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7화 : 늑대가 지키는 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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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7화 : 늑대가 지키는 성(城)


  1. 늑대가 지키는 성(城)

만화곡에서 겪은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묘한 꿈속의 경험처럼 느껴졌다.

몽몽의 시뮬레이션 결과로는 최소한 1000년은 그런 환경 속에 있어야 그런 식으로 특정 풍토가 발생한다고 했다. 물론, 그것도 ‘가능성’일 뿐이지 ‘반드시’는 아니라고 하니 난 정말 특별한 장소를 방문했던 셈이다.

시간여행의 나쁜 경험 때문인지 그런 ‘이상한 세계’ 자체에 거부감과 경계심을 가지고 대했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어떤 마을이든 내가 대충은 그 패턴을 알고 있으니 그리 위험할 것 같지 않다. 나중에 돌아갈 때 한 번 더 들러볼까? 애로촌이나 뭐, 그런 위험성 적은 곳… 음… 순전히 그런 이유로 흠, 흠… 가볼까…?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위험할 것 같군. 현재 내 신분은 짤 없이 ‘악당’이니 거기서 오래 머물다가 일부 썰렁한 영웅물의 주인공이라도 만나면 X될 가능성이 높다. 만화곡 특유의 소위 ‘만화화 기(氣)’가 별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착한 주인공’을 밀어주기 시작하면 제아무리 막강한 전투력과 지능의 악당도 대책 없이 ‘바보’로 전락하기 마련일 테니 말이다. 뭐… 그냥 특이한 경험 한 번 한 거로 만족하고 잊어 줘야겠다.

만화곡을 탈출하고 나서는 특별한 이벤트 없이 비교적 평탄한 여행이었고, 예정대로 비화곡을 나선 지 보름째가 되는 날 드디어 문제의 짜가 극악의 출몰지인 약산성(藥山城) 부근에 도착했다. 안으로 내가 바로 들어가기기는 좀 그렇고 선발대 역시 함부로 보냈다가 외당 꼴 날까 싶어 일단은 얼마간 대기하며 월영당을 불러서 정찰을 시키기로 했다. 전문 첩보조직인 월영당의 야영(夜影)들이라면 외당 요원들처럼 쉽게 적에게 걸려 당하지는 않을 것 같아 결정한 건데…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도착한 다음날, 야영 몇 명을 침투시키고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혈랑대가 만들어 준 막사(幕舍) 안에서 대교와 점심을 먹고 있는 데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곡주님~! 큰일입니다! 사고가 생겼습니다!”

놀라서 먹던 거 제대로 삼키지도 못한 채 튀어 나가 봤더니 야영 한 명이… 13호(번호 수가 작을수록 유능한 요원이다.)라고 기억되는 녀석이 몸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죽여주십시오, 곡주님. 성 침투는 실패하고 저만 간신히……”

“나, 나머진 모두 당했단 말야? 모두?”

“곡주님께 보고하기 위해 저만 탈출을… 동료들은 그걸 위해 늑대 무리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늑대들의 무서운 기세로 보아 아마 지금쯤은 이미……”

“느, 늑대?”

이게 뭔 소리야? 군용견도 아니고 군용 늑대라도 있다는 거야, 뭐야? 아, 아니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지?

“제기, 아직 확실하지 않잖아! 거기가 어디야?”

나는 야영 13호가 방향과 거리를 알려 줌과 동시에 다급히 구조대를 출발시키고 나 역시 K-2와 실탄을 챙겼다. 그 다음에는 쪽팔림이고 뭐고 혈랑대 백인장 중 한 명의 등에 업혀 그 쪽으로 달리도록 명령했다. 원판의 육체 정도 무게는 우습다는 듯 놀라운 속도로 경공을 전개한 혈랑대는 십 분 정도 지났을 때 달리면서 외쳤다.

“곡주님, 약 이 백장 정도 거리에 야영들과 늑대 무리가 있습니다.”

“상황은?”

“아직은 버티고 있는 것 같습니만 위급해 보입니다. 구조가 제 시간에 될 수 있을지……”

이 백장이라면 약 480미터 정도이다. 혈랑대가 시력이 좋은 탓도 있지만 다행히 야영들이 싸우고 있는 곳은 우리보다 훨씬 낮은 지대여서 빨리 발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혈랑대를 멈추게 하고 근처의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가도록 한 다음 엎드려 쏴 자세로 들어갔다.

“몽몽! 시력 터보! 아, 그리고 아예 네가 조준해 줘.”

이 정도 거리는 쏴 본 적도 없고 자존심을 따질 때도 아니어서 나는 몽몽이 제공하는 십자 표시에 맞추어 조준선을 정렬했다. 침착하게… 제 1발… 꽝! 기어이 쓰러진 야영을 물어뜯으려 아가리를 벌리던 늑대 한 마리가 자신의 입에서 피를 뿜으며 자빠졌다. 좋아, 한 발 더… 이번엔 제일 덩치 큰 너… 꽝!

후… 아무리 짐승이라도 생명체를 사살한다는 건 그리 유쾌한 기분이 못 되는 군. 다행히 두 마리가 사살된 것만으로도 늑대들은 충분히 비상 사태를 실감했는지 천천히 야영들로부터 물러나고 있어서 뒷일은 구조대에게 맡겨도 될 것 같았다.

얼마 후, 다행히 살아서 구조된 야영 세 명은 13호와 함께 막사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나는 간만에 아니… 처음인가? 하여간 부하를 내 손으로 구해냈다는 사실을 뿌듯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잠시였다. 여기저기 늑대의 이빨에 찢긴 몸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하늘 같은 곡주에게 구명 받았다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야영들을 보고 있자니, 애초에 사지에 보낸 건 나라는 생각에 도리어 미안하고 입맛이 썼던 것이다.

결국 직접 침투 작전은 취소되었고 나는 좀 더 신중한 작전을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에효,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낮에는 관광하고 저녁에는 술 마시며 잘 놀고 왔는데 그 벌인가 보다. 이번 ‘짜가 극악 퇴치 작전’… 아무래도 ‘장기전’을 각오해야 할 것 같았다.

군용 늑대(?)들의 습격이라는 썰렁한 사건이 있은 후 삼일이 지나 나는 다시 ‘작전 회의’를 소집했다. 대교가 먼저 막사로 들어왔고 그녀의 뒤를 따라 혈랑대의 백인장 백상과 역시 같은 백인장 네 명이 더 들어와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그럼 시작하지.”

백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밤에도 대교님 지시대로 오백인장과 함께 성 부근으로 정찰을 나갔었는데 성 주위 숲에서 여전히 많은 숫자의 늑대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밤새 간간이 늑대들을 통제하는데 쓰이는 것으로 여겨지는 피리소리 같은 소리가 성이 있는 방향에서 울리긴 했지 만, 만수신공과 같은 내력을 지닌 고수의 존재 여부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에 나와 가경촌 나들이 가면서 안면을 튼 백상은 지금도 여전히 식사 때는 ‘밥 먹는 하마’지만 일은 일 대로 잘하는, 말 그대로 밥값은 하는 인물이다.

“다각도로 침투 가능 지역을 찾아 봤지만, 늑대의 후각은 인간보다 뛰어난지라 역시 보통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백상의 말에 대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자는 말은 내가 했지만 지금 이 작전회의의 주도자는 대교이다.

“애초에 적을 자극하지 않는 한도에서 최소한의 정탐을 명한 것은 곡주님이니 그 정도면 되었어요. 설사 만수신공이 확인 되었다 해도 강호에도 비슷한 괴공을 연마한 자들이 있다고 하니 어차피 절대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거예요.”

만수신공이란 한자 뜻 그대로 모든 짐승들을 자기 부하처럼 부릴 수 있다는… 일종의 ‘타잔 되기 신공’이라고나 할까? 내가 몽몽과 함께 그에 관한 자료를 다각도로 분석해 본 결과 사실 무공이라고 부르긴 좀 뭐하고 그냥 특이한 동물 조련 법쯤 되는 것 같았다.

“백백인장과 오백인장은 그간 수고했어요. 그리고 천백인장은 본래 약산성 출신이라고 했지요?”

“예. 하지만 벌써 10여 년 전에 떠나온 곳이라 지금은 어찌 변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직 살아있을 만한 친척이라던가 친구들이 있나요?”

“글쎄요. 본래 일가친지는 없고, 어릴 적 친구들이라면 혹시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아요. 일단 천백인장은 안내역을 맡는 것으로 합니 다.”

“알겠습니다. 대교님.”

“백백인장과 오백인장은 두 사람 임의대로 천백인장의 수하들을 적절하게 재배치하도록 해요.”

“그리 시행하겠습니다. 대교님.”

“거참……”

대교에게 회의를 맡겨 놓고 옆에서 듣기만 하던 내가 입을 열자 다들 흠칫 긴장하여 내게 시선을 모았다. 무심결에 중얼거렸던 나는 모두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아,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계속해.”

사실…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 회의 분위기에서 백백, 오백, 천백… 이렇게 서로를 불러 대니까 웬지 헷갈린다는 소리를 했다가는 따뜻했던 텐트 안에 별안간 썰렁한 바람이 몰아 치며 펭귄 수십 마리가 우아한 동작으로 피겨 스케이팅을 즐길 것 같았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빨리 준비하도록 해요. 마차를 한 대 구하는데 되도록 허름한 것으로 구하던가 아니면……”

대교는 백인장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고 세부사항을 서로 확인하는 등의 과정 때문에 회의는 얼마간 더 지속되었다. 내가 끼어 들지 않아도 일이 척척 진행되니까 좀 전엔 괜히 혼자 엄한 생각을 했었나 보다. 에구, 노느니 이번 사건의 특이성이나 다시 따져봐야겠다.

군용 늑대가 떼거지로 보초 서고 있는 성이라는 거 하나만 해도 충분히 예상이상의 사태였지만, 간신히 살아 돌아온 야영들이 습격당했던 과정과 그 후 상태를 보면 문제는 더 심각했다. 뭐… 제아무리 저 약산성이 짜가 극악에 의해 어느 정도 비화곡화 되었다 해도 진짜 비화곡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것이다. 문제는 그 새 발의 피가 ‘정체 불명’이라는 데에 있다.

아니, 야영들 정도의 고수들도 고전할 정도로 훈련된 늑대로 구성된 특수부대 편성이라던가, 현재까지 파악된 사항으로도 대충 어디서 온 조직인지 윤곽은 드러나니까 아주 정체 불명이라고 할 수는 없었겠지 만…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사건의 본질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의문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묘강일까요?”

작전 회의를 끝낸 혈랑대 백인장들이 나가고 나자 대교가 그렇게 물어왔다.

“음… 이번에 야영들은 모두 독고에 중독되어서 더 위험했었지. 독고는 분명 묘강이 원산지고… 그러나 만수신공과 유사한 수법이 강호에 없지 않은 것처럼 묘강의 독공을 쓰는 자라고 반드시 묘족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딴에는 신중하게 하느라 그렇게 말은 했지만, 현재로써는 나도 묘강이라는 생각이 짙어진 상태이다. 야영들의 증언으로는 침투 과정에서 중독 될 만한 상황이 전혀 없었다는데 그래도 중독이 된 거라 결국 가장 의심스러운 건 그들을 물어뜯은 늑대였다. 놀랍게도 야영들이 해치운 놈들이나 내 총에 사살된 늑대 시체까지 전부 다른 놈들이 물고 사라져 버려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만약 정말 늑대로부터 고독이 옮겨온 거라면 이건 보통 독물 전문가의 수법이 아니다. 몽몽의 데이터에도 없는, ‘살아있는 매개체를 통한 2차 중독’ 같은 사용법까지 쓸 수 있다면… 역시 고독의 원산지를 의심해 볼 수밖에.

무협지에서 유명한 독물을 들자면 보통 독고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거꾸로 고독이라고도 불리는 독고가 다른 독극물보다 더 끔찍한 수법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조제된 약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벌레를 사람 몸 속에 집어넣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협 만화에 나오듯 그 벌레가 사람 뇌를 장악해 중독자를 원격 조종한다던가 하는 일은 없지만 그 자체가 ‘생물’이기 때문에 원판처럼 만독불침인 사람이라도 고독은 못 당한다. 뭐… 비화곡 쯤 되면 독고의 해독제도 있고, 내게는 몽몽이라는 최첨단 해독기(재주도 많은 우리 몽몽!)가 있어서 상관없지만 말이다.

“만약 묘족이 맞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대체 묘족들이 중원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요?”

“그건 나도 아직 모르지 뭐. 묘족이 대규모로 숨어 들어와서는 한다는 짓이 중원의 악당 두목 행세를 하는 것이라니… 그냥 정신이 나간 놈인지도 모르지.”

대교는 내가 장난기를 섞어 스스로를 악당 두목이라고 표현하자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음, 혹시 정파인들이 곡주님을 음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닐까요? 곡주님이 삼태자 조명환님과 절친한 사이가 된 것 때문에 섣불리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되자 묘족을 끌어들인 건 아닐는지요.”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

“휴우- 남쪽의 오랑캐들이 최근 세력이 융성해져 나라를 세우더니 이젠 겁도 없이 중원에 들어와 설쳐대기에 이르렀군요. 참으로 염치없는 족속들입니다.”

겁도, 염치도 없는 오랑캐들이라… 대교도 역시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중화사상으로 무장된 소녀라는 것이 실감나는군.

“대교야.”

“예, 곡주님.”

그런 식이면 나는 동쪽 오랑캐다. 꼽냐? 라고 물을 수는 없어서 그냥 비지직 웃었다.

“아- 남만(南蠻, 묘강과 같은 지역)이나 북적(北狄)이 서융(西戎)과 동이(東夷)의 본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특히 동이의 독특하고 깊이 있는 문화를 배운다면 그 야만인들도 조금이나마 개전(改悛)의 여지가 생길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저도 요즘 고려(高麗)의 문화에 관심이 많아졌는걸요.”

대교… 이 앙큼한 것 같으니. 내 진짜 출신은 몰라도 최소한 내가 친동이파(親東夷派)라는 게 생각나니까 재빨리 둘러치는구먼. 고대로부터 중국이 우리를 지칭한 동이(東夷)라는 말에 대한 개념은 시대별로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았는데 현재 내가 있는 송대(宋代)에는 송과 우리 고려가 꽤 사이가 좋아서 그런지 동이(東夷)라는 말도 ‘동쪽 오랑캐’라기보다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이란 개념이며 비교적 좋은 이미지로 통하는 것 같았다. 소교가 비룡전(飛龍殿, 비화곡 간부 전용 도서관)에서 빌려왔던 몇몇 역사 서적을 보면 고구려 때는 또 조금 달랐던 것 같지만… 음, 지금은 역사 공부 복습할 때가 아니지.

“뭐… 아무튼, 지금의 묘강은 대월(大越) 건국 이후 결코 약하지 않은 국력을 자랑하고 있어. 물론, 무단으로 중원에 들어 온 자들이니 우리 비화곡에서 맘대로 처리 못할 것도 없겠지만 일단은 좀 신중하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민간 조직이 외교적인 문제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현재 삼태자 조명환이 내 후견인으로 자처하고 있는 상황이라 혹시라도 비화곡과 주변국 사이에 무슨 말썽이 생기기라도 하면 서로 입장이 곤란해질 것 같았다. 이번 묘족 버전의 가짜 극악 등장 이 정말 정파 측에서 꾸민 음모라고 한다면 바로 그런 점을 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이 만약 정말 정파인들의 비열한 음모임이 밝혀진다면 누구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교는 결국 조금 흥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앙 다물고 있었다. 어째 우리가 정파고 정파가 사마외도인 것 같은 대화 분위기지? 하긴 내 시각으로 칼 휘두르고 사람 죽이는 ‘인명경시’ 풍조만으로 보면 정파나 사마 외도인들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기도 하다. 조직 보스 생활을 1년 넘게 하다 보니 나도 좀 물든 건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같은 식구들을 좋게 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저어, 곡주님. 어떤 배경이든 감히 곡주님을 사칭하는 자가 있으니 노하신 것도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이런 일에 귀한 분께서 굳이 위험을 자처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적들의 음모를 파헤치는 일은 소녀가 맡을 테니 곡주님은 여기서 기다리시는 것이…”

애정과 걱정이 담뿍 담긴 시선을 던져오는 대교… 그래, 이런 애가 사마외도면 나도 그냥 계속 사마외도 할란다,가 현재의 내 결론이다.

“아냐, 네가 가면 나도 가는 거야.”

무심코 나온 말… 아무래도 내 창작이 아닌 어디서 들어 봤던 대사인 것 같지?

“정히 그러시다면… 소녀, 목숨을 걸고 곡주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 잘 부탁…한다.”

본래는 내친 김에 더 그럴듯하고 멋진 대사로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좀 어정쩡한 대꾸를 하고 말았다. 간만의 닭살 분위기여서 조금 당황했던 것 같다.

낡은 마차 구하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혈랑대 몇 명이 오진우 백인장에게 깨지고 있는 동안 다른 혈랑들이 그 동안 내가 타고 왔던 마차의 지붕을 날려버리고 마차 옆면을 돌 같은 것으로 벅벅 긁고 흙칠을 하는 등 작업을 해서 허름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 무지 비싸게 산 마차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족보 없는 똥개도 아닌 정통 늑대 무리가 주변을 지키고 있는 성이니 몰래 접근하는 것은 힘들 것 같고(내가 따라가면 더더구나) 해서 결국 이전에 외당 요원들이 썼다는 방법, 그냥 큰길로 걸어가 성문을 두드리며 “문 열어 주세요~! 플리즈~!”하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결정한 일행은 우선 나하고 대교 그리고 ‘천사 표’라는 이름의 약산성 출신 백인장(본래 그래서 데려 온 거다.) 이렇게 3인이었다. 아니, 정확히 하자면 마차 밑의 흑주와 내 손목의 몽몽까지 포함해 4인(人) 1기(機)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일단 겉으로는 3인으로 이루어진 우리 일행은 오후 늦게 출발했고 마차는 인적 없는 숲길을 3-40분 정도 달려야 했다. 외길에서 약산성과 또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로 갈라지는 지점에 도착하여 마차를 약산성 쪽으로 향하게 하자 예상대로 마차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었다. 나타난 것은 회의의 남자들이었는데 한 명은 20대 초반, 다른 한 명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잠깐-! 멈추시오!”

“…무슨 일이오. 노인장.”

일단 마차를 세운 천사표 백인장은 나름대로 부드럽게 한다고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기본적으로 터프한 음성과 쬐~금 험악한 용모 때문에 본래 의도와 달리 ‘넌 뭔데 가로막고 지랄이야, 임마.’라고 대꾸한 느낌을 주었는데 같은 편인 내가 봐도 그렇다. 그래서인지 중 백발이 성성하고 인자한 인상의 그 노인은 우리 일행의 행색, 특히 천백인장을 재빨리 살피고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함부로 길을 막아서 미안하구려. 사람 생명에 관계된 일인지라 무례를 무릅써야 했으니 이해하시오.”

“생명에 관계된 일?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오.”

“그건……”

노인의 말은 현재 약산성에 역병(疫病)이 돌아 주민들이 무수히 죽어가고 있으니 우리도 성으로 가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서 역병이라면 치명적인 전염병을 통칭하는 거지만 현재의 계절에는 보통 장티푸스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20세기에서야 주사 한방으로도 예방 가능하겠지만 이 시대에선 동의보감의 허준 급 명의가 떠도 제압하기 빡센, 매우 위험한 전염병인 것이다. 천백인장은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뒷자리의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참 안됐구먼. 하필 천아우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는데 역병이라니……”

내가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자 옆의 대교도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을 위해 애써 길을 돌았는데 참으로 공교롭게 되었군요.”

대교는 본래의 미성과는 상당히 다른, 남자처럼 굵은 저음이 섞인 음성을 쓰고 있었다. 대교는 현재 일부러 피부를 거칠게 보이게 하면서 약간 부풀게 하는 약품(물론 천연 소재)을 얼굴에 사용한 데다 옷 속에도 적당한 양의 솜을 써서 몸매를 변형시키는 등, 결코 미인이라 하기 어렵고 나이도 10살 이상 더 들어 보이는 변장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나 같은 경우도 최근 업그레이드된 인피면구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30대 이상의 나이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형님과 형수님께 꼭 제 고향을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그러면 아우님이 너무 아쉽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와서 말이야.”

“하는 수 없지요. 저 때문에 두 분께 누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천백인장과 나의 대화는 그대로 마차를 돌려 약산성에 안 갈 것 같은 분위기로 시작되었지만 곧 예정대로 대교가 끼어 들었다.

“제 생각에는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잠시라도 천공자의 고향을 돌아보는 것이 나중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걱정이라면 하지 말아요. 아무리 무서운 병마라 해도 먹고 마시는데 조심하면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무른다 해서 큰일이야 있겠어요?”

여기서 나도 마누라 말이라면 껌벅 죽는 남자의 모습으로 ‘역시 그리 하는 게 좋겠다’며 맞장구를 쳤고 그렇게 대화 방향이 바뀌자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 들어왔다.

“커험, 거 부인께서 역병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구려. 그동안 우리 마을 사람들도 조심에 조심을 했건만 벌써 성 전체에 퍼져 버렸으니 섣불리 판단하지 말기 바라오. 이건 모두 그대들을 위해 하는 말이라오.”

퍼지긴 퍼졌어도 역병이 아니라 독고겠지만 뭐, 일단은 공식적인 사항에서 아는 체를 하기로 했다.

“음… 혹시 성에 도는 역병이 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소? 멀쩡하던 사람이 몸이 나른하고 식욕이 없어지며 두통, 요통, 관절통 등이 일어나고 오한이 난다 호소하지 않던가 말이오.”

“예? 그, 그건……”

노인이 망설이는 틈이 찬스다 싶어 나는 재빨리 ‘명의 허준 모드’로 말을 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 후에는 열이 하루하루 높아지고 발병 보름 전후에 고열이 계속되고 복부가 팽창하거나 가슴, 배 등의 피부에 작은 담홍색의 발진이 수십 개 드문드문 나타났을 것이오. 혀는 황색 또는 갈색의 두꺼운 설태(舌苔)에 덮이고 식욕이 없어지며 심해지면 기침에 피가 섞이는 수가 있고, 중증일 때에는 귀가 멀고 의식이 혼탁해지는 수도 있었을 것이요. 발병 후 20일이 지나면서부터는 열이 높고 조석(朝夕)의 차가 차츰 커지며 식욕이 나고 병이 회복되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지만, 실은 이때 내장에 출혈을 일으키기 쉽소. 발병 30일이 넘게 되면 열은 크게 오르내리면서 차츰 내리기 시작하고 다시 7일 정도이면 평열이 되어 완쾌되기 마련이지요. 물론… 그런 과정에 몸이 배겨나지 못하여 죽는 사람이 태반이겠지만 말이오.”

드라마 허준 속이라면 이쯤에서 ‘진정 명의십니다~!’라며 무릎 꿇는 장면이 연출되겠지만, 노인은 벌레 씹은 표정이 되는 걸 참는 매우 어색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 지식을 자랑해서 섣불리 다른 병을 내세워 사기 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내 의도였다. …그래, 솔직히 대교 앞에서 좀 튀고 싶기도 했다.

“의… 의원이셨소?”

“그저 심심파적으로 의서 몇 권 읽었을 뿐이니 어찌 의원이라고 할 수 있겠소. 음… 내가 비록 환자를 치료할 수는 없어도 조심하는 법은 알고 있으니 주민들에게 그것을 알려주는 것도 좋겠군. 안 그렇소~ 당신?”

마무리로 느끼 닭살 모드로 대교에게 묻자 대교는 변장도 무색할 정도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오.”

“예?”

“성에는 의원이 없었는 줄 아시오? 병에 대해 조금 안다고… 음, 아무튼 좋소. 정히 고집을 부리겠다면 더는 말리지 않겠소이다.”

우리의 입성을 막을 명분이 약해지자 노인은 말투부터 변해있었다. 우리가 다시 마차를 출발시키자 노인의 표정에 노골적인 냉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시건방 진 놈, 그럼 가서 한 번 죽어봐라!’라는 의미일 것이다.

얼마 후 우린 드디어 늑대 출몰 지역으로 추정되는 숲길로 접어들기 시작했지만 역시 별다른 일은 없었다. 대낮인데도 가끔 아우우~하는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좀 썰렁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삼십분 정도를 더 가서 숲길을 벗어나니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며 성벽과 성문이 보이는 평지가 나타났다. 성의 규모는 말로 듣고 생각하던 이상으로 상당히 커서 대충 봐도 잠실 운동장보다 훨씬 크지 싶었다. 성문으로 통하는 길 양옆으로 벼가 자라고 있는 논이 꽤 넓게 펼쳐져 있었고 논과 산등성이 경계선 부근에는 농가도 여러 채 보이고 있었다. 그 자체는 평화롭고 아늑한 전원풍경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 전원풍경이 시작되는 지점 즉,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몽몽이 경고해왔다.

[ …양쪽 숲 속에 다수의 인체가 탐지되었습니다. 모두 인명 살상용 병기를 소지한 상태입니다. ]

기껏 늑대 지역을 무사 통과했더니 여기서 인간들에게 습격이나 검문 검색을 당하는 거 아닌가 하여 조금 긴장했지만 다행히 우리가 지나가는 동안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나처럼 미래표 고성능 탐색장치가 없어도 그 정도 매복은 쉽게 눈치 챌만한 수준의 대교와 천백인장이었지만 역시 둘 다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 차츰 가까워지는 약산성의 성벽은 오래 관리가 안 된 성답게 넝쿨 같은 것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어 내게는 오히려 일부러 군대식으로 위장을 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성문은 두드릴 것도 없이 이미 바깥으로 열려진 상태여서 들어가기도 전에 성안의 경치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고 있었는데, 아직 특별히 이상하게 느껴지는 구석은 없어 보였다. 성문을 지키는 자들조차 눈에 뜨지 않아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 기까지 했다.

“그리 바뀌지 않았군요. 성밖이나 성안의 거리나……”

중얼거린 천백인장은 마차 옆을 돌아가던 촌부를 불러 세워 객점이 어딘가를 물었다.

“음, 아직도 그 두 곳만이 있는 건가?”

“그렇소. …댁은 약산성에 처음이 아닌 모양이구려.”

“본래는 나도 이 곳 출신이오. 벌써 10여 전에 떠났었지만 말이오.”

“쯧쯧, 하필이면 이때 고향을… 아, 아니오. 그럼 이 만.”

무심코 혀를 차던 촌부는 스스로의 말에 당황한 듯 재빨리 몸을 돌려 총총히 마차로부터 멀어져갔다. 성 밖에서부터 계속 느끼고 있던 ‘어디선가 감시하는 눈길’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태도로 성의 중심 도로를 따라 마차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자꾸 의식을 해서 그런지 언뜻 평범한 본래의 생활을 하고 있는 성 주민들이 간간이 우리 쪽에 호기심과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식을 덮느라 일부러 노점상 앞에 마차를 멈추게 한 다음 대교와 물건을 구경하고 가는 등 약간의 연막을 피우기도 하며 천천히 객점을 찾아들었다. 2층 짜리 낡은 목조 건물이었는데 이 곳은 성 안에 단 두 곳뿐인 객점이며 숙박까지 가능한 조건이면 유일한 곳이라고 했다.

“실은 이 곳이 바로 제가 성을 떠나기 전까지 머물던 곳입니다. 부모를 여읜 후 당시 객점 주인이 절 거두었었지요.”

“흠, 그래? 그럼 여기저기에 추억이 서려있겠구먼. 저녁식사 전까지 아우님 혼자 돌아보고 오게나. 우린 좀 피곤해서……”

주변 정찰을 하고 오라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것은 우리 방 천장에 숨어있는 것으로 탐지된 묘족의 감시자를 의식해서였다. 재밌는 건, 천장에는 이미 흑주도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감시자의 바로 머리 위, 거리 상으로는 1미터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녀석은 흑주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중 천백인장이 돌아오고 다 함께 저녁식사를 끝내자 그때까지 두 시간 정도를 끈기 있게 버티던 감시자 녀석은 비로소 자기 딴에 매우 은밀하게 철수했다.

“내가 흑주였더라면… 눈앞의 녀석 뒤통수를 쿡 쥐어박고 싶었을 거야.”

내 말에 대교가 입을 가리며 푸웃, 소리를 냈다. 농담인 줄 아는 모양이다. 진심이었는데…… 뭐, 하여간 더 이상의 직접적인 감시는 없는 것 같아서 우린 서둘러 저녁식사의 뒤처리를 해야 했다. 독고가 든 음식물을 오바이트 해버리고 혹시라도 속에 남아 있다가 부화될지도 모를 독고의 유충을 대비해 미리 준비해 온 해충제(?)를 먹는 일이어서 다 끝내고 나서도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사실 몽몽이 나는 그렇 게까지 안 해도 자체적으로 소독할 수 있다고 했지만 배속의 ‘벌레’를 의식하니까 꺼림칙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백인장이 옆의 자기 방으로 간 후 나는 대교와 차를 마시며 찝찝함을 달랜 다음 침상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야 했다.

천백인장이 오랜만에 고향에 들른 청년으로서 주민들에게 직접 접촉하며 얻은 정보를 추가하여 현재 성 안의 상황을 정리해 보았는데, 아직은 묘족으로 여겨지는 세력에게 성이 완전 점령되었음을 확인한 것 외에는 특별한 사항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니… 그 것밖에 확인 안 되는 자체가 오히려 특별한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무협지에서 묘족이라 하면 기괴한 사술과 독공을 구사하는 소규모 종족 정도로 자주 등장하지만 현 시대 중국에서 묘족은 남부 지역의 소수민족들을 통칭하는 거라 실제 규모는 장난이 아니고 그 묘족들이 현재 묘강에 건국해 놓은 대월국은 엄연히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왕조이다. 중원에서 묘족이라 부르는 여러 묘족 중에서 이번 묘족은 나중 20세기에도 묘족이라 칭해질 소수 민족 묘족과 같은 묘족은 아닌 것 같지만 어차피 그 묘족이 현재 묘족에 속해있고 현재 묘족을 그 묘족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 묘족이 그 묘족 맞는 거고, 그 말이 그 말이므로… 그러니까… …에이 씨~! 헷갈린다.

제기, 생각 정리하려다가 핀트가 어긋나면서 엉켜버렸다.

일단은 현재 중원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나도 그냥 묘강=대월=묘족, 이렇게 단순 공식으로 생각하는 게 좋겠다.

어차피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묘족은 대월에 속하는 묘족을 말하는 거였으므로 지금 굳이 묘족이라 불리는 다른 묘족과 이 묘족을 따져서 그 묘족과 이 묘족을 구분해 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중이라도 그 묘족과 이 묘족을 구분하는 기준은 요번 묘족을… …에이 썅~! 내가 왜 이러지? 설마 독고, 아니 고독의 후유증이라도 발생한 건 아니겠지?

어차피 독고는 고독이라고도 불리니까 독고를 고독이라고 하거나 고독을 독고라 부른다고 독고와 고독이 다른 건 아니니까 고독을 먹은 건…

“곡주님……?”

“으, 으응?”

“신색이 어둡고 심기가 어지러워 보이십니다. 무어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냐 대교야. 그냥… 그냥 어쩌다 보니 쓸데없는 생각에서 좀… 어쨌든 잘 끊어 줬다. 고마워.”

대교는 내가 대체 뭘 고맙다고 하는 건지 정확히 이해한 건 아닌 듯했지만 더 이상 뭐라 묻지 않고 얌전히 차를 한 잔 더 가져다 주었다.

…음, 차 몇 모금 마시며 한숨 돌리니까 좀 낫군. 정신 차리고 다시 시작해야겠다.

사실 난 복잡한 상황이나 이야기를 나름대로 최대한 정리하여 단순화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작업에 있어 비교적 강하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근데 가끔 컨디션이 좋지 못할 때는 스스로 무한루프에 빠지는… 전문용어로 ‘삽질 모드’가 되는 수가 있는데 이번이 딱 그 경우였던 것 같다.

여기서 빠져 나오는 대표적인 방법은 다른 사람(가능한 한 똘똘한 인물.)에게 같은 주제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음… 아직까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상황이긴 하다만, 대교는 오늘 여기까지 오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네 생각을 좀 듣고 싶다.”

내 요청에 대교는 잠시 곤란한 표정으로 망설이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소녀가 나름대로 생각한 바를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망설이는데 쓰인 짧은 간격으로 보아 대교도 그동안 혼자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에 곡주님을 가장하는 자가 이 곳에 나타났다 했을 때 소녀는 그 가짜가 곡주님을 가장함으로써 단순히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하려 들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짜는 진짜 곡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기에 이런 편협한 장소에 숨어 약하고 물정 모르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지요. 허나, 현재는 그 가짜와 추종자들이 상당한 조직력을 갖춘 묘족임이 확실시되고 있으니 문제가 그리 단순하고 가벼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묘족의 무리가 미치지 않은 이상 감히 함부로 중원에 발을 들여놓을 것이며 거기에 곡주님과 비화곡을 가장할 생각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소녀가 의심하기로, 정파의 간교한 무리들이 암암리에 음모를 꾸며 묘족의 무리로 하여금 곡주님의 행세를 하도록 하여 곡주님의 명예를 더럽히고 나아가 묘족과 곡주님의 관계를 날조하여 삼태자 전하가 곡주님을 오해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흠, 역시 얘하고는 좀 통한다니까.

강호 상에서 극악 서생의 이미지가 더 이상 망가질 여지가 남았겠는가를 생각했을 때 곡주의 명예 운운은 좀 그래도…

현 사태에 삼태자 조명환을 연결해서 생각한 부분은 내 생각과 거의 일치했다.

대교의 정돈된 어조 덕분인지 엄한 부분에서 삐딱선을 탔던 내 머리속도 제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웬일인지 대교는 다시 망설이고 있었다.

“괜찮아, 계속 얘기해 봐.”

“…예. 오늘 성에 들어와 묘족들의 움직임을 직접 보고 있자니 성을 장악하고 있는 사실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게 애쓰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런 성을 택한 이유도 그렇고… 어쩐지 소녀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자꾸만 듭니다. 혹시라도 이번 일이… 만약에……”

“날 노린 거라면… 애초에 이 가짜 놀음이 비화곡주인 나를 이 곳에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다면 우린 지금 그 함정에 자기 발로 찾아 들어온 꼴!”

내가 먼저 구체적으로 집어내자 대교는 수능시험 죽 쑤고 와서 부모님 앞에 앉은 고3 같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곡주님도 그 점을 우려하고 계셨군요. 이것은 모두 저의 경솔함 때문입니다. 조금 더 신중하게 전후를 살폈어야 했거늘……”

“됐어. 네가 자책할 필요 없어. 아직 어떤 것도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잖아. 그리고 설사 누군가 날 노리고 꾸민 일이 맞더라도 일의 진행으로 보아 자신들이 직접 나설 배짱도 없는 자들이 분명해. 그런 자들을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

대교를 안심시키려고 조금 무리해서 말한 거다.

솔직히 이 시대에서 비화곡주를 노릴 정도의 적이라면 누구든 졸라 강할 테고… 솔직히 되도록 안 만났으면 좋겠다.

“곡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도 안심이 됩니다. 하지만……”

“녀석, 새삼스럽게 왜 그래. 날 지켜내겠다고 큰소리 치더니 벌써 자신이 없어졌어?”

나는 웃으며 농담처럼 말을 건넸건만 대교의 표정은 그렇지가 못했다.

“만약의 경우,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곡주님을 지켜 낸다면 다행일 것이나 만의 하나라도 곡주님 신변에 불미스런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럼 소녀는 죽어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그만!”

대교가 갑자기 초창기 분위기의 대사를 하는 바람에 서둘러 끊어 버린 나는 약간 인상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대교, 너. 오버하지마! 아직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다고 했잖아.”

“예? 오바…? 아, 죄송합니다, 곡주님. 소녀가 잠시 이성적이지 못했습니다.”

‘오버’란 20세기 한국형 영어에 대해 교육해 놓았더니 매번 이러저러한 말이나 행동하지 말라고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 없어서 편해졌다. 대교가 어느 정도 정확하게 뜻을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니 차츰 주변으로 단어 교육 범위를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초 고수들이라고는 해도 적지의 한 복판에서 단 세 명이 날 호위하고 있자니 꽤 불안한 모양이다.

“음… 그보다 대교 넌 아무래도 역용(易容)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

“아, 제 역용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그래, 넌 아무리 바꿔도 여전히 예쁘기만 하니 역용의 효과가 없는 것 같아.”

서둘러 자신의 변장을 살피던 대교가 나의 이어지는 말에 비로소 피식 웃으며 거울을 내려놓았다.

“…주무시기 전에 주안상을 내오도록 할까요?”

“어, 그래. 가볍게 한잔하자, 우리.”

설마 또 독고를 쓰겠냐 싶어 허락하자, 대교는 가벼운 옷자락 소리를 내며 방을 나갔고 나는 천장을 향해 대자로 누워 쩝, 입맛을 다셨다. 현재, 그리 맘 편한 상황은 못되지만 지난번에 사영하고 뺑이 치며 목야평에 갈 때보다야 양반이다. 더구나 지금은 나도 K-2, 아니 독각포와 수류탄(화약을 많이 줄여 위협용에 불과하긴 하지만.) 등으로 무장한 몸이니 만약의 경우 누구하고라도 한 번 붙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잠시 후 술상이 차려지고 나자 대교는 문을 잠그고 창문도 모두 닫아 버리더니 실내의 등잔불들을 한 개로 줄이고 있었다. 그러고도 나보고 잠시 더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역용했던 것을 모두 지우고 나서야 자리에 앉는다. 번거로움을 무릎 쓰고 내 앞에서는 항상 예쁜 모습을 보이려는 대교… 그래, 적지 한 복판이고 뭐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다음 날 아침.

“으… 흐응……”

잠결이지만 내 입에서 괴이한 소리가 흘러나온 것 같다. 왜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 깨닫는 순간, 나는 발작하듯 상체를 벌떡 일으키…지 않았다. 오른 쪽 볼에 부드러운 감촉과 달콤한 향기가 스치고 있었다.

“으…으음, 음냐~ 쩝쩝~!”

내가 노골적으로 추접하게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자 귓가에 풋~ 하고 가벼운 콧바람이 불었다. 누워있는 내게 숙여져있던 상체를 세우는 기색이 느껴지더니 웃음기를 머금은 대교의 음성이 들려왔다.

“알고 보니 이미 깨어 계셨군요.”

“음… 아냐, 나 아직 자는 거야.”

“후후- 과연 뭐든지 남다르셔서 잠꼬대도 깨어있는 사람처럼 또렷하게 하시는군요. 음… 혹시 아침 식사도 그냥 주무시면서 하실 생각이세요?”

“좋은… 생각이야~!”

내가 몽유병 환자처럼 짐짓 몽롱한 표정과 몸짓으로 몸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대교가 손을 뻗어 날 부축해 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다음에야 슬며시 눈을 뜨니 비로소 나와 눈이 마주친 대교는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대교의 뒤쪽, 창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의 느낌이 오늘 날씨는 매우 맑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간밤과는 달리 뭐가 그리 좋은지 내 침상 옆에서 생글거리고 앉아있는 대교에게 나는 늘어지게 긴 하품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적진에 들어와서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는가 싶긴 했지만 워낙에 믿음직한 호위자들과 함께여서 그런지 별로 긴장은… 음… 그렇다고는 해도 생활이 너무 자연스러우니까 한편으로는 웬지 그 자체가 불안해지기도 한다.
불안감이라… 전의 타임씨 방문 이후로 가끔씩 드는 불안감의 정체는 내가 불과 1년 만에 너무 현재의 환경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점이다. 비화곡주로써의 생활과 평범한 본래의 나로 돌아가 하게 될 생활의 차이는 거의 대기업 회장에서 단칸 셋방살이 백수로 전락하는 정도의 격차가 있을 것이다. 음… 하지만 사실 그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적응력’ 하나는 자신 있는 나이다. 내 막연한 불안감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 ‘적응력’ 자체인지도 모른다. 뭐랄까… 너무 상황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오히려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지내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실은 그런 느낌은 이번에 비화곡을 빠져 나오면서 웬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 시대에 K-2까지 등장시킬 정도로 나름대로는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지내는 듯한 기분은 사라지질 않으니… 음… 대체 뭘까……? 에이, 기껏 기분 좋게 일어나서 뭔 궁상이냐. 일단은 당장 눈앞에 닥친 짜가 문제나 해결하고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다.

“차나 한잔하고 나서 아침 먹기 전에 주변을 좀 돌아보……”

“잠시만요.”

응? 대교가 내 말을 끊어?

“저건… 음, 드디어 나타난 것 같습니다.”

급히 창가로 향한 대교의 뒤를 따라가 녀석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과연, 짜가 극악이 뜬 것 같았다.

귀 밝은 대교가 먼저 들은 것일 악기 연주 소리가 조금씩 내게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성의 안쪽 방향으로부터 꽤 큰 규모의 행렬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대로를 따라 차츰 우리가 있는 객점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근데… 이건 뭐 보통 화려한 행차가 아니었다. 가짜가 타고 있을 화려한 디자인의 가마부터 가마꾼과 그 수행 행렬의 구성원들까지 온통 눈처럼 하얀 백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마차 뒤에서 이상한 그림이 수놓아진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따라오는 녀석들이 수십 명… 마차 앞으로는 긴 나팔 같은 악기와 징을 두드리며 요란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자들… 그리고 그 맨 앞으로는 몇 명의 여자들이 바구니를 들고 앞장서고 있었는데 그녀들은 바구니에서 흰 꽃잎을 꺼내 연이어 허공에 뿌리고 있었다.

“호호~ 생각보다 경박한 성품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작은 성에서 저런 식으로 유세를 부리다니……”

대교의 말에 나도 피식거리며 웃었고 행렬은 차츰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엔 밖으로 나가 구경꾼들 틈에서 좀 더 가까이 볼까도 생각했지만 대교도 말리 고… 뭐, 이대로라면 가마가 객점 아래를 지날 때 가짜의 얼굴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예 의자를 가져다 앉은 나에게 대교가 찻잔 두 개를 가지고 왔다. 드디어 가짜의 가마가 가까이 접근했을 때… 우린 비로소 가마에 드리워진 흰 커튼 사이로 가짜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대교도 놀라 찻잔을 떨구고 말았는지 챙~! 하는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세, 세상에…! 이, 이럴 수가… 어찌 저렇게 정교한… 인피면구가……?”

나와 대교의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가마 안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인물의 얼굴은 지난 1년 동안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날 마주 노려보던 바로 그 ‘독각와룡 진하운’의 재수없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몽몽은 방금 내게 더 놀라운 스캔 결과를 알려왔다.

“대교…야, 저건… 인피면구가 아니야. 진짜… 얼굴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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