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0-1화 : 극악서생이 사는 아파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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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10-1화 : 극악서생이 사는 아파트(1)


대교의 성공적인 한국 첫 공연… 그 둘째 날!

나는 물론 현장에서 첫날 놓쳤던 부분까지 전부 보고 다른 관중들과 함께 환호하며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만…! 젠장 정말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렇지 못했던 것은… 공연을 보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게 대교의 안전을 위한 호위 활동이었기 때문…이기라도 했으면 또 그래도 좋았겠는가마는…! 난 대교의 공연 시간에 적(혹은 적이 될지도 모를 남자)의 차를 얻어 타고 엉뚱한 장소에 도착해 있어야 했다.

“나참…! 이건 또 뭐야?”

나는 투덜거리며 차에서 내려 눈앞의 고층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한눈에도 나 같은 서민은 평생 꿈도 못 꿔볼 고급 아파트라는 거 정도는 알겠는데… 어쨌든 아파트라는 거 자체가 뭔가 최종 보스의 임시 아지트라는 느낌이 안 온다.

“이봐, 도홍. 보통 외국에서 온 악당 두목은 그 나라의 최고급 호텔 같은 곳에 머물거나 하지 않나? 아니면 시외의 별장이라던가……”

정중하게 차 문을 열어 주었던 도홍은, 내 다소 시비조인 말에도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우선 마스터께서는 ‘악당 두목’ 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또한… 마스터께서 이 나라 출신이 아닌 건 맞지만 때로 한국에서 머무는 시간이 DP 본사보다도 길 정도이니 제대로 된 거처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죠.”

원판이 DP 본사에서보다도 긴 시간을 한국에서 보낸다고…? 등잔 밑이 어둡다? 목 밑의 칼…?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알게 모르게 소름이 끼친다. 아무도, 심지어 나조차 모르는 사이에 오래전부터 같은 서울 하늘 아래 고대 무림 최악의 악마라고 불리던 극악서생… 마도 비화곡의 주인이었던 독각와룡 진하운이란 남자가 함께 지내고 있었다니……

난… 어제 원판 녀석을 처음 별도의 몸으로 만났을 때… 아니, 예전 와룡전(臥龍殿) 안에서도 영혼 상태로나마 잠시 스쳤으니 이번엔 ‘재회’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난 그때 바로 옆에서 하은이가 의혹에 찬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는 것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원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어찌 대처를 해야 할지 패닉 상태에서 굳어져 있는 나와 달리 태연히 걸음을 옮겨 내 옆을 스쳐가던 녀석은 문득 걸음을 멈췄었다.

  • 지난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우리 둘 뿐! 곧 초대장을 보내지.

아주 낮은 음성으로 그런 말을 남긴 놈을 보내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몽몽과 함께 사태 분석 및 대책 마련에 고심하느라 밤을 꼴딱 새야만 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 중 중요한 건 두 가지였다.

첫째. 놈은 환생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 몽몽은 내와 만났던 사람들 중 꽤 많은 시간을 접촉한 사람들 위주로 영체까지 검사를 해 놓았었다. 그러나… 몽몽도 정작 원판의 영혼은 와룡전에서 내게 몸을 빼앗기던 때의 아주 짧은 순간밖에 접촉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영체 비교는 아예 할 데이터가 없는 건데… 대신 아예 달려 살았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육체의 일치도는 어제의 1차 스캔 결과가 99.9%란다. 말이 99.9%지 이건 100%나 다름없다는 건데, 그건 어제 본 원판의 육체는 환생 같은 과정도 없었던… 바로 내가 비화곡에서 요긴하게 썼었던 그 육체 그대로라는 결론인 것이다.

둘째. 첫째 결론을 기반으로 생각해 보면… 원판의 영혼은 어찌 된 건지 내가 빠져 나온 다음에 육체로 복귀… 결국 ‘부활’했다는 거고, 그 이후 미래 여자 ‘진’을 만나 나처럼 시간 여행을 통해 우리 시대로 날아왔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그 미래 여자를 만나지 않고서야 원판이 아무리 천재라 해도 나와 몽몽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아는 건 물론이고 현 시대에서 DP라는 거대 기업을 이룰 정도의 과학지식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결론 하에서의 추가적인 의문점도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먼저 궁금해지는 건 내게 육체를 빼앗긴 상태에서의 원판 영혼은 대체 어디 짱 박혀 있었기에 계속 나타나지 못했던 거며, 나중에는 또 어떻게 복귀할 수 있었는가,이다.

물론 나와 같은 시기에 육체를 공유하며 육체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는 가정도 해 볼 수 있겠으나, 그 가정은 비화곡 시절부터 종종 스캔해 봤다는 몽몽이 가능성 0.1% 이하라고 자신하므로 일단 빼기로 했다.

다음으로 더 중요한 문제는… 그 말썽쟁이 재수떼기 미래 여자 진인데… 이 여자는 기껏 다시 과거로 날아갔으면 대교를 데려와야지 어째서 원판을 데려왔느냐는 거다.

거기다가 미래의 과학까지 전수한 것이 틀림없다면… 그 웬수도 여자라고 원판에게 뻑 갔거나, 여하간의 이유로 협력을 하고 있다는 건데, 그리되면 원판이 우리 시대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든들 나와 몽몽의 힘으로도 막기가 어려울 건 뻔한 일이다.

에효~ 그밖에도 원판의 등장으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를 변수나 큰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현재 그나마 다행인 거 하나는, 원판이 어제 예고했던 ‘곧’이 정말 ‘곧’이었는지, 오늘 오전에 바로 인간 초대장 도홍이 날 직접 찾아왔다는 거다. 그렇지 않고 며칠이라도 끌었다면 내가 갑갑한 걸 못 참고 정글도 휘두르며 DP 본사로 쳐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홍의 안내를 받으며 아파트로 들어가다 보니… 그런 녀석이 살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소위 상류층 아파트는 다 이런 건지 모르겠지만, 철저한 신원 체크 과정이라던가 경비실 규모와 직원들의 분위기 자체가 여느 아파트는 고사하고 웬만한 사법 기관 못지 않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뭐, 내가 사법 기관 가본 경험이래봐야 법원의 벌금 창구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원판 녀석이 산다는 30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자니까 꽤나 묘한 기분이 든다. 하필 놈이 우리 시대에 나타난 데다 나와 그리 멀지도 않은 곳을 오래전부터 드나들었었다는 사실 자체는 끔찍하지만… 한편으로는 원판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아파트를 사서 살림을 꾸미고 살고 있다는 현실은… 왠지 너무 현실적이라 오히려 또 어색한 기분이 든다고 할까…?

놈이라면 좀 더… 에…? 뭐, 뭐야? 으…

현실적이란 말, 취소다!

제기… 아파트 복도나 문 앞의 분위기까지는 그리 대단한 것도 없다 했더니만… 막상 아파트 문이 열리니 이건 완전 별천지잖은가. 바닥의 양탄자부터 시작해서 인테리어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얼마 전 가 본 대교의 고급 호텔 방은 동네 모텔 수준으로 보일 정도이니…

아… 녀석인가…? 원판 녀석이 문과 반대편의 창가 쪽에 있다. 그런데… 저 모습은……?

“마스터! 진유준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도홍의 약간 딱딱한 군대식(혹은 비화곡식?) 어투의 보고에, 창가에 서서 등을 보이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역광으로 드리워진 햇빛에 쌓인 피빛 자의(紫衣)… 그리고 그 자의에 가로로 누워 잠들어 있는 백룡(白龍)… 마치 원판의 부채 속 선혈의 부처가 부채 바깥으로 빠져 나온 듯한 느낌이랄까.

…제에길! 순간적으로 내가 지금 왜 넋을 잃은 거냐! 게다가 하필 대교가 놈을 처음 보았을 때의 표현을 떠올리다니. 썅! 정신 차리자, 진유준! 어제 네가 놈의 앞에서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고 버벅댔던 건 단지… 그래, 단지 뜻밖의 사태에 놀랐던 것뿐이다. 나, 대한민국 모범청년 진유준! 원판 저 놈이 극악이라면 나는 극모범으로서…

젠장! 예를 잘못 들었다. 하, 하여간! 나 진유준, 세상의 어떤 괴물이나 악마가 상대라 할지라도 간단히 씹힐 놈이 아니다. 놈이 아무리 원판이라도 나 역시 무난히…는 아니지만, 하여간 놈의 대리도 해 봤던 몸이다. 뭔가… 뭔가 당당한 첫 마디를…

“이쒸… 더럽게 폼 잡고 있네!”

쳇! 좀 유치한 대사였나? 원판 녀석, 다소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버리는군.

“이런, 이런…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난 단지 아주 오래된 옛 추억을 되살려 보자는 의미에서 이와 같은 복장을 해 봤을 뿐인데… 아, 그래. 당신에게는 그리 오래 전 얘기도 아니겠군.”

원판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쳇! 내가 저 몸과 얼굴로 거울을 보았을 때는 재수없음 만땅의 짜증이었는데… 제 3자 입장이 되어 오리지널의 표정을 직접 보니… 저 얼굴을 절세미녀로 착각하고 넋이 나갔던 사람들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끄음. 그래 절대로 조금! 조금만 이해한다는 거다.

난 근본적으로 저딴 타입이 싫단 말이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는 건 어떤가, 진·유·준·씨!”

“…그러지.”

나는 다시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놈이 손짓한 응접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화곡의 창천각(創天閣) 안에 있는 원판 처소보다도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야 했는데 바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방향의 창, 아니 그 쪽 벽 전부가 맑고 투명한 유리였다.

쯧! 내가 나중에 살고 싶은 집이 딱 이런 스타일이었는데…

“도홍!”

“예, 마스터!”

“귀한 손님을 모셔 오느라 수고했어. ‘란’에게 준비한 걸 가져 오라 해 주겠나?”

“예! 마스터!”

대답을 하자마자 돌아선 도홍은 빠르면서도 소리 없이 거실을 가로질러 정문 옆의 문으로 사라진다.

음… 저 도홍은 하은이를 대할 때조차 어딘가 여유가 엿보이는 남자였는데… 원판 앞에서만은 그야말로 철저한 복종의 자세로군. 대답 끝에 ‘존명’이라고 외치는 것만 빠졌지 딱 비화곡 분위기인 걸 보니… 원판 녀석,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여기서도 부하들을 험하게 다루고 있나 보다.

어쨌든 응접실에 원판과 마주 앉아 몇 초가 지나기도 전에, 도홍이 사라졌던 문이 다시 열리더니 ‘란’이란 여자가 호텔 객실의 서빙 카트(?) 같은 걸 밀며 들어왔다. 란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 으음… 근데 어째… 이 여자는 어째 좀…

[ 비화곡 비취각(翡翠閣)의 각주(閣主) ‘취음란’, 해당 여성과 닮은 용모이기는 하지만 환생자는 아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용모 또한 안면부만이 유사할 뿐… ]

영체 정밀 스캔에 들어갈 것도 없을 정도라는 얘기로군. 하긴, 몽몽의 보고가 없었어도 나 역시 조금 더 차분히 보니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짝퉁에 불과한 취음란이다. 사실 원본과(?) 비교하는 관점에서 보니까 표현이 그랬지 이 여자도 취음란에 버금갈 정도로 굉장한 미녀인 건 틀림없는데 굳이 짝퉁이라고 하는 건 실례가 되려나…? 에, 어쨌건, 심복이라는 도홍까지 내보내 놓았으면서… 이 여자는 괜찮은 건가?

“괜찮아, 란은.”

내 시선과 표정을 바로 읽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해 주는 것까진 좋은데… 대답이 그게 뭐야? 이 여자도 알만큼 알아서 상관없다는 거야? 아니면 이제부터 알게 되어도 괜찮을 정도로… 음,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쪽이든 결국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건가…? 내가 듣기로 원판은 비취각주와 그리 대단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런 닮은 꼴 여자를 곁에 두고 신뢰하고 있다는 건… 원판의 속마음은 소문과는 조금 달랐었다는 건가?

흐으음. 이거 오늘 원판의 과거 비밀을 하나 알게 된 건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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