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8-1화 : 진유준. 진하운. 진하연.(1)
- 진유준. 진하운. 진하연.(1)
가짜 극악이 인피면구 따위가 아닌 진짜 진하운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내 말에, 대교는 더욱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예? 그럴 리가… 그럼 대체……”
몽몽이 알려 준 정보가 하나 더 있었지만, 그 또한 이 사태를 모두 해명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걸 대교에게 알리기에 앞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행렬과 가마는 내가 서 있는 창가 바로 앞에 멈춰 있었고, 요란하던 악기 연주도 멈춰 있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일시에 적막해진 거리에는 거친 바람만이 소리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가마의 흰 천이 바람에 말려 올라 춤추는 아래로 은은한 피빛의 두 눈동자가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단순히 충혈되었다는 현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저 요사스런 눈빛은 틀림없이 극악서생 진하운의 상징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나를 향해 한쪽 입가를 올려 새액~하고 비릿한 미소를 짓는 저 표정도… 제기, 혹시 지금 나 역시 웃고 있는 건가? 별로 그럴 기분이 아닌데 왜……
“…거기 있어. 내가 내려가지.”
나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담담하게 말하고는 주저 없이 객실을 나섰다. 뭐랄까… 어느 순간부터인지 나 진유준의 의식보다 원판 진하운의 육체가 먼저 가마 속의 녀석에게 격렬히 반응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어이없게도 바로 조금 전과는 달리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동작 하나하나에 왠지 모를 기쁨 같은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객잔 입구로 나서자 가마 행렬을 이루던 자들이 무기를 빼들고 나와 가마 사이를 가로막았다. 우리 측에서는 대교와 오백인장, 흑주까지 모습을 드러내 날 감싸는 대형을 만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러나 난 걸음을 멈추지 않고 가마로 더욱 다가서며 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어 던졌다.
내 쪽으로 무기를 들이대던 자들이 일제히 경악하더니 이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가마 바로 앞까지 다가선 나는… 아니 진하운은 갑자기 평소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그렇게 생각되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가마 안에서 별안간 아하하하하~ 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어 눈부시게 흰 그림자가 몸을 날려 그대로 내게 달려들었다.
“꺄하하~ 만났다! 드디어 만났다!”
녀석이 내 품에 안기며 동시에 두 팔로 내 목을 감고 체중을 실어왔기 때문에 나는 그와 엉겨 땅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넘어진 상태에서도 내 목을 감은 팔을 풀지 않은 채 연신 웃으며 기쁨의 탄성을 질러댔다.
“만났어! 까아~ 드디어 만난 거야~!”
그래, 나도 왠지 반갑기는 한데… 근데, 대체 너 누구냐? 라고 물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몽몽이 이 녀석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려 줬을 때 혹시…라고 생각했던 것이 원판 육체의 이상한 반응으로 좀 더 확실해진 셈이긴 하지만, 내겐 너무 갑작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나 지금 진유준이야? 진하운이야?
“저기, 야… 이제 그만 진정하고……”
“어머머~?”
가짜 극악… 아니, ‘여자 극악’ 녀석은 그제야 미묘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남북 이산가족 찾기 분위기를 내는 사이, 우리 양쪽의 수하들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난 아닌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먼저 우리 측 흑주의 검 끝은 여지없이 여자 극악의 뒷덜미에 겨누어져 있었고, 그 흑주의 목덜미에는 여자 극악 쪽의 고수로 보이는 자의 사내의 검날이 걸려 있었다. 대교와 백인장, 그리고 상대측의 무수한 무기들도 서로를 노리고 엉켜 있었다. 서로가 팔에 약간의 힘만 주어도 상대를 해칠 수 있는 상태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불쌍한 양측 진영의 무사들……
“모두 물러서요! 뭐햇! 암혼자, 당신부터 뒤로 물러나!”
“난 괜찮으니까 너희들도 모두 무기를 거둬.”
여자 극악의 앙칼진 외침과 내 점잖은(?) 명령으로 그녀의 부하들과 대교, 오백인장은 모두 무기를 내리고 뒤로 물러났지만, 흑주와 암혼자라는 놈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그대로 대치하고 있다가 나와 여자 극악의 재촉이 몇 번 더 이어지고야 겨우 동시에 천천히 검을 치우며 뒤로 물러섰다. 우리 남녀 극악서생 못지않게 그 보디가드들도 왠지 분위기가 비슷하달까? 저 자의 사내놈은 흑주와 달리 복면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첫 인상이 흑주처럼 말수 적은 냉막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흥~ 맘 놓고 기뻐하지도 못하겠네. 20년 만의 ‘남매 상봉’인데… 그쵸, 오,라,버,니?”
스스럼없이 내 팔에 매달린 채 묻는 여자 극악… 아무래도 극악서생의 ‘쌍둥이 동생’인 모양인 녀석에게 나는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렇구나.”
“피이~ 이제 보니 오라버니는 이 동생과의 재회가 그리 반갑지 않나 봐요.”
“하핫~! 그럴 리가 있나. 하하……”
아아, 어색해라. 차츰 알 수 없는 진하운 모드가 사라져 가면서 나는 이 뜬금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쌍둥이 동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오래 전부터 원판 녀석이 주변 사람들 몰래 지 동생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서로가 얼마만큼 알고 있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귀여운 여동생’께서는 연신 생글대며 가마 쪽을 향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얼마 후, 나는 결국 녀석과 함께 가마에 올라 녀석의 현 거주지라는, 약산성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저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마도 성을 점령하면서 가장 그럴듯한 집도 강제로 접수한 거겠지만, 녀석은 아주 자연스럽게 지네 집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녀석의 취향인 듯, 흰 천과 붉은 천이 묘하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장식된 방안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쯤엔 나도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상태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녀석이 쉴 틈 없이 쏟아낸 얘기를 들으며 그간의 사정, 이 두 남매가 서로 전혀 연락할 수 없었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동생인 이 녀석도 풍문으로 들리는 비화곡주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실은 ‘진짜 가짜 극악(표현이 좀…)’인 나에게 유리한 점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원판이 본래 과거 기억이 오락가락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서 어린 시절 이야기도 지가 먼저 조잘댔고, 덕분에 지금까지 모르던, 비화곡에 오기 전의 원판에 대해서도 단편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이제야 알게 된 원판의 아명은 ‘백마동(白魔童)’. 일찌감치 고아가 되어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무공은 고사하고 다른 아이들보다 체력도 떨어지는 꼬마 주제에 무슨 수단을 썼는지 당시 살던 지역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부르며 두려워했다는 걸 보면 비화곡에 스카웃되기 전부터도 싹수가 그랬나 보다. 그리고 이 여동생의 아명은 ‘설아(雪兒)’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진하연’을 자처하고 있다. 내가 지난번 강호행 때 사용한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나…? 어차피 설아라는 아명도 오빠인 백마동이 붙여준 이름이라 이번에도 오빠가 지어준(?) 이름을 쓰겠다는 건데, 끄흠… 원판이(내가) 성장해 있을 여동생을 깊이 생각하며(그냥 암 생각 없이) 이름을 지었다고 생각하는 ‘진짜 진하연’을 보고 있으려니 상당히 미안하다. 난 그냥 원판 이름에다가 내가 좋아하는 제비 연(燕) 자를 갖다 붙였을 뿐이거늘…
이런… 내가 너무 방심했나 보다. 오랜만에 재회한 오라버니에게 보인 사랑스런 여동생의 모습에 속아 잠시 잊었다. 원판과 한 핏줄의 여동생이라는 사실 자체가 ‘극히 위험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기본 주의 사항을 말이다.
묘강에서의 정확한 신분은 아직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까지 확인된 묘강 전사들의 규모나 수준, 녀석을 대하는 충성도만 봐도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부하, 그 것도 흑주와 비견될 만한 수준의 보디가드를 다루는 태도를 보니 이건 정말 여성판 극악서생 아닌가.
“음… 제 체면을 봐주시는 건가요? 쓸모없는 눈 하나쯤은 상관없는데……”
여전히 천진한 표정의 ‘여자 극악’… 그동안 비화곡 사람들이 원판을 대할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제야 실감이 난다. 솔직히 말해서 날 아무리 친 오래비로 생각한다고 해도 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 건지 불안해진다. 으… 그래도 이쯤에서 밥이 되는 죽이 되든 일단 내 쪽의 태도를 확실히 해야겠지?
“됐다. 그 딴 거 받아서 뭐에 써먹게. 그리고 난 요즘 피 보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어머…? 정말이었네?”
젠장, 역시 암혼자의 처리를 나에게 맡긴 건 녀석 나름의 탐색전이었나?
“…뭐가.”
“후후~ ‘그자’는 오라버니께서 요즘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했지만 전 설마 했거든요. 어릴 적부터 오라버니는 우리 남매를 괴롭히는 자는 누구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았거늘……”
“그야,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다… 어, 근데 방금 말한 ‘그자’는 누구냐?”
“음… 그자는 스스로를 ‘사갈서생(蛇蝎書生)’이라고 칭했어요. 오라버니와 꽤 친한 사이라고……”
뜻밖에 등장한 명호에 놀란 건 순간이었고 그 몇 배의 분노가 갑자기 밀려왔다. 나와 대교를 납치하고 내 눈앞에서 대교를 잔인하게 해치려 했던 사갈서생이라는 놈의 추하게 번들거리는 두 눈동자가 떠올랐다. 설마 오늘 진하연을 만난 모든 일이 그 더러운 놈의 음모?
“이 썅~ 설마 그 쥐새끼가 네 배후였어?”
내가 별안간 욕지거리와 함께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자 실내는 순식간에 아까의 상황이 재현되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형편이 조금 달라서 암혼자는 내 옆에 앉아 있던 대교의 발이 재빨리 손등을 누르는 바람에 검을 반도 채 못 뺀 상태였고 그런 그의 목덜미를 흑주의 검이 지긋이 누르고 있었다. 그 사이 오진우 백인장은 입구로 달려가 실내의 소란을 눈치채고 달려온 진하연의 수하들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묘랑! 무슨 일입니까! 무사하십니까?”
“시끄러워! 모두 물러가요!”
요란하게 몰려왔던 묘강의 무사들은 진하연의 냉랭한 대꾸에 멈칫하더니 대교의 검이 자신들의 묘랑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얌전히 복도로 물러난다. 대교와 흑주의 활약으로 일단 우리 쪽이 유리한 형세가 되긴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분위기 반전이라 솔직히 나 자신이 가장 놀라고 당혹스러웠다.
“사갈서생… 그 더러운 쥐새끼, 어디 있어?”
애써 사갈서생을 다시 떠올리며 강압적인 말투로 물었지만 진하연은 입을 다문 채 원망의 눈빛만을 보내 올 뿐이었다. 당시 목야평(沐野平)에서 사갈서생의 공격으로 숨진 사람들의 비율이 정파 쪽이 월등히 많아서 난 그 녀석을 정파에 인계했었다. 그리고 그 후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 난 그 놈의 탈옥 소식을 들었었다. 정파에 넘기는 그 순간까지도 ‘반드시 당신이 후회하는 모습을 보겠어.’라는 말을 내뱉던 놈의 음성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었다.
“너… 그래… 네가 내 동생이라는 건 의심하지 않아. 하지만 그 놈이 널 꼬드겨서 나와 만나게 한 거라면 분명히 뭔가 음모가 있을 거야. 나나 혹은 우리 모두를 해치려는 더러운 수작이 말이야.”
“몰라요. 말 안해요.”
윽…! 이건 또 무슨 어린애 투정이냐.
“바보같이… 난 널 해치려는 것이 아냐. 잘 생각해 봐. 그 놈이 무엇 때문에 너에게 접근했을 거 같아. 그 놈은……”
“흥~ 더 이상 오라버니에게 아무 말도 않겠어요.”
으… 대교보다도 한참 더 먹은 20대 중반의 처녀가 갑자기 막내 미령이 모드로 들어간 건데… 근데 제기, 앤 왜 이런 모습도 어울리는 거야?
“설아야, 제발……”
으으~ 왜 내가 매달리는 형세가 되는 거지? 저 재수 없는 원판의 얼굴을 한 녀석에게 난 왜 이리 모질어지지가 않는 거지? 사실 진짜 여동생도 아닌데……
“야, 너……”
…제기, 역시 힘들다. 왜지…? 혹시 아까의 첫 대면 때처럼 이 진하운의 육체가 반란을 일으킨 건가? 함께 어머니 배속에서 깨어나고 서로의 심장 소리로 안도하며 잠들었던 그런 존재의 감정에 반응하고 있는 걸까? 그게 지금 나까지 이런 알 수 없는 기분이 들게 하는 건가…? 단지 서글픈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편이 더 가슴 아프고 안쓰러워지는… 제기, 이런 놈들이 어떻게 20년이나 서로 떨어져 살았던 거야?
“잘… 못했다.”
그동안은 거의 의식조차 못했던 원판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나는 녀석에게 잘못을 사과하기로 했다. 별 시답지도 않은 놈과의 일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에게 칼을 겨눈 일을 말이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나는 대교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다가가 녀석의 가냘픈 어깨를 감싸 안으며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허엉~ 소리를 내며 가슴에 뛰어든 녀석이 정말이지 서럽게, 오래도록 서럽게도 울어댔다.
빌어먹을… 한 번 만이다. 이번 한 번만 너희 남매에게… 내 의지를 양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