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8-3화 : 진유준. 진하운. 진하연.(3)
8. 진유준. 진하운. 진하연.(3)
사갈서생이라는… 원판보다 더 재수 없는 놈의 생각을 바로 잊기는 어려웠지만 대교를 의식하며 겨우 진정한 나는 분위기도 바꿀 겸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는 쪽으로 화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진하연은 그제야 손뼉을 치며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참, 독고를 잊고 있었네? 암혼자, 어서 해독제를 가져와요.”
기집애, 일찍도 말한다…라고 말할 처지가 못되는군. 처음에 성안에 들어올 때는 야영들을 위해 변종 독고를 개발한 자를 찾아 해독제를 빼앗을 생각이었는데 잊고 있었으니……
“우린 어제 이미 해독했어. 하지만 너희 늑대에 물린 자들에게는 필요하겠다.”
“역시… 후후… 랑아군(狼牙軍)에 심어 놓은 독고는 제가 특별히 배양한 건데… 어땠어요?”
빌어먹을 기집애. 역시 얘가 그 변종 업그레이드 독고를 개발했군.
“…아, 주… 훌륭하더라. 다른 독고보다 퍼지는 시간이 빨라서 나도 해독 시기를 놓쳤어.”
일반적으로 알려진 독고들은 유충(幼蟲)이나 알 상태로 몸 속에 들어온 후 인체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성장하는데 걸리는 평균 추정 시간이 30분에서 1시간 정도. 그 전에는 처음 침투한 장소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먹은 경우 토해내고, 상처로 들어온 경우 그 부위를 베어내는 등 비교적 수월하게 해독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일단 성장하여 전신으로 퍼진 독고는 비화곡의 해독제로도 퇴치가 어렵다. 일단 당장 외당에서 보내 온 해독제로 독고의 발작을 막아 놓기는 했지만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만독당에서 직접 더 용한(?) 해독제를 공수해 오거나 환자들을 비화곡으로 후송해야 할 상황이었다.
“심심할 때 만들어 본 건데… 그래도 다행이네. 최근에 완성한 아이들을 썼으면 벌써 모두 몇 장의 인피(人皮)만 남는 신세였을 거예요.”
지 오빠 기다리는 상황이라 좀 약한 놈 썼다는 거다. 근데 최근 완성한 아이들은 무슨 식인곤충 같은 건가? 으… 무슨 공포 영화도 아니고……
“…확실히 넌 날… 닮았구나.”
내 말에 진하연은 또 끔찍하게 예쁘게 웃었다. 정말이지… 초 실감 3D 거울 보는 기분이다.
같은 날 밤.
아니… 지금은 이미 다음날 새벽이군. 진하연은 밤새 나와 옛일을 얘기하고 싶어했지만 재회 축하주 몇 잔을 마신 탓인지 축시(丑時, 새벽 1시-3시 사이)를 넘기지 못하고 연속으로 하품을 해대서 나와 대교는 아쉬워하는 녀석을 다독거려 재우고 옆에 배정된 내 방으로 건너왔다.
나는 대교를 의식해 약간 웃는 표정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며 한 동안 창가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나도 취기와 피곤함이 겹쳐 졸립기는 했지만 왠지 바로 잠자리에 들고 싶지는 않았다.
음… 원판을 생각할 때 늘 재수 없다, 재수 없다 하면서도 이제는 어느 정도 미운 정(?)이 든 건지 요즘 들어 원판에 대해 긍정적인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 여동생을 만나고 그간의 사연을 듣고 있으니까 자꾸만 이들 남매에게 동병상련이랄까…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처한 환경은 사실 나 진유준이나 진하운 남매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나는 나이나 좀 먹고 이런 곳으로 날아왔다지만, 당시의 원판 남매는 그 어린 나이에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에 떨어졌던 것이다.
오빠는 비화곡이라는 강호 마인들의 총 본산에, 여동생은 아예 말도 안 통하는 타국의 땅에… 그런 척박하고 살벌한 환경에서 남매는 각자 20년 동안이나 아둥바둥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해왔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솔직히, 순간적이지만 ‘천재 남매의 인간승리! 나도 본받자!’라는 마음이 들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역시 이 원판 남매의 ‘살아가는 법’은 나에게 무리다.
원판의 사부가 죽은 후 권력을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저지른 대량 살상극이나 오늘 조금 들은 진하연의 묘랑으로의 출세기(역시 대량 학살극으로 추정) 같은 건, 나는 방법을 알아도 못할 것 같았다. 저 독한 남매는 그러고도 룰루랄라~ 즐거운 인생인지 몰라도 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고도 맘 편히 살아갈 자신이 없는 것이다.
뭐… 나도 살아 보겠다고 ‘완전무장’을 한 상태이니 원판 남매를 무조건 욕할 처지는 못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명색이 대한민국 모범 청년이 아닌가. 사갈서생 같은 놈이라면 몰라도 아무나 막 해칠 마음은 절대로 없다. 그래서 지금도 최대한 발생할지도 모를 희생을 막으려고 이렇게 피곤한 가운데에도 열심히 묘강의 숨은 권력자이자 내(?) 여동생인 진하연과의 긍정적인 관계 모색을 연구하는……
…음, 으… 제기, 애써 현재 상황을 미화해 봤지만 역시 찔려서 더 못하겠다. …그래. 솔직히 나는 지금 오늘 운 좋게(?) 만난 ‘묘랑 진하연’을 앞으로도 어떻게든 ‘이용해 먹을 방법’을 생각 중이다. 하연이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나도… 살고 싶다. 이쒸~! 적나라하게 표현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군. 빌어먹을… 저런 여자 극악은 전략적으로 이용한다 해도 별로 죄책감이 안 들 줄 알았는데 왜 이리 심란한지 모르겠다. 자꾸 아까 녀석이 서럽게 눈물짓던 모습이 떠오르고… 아무리 그런 녀석이라도… 하늘 아래 유일한 자신의 혈육을 믿고 따르고 있는데… 나는 그런 녀석을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고 있으니… 으… 나란 놈은……
“저, 곡주님.”
“응……?”
“역시 사갈서생이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군요. 소녀의 짧은 생각으로는 놈도 여러 차례 실패를 겪었으니 당분간은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최소한… 동생 분을 만난 오늘 밤만이라도 저희를 믿고 편히 쉬도록 하십시오.”
“…대교야.”
“예, 곡주님.”
내가 너 땜에 산다…라는 대사는 생략하고 그냥 녀석을 끌어 당겨 확 안아 버렸다.
“정말 잘 끊어주었어. 넌 역시 내 천사야, 천사!”
“예, 예? 뭐, 뭘 끊… 고, 곡주…님……?”
나는 잠깐 당황한 소리를 내다가 결국 조용해진 대교를 품안에 넣은 채 오래도록 그녀의 체온을 음미했다.
처음엔 단순히 내 감정의 폭주를 막아 준데 대한 감사를 장난기 섞어 표현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또 다른 감정의 폭주를 막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차츰 달빛이 그린 창 그림자가 또렷해지고 대교의 콩닥이는 심장소리가 방안에 가득한 것을 느끼면서 나는 대교를 살짝 품에서 떼어냈다.
아주 잠깐, 내 ‘이성’이 이건 ‘단순한 욕정’일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대교의 두 눈이 거짓말처럼 투명했다.
흔들리는 등잔불과 달빛 모두가 반사되지 않고 그 안으로 잠겨버리는 것 같았다.
내 시선도 그 불빛들을 따르듯 하강했지만 곧 지나쳐갔고 대신 대교의 작고 따뜻한 입술이 내 입술을 맞이했다.
작게 대교의 입술이 뭐라고 의문을 던져왔고 나는 그에 답했다.
뜨거운 온천의 기운 같은 숨결을 토하며 벌어진 대교의 입술 사이를 망설이던 내 혀가 조심스럽게 파고들었고 곧 사랑스런 환대를 받았다.
대교에게서 향긋한 단내가 났다.
내 두 손은 이유를 탐색하듯 대교의 부드러운 머리결을 헤치다가 이내 목덜미로, 그 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서로를 탐닉하는 몸짓이 조금씩 더 빨라지며 우린 멀고 먼 침상과의 거리를 다급하게 좁혀갔다.
그리고……
아우우우우~!
응…? 느닷없이 웬 늑대 소리……?
아우우우우~! 컹! 삐익~! 컹! 커엉~! 삑! 삐이익~!
꿈에서 깨어나듯 빠르고 허망하게 멀어진 나와 대교 사이로 계속해서 빌,어,먹,을 늑대들이 짖어대는 소리와 묘강인들과 우리 혈랑대와 비연대 간의 연락용 피리 소리가 섞여서 쉴 사이 없이 울려왔다.
“저, 저도 가봐야……”
대교가 황망히 머리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어색한 태도로 후다닥 방을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방안 구석에 놓여진 동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누군가가 내게 건 석화마법(?)에서 풀려 인간으로 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사이 아까처럼 다시 창가에 서서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거참… 뉘 집 늑대인지 우라지게도 짖어 대는구먼…
어차피 같은 ‘개 과’니까… 내일은 늑대 보신탕이나 끓여 먹어야겠군.
음… 금방… 조용해졌네…? 왜 그리 소란스러웠던 건지… 음… 무슨 일이었는지… 음… 조금 궁금… 음… 물론 중대한… 암… 그렇겠지… 음……
한참을 그렇게 버벅대던 내 의식세계는 다행히 대교가 다시 방으로 복귀했을 때쯤에는 거의 정상으로 질서를 회복된 상태였다.
그러나 대교가 돌아와 보고를 하려는 기척을 냈을 때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곡주님. 다행히 별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대체 무슨 일이었던 거지?”
“그게… 실은 탈출을 시도한 몇 명의 주민이 있었던 모양인데, 저희와 묘강, 아니 월국의 협조체계가 아직 미비해서 그런지 공연히 더 소란을 피운 것 같습니다.”
“뭐? 설마 그 사람들을 해친 건 아니겠지?”
“예, 제가 다행히 빨리 달려갔기 때문에 월국 사람들이 중원의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걸 막을 수 있었습니다.”
계속 창 밖을 보는 자세로 대교를 등지고 있던 나는 비로소 몸을 돌렸다.
대교는 ‘자기가 달려갔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자기 공을 내세우는 성격이 아니다.
녀석은 아까의 그 흐뭇한(?) 분위기를 깨고라도 자신이 달려갔기 때문에 성과가 있었다…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잘됐다. 하마터면 큰 후회를 남길 뻔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침상으로 가 누웠다.
대교는 조심스럽게 날 따라와 슬며시 침상에 기대앉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미안, 정말 미안하지만… 지금부터 나 혼자 있게 해 줄래?”
“…예, 곡주님. 부디 평안히……”
대교는 자기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힘없는 인사를 남기고 침상에서 물러났다.
미안하고 안타까웠지만 나는 눈을 감고 그녀를 외면했다.
이번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교의 음성이 들려왔다.
“곡주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응……?”
“아까… ‘천사’라는 말… 단순히 하늘의 사자(使者)라는 뜻입니까? 소녀를 그렇게 부르신 건 무슨 뜻인지……”
“…천사는… 하늘의, 신의… 모든 인간에 대한 애증(愛憎)을 대표하는 존재… 천사는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지켜보지…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을 생각해. 하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의 곁에만 머무는 천사를 원해. 나도… 다르지 않아.”
“……”
대교는 더 이상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고 얼마가 지난 후 내가 눈을 뜨고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방에서 떠나고 난 후였다.
나는 누운 채 두 손을 눈앞으로 들어올린 후 공연히 쥐었다 폈다 하는 등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각에 새삼 한숨이 나왔다.
톡, 톡, 톡.
“몽몽…! 지금의 내 상태… 이 육체에 머무는 시간이 오래 될수록…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기 더 힘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영체와 육체의 일체성은 결합 기간에 영향을 받는다는 실험 데이터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주인님의 최초 영혼 교체 상황에 준하는 강제적 수단의 실행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하긴… 수십 년을 살아온 본래의 몸에서도 빠져나올 정도니까.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란 게 의외로 매우 허술한 지도……”
[주인님의 영체와 현 육체의 일체성은 안정적입니다. 제가 감지하지 못한 이상 징후가 있었습니까?]
“…아니. 너무 안정적이라 탈이라는 거다, 임마.”
[주인님은 이미 정신적인 불안정을 극복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만……]
“극복… 했지. 얹혀 사는 처지는 말이야. 근데 말이야. 난 아무래도 무단 침입한 집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 같아. 난 조금 전… 이 몸을 오래도록 산 내 집처럼 사용했어. 별다른 거부감도 없이……”
[인간의 여러 감정 중 ‘애정’에 관한 문제라면 몇몇 세기의 상담용 소프트가 존재합니다만……]
“됐네, 이… 몽몽아. 남녀간의 문제야말로 인간 본연의 임무(?)야. 미안하지만, 니 영역이 아니야.”
나는 상당히 우울해진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이미 깊게 각인된 대교의 모습과 선명한 입술의 감촉, 한없이 따스한 체온이 생생하면 할수록 허망함과 불쾌감도 비례하여 커져만 갔다.
사실… ’20세기 대한민국 법으로 규정된 미성년자의 터치 금지’라는 내 신념은 적어도 이 아이 대교에게만은 적용하기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녀가 가까워질 때마다 내 감정을 막아서는 또 하나의 벽은 너무나 두껍고 잔인했다.
그녀가 바라보는 얼굴은 나 진유준의 것이 아니며 그녀를 안는 두 팔 또한 내가 아닌 다른 사내놈의 팔… 그녀의 입술을 탐하던 진하운의…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진정하세요. 주인님.]
“…응?”
눈을 감아 암흑뿐이던 눈앞에 온화한 느낌의 빛이 채워지더니 그 속에 작은 요정 버전의 몽몽이 날아올랐다.
“너 이 자식…! 이젠 허락도 없이 막……”
[헤헤~ 죄송해요, 주인님.]
작은 혀를 살짝 빼물며 애교를 부리는 요정 몽몽… 나 참, 이 녀석 이거……
[후… 사실 저의 작은 머리로는 주인님과 대교님과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다 주인님 팔자려니~ 해야죠.]
“뭐?”
어이가 없어서 웃자 몽몽은 이거나 보고 기분 풀라는 듯 정신없이 빛을 뿌리며 공중 곡예를 펼쳐 보인다.
몽몽의 ‘대 변신’…? 모습뿐 아니라 평소와 다른 말투에 이제는 노래까지 부르며 ‘재롱’을 떨기까지 하는 몽몽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자니 처음엔 헛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녀석의 그런 로봇답지 않은 일탈 행동이 그리 밉지는 않았다.
몽몽의 위문 공연(?)을 차츰 진심으로 웃으며 지켜보면서 나는 어느 사이 그때까지의 우울함을 조금이나마 덜고 잠들 수가 있었다.
땡큐… 몽몽……
아침에 눈을 뜨니 나 나름대로 무지 심각했던 간밤의 일이 모두 얼결에 꾼 꿈처럼 아련해서 나는 아침 인사를 온 진하연 앞에서 공연히 피식거리고 웃었다.
“어머…? 간밤에 잔뜩 화가 나신 줄 알았더니 벌써 다 풀어지셨나 봐?”
“응? 내가 왜 화가 났다고 생각……”
진하연은 얄궂은 미소를 띤 채 나와 대교에게 미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윽, 설마 이 기집애, 어젯밤 혹시 내 방을 엿본 거 아냐?
“호호~ 왜 그러세요. 설마 제가 오라버니의 방을 엿보기라도 했을까 봐요?”
윽, 쪽집개다. 내 얼굴이 모니터였나? 생각이 타이핑되는……
“…어젯밤 그런 소동에 누군들 잠을 깨지 않을 수 있었어요. 사갈서생 놈이라도 침입했나 하고 나와 봤다가 우리 대교 동생이 그제야 허둥대며 오라버니 방에서 나오는 걸 목격했지요. 지금처럼 단정한 모습이 아니던데… 후후~ 둘이서 뭐, 했, 어, 요?”
얼레리 꼴레리~ 하고 애들 놀리듯 짓궂은 진하연의 말에 대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딴청을 피운다.
“커험, 거… 뭘 그런 걸 묻고… 그러냐?”
“후후~ 듣자니 오라버니는 최근 고리아 교라던가 하는 종교의 교리에 충실하다던데… 대교 동생만은 예외인가 보죠?”
“커허,험~! 그…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너 자꾸 뭐 그런 걸 따지고 그러니?”
“오라버니야말로 별나세요. 새삼 숨길 게 뭐 있다고… 하연이는 이래 보여도 우리 대월에 전래된 방중술을 모두 터득한 몸. 이런 일로 얼굴 붉힐 정도로 어리고 순박한 소녀가 아니랍니다.”
“흠, 그런 거라면 우리 대교도 비취각의 취음란 각주가 심혈을 기울여 모든 것을 전수한……”
“고, 곡주님!”
대교가 당황해서 부르는 바람에 난 정신을 차렸다(?).
으… 내가 순간적으로 미쳤었나 보다. 이 기집애의 장단에 맞추어 엄한 자랑을 늘어놓다니 말이다.
“호오~ 대교 동생이 그 명성 높은 비취각주 취음란의 제자였단 말이죠? 비화곡 비취각주는 그 다리 사이로 능히 천하 제패를 논할 수 있는 여자라는 말… 저도 들었어요. 그녀와 하루 밤이라도 보낸 남자들은 친자식의 목숨도 아낌없이 내놓는다던데… 오히려 내가 한 수 배워야겠네?”
어? 비취각주의 다리 사이 운운은 나도 못 들어 본 것 같은… 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이게 대체 시집도 안간… 아니, 갔건 안 갔건, 지 오빠 앞에서 할 수 있는 대사들이냐?
…역시 나로서는 정 붙이기 힘든 타입인 것 같다, 이 여자 극악은……!
얼마 후, 난 계속 대교와 방중술에 대한 심도 있는 토의를 하고 싶어하는 진하연을 설득(?)하여 간신히 정상적인 대화 분위기로 바꿀 수 있었다.
내가 비화곡을 떠난 가장 큰 이유(수라혈불 회피)를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이미 ‘사갈서생 처리’라는 적당한 핑계가 생겼기에 나는 당분간 진하연과 함께 행동하며 녀석을 잡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어제 이미 다른 야영을 통해 비화곡 본단에는 조금 왜곡된 소식을 전한 상태였다.
‘가짜 극악 일파는 모두 제압하여 해치웠지만 그 배후로 밝혀진 사갈서생을 계속 추적할 계획’…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추가로 ‘보안을 위해 당분간 행적을 숨기겠다’라고도 했다.
해독을 끝낸 야영들과 이전부터 갇혀있던 외당 요원들은 야영들의 부상 치유가 진행되는 것을 보아 먼저 돌려보내기로 했지만 그 전에 단단히 교육을 시켜 사건의 진상을 당분간이라도 숨길 생각이었다.
비화곡에는 ‘곡주에게는 비슷한 역량의 형제가 있으면 안 된다.’라는 권력 다툼을 경계한 규칙이 있지만 ‘성지 출입금지’와 ‘황실과의 인연 금지’ 같은 철칙에 비하면 그건 사실상 ‘권고 사항’에 가까운 정도였다.
그래도 원판이 잃어버린 동생 찾기를 공공연히 하지 못했던 걸 보면 다른 사정도 있겠다 싶어서 일단은 숨기기로 한 것이다.
이산 남매 상봉으로 인한 비화곡과 묘강 특수 부대들의 연합군 편성은 이미 어제 다 끝났기 때문에 어제부터 이미 혈랑대와 비연대는 성안에 재배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어젯밤 같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연합군의 연락 신호 체계 확립이라던가 임시 소속 등의 과정은 암혼자와 대교가 알아서 상의해 결정하도록 했다.
진하연은 이 약산성의 본래 주인인 일반 주민들의 일에는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나는 녀석을 설득해 꽤 많은 금은보화를 내놓도록 했다.
나중 우리가 성에서 물러가고 나면 독고도 해독해주고 그만한 보상을 해준다는… 나의 일명 ‘치고 어르는 전법’에 주민 대표들은 오히려 매우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서 속으로는 다소 씁쓸했다.
지도자들이 모두 저 모양이면 점령군은 정말 너무나 편하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면서 나는 또한 다음 이동지를 수배하기로 했다.
나와 진하연, 대교의 의견을 정리해보면… 첫 번째 조건은 사람이 드물거나 아예 없는 장소였다.
괜히 모진 우리 옆에 있다가 사갈표 벼락을 맞을지도 모를 피해자를 없게 하기 위해 내가 붙인 조건이었다.
…아니 우리 연합군 자체가 바로 벼락이려나?
하여간 두 번째는 진하연이 내세운 조건으로, 아름다운 관광지(?).
세 번째로 대교는 주장한 전술적으로 방어가 유리한 장소를 원했다.
수하들이 뭐 빠지게 다니며 ‘인적 없고 경치가 좋으면서도 방어 병력 배치가 용이한 장소’를 수배하는 동안 우리 지도자층은 계속 딩가 딩가 놀다가 가끔 사갈서생을 유인할 묘책을 연구하면서… 그렇게 매우 건설적인(?) 시간을 보냈다.
약산성에 도착한 후 5일째의 밤.
나와 티타임을 즐기던 진하연이 뜬금없이 흑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은 대교 빼고는 내 수하들에 대해서는 그리 언급하지 않았었는데 대화거리가 잠시 떨어지자 문득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듣자니까, 그 복면… 오라버니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다면서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나는 즉석에서 천장을 향해 흑주를 목청 높여 불렀고 당근 흑주는 코빼기도 안 비쳤다.
진하연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을 깔깔대더니 이어 내가 들려주는 흑주에 대한 이야기에 흥미로운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계속 ‘재미있다’는 표정일 뿐이던 진하연은 흑주의 유일한 자기 물건… 예의 ‘검은 천 조각’의 얘기에 이르러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답파화미인……?”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른 그 검은 천을 꺼내 보여 주었다.
진하연은 말없이 검은 천과 답파화미인 이란 글귀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참 만에 비로소 입을 열었다.
“꽃을 밟아 으깬 미인… 꽃을 질투한… 그러나 실은 꽃보다 아름다운… 흠, 오라버니. 어쩌면 이 천의 주인은 제가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요.”
흔한 표현으로 귀가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경치고 사갈이고 나발이고 다음 행선지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