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0-2화 : 극악서생이 사는 아파트(2)
2-1. 극악서생이 사는 아파트 (2)
그런 생각이 드니 새삼 과거의 비취각주 취음란과 DP 마스터의 개인비서(?) 란을 비교해 보게 된다. 취음란과 이름 끝자가 우연히 같은 건지 아니면 본래 다른 이름인데 원판이 멋대로 그런 애칭을 붙인 건지 몰라도, 일단 그렇게 호칭부터 비슷한데다 용모도 난형난제라고 할 수 있겠다. 차이점으로 취음란 같은 경우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의 소위 동양적인 매력이 있었던 반면 미스 란에게서는 보다 솔직하고 담백한 면이 느껴진다고 하면… 너무 막연하고 또 성급한 판단일까?
어쨌든, 뇌쇄적이라는 표현을 붙여도 무방할 정도로 착한(?) 몸매에 치파오로 그 착한 라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 란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나로서는 구관이 명관, 보일 듯 말 듯한 매력의 비취각주 취음란에게 더 점수를 주고 싶다.
“…비교해 보고 있는 건가?”
응? …젠장! 원판 녀석,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건가? 아니면 방금 내가 그만큼 속보이는 표정이었나? 암튼… 기왕에 들켰으니 굳이 감출 것도 없겠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닮은 사람을 보여 주면서 그러지 말라는 것도 무리 아닌가?”
“그것도 그렇군. 그래, 어떤가 판정은? 어느 쪽 비취각주가 더 마음에 들지?”
“…두 사람은 달라. 판정 같은 건 안 했어.”
“후후- 어때, 란. 너에 대한 진유준씨의 평가가?”
원판이 돌아보며 묻자 술병 몇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대기 중이던 란이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최고의 칭찬을 들은 기분입니다.”
이어 조용히 그리고 우아하게 상체를 숙여 감사를 표현하는 모습에서 비로소 나름대로의 비취각주 필이 느껴진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난 판정 자체를 거부했는데 본인은 뭔 칭찬을 받았다고 감사를 하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아…! 그보다 저 여자 이미 자신이 누구와 비교된 지를 알만큼 원판과 과거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건가? 그리고 그녀가 준비했다는 저 술병들… 저건 비화곡에서 내가 즐겨 마시던 술이다. 그 중 세 번째 저 병은… 원판 녀석, 저것까지 구해 놨던 건가?
“당신이 대교 자매들 중 세째와 즐겼다던 백일취(百日醉)… 이건 이 시간부터 마시기에는 조금 부담스럽겠군. 그렇다면… 가장 많이 즐겼다던 백화주로 우리의 만남을 축하는 건 어떤가.”
“뭐… 별로 축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줄려면 한 잔 줘봐.”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오는 술 안 막고 가는 술…은 가끔 막을 때도 있는 것이 우리 진씨 집안의 전통! 나는 다소(?) 삐딱한 태도로나마 술을 콜하고, 란이 따라주는 백화주를 받아 들었다.
으음… 사실 맞은 편의 원판을 보고 있을 때는 계속 그랬지만… 막상 직접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려니까 더더욱 기묘한 느낌이 든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2년 정도의 세월 동안 내 몸처럼 들어가 있던 또 하나의 나와 건배를 하다니…
“아무래도……”
비교적 만족스런 표정으로 술잔을 비우는 것 같았지만, 곧 조금 씁쓸한 표정이 된 원판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날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왜지…? 난 진유준 당신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예의와 성의를 다해 대하고 있어. 그런데 당신은 왜 날 그렇게 악마를 보듯 하는 걸까?”
그야 넌 정말 악마 같은 인간이니까…라고 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본인 앞에서 너무 심한 거려나?
“게다가… 우린 실질적으로 첫 대면일 뿐인데 말야.”
“그렇다고는 해도, 난 몇 년 동안 당신의 대리 역할을 하면서 지겹도록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겪어 보았어. 당신이 산 원한들 때문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어쨌든 난 원판, 당신의 과거 행적이나 성격… 심지어 생긴 거까지… 전부 맘에 안 들어.”
쯧! 술 한잔에 벌써 취했나? 결국에는 약간 흥분해서 본인 면전에서 씹고 말았다. 나… 혹시 오늘 살아서 못 돌아가는 거 아냐?
“후후- 원판… 원판이라…”
뜻밖에도 재미있다는 듯 웃는 저 모습… 근데 어째 다른 말들보다 자신이 원판이라 불린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심지어 그 말을 ‘음미’한다고 할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랬군. 하지만… 조금 섭섭하기도 하군. 내 인생을 잠시나마 대신 살아 본 사람치고는 나란 남자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 같아.”
“적어도… 당신이 지금 나에게 보이고 있는 모든 태도며 말투… 그 잘난 미소까지도 진심이 아니라는 거 정도는 알아. 어쨌든 당신은 내가 무심코 한 몇 마디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게 만든… 그런 상황의 근본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니까 말야.”
응? 기분… 탓일까? 녀석의 눈동자가 조금 더 붉은 빛을 띠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
“그렇군. 오해 할 만도 해.”
“뭐?”
“아니, 그건 그리 중요한 얘기가 아니니 이 정도로 하지. 그보다… 그간의 일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을 테니 란에게 들어보는 건 어떤가?”
“란…? 왜, 당신이 아니고?”
“진유준씨, 나도 당신에게만은 말수가 많아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장시간에 걸쳐 다정한 대화를 즐길 만큼… 솔직히 우리, 그만큼 친한 것도 아니잖아?”
놈의 음성에서 처음으로 냉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그야 그렇기도 하지만… 내가 안 친한 건 이 여자도 마찬가지……”
“친해 보도록 해. 그래둬서 나쁠 건 없는 여자니까.”
젠장…! 원판 녀석, 진짜로 지 잔만을 챙겨서 불쑥 일어나 버리더니 처음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서 있던 창가로 향한다. 친한 사이 운운은 단지 핑계이고 그보다는 ‘귀찮은 일은 아랫것들에게’라는 태도였다. 아니면 혹시… 내 태도나 말에 열 받아서 저걸 어떻게 죽여야 고대로부터 미래에까지 자손만대 소문이 날까, 그런 거 따로 연구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에구… 속마음은 어쨌든 나도 그냥 사교적으로 나갈 걸 그랬나?
“잠시나마 마스터를 대신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유준님.”
슬며시 달착지근한 향기와 함께 다가온 미스 란이다시 한 잔의 술을 채워 주더니 곧 원판이 앉아있던 옆자리로 이동했다.
“…1000년 전으로부터 이어진 마스터와 진유준님의 사연을 알고 있는 것은 DP 내에서도 저 뿐입니다. 뭐든 궁금한 점은 물어봐 주십시오.”
“…전부 다.”
“전부 다… 말씀입니까?”
“그렇소. 저 친구가 이 시대에 오게 된, 아니 내가 떠난 후 어떻게 육체로 복귀할 수 있었는지부터 현재의 상황까지 전부 낱낱이 말이오.”
“훗~! 저도 그래 드렸으면 좋겠지만, 전 허가 된 얘기 밖에는……”
“뭔 허가를 일일이… 젠장! 아무래도 좋으니까 일단 얘기해 보슈.”
나의 짜증 섞인 태도에도 란은 별다른 반응 없이, 조용히 웃는 표정 그대로 입을 열어 얘기를 시작했다.
란은… 진유준에게 단지 들었을 뿐일 이야기를 마치 잘 꾸며진 소설처럼 자세하고 생생하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낭만적인 전설이나 동화처럼 감성적으로 풀어서 들려주었다. 그래서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무척 편안하고 흥미롭기도 했는데… 근데, 막상 그 긴 이야기를 들으며 줄거리를 추려 보면 어제 나와 몽몽이 추정했던 것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은 얘기들뿐이었다.
궁금했던 원판의 부활 과정은 원판 자신도 정말 잘 기억을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란에게도 그렇게만 얘기해 둔 것 같으니 패스… 그리고 미래 여자 진이 내 부탁대로 대교를 데리러 간다고 가놓고는 삑사리 나서 부활한 원판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추정한 대로였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조심성 없이 시간 여행에 대해 떠벌리다가 그에 주목한 원판의 말빨과 술수에 넘어가 온갖 사연을 더 줄줄이 알려주고는 결국 우리 시대로 데려오기까지 하는 과정… 그건 안 보거나 안 들어도 비디오고… 다만 그 이후 상황에서는 좀 차이가 났다. 그 여자 진의 취향은 원판 스타일이 아니었는지 여자로서 넘어간 건 아니어서, 원판의 위험도를 알아챈 이후로는 협조를 안 하려고 버티며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난 듣고 싶었던 얘기를 어느 정도 다 들었다 싶은 시점에서 란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는 몽몽과 중간 회의에 들어갔다.
< 음… 추정하던 걸 전부 확인한 건 좋은데… 결국 추가된 정보는 몽몽 니 전 주인이 최소한 ‘협조’는 하지 않고 있다… 정도인가? 미래로 튀지 못한 걸 보면 타임머신, 아니 중계기라고 해야 하나? 그 것도 빼앗긴 모양이고 말이야. >
[ 그렇습니다. 현재 DP의 기술력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비록 저보다 낮은 기종이기는 하지만, 저희 시대의 과학이 담긴 로봇에서 추출된 정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 …그래. 넌 일단 그 기종과 너의 기능 차이에 대해서 정밀 분석해봐. 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정작 중요한… 놈이 대체 왜 굳이 이 시대로 넘어 왔으며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얘기가 나오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놈에게 직접 듣는 수밖에 없겠지? >
[ 한 가지 추정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것은 그의 지병인 천형오음절맥(天刑五陰切脈)을 치유할 수 있는 환경이 이 곳에서는 구성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
< 아, 맞다! 내가 왜 그 당연한 걸 생각 못했지? 그것 때문에 주술로 육체 교환까지 시도한 놈인데… 음… 그럼 다 고치고도 돌아가지 않고 있는 건…… >
“죄송하지만, 혹시……”
문득 끼어 들어 우리의 회의를 방해한 란이 새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와 내 팔목의 몽몽을(오늘은 어떤 상황일지 몰라 오랜만에 다시 손목에 차고 왔다.) 살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대화하시는 건가요? 그 팔찌… 미래에서도 드물 정도로 상위의 기종과?”
“…그렇소.”
“으음- 전부터 궁금했었어요. 그 정도 용적에 제가 들은 정도의 다양한 기능들이 내장되어 있다면… 대체 어떤 기술이 집약되어 있는 건지……”
“당신도 혹시 과학자요?”
“아니요.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을 상대하기는 한답니다.”
“그건……”
직접적으로 ‘과학자들을 꼬드겨 DP로 끌어들이는 역할인가?’라고 묻기는 뭐해서 망설이고 있자니까, 원판이 다시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음, 이제야 다시 교대… 하려는 건가?”
내가 고개를 들며 묻자 원판은 란에게서 한 잔의 술을 더 받으며 입을 열었다.
“어떤가, 그간 내가 겪었던 일들을 들은 감상은? 물론 란이 아직 모르는 사연도 많기는 하지만……”
“…뭐, 감상이나마나 일단 대부분은 어제 만난 이후 추정해본 대로인 것 같군. 굳이 이 곳에 온 이유는 천형오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는 것 정도도 짐작할 수 있겠고… 그런데 왜 그 후로도 비화곡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더구나 왜 하필 날… 본의 아니게 그 육체를 중심으로 얽히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대화 한 마디 해 본적도 없었던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지, 거기서부터 잘 모르겠지만 말야.”
내 간단한 감상평(?)과 재 질문에 원판은 대답도 없이 피식-! 가볍게 웃었다.
그 다음 순간 그는 ‘어떤 표정’을 떠올리며 몸을 돌리더니 다시 창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걸음을 옮기면서 놈답지 않게 거친 몸짓으로 술을 원샷! 그리고는 창가에 도착하자마자 손에 든 술잔을 창에 던져 박살을 내 버린다. 그와 함께 급속도로 하강하는 실내 분위기!
이런 제기, 방금 내가 원판에게 뭐 잘 못 말했나…?
물론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삐딱한 태도로 녀석을 대한 건 인정하지만… 근데 그 보다… 내가 조금 전에 본 게 정확한 거야…? 녀석이 몸을 돌리기 전에 본…
저 녀석도 그런 표정도 지을 수가 있단 말인가? 천하마도인들을 공포로 다스리던 마인 중의 마인이 마치 보통 사람처럼… 어떤 일에 극도로 서글픈 감정을 느끼는 듯한……
나는 일단 어정쩡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고, 그 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던 란이 내게 원망스런 시선을 던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끝내 아무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는 패액- 찬바람이 이는 동작으로 자리를 떠나 들어왔었던 출입구 쪽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그녀가 일으킨 찬 기운 이전부터 실내를 메우기 시작한 냉기… 혹은 반대로 타오르는 불길…?
하여간 원판 녀석이 내뿜기 시작한 심상치 않은 기운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등 뒤의 정글도를 잡았다.
고대의 중국에 떨어진 이후, 줄곧 생명의 위협 속에서 극도로 긴장된 상태로 지내게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느 날 문득, ‘저 사람 지금 웃고 있지만 화내는 거 맞지?’ 같은 내 무심결의 판단들이 상당한 정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면 확실히 비화곡 시절을 기점으로 그 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다른 사람들의 살기나 어떤 감정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나 역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금 내게 등을 보이고 있는 저 원판에게서처럼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구체적인 기운으로까지 느껴지고, 그 느낌만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정도의 경험은 없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력의 방출과는 종류가 다른… 정신적인 어떤 파장의 강렬함…?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는 않지만, 하여간 저게 원판의 힘…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기라성 같은 마인들을 제압한 카리스마의 원천이 아닐까……?
…쳇! 분석은 아무래도 좋은데… 당장의 문제는 내가 지금 놈의 기세에 눌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손끝에 약간의 떨림이… 썅~! 뭐냐, 이게! 나, 진유준! 비화곡 시절은 그렇다 쳐도, 나도 결국 저놈 못지 않다는 천재 연옥서생의 제자이며 2대 마군황! 생사금마도결의 전인이다. 그런데 저 비리한 놈의 단지 ‘기운’에 눌려 이게 무슨 쪽팔린 꼴이냐. 연옥서생 사부가 알면 생사금마도결 물어내라고 땅을 치고 한탄할… 에이 쒸~ 하여간!
나는 새삼 각오를 다지며 정글도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놈에게 접근하면 도홍을 비롯해서 무수한 소위 생체강화인간들이 나타날 건 뻔한 일…! 그래도 난 놈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