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0-3화 : 극악서생이 사는 아파트(3)
2-1. 극악서생이 사는 아파트(3)
< 몽몽… 적의 움직임은? >
[ 죄송합니다. 거실 벽의 새로운 스캔 방지 장벽 때문에 현재는 감지가 불가능합니다. ]
젠장! 지난 번 하은이의 가방에 코팅된 재질은 분석에 성공해서 앞으로는 스캔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여긴 또 다른 성분으로 구성된 벽이라 이거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뭔가 숨기고 나와 몽몽을 대비했다는 건데… 이러면서 뭐가 예의와 성의를 다해 날 대하고 있다는 거냐? 응? 너 이 자식 원판……!
[ 그런데 주인님! 잠시 행동을 자제해 주시겠습니까? ]
< 뭐냐, 몽몽. 이 판국에 왜 태클을…… >
은발 소년 모드로 나타난 몽몽은 두 팔을 벌려 날 막아서는 자세로 말을 이었다.
[ 상대의 비정상적인 살기 및 기타 인간의 C-PK(Catalyst Psychokinesis.)계열 정신 에너지 방사에 따른 주인님 뇌파의 동조 및 반발 현상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
< C…PK? >
[ 예, 인간이 분노와 슬픔, 살기 등의 극단적인 감정 상태에서 발산하는 정신 에너지를 말합니다. 해당 에너지는 PK 즉 염력과 같은 구체적인 물리적 파괴력을 동반한 정신 에너지가 아니지만 특정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에서는 염력 방사의 촉매 작용, 또는 구현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어 그러한 명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
몽몽 녀석, 전부터 인간의 살기 같은 건 잘 스캔해낸다 했더니만 그런 류의 에너지 구분과 측정법도 있었… 아, 이런. 이 녀석 그러고 보니!
< 에이 씨! 결국 그냥 같이 열 받지 말고 참으라는 얘기 아냐! >
[ …그렇습니다. ]
< 자꾸 옛날 식으로 수 쓰지 마라, 몽몽! 너에게는 어떤 것까지 감지되는 지 모르겠다만… 지금 내가 느끼는 저 녀석의 ‘뭔가’는 정말 장난이 아니야. 흔한 말로… 싸움은 기가 밀리면 벌써 지고 들어가는 법! 난 더 이상 어영부영 하고 싶지 않다구! >
[ 하지만 주인님. 상황의 전후 관계를 모두 파악하지 못한 현재의 상황에서 먼저 싸움을 거는 것은 비효율적인 대처 방법입니다. ]
< 이미 대화 창구가 저 모양이잖아! >
[ 그래도 주인님! 이번에는 저도 반대예요! ]
< 으… 요정 몽, 너까지? >
[ 주인님. 제가 보기에는 저 사람… 원판 말인데요. 웬지 불쌍해요. ]
< 뭐? 저 녀석이 불쌍하다고-? >
오늘은 하루 종일 얌전히 짱 박혀서 나오지 않던 요정 몽 녀석, 기껏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 네가 보기엔 정말 저 녀석이 불쌍씩이나 하냐? >
[ 그래요. 주인님께서 싫어하는 타입이라는 것도 알고… 인간들의 기본적인 도덕관념에서 많이 벗어난… 소위 나쁜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
녀석들과 티격태격 하다 보니 어느 사이 원판의 등 뒤 2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온 상태였다. 하는 수없이 걸음을 멈추는 내게 요정 몽의 말이 이어졌다.
[ 저 원판이란 사람은… 비화곡에서도, 그리고 이 시대에 와서도 계속 ‘혼자’인 것 같아요. ]
< 혼…자? 그거야 그렇겠지. 저 잘난 맛에 누구도… 아니 하연이 정도는 제대로 사람 취급을 했으려나? >
[ 그 하연님과는 어렸을 때 헤어져서 만나지 못하고… 지금의 하은님은 엄밀히 말해 같은 분이 아니잖아요. ]
< 그야 뭐… 쳇! 그렇다고 해서 저 녀석이… 아니 잠깐! 너 설마… 저 녀석이 지금 저렇게 빡 돌아버린 게… 나 때문이라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날 계속 기다렸는데… 근데 정작 내가 계속 삐딱하게 나와서 저러는 거란 말이냐? >
[ 저도 잘은 모르죠. 하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아요. 저도… 세상에 저와 같은 존재가 저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하면 너무나 슬퍼지거든요. ]
으~ 잘 키운 인공지능 소녀 하나 열 사람 소녀 안 부럽다더니, 이 녀석이 이렇게 애틋한 대사를… 아니 대사는 평범해도 저 표정이나 분위기… 하여간 전체적으로 이렇게 사람 가슴에 와 닿는 감정 표현을 해 낼 줄이야!
< 어, 어쨌든… 그래, 나도 생각해 보면… 녀석이 좀 불쌍하기는 해. 저 녀석 신분으로 지낼 때… 그 뭐냐, 잘난 건 둘째치고… 그렇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환경적 요인이랄까… 뭐 그런 건 좀… 이해해. 사실 나도 같은 신분과 상황에서의 도덕성 측면에서… 그리 떳떳한 놈도 아니고… 에… 뭐, 원판도 우리 시대에 와서도 혼자서 살기에 꽤 긴 세월이긴 했겠고…… >
몽몽이 조사한 DP의 제 2 창립일(그 전에도 있었는데 대단치 않은 규모의 중소기업이었던 모양이다.)…
매우 획기적인 발명품과 기술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기업으로의 성장을 시작한 시점이 자그마치 16년 전! 그러니까 원판이 우리 시대에 온 건 최소한 16년 전이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현재 원판의 육체 나이는 내가 떠났을 때와 거의 변함이 없다. 그럴 수 있는 이유로는 아무래도 미래 생체 과학을 이용해 세포의 노화를 막고 있다거나 아니면 타임머신을 어떤 식으로든 응용했다거나… 그런 정도를 예상해 보고 있지만… 음……
어쨌거나, 내가 원판을 다소나마 이해하긴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자 요정 몽 녀석은 비로소 얼굴을 풀고 ‘그렇죠?’, ‘그렇죠?’를 연발한다.
< 쳇…!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같은 환경이라고 해서 누구나 저 녀석처럼 변태 살인마가 되는 것도 아니고… 역시 절대 마음에 드는 놈은 아니야. 더구나 대교에게는 또 왜 접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
[ 아, 맞다! 대교님 문제가 있었구나! 흐음~ 그래서 주인님이 처음부터 계속 적대적으로 나오신 거였구나. 으~ 그럼, 몽몽 오빠! 우린 더 이상 참견하면 안 되겠다. ]
< 야 임마, 너 또 그렇게 노골적으로…… >
요정 몽 녀석은 결국 헤헤거리며 지 오래비 손을 잡더니 사이좋게 함께 사라진다.
그런데… 솔직히 난 이미 조금 전부터 녀석들이 아니더라도 뭘 어쩌기가 힘든 상황이다.
어떻게 된 게, 당연히 나올 줄 알았던 원판의 생체강화 보디가드 군단(?)이 내가 이렇게 정글도까지 든 채 지들 주인 가까이 접근해 있는데도 코빼기조차 안 보이고 있는 것이다.
원판이 아무리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C-PK인지 뭔지가 있는 놈인지 몰라도, 그건 실제 물리적인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외견상으론 그냥 비리한 데다 비무장인 녀석이다.
그런 상대에게 직접 싸움을 걸 수도 없고… 제기! 이노무몽몽 남매들, 말릴 거면 차라리 끝까지 말리던가 공연히 김만 빼놓고 사라져서 더 벌쭘한 상태가 됐잖아?
에효~ 어쩐다? 다시 억지로라도 스팀 올리고 다시시작해?
근데… 이 녀석 원판은 또 어느 틈에 좀 전까지의 소위 C-PK계열의 강력한 에너지 방출을 멈춰버린 거지? 그러니까 더 시비를 걸 여지가 없어지고…
으… 뭐, 뭐냐. 이번엔 또 뭔가 다른 에너지라도 방출하기 시작한 거냐?
왜 내가 네놈의 뒷모습에서 이렇게 쓸쓸하고 애틋한… 마치 세상 고민이란 고민은 다 너 혼자 안고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하는 거지…? 이… 이 빌어먹을 놈!
“니미~! 그래, 알겠다. 알겠어! 내가 다 잘못했다!”
나는 결국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자세로 등을 돌리고 있는 원판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오버 좀 했다! 나 진유준, 대한민국 모범청년을 자처하는 몸으로서, 원판 네가 했다는 짓들 다 맘에 안 들더라! 그래서 사실상 오늘 첨 인사하는건데도 졸라 삐딱하게 나왔다. 거 뭐… 대체 왜 그런지 몰라도 졸라 오래 날 기다렸다는데… 근데 그런 거 전부 생깐 거… 그건 좀… 그러니까 하여튼 조금… 미안하다!”
제기, 내가 지금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람?
솔직히 그런 마음도 발가락 때만큼은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기다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굳이 사과해야 할 필요도 없었잖은가.
이노무 몽몽 남매가 사람 정신을 흐트러트리는 바람에 나까지 뒤죽박죽… 에라 모르겠다!
“그, 그렇지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쓰바! 너 사람이 그렇게 사는 거 아냐! 그런 상황이라고 다 변태 살인마 되냐? 거기서 나는 너 같이 안 되려고 얼마나 뺑이 쳤는 줄 알아? 너도 솔직히 네 전과(?)를 아는 사람들 중에 너한테 나만큼 점잖게 나오는 사람 봤냐? 나 정도 반응하면 양반이지, 안 그래?”
형식이야 어쨌든 꽤 오랫동안 별러왔던 원판 극악서생에게 ‘그렇게 살지마’라고 충고하기… 결국 했다.
후우~ 조금은 속이 시원하네. 뭐… 확실히 시원도 했고, 이제야 말로 녀석의 명령과 함께 생체강화 보디가드 떼거지 러시가 몰려들겠지? 그럼 본래 목적대로… 음…
어째 아직도 좀 부족한 모양이네?
그럼 결정타를… 저런 용모의 남자들이 오히려 가장 싫어한다는 어택을 해 주마!
“쯧-! 그렇다고 계집애처럼 삐지기는!”
…오, 이제야 반응이 오기 시작한다.
뭔가 크큭하는 소리를 낸 것 같은데, 그와 함께 조금씩 어깨를 들썩이며… 어…? 엉?
나는 원판이 크큭, 쿡쿡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하는 걸 어이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참으려는 듯 쿡쿡대며 내 쪽으로 돌아서던 녀석의 입이 더욱 크게 벌어지며 기어이 아하핫핫핫~! 커다란 웃음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녀석은 고개를 숙이고 배를 잡고 웃었으며 곧 반대로 천장을 향해 상체를 젖혀 한 손으로 그 긴 머리채를 쓸어 넘기면서도 웃었다.
빌어먹을…! 이 녀석, 지금까지 생쇼 한 거였나?
내 반응을 보기 위해 이유도 없이 화를 내는 척을 해 놓고는, 내가 어떻게 나오는 가를 관찰한 거였나…?
근데…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대체 뭐가 저렇게 웃기다는 거지? 내가 제풀에 먼저 사과한 거? 아니면 욕을 할 때조차 그 의도가 뻔히 보여서… 그래서 가소로워서…? …썅! 뭐가 어찌 되었든……
“…이봐! 뭐가 그렇게 웃긴 거지?”
이번엔 정말 약간의(?) 살기를 담아 입을 열었더니, 녀석도 눈치를 채고는 차츰 진정하기 시작한다.
녀석은 결국 웃느라, 혹은 웃음을 참느라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얼굴로 하아- 한숨을 토해냈다.
“핫…! 아… 정말이지, 이렇게 즐겁게 해 줄 줄은 몰랐어.”
“이~”
“아, 미안! 미안! 사과하지, 웃은 건 사과할게, 너무 화내지 말아 줘!”
녀석은 어이없게도 두 손을 모아 비는 포즈를 취하며 생글대고 있었다.
웬지 그 모습이 더 ‘이걸 정말 한 방 날려 버려?’라는 충동이 일게 했지만, 녀석은 그 것도 미리 예측한 것처럼 얄밉게도 곧바로 몸을 뒤로 기울여 유리 창, 아니 유리벽에 몸을 기대어 섰다.
“사실… 어제 도홍에게 전달시켰듯, 우린 아직은 만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음… 빡 도는 건 잠시 보류해야겠군. 어째 이제야 본론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지?
“난 당신이란 남자를 좀 더 관찰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당신에게는 내가 준비한 것들을 자신의 힘으로 찾고 확인하도록 할 생각이었지.”
“준비…한 것들?”
“후후~ 난 이 시대 이 세계로 온 후 계속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왔어. 내가 이 시대에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은 당신이 왔을 때를 대비한… 아니, 어쩌면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 일들에 불과하다고 할까?”
으윽-! 이건 또… 뭔 소리야? 대교라면 몰라도 저 녀석이 왜 날 그렇게까지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지?
“난… 미래에서 온 로봇에 기록된 당신에 대한 기록을 보고 또 보았지.”
그건, 그런 줄 알았다. 그러니 내가 소령이하고 백일취 마신 거까지 알고 있지.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때로는 당신이 대교 자매들과 술을 마시는 모습을 재생시키며 함께 술잔을 기울인 적도 있었지.”
에? 그 건 오버 아냐?
으- 어쩐지 얘기가 남들이 들으면 이상한 오해라도 할 법한 분위기로 흐르는 기분이……
“그리고 결론을 내렸어. 당신이야말로 비화곡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던… 내 동류!”
으윽! 우려했던 말은 아니지만, 이건 이거대로 씨나락 까먹던 귀신 오바이트 하는 것 같은 소리잖아?
“이봐! 내가 좀 전에 말했잖아! 난 너처럼 되기 싫어서 그렇게 뺑이를 쳤다고!”
“바로 그거야! 나처럼 되기 싫어서 노력했다고…?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그, 그건… …칫! 말장난하지 마. 난 마침 너의 경우를 알았기 때문에 더 노력했을 뿐, 내가 너와 같은 타입이어서가 아니야.”
“후후~ 바로 또 이런 점! 허를 찔렸음에도 곧바로 신속히 대처하지.”
“이봐… 지금 말꼬리 잡기 놀이하자는 거야?”
“허점 투성이면서도 위기의 순간에는 이미 모든 약점을 닫아걸지. 질서를 보면 어지럽히고 싶어지고, 어지럽혀진 걸 보면 정돈해 놓길 즐기며… 자신이 선택한 일은 자신의 존재처럼 확고한 의지에 반한 일이었어도 웃으며 후회하지 않아.”
“어이~ 지금 대체 뭐라는 거야?”
“천하이며 천외천(天外天)…! 세계이며 세외세(世外世)……”
“에이 씨, 진짜!”
“후후… 당신은 틀림없는 나의 동류이며 또한 어쩌면 동급……!”
…미치겠네. 굳이 따지자면 칭찬을 한 건지는 몰라도 결국…
으… 나 혹시 나도 모르는 새 엄청난 스토커에게 찍혀 버린 거 아닐까?
이 딴 녀석에게 ‘우린 닮은꼴 친구!’라는 소리 들어봐야 하도 안 기쁘고…
게다가 이 녀석에게서는 예전 천우신의 경우와 달리 무지하게 비틀린 집착 같은 게 느껴진다.
세상에 그 어떤 남자가 괜찮은 친구감(?)을 발견했다고 해서 16년을 투자해 거대 기업을 세우고 생체강화인간부대 같은 걸 만들어 가며 사귈 준비(?)를 하겠는가!
“아니, 그게… 나 뭐 볼게 있다고……”
나는 급속도로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애매모호한 반문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원판은 피식 한 번 웃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군.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
그, 그러면 고맙지만…
근데 이 녀석 내가 뭘 걱정하는 지 정말 알고 말하는 걸까?
“아, 그리고… 이런 말 들어 본 적 있겠지?”
원판은 마치 사춘기 소녀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동·족·혐·오,라는 말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