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1-2화 : 적대관계 조인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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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11-2화 : 적대관계 조인식(2)


2-2. 적대관계 조인식(2)

…무림에서 돌아 온 이후 며칠 전 대교와 재회하기 전까지의 나는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에 무심했었다.

그런 내가 단 한 번, 감정의 동요를 일으켰던 적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그 더러운 살인자 때문이었다.

인간으로서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 자체가 물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범행 대상 선정에서의 야비함과 범행 동기의 타인 전가…
두 가지가 더 혐오스러웠다.

게다가 실은…
피해자 중의 한 명이 바로 아버지의 동창 중 한 분의 따님이었고,
나 역시 언제인가 얼굴 한 번 본 적은 있었다.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 소식에 안면이라도 있는 사람이 나온다는 건 느낌의 차이가 굉장할 수밖에 없다.

최근의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그 쓰레기의 추가 범죄 주장이나 인육을 어쨌네 저쨌네하는 소식들은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조금이라도 더 거물 대접을 받아 보겠다는 망상에 빠져 떠들어대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그 딴 개짓는 소리만도 못한 헛소리를 시종처럼 받들어 전달하는 매스컴들이 더 짜증스럽고…

그래서 당장 놈을 찾아가 내 손으로 놈의 목을 비틀어 그 뻔뻔한 입놀림을 막아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아, 그런… 가?

이 원판의 고백은 과연… 어디까지 진실일까…?
내가 그런 타입의 인간을 가장 경멸하고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리고 피해자 중의 한 명이 마침 나와 약간이나마 관련이 있다는 것까지 알고서…

그래서 꾸며낸 말일까…?
아니면… 원판이 그날 그 놈을 만나 뭔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인데…
그게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 그 놈을 망가트리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오늘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한 일은 아니었을까…?

어느 쪽이든, 원판의 나에 대한 시험…
이 일방적인 게임은 그런 곳에서부터도 준비되었고 지금 이미 시작된 건 아닐까……?

“음… 역시 고민하는 군.”

썅-! 정말 징그럽게 얄미운 녀석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의미의 말을 던지고는 느긋하게 더 기다려 주겠다는 포즈를 취하며 웃는 저 얼굴……

…제기, 어쨌든 얘기가 이렇게 된 이상 답을 해 주긴 해야 하는데…
장례식장에 다녀오신 아버지께서 친구분이 불쌍하다고 한탄하시는 모습을 봤을 때는…
아니, 평소부터 늘 누가 내게 그런 쓰레기의 처분을 맡긴다면 피해자들을 대신해 처절히 응징해 주겠다고 생각해왔었는데…

그런데 막상 정말로 내게 이런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니…
이건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원판이나 그 쓰레기와 달리 정상적인 인간을 자처하는 이가 아닌가.
살인을 살인으로 갚아 준다…?

정말 그게 옳은 일일까…?
더구나 더 극악한 자의 손을 빌어…?
아니, 독에는 더 강한 독이라고, 그건 오히려 더 효과적인…
아니, 아니… 그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상대가 살인자라고 해서 과연 같은 인간이 죽일 권리가 있는가라는…
으~ 빌어먹을!

“그냥… 니 맘대로 해.”

나는 결국 힘겹게 입을 열어 그렇게 말한 다음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훗…! 좋아.”

원판은 더욱 노골적으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이 웃었고,
나는 눈앞의 소주를 한 잔 더 원샷 해야 했다.

“당신의 뜻을 받들어. 놈을 비화곡의 방식대로 처리해 주지.”

나의 뜻을 받들어…라는 말이 너무나 거슬렸지만…

나는 쉽게 ‘이건 본래 네가 마무리해야 할 일이며 나와는 상관이 없는 거 아니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알게 되어 선택권까지 쥔 상태에서 내 의지로 결정한 이상 책임을 면할 수는… 제기…!
난 원판보다 나 자신에게 먼저 반문해 보았다.

진유준! 만약 또 다시 어떤 추악한 범죄자가 네 눈앞에 있고 네 손으로 처분을 결정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너는 그와 직접적으로 아무런 원한이 없음에도…

그래도 네 손으로 그를 죽일 수 있겠는가?
지금처럼 비겁하게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네 자신의 손으로……?

“…그…래!”

“응?”

“네 놈과 나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기분 탓인지 조금 전부터 냉혈 짐승처럼 차갑게 번들거리기 시작한 것 같은 원판의 눈동자를 마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정의 사자 따위가 아니야.
하지만… 다른 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런 놈은 죽여 없애도 된다고 생각해.
그냥 간단히도 곤란하지.

가급적 오랫도록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반복하여 겪으며 자신의 죄악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다가…
아니, 아니… 가능하다면 어떤 일이든 계기가 되어 놈이 개과천선하도록 만들었으면 좋겠어.
아아- 그래. 놈이 아예 감옥 같은 곳 말고 세상 밖에서 풍족한 환경과 좋은 여자, 착한 자녀…
모든 것을 갖추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말을 계속할수록 조금씩 더 흥분해서 자신을 잃어 가는 것을 제어하느라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말을 마쳤다.

“그럴 때 죽여야 해.”

…내가 지금 무슨 얘길 한 걸까…?
원판에게 밀리기 싫다는 마음에서 나온 말인 걸까…?
아니면 모두 나 자신의 진심이며…
또한 나는 여건만 되면 정말 그런 일을 실행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인 걸까?
원판…처럼?

“후후후~ 좋아. 모범답안이라고 꾸며낸 말이었다면 화가 났겠지만…
당신은 역시 게임의 기본 예의를 아는 사람이야.
나 역시 앞으로 숨기면 숨겼지, 거짓을 내 놓지는 않겠어.”

원판은 그렇게 말하며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고,
나도 지지 않고 잔을 들었다.
놈은… 내 말을 ‘진심’으로 판정한 모양이다.
나는… 나 자신은 아직 판정을 내릴 수 없지만……

“자아- 이제 당신 쪽에서 더 추가할 조건이 있는가?”

“…없어.”

“조금… 기다려 줄까?”

“…됐어. 그냥 계속해.”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까지 배려해 주려 해서 엄청 고마워 죽겠다. 이 ###야!’라는 소리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그래… 난 정의의 사도도 뭣도 아니다.

난 지금… 그런 쓰레기 처분에 동조했다는 사실에 흔들릴 때가 아니다.

“음- 이번 게임의 목적은 일단 진유준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예비역 남자의 인간성 및 능력 테스트… 정도로 해 두지.”

“니 꼴리는 대로 하세요.”

쯧-! 그래도 역시 군대 제대와 함께 버리려 했던 험한 말이 저절로 나와 버린다.

“후후- 그리고… 게임의 방식은 3단계로 나뉘어 단계 순으로 클리어 하는 거야.
1단계는 나 진하운, 현재명 화이트 W 크라우드가 현 시대에서 이루어 놓은 세력의 진면목을 밝혀내어 그 본부까지 찾아오는 것.”

“DP의… 진면목?”

“DP는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며 또한 일부에 지나지 않아.
SFV… 이 시대의 비화곡이라 이름 붙인 세력이 어떤 것이며 그 중심이 어딘가를 찾아내 보라는 거야.”

젠장…! DP만으로도 장난이 아닌데 그게 고작 일부…?
첨부터 아주 기를 팍팍 죽이시는구먼.

“2단계는… 어딘가에 잡혀 있는 미래 여자 진을 구출하기.
음- 실은 대교 양으로 할 생각이었지만 플레이어인 자네가 그것만은 거부하겠다니… 하는 수 없지.
나도 더 이상 머리카락이 잘리기도 싫고 말야.”

원판 녀석은 아까 내게 잘린 부위를 손으로 매만지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교를 게임에 끼워 넣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건지 머리카락이 아깝다는 건지……

“꽤 오래… 아끼며 가꿔왔던 머리였는데 말야.”

머리카락 쪽이었군.
여자로 오인받으면 끔찍한 패악을 부리는 놈이 그런 건 또……

“아- 오해는 말게. 나보다 여자들이 자르지 못하게 한 거였어.
특히… 음, 란이 아쉽게 되었군. 이쪽 옆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했었는데……”

응…?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가?
란이란 여자가 새삼 정말 무지하게 안타까운 눈으로 보고 있잖아?

어…? 기어이 침통한 한숨을 내쉬며 날 노려보기 시작하네?

“…잊지 않겠습니다, 진유준님.”

으윽- 협박까지?
살다 살다 별 노무 원한을 다 사보네.

“으~ 알았다, 알았어. 내가 아까 좀 오버했다. 그래…
나중에 돈 벌면 엘#스#틴(특정 광고 자제를 위한 자체 심의) 샴프 하나 사서 보내 줄게, 됐지?”

“엘#스#틴……?”

자기한테 한 농담도 아닌데…
저 여자, 수첩 꺼내서 적는다 적어. 젠장… 진짜로 보내 주지 않으면 총 부림날지도 모르겠는 걸?

“흠…! 어쨌든 그 두 가지를 클리어 하면 끝인 건가?”

“아니, 마지막 3단계가 남아있지. 그건 앞의 두 단계가 끝나면 알려 주도록 하지.
아니, 당신이라면… 그전에 모든 걸 스스로 알게 될 지도 모르지.”

“…좋아. 게임 시간, 아니 기간은?”

“무제한.”

“무제한…? 원판, 너… 혹시 진시황처럼 불로장생이라도 노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지금의 나에게는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좋아. 기간은 그렇다 치고 게임 상대는 너의 세력… 심판도 너라……”

“훗-! 새삼스럽게… 걱정하지 마. 어떤 결과가 나오든 판정 기준과 결과는 당신도 납득할 수 있을 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그리고… 내가 게임을 모두 클리어하고 나면 ‘처분’과 ‘대접’ 두 가지 중 하나가 있을 거라고 했지?
하지만 처음부터 말했듯, 난 너에게 대접받는 건 필요 없어.
다 끝나고 나면 너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을 뿐.”

“그건…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될 거야.”

“…좋아! 대충 끝난 건가, 게임 얘기?”

“그런 것 같군.”

“근데, 원판. 너… 이 시대로 와서 만화나 소설, 영화 같은 거 안 봤냐?”

“봤지, 지겹도록.
음- 알겠어.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주인공과 게임 같은 걸 하겠다고 나서는 악당 캐릭터 중에 잘 되는 꼴 못 봤다’…라고 말야.”

“그래.”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 난… 당신도 결코 어쩔 수 없는 히든 카드를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 그 것도 악당 보스의 전형적인 대사야.”

“그런가…? 전형적인 악당 보스라… 확실히 당신에겐 내가 그렇게 보이겠군.”

“자신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전형적이지.”

“훗~! 전형적인 정신 어택이로군.”

“그… 내 앞에서 내 말투 흉내내는 것도 그만뒀으면 좋겠어. 아니… 뭐, 넌 소위 안락의자형 보스이니 앞으로는 자주 볼일도 없으려나?”

나는 내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이번에는 내가 먼저 내밀었고, 녀석도 마주 잔을 들었다.
마지막 건배를 끝으로 내가 먼저 벌떡 일어남으로써, 우리의 게임 협정… 혹은 적대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한 조인식…?
하여간 나로서는 불쾌하기만 한 자리가 끝나고 있었다.

“아, 잠깐!”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나를 녀석이 다시 불렀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진유준 당신을 기다려온 세월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맥없이 죽지는 말아 줘.”

썅-! 말따구냐고 끝까지……

“…네 놈 목이나 조심해. 내가 정말 너와 닮은꼴이라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나는 끝까지 신경을 거슬리는 원판 녀석을 뒤로하고 아파트인지 호화궁궐인지 모를 집의 문을 나섰다.
란이 원판 대신 마중을 나와 나란히 따라오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진유준님.”

“뭐가… 말이오?”

“진유준님 덕분에 전 그 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마스터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무슨… 암튼, 그럼 내가 그 녀석 머리카락 자른 건 봐주는 거요?”

“후후- 그럴지도……”

“나참! 여자들이 자기 머리카락 아끼는 건 알았어도 다른 남자 머리카락까지 그렇게 챙길 줄은 몰랐소.”

“마스터께서는… 그만큼 특별한 분이니까요.”

나는 마침 멈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며 손을 들어 따라 들어오려는 란을 막았다.

“알겠수다! 안 특별한 분은 갈 테니, 이만 돌아가서 댁의 특별한 분이나 계속 챙겨 주쇼.”

“훗~! 정말 이상한 분. 이렇게 마스터와는 말투 하나까지 전혀 다른 남자인데도 어쩐지……”

“이봐! 당신도 내가 원판과 닮았다는 소리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 녀석이 어떻게 생각하든… 난 결코 내가 그 녀석과 동족 같은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있는 놈들이 더 무섭다더니… 엘#스#틴 안 해도 한 거 같은 놈이, 맨날 해도 이 모양 이 꼴인 사람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하여간 나, 진유준. 전 세계의 평범 남들을 대신해서 댁의 마스터와 나의 이 게임… 아니 이 전쟁의 주제를 이렇게 명명하겠소.”

나는 스르륵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란의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 비장한(?) 음성으로 선언했다.

“잘생긴 것들은 다 죽어야 돼.”

2-2. 적대관계 조인식(3)

엘리베이터의 문은 닫히고… 미세한 진동과 함께 하강을 시작했다.
그 전에 뛰어든 란의 웃음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을 즈음에는 내 얼굴의 약간이나마 존재했던 웃음기도 사라졌다.

< 몽몽… 네 생각은 어떠냐. 너도 나와 원판이 그렇게 닮았다고 생각하냐? >

[ 주인님께서는 불쾌하시겠지만… 확실히 일치하는 부분은 많습니다. ]

< …그 정도는? >

[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의 비교는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정신분석과 행동 관찰이 필요하므로 현재까지 수집된 정보만으로는 정확한 결론 도출이 어렵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주인님께서 원판이라 명명한 인간의 심리 상태, 뛰어난 지능을 소유한 자로서 그러한 결론을 내린 배경과 과정을 파악하는 시도가 선행되는 쪽을 권장합니다. ]

< 그야 이 빌어먹을 게임인지를 하다 보니… 어… 그런…가? 혹시 녀석은 날 관찰함과 동시에 내 쪽에서도 자신에 대해 알아 가는 걸 원하는 거 아닐까? >

[ 상대의 동조를 얻기 위한 기본적인 과정입니다. ]

< 나의 동조라… 놈이 왜? 무엇을 위해서? >

[ 그야~! 그 사람, 그만큼 외로운 거라니까요! ]

< 요정 몽…! 넌 심각한 얘기에는 좀 끼어 들지 마라, 응? >

[ 치이-! 너무 하세요. 저도 알 만큼은 아는 요정이라구요. ]

< 잘해야 한 살 짜리가 퍽이나 알 만큼 알겠다. 임마! 이런 건 지식만 가지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

[ 우~ 저의 태생적 약점을…… ]

엄청난(?) 연장자로서의 전형적인 나이 어택에 입술을 삐죽이며 토라지는 기색의 요정 몽.

< 뭐, 너의 말도 나름대로 근거는 있겠지. 하지만… 음… 그래, 실은 나도 모르겠다. 녀석이 네 말대로 정말 외로운 삶을 살아와서… 그래서 그나마 좀 닮은… 그게 성격 드러운 측면만이든 뭐든 간에 나와 좀 친해지려는 의도… 그런 식의 생각도 안 드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 전에 난 웬지… 녀석이 오늘 나에게 뭔가 거짓말을 했다는 느낌이 들어. >

[ 거짓말이요? 어떤 거요? ]

< …몰라. 아직은 구체적으로 뭔지는 잘 모르겠어. 그냥… 느낌이야. 녀석의 의도… 혹은 전부 거짓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쳇~! 너희들도 알다시피 내 직관력인지 뭔지는 항상 좀 애매하잖냐. 위기가 코앞에 닥쳐야만 감지할 때가 많았고 말야. >

[ 흐응- 하긴, 주인님의 시스템은 성능에 비해 너무 불안정해요. ]

요정 몽은 무심결에 말을 해 놓고 이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녀석을 야단칠 생각도 들지 않았다.

< …니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히 그래.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넘겨왔는데…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나빠. 이번에는…… >

‘나도 정신적이든 지능적이든 뭔가 좀 더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할 것 같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웬지 기분이 나빠져서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내가 그 업그레이드라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거 자체가 원판이 노리는 일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놈이 원하는 걸 최소치로 잡아서 ‘쓸만한 놈 키워서 부하로 만들기’ 정도로 추정해 보면… 아니, 그 어떤 추정도 기분 좋은 게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 제기! 정말이지… 기분 더럽군. >

동족 운운을 인정하기는 죽어도 싫지만, 이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일단 놈이 나와 비슷한 패턴의 발상과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그래.
이용하기는 해야 한다. 그렇지만 또 문제는 놈도 같은 걸 예상하고 더 꼬인 상황을 연출할 가능성도 높다는 점이다.

제기… 놈이 말한 동족 혐오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누구라도 스트리트 파이터 같은 대전 격투 게임을 할 때 자신과 같은 캐릭터를 선택한 데다 얍샵이 기술까지 똑같은 상대를 만나면 짜증이 나기 마련인 건데……

[ 주인님! 원판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

< 웬… 문자 메시지? >

[ 아, 연속으로 몇 개가 계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일반 라인이라 한 번에 길게 쓰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원판은 저의 핸드폰 모드 때와 같은 무선 통신사에 가입된 핸드폰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

난 몽몽의 몽드폰 모드를 특정 회사 기계를 상정하여 구성하게 한 다음 정식으로 한 통신사에 가입해 요금도 제대로 내고 있다.
원판이라면 그 번호를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방금 헤어져서 이제 막 아파트 정문을 나서려는 참인데 그 사이 웬 문자 메시지…?
어디 뭐라고 온 건지 첫 번째가……

나의 실수!--; 만남 자체에 흥분해서ㅋㅋ♥ 중요한 얘기를 빼먹었군 미안!(- -)( _)

…쳇! 이모티콘에… 누가 보면 평범한 이 시대의 젊은이가 보낸 메시지인 줄 알겠다.
음… 어쨌든 이 게임의 기본 규칙이라… 그 중 첫 번째가… 다른 사람들, 특히 하은이와 대교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말라…?
….어? 아… 알겠다. 저 녀석이 온다는 보고를 받고 서둘러 메시지를 보낸 거였군.

하은이였다. 아까는 대충 둘러대고 집에 남겨 두고 왔었는데… 어떻게 눈치를 챈 건지, 아니면 그냥 별 생각 없이 지 오래비 찾아온 건지 몰라도 하여간 녀석이 마악 택시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 몽몽. 원판에게는 내 대신 답신 보내 줘. ‘알겠다. 그런데..’ >

몽몽은 내 답신을 보내기 전 실제 핸드폰 화면에 나오는 규격으로 타이핑해 보여 주었다.
짧게 한다고 했는데도 두 통으로 나누어져 보내야 할 모양이었다.
서로 첨단 미래 기계를 가진 거 뻔히 아는데 뭔 짓인가 싶긴 했지만 일단……

알겠다. 그런 데.. 난 이모티콘이나 자음만 치는 거 별로 안 좋아 해.
특히… 사내 녀석이 재수 없게… 또 말끝에 하트 붙이면 수신 거부다!

내가 그런 답신을 보내자 곧 또 답신이 왔는데… 그걸 확인하고 어이없어 하고 있자니까, 그 사이 내 앞까지 온 하은이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눈치가 이상해서 설마 했는데… 유준 오빠! 벌써 우리 화이트 오빠까지 알고 있었던 거야?”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느라 일단 고개만을 끄덕여 보였더니 하은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빠는 대체… 대체 어떤 사람인 거지? 큰 이모와 이모부께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계시는 거 같던데!”

“너… 설마 우리 부모님께 나에 대해 이상한 소리한 거 아니지?”

내가 대뜸 인상을 긁으며 묻자 녀석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바본가 뭐. 그냥… 여러 가지로 떠 봤을 뿐이야. 두 분이 눈치채지 못하는 한도에서… 아니, 그보다! 대체 오빤 어떻게 화이트 오빠를 알고 있는 거지? 응?”

“에… 그게… 그냥 좀… 알긴 아는 사인데… 별로 친하지는 않고……”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 이런 경우 그냥 보통 조금 아는 친구 사이 정도로 얘기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겠지만 그냥 하는 말이라도 원판을 친구라고 표현하기는 싫은데……

“예전에… 음… 그러니까, 내가 이래봬도 특별한 내력이 있잖냐. 아마 그게 니 잘난 오빠의 정보망에 걸렸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전부터 날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데. 어… 더구나 난 너 하은이의 외사촌이기도 하고… 말야.”

“…그 것뿐?”

“음… 그래. 그 것뿐. 그리고 넌 또 여기 어떻게 알고 왔냐?”

“와 본 적은 없지만, 전부터 주소 정도는 알고 있었어. 어제 거기서 오빠들이 마주쳤을 때… 두 사람이 표정! 특히 유준 오빠의 표정은 장난이 아니었어.”

“어, 그건… 음… 사실 내 쪽에서도 니 오빠를 조금 알긴 알았는데… 에… 직접 본 건 처음이라, 그래서 좀 놀랐던 거야. 하핫-! 설마 친남매도 아닌데 그렇게 쌍둥이처럼 닮았을 줄은……”

아, 그러고 보니 이 희귀한 남매는… 아니, 원판은 그렇다 치고 하은이 쪽은 입양으로 맺어진 남매의 쌍둥이 현상(?)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뭐… 내가 입양 된 걸 아는 이들은 더욱 놀라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어제 유준 오빠의 반응은 그 정도가 아니었어. 그건 결코 그냥 조금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마주쳤다고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아니고 마치…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는 어떤… 귀신이나 악마 같은 걸 목격한 사람의 표정…이었다고 할까?”

누가 원판 동생 아니랄까봐 날카롭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전에… 기집애! 이쯤에서 지 얘기나 털어놓을 것이지, 자꾸 우리 쪽 기밀 사항을 파고들기는……

“너… 그건 좀 오버 아니니? 내가 설마 그 정도 표정이었을라구.”

“…그럼 오빠가 납득이 가게 설명을 해.”

젠장…! 우리의 부적절한(?) 관계를 밝힐 수는 없고… 어쩔 수 없군. 정말이지 싫지만… 녀석에게 ‘친구’라는 호칭을 붙일 수밖에.

“실은… 우린 전부터 조금 아는… 친구 비슷한 사이였어.”

“친구…? 어제 처음 만났다면서?”

“그게… 문자 친구.”

“에…? 문,자… 친구?”

나는 터무니없다는 표정의 하은이에게 몽드폰을 내밀어 그 증거(?)… 조금 전 원판이 마지막으로 보내 온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 -__-^ )
.'(☞☜)’.
너무하는군. 당신의 단점은 유머감각이 너무 없다는 거야.

내가 한 소리 했음에도 기어이 이모티콘을 쓴 녀석의 메시지를 확인한 하은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고 몽드폰 화면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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