… 여기서 민간 밀정이라면 우리 시대로 치면 ‘탐정’이라는 얘긴데, 어째 별로 신용이 가지 않는 인상이었다.

“하하~ 실은 저희 일행 중에 약간의 부상을 입은 사람이 있는데 마침 금창약(金瘡藥)이 다 떨어져서… 혹시 가지고 계시면 부탁을 드릴까 해서……”

“음, 알고 보니 명성이 자자한 몽환수사 무대협이셨군요. 마침 저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으니 부상자를 모시고 오십시오.”

내가 자기 명호를 바로 알아주고 반갑게 웃어 보이니까 밀정 무이는 매우 표나게 기뻐하며 미리 인사를 거듭하더니 자기 일행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소문과는 상당히 다른 이미지인데다, 그나 그 일행이나 강호인들의 외출 필수품인 금창약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자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우리의 정체를 알고 쳐들어 온 적은 아닌 것 같아서 안심할 수 있었다. 그 후 내가 앞장서서 모두에게 계속 친절하게 대해 줬더니 곧 우리는 그 일행 전체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인사를 나누며 잠시나마 어울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얼마 후, 나는 몽환수사 일행과 서둘러 굿바이~ 인사를 나누고 급히 갈 길을 재촉했다. 마차가 얼마 가지도 전에 만화곡의 마지막 관문 격인 엄청 높은 구름다리에 도착했을 때 나는 결국 마지막으로 또 이동을 멈추어야 했다. 대교가 끊어진 구름다리 앞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 어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 선발대로부터는 무사히 이 다리를 건넜다는 보고가 있었거늘……”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나도… 아니, 그래서 더 기가 막힌 나는 대교가 의아해할 정도로 심각하고 초조한 태도로 끊어진 구름다리 앞을 서성거렸다.

“반대편과의 거리가 너무 멀고 절벽도 깊습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하루를 묵은 뒤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

대교가 이미 어둑해지고 있는 하늘을 보며 의견을 말했지만 나는 무작정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당장 여길 빠져나가야 해. 으음~ 대교 너의 경공으로도 단숨에 저 건너편까지 뛰지는 못하겠지만… 그래, 작은 돌 같은 걸 건너편에 던질 수는 있겠지?”

“…가능은 할 것입니다.”

“좋아, 서두르자. 당장 건너편의 선발대에게 신호해.”

내공이 깊은 대교나 혹은 내공은 그에 미치지 못해도 본래 힘 좋은 혈랑대의 덩치들이라면 가늘고 가벼운 줄을 매단 돌맹이 같은 걸 충분히 건너편까지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먼저 출발했던 선발대 몇 명이 이미 절벽 건너편에 있는 것이다.

그 얼마 후…

우리 쪽 신호를 보고 건너편 절벽 위로 돌아온 선발대를 향해 혈랑대 몇 명이 번갈아 가며 내가 말한 바를 실행했고, 결국 한 쪽 끝이 전해지는 데 성공한 가는 실을 기반으로 굵은 밧줄까지 연결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타고 온 마차나 말을 포기하는 건 물론이고, 난 덩치 좋은 혈랑대 녀석의 등에 매달려(난 혼자 밧줄 타기 할 힘이 없으므로) 가는 쪽팔림을 감수해 가며 결국 나와 일행 모두는 만화곡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했다.

조금 전 우리가 갇힐 뻔한 곳은 만화곡을 이루는 지역의 가장 끝에 위치한 데다 산사태가 나면 퇴로가 막힘과 동시에 지금처럼 다리까지 끊기면 아예 고립될 수밖에 없는 특이한 지형으로 인해 ‘섬’이라는 지명이 붙은 곳이다. 지도에는 그 지명이 나오지 않아서 몰랐는데, 아까 그 몽환수사 무이 일행에게 듣기로는 그 곳이 ‘추리도(推理島)’라고 했다.

선발대가 먼저 새로운 말과 마차를 구하러 달려가고, 그걸 기다리는 사이 대교는 비로소 내가 이토록 탈출을 서두른 이유를 물어왔다.

“…대교야, 네가 처음 수상하다고 했던 젊은 남자의 정체가 뭔지 아니?”

“…일행 중의 한 명이 그를 ‘무결공자(無缺公子) 아개지’라고 했습니다만, 저는 그런 별호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분명 심상치 않은 내력을 가진 인물인 것 같긴 하지만……”

“나도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분명히 강호인이 아닌 조정의 관리일 거야. 그것도 판관(判官, 판관 포청천을 연상하면 어느 급인지 짐작할 수 있음)이나 그 비슷한 정도의 위치에 있는 것이 분명해.”

“세상에, 그런 젊은 나이에 고위 관직에 있는 인물이었다고요?”

대교나 다른 녀석들도 내 말에 놀라면서도 내가 어떻게 그 딴 걸 알아챘느냐는 질문은 감히(?) 하지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미령이만 흥~하고 콧방귀를 뀌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미령이는 첨부터 기분 나빴어요. 그렇게 건방지고 잘난 체하는 남자를 보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을 줄 알았어요.”

“흠, 어쨌든… 진짜 문제가 되는 자는 무결공자가 아니라. 그를 그렇게 부르던 ‘김전일’이라는 녀석이야.”

“예? 그 잘생긴 소공자가 왜요? 그도 설마 관리인가요?”

나는 비슷한 또래의 김전일에게 호감을 보이는 미령에게 피식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는 관리도 아니고 무공도 못하고… 심지어 집안의 재산도 빈약한 인물일 거야. 하지만 관상학적으로 보면… 머리가 아주 비상하지. 아마 조금만 더 함께 있었으면 우리들의 사소한 말실수도 놓치지 않고 결국 정체를 알아냈을 걸?”

“아, 소공자가 그런 놀라운 인물일 줄이야. 그래서 곡주께서 서둘러 자리를 뜨셨군요.”

“아니, 사실 난 김전일이란 녀석이나 아개지… 그 두 사람 자체를 경계한 건 아니야. 그리고 그들 말고도… 아까 소령이가 잠깐 함께 놀던 꼬마 아이 있지? 그 녀석도 무서운 놈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번엔 소령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가 잠깐 안아 주었던 고난(高卵)이란 아이 말씀입니까? 무척 귀엽고 착하던데… 정말 그렇게 무서운 아이입니까?”

“아마… 어린아이가 아닐걸? 소령이 너와 비슷한 또래일 거야.”

“애에~?”

소령이는 징그러운 짐승을 모르고 덥석 안았던 것처럼 울상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이번엔 소교가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럼 설마…! 반로환동(反老還童)의 경지에 이른 내가고수란 말씀입니까?”

“그건 아냐. 아마… 어떤 독물에 정통한 놈들… 음… 어쩌면 우리 비화곡 소속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녀석의 적에 의해 독을 마시고 알 수 없는 부작용으로 그런 모습이 되었을 거야.”

지난 상황에 대한 내 놀라운(?) 해석에 넋을 잃은 대교 자매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세상에 이렇게 순진한 독자들만 있으면 나도 추리 작가 해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충 상황이 이러저러하니까… 혹은 관상학적으로 틀림없이 이런 놈이다,라고만 해도 저렇게 철썩 같이 믿어주는 애들이 있으면 말이다. 아… 이건 대교 자매들을 너무 비하하는 생각인가? 재들은 사실 무지 똘똘한 애들인데, 자라면서 계속 ‘비화곡주 진하운의 말은 모두 무조건 옳다’라는 세뇌 교육을 받았을 뿐인 것을……

“저, 곡주님. 아무리 그 세 명이 모두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해도 곡주님의 신기에는 미치지 못할 터… 신행을 서두르신 것에는 보다 큰 이유가 있은 게 아닌지요.”

마지막으로 대교가 결정적인 걸 묻는군. 그래… 정말 더 큰 이유가 있지.

“…대교의 말 대로다. 아까 내가 협곡이 무너질지 모른다고 했었지? 지금쯤, 아니면 오늘 밤 안에 거긴 틀림없이 무너져. 그리고 다리는 이미 끊긴 상태이니 저 추리도가 일종의 밀실(密室)이 된 셈이지? 그럼… 틀림없이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많이 죽을 거다.”

내 말에 대교 자매들은 새삼 의아한 표정으로 건너편 절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아-! 방금 건너편의 누군가가 밧줄을 끊는 것 같아요.”

“…그럴 줄 알았다. 너무 어두워서 너희들 모두 누군지 얼굴까지는 못 봤지?”

네 자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가 추리 만화들의 패턴을 이미 지겹게 봐서 그런 걸 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고, 더구나 ‘김전일’, ‘고난’ 등이 내가 있던 20세기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일본 추리 만화의 주인공 이름과 비슷하다는… 내 추리(?)의 근거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기에…

나는 마치 엄청나게 대단한 사건 추리의 결말을 밝히는 명탐정의 시니컬하면서도 당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그렇게 보이려나…?) 말을 이었다.

“저게 누군지는 말하지 않겠다. 중요한 건… 아름다운 추리도에 단지 유람을 왔을 뿐이라는 저 12명 중에 사악한 운명을 가진 인물이 두 명 끼어 있었다는 점이지. 두 명 다 ‘날 때부터 주변 사람들이 무수히 살해당하는 운명’을 타고난 거야. 특히 저렇게 일정 장소에 고립되었을 때… 원판, 아, 음… 너희들의 주인인 진하운은 자기가 죽이고 싶을 때 다른 사람을 해치지만 그 두 명은 스스로 원치 않아도 자꾸 주변 사람들이 죽게 되어 있다고 할까? 내가 이렇게 서둘러 그들과 멀어지지 않았으면 아마 오늘 밤 안에 우리들 중 누군가 반드시 죽었을 거야. 사실 나도 누가 죽을지까지는 알 수가 없어서 일단 자리를 피한 거야, 알겠니?”

폼은 폼대로 잡았으나 여전히 정상적인 논리와는 거리가 먼 내 말을 들으며 대교 자매들은 감탄과 흠모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 찔린다. 정말 계속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때로… 즐기며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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