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2-1화 : 비밀결사 자취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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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12-1화 : 비밀결사 자취생(1)


2-3. 비밀결사 자취생(1)

내가 오늘 원판과 맺은 건 기껏해야 적대관계뿐이지만, 하은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난 원판과 문자친구라는… 얼결이라지만 참으로 어이없는 소리까지 내 입으로 하고 난 뒤여서, 더 이상의 설명은 거부하고 자리를 떠났다.

하은이 녀석은 주춤대며 나를 쫓아올지 어쩔지를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결국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내친김에 원판을 찾아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은이 녀석의 추궁에 원판이 뭐라고 설명할지는…

뭐, 그건 원판 몫이고……

“하하- 애인과 싸우신 모양입니다.”

기껏 탄 택시의 기사가 창 밖에 서 있는 하은이를 힐끗 쳐다보며 한 말이었다. 하은이 녀석은 날 따라오지는 않았지만 계속 의아함에 뾰루퉁한 표정을 섞어내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어쨌든, 손님. 보기보다 재주가 좋으십니다. 어디서 저런 미인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운전이나 해.”

나는 퉁명스럽게, 그리고 대뜸 반말로 택시 기사의 말을 막았고, 내 두 배는 됨직한 나이로 보이는 택시 기사가 찔끔 웃음기를 거두며 차를 출발 시켰다.

“제 변장을 한 눈에 알아보시다니, 과연 전설의……”

“전설이고 나발이고… 챈은 어딨지?”

내 무뚝뚝하고 단도 직입적인 추궁에 나이 든 택시기사… 아니 그렇게 변장을 하고 있는 젊은 GM 요원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챈 님은… 어제 일을 보고 받고 다카시님을 추적중입니다. 아, 물론 다카시님에 대한 징계 조치가 끝나면 곧 진유준님께 직접 사과를 하러 오실 겁니다.”

사실 다카시란 놈이 문제지 챈이 뭔 잘못인가 싶기는 했지만, 나중에 다카시일로 챈을 압박하여 정보를 하나라도 더 캐내려면 미리 분위기를 잡아 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더욱 비꼬는 투로 말을 이었다.

“…사과는 필요 없고, 자기 수하 단속이나 확실히 하라고 해. 내가… 좀 실망했다고 말야.”

“아, 알겠습니다.”

다카시와 다른 놈들은 그렇다 치고, 처음 지하철에서 내게 총을 겨누었던 놈들 두 명은 분명히 그 전날에도 본 챈의 진짜 수하였었다. 지금 이 녀석도 챈의 수하… 음, 하지만 챈이 자기 대신 사과를 하러 보낼 정도면 그만큼 믿을 만한 녀석인 모양이다. 저 최신형 인피면구를 벗으면 나도 아는 얼굴이 나오겠지만… 어쨌든, 변장했다는 거까지는 몰라도 바로 인피면구 밑의 얼굴이 누구라는 것까지 알아맞추는 건 오버일 테니 일단 아는 체는 않기로 했다.

“선조님의 유언이 있었음에도… 같은 GM의 사람이 진하사님의 후예께 무례했던 점……”

거참 들을 때마다 묘하단 말야? 내가 내 후예라니, 원.

“저도 무척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응…? 챈이 아니라 너도…? 상관의 대리로 와서 자기의견까지 내세우다니, 챈이나 다카시에게 님자를 붙이긴 하지만 이 녀석도 결코 말단은 아닌 건가? 흐음…

금동이 일에 GM이 얼마나 중요시 여기고 있는지 새삼 알만하군. 챈이나 소령, 미령 자매는 지휘관 급으로 온 거라 해도… 이 녀석은 말 그대로 잠복 전문의 말단이라 생각했었는데……

“또한 전……”

녀석은 차가 신호대기 상태였을 때, 변장을 벗어 보이고는 씨익- 낯익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진유준님께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겁니다. 비록… 만난 기간은 짧았지만 말입니다.”

나도 몽몽도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이 인상 좋은 자취생이 우리 집 2층의 원룸 중 한 곳에 세를 든 것은 하은이가 미국에서 금동이를 차지하고 내놓지 않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그 때 벌써 GM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우리 집에까지 잠복 인원을 배치했던 것이다. 우리 집 2층의 원룸은 총 4개. 그 중 한 군데가 꽤 오래 빈 상태였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이 녀석을 무지하게 반기며 입주 시켰었다는데……

음… 암튼, 거기다가 몽몽이 동사무소 자료를 검색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 녀석이 지방에서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한 학생을 가장해 천연덕스럽게 우리 집으로 침투한 후로도 최근까지 우리 집 주위 다른 집의 자취생이나 심지어 가게 주인이 통째로 바뀐 곳이 여섯 군데다. 아직 일일이 직접 확인까지는 안 했지만 만약 그 곳들이 전부 GM의 거점이라면… 아니 그 중 절반만 GM이라도 우리 집은 하은이가 오기 전부터 완벽하게 포위를 당했던 셈이다. 원판의 DP가 미래 과학을 바탕으로 한 호화 테크놀로지로 우릴 감시한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GM은 몸빵……

“목표물이 오기 훨씬 전부터 현지 주민으로 침투해 있는다…! 예전 천이단 시절의 목이(木耳)… 맞지?”

“역시 잘 아시는군요. 어쨌든 전 이후로 다른 임무가 있어서……”

“자취생… 음, 이름이 뭐지?”

“후후~ 그냥 ‘인표’라고 불러 주십시오.”

“인표……?”

“예. 전 한국의 배우 차인표 씨의 팬이거든요.”

상관인 재키 챈도 그렇고… 비밀결사 요원들도 영화 무지하게 보는구나 싶다. 이 녀석은 본래 인상이 나쁘지 않았는데 우리 나라 배우 팬이라니 더 좋게 봐지는군.

“좋아, 인표. 뭐… 잠복이 드러나고, 그리고 비록 다카시와 약간의 일이 있긴 했어도 그 정도로 나와 GM 사이가 나빠질 것도 아닌데… 그냥 있지, 그래? 자네 말대로 만난 기간은 짧았어도… 그 동안 아침저녁으로 인사까지 나누던 사인데 말야.”

임무의 연장선상이었겠지만, 이 녀석 정말 인사성은 밝았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전 정말로 다른 임무가 생겼습니다.”

“에… 챈에게는 내가 말해 볼까?”

“아닙니다. 본래 저희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특수한 임무가 아닌 이상… 으음~ 실은 저도 정말 아쉽습니다. 이제는 영화에서나 어설프게 재현하는 전설의 무공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도… 진유준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기쁩니다. 인연이 된다면 언젠가 또 뵐 날이 있겠지요.”

내가 붙잡는 걸 고마워하고 기뻐하는 걸 보니… 좀 찔리는 군. 솔직히 그 사이 몇 번이나 봤다고, 게다가 내가 사내 녀석에게 뭔 정이 들었다고 붙잡겠는가. 당연히… 방이 비어 안 나가면 걱정하시는 어머니 때문이다. 지금은 방학 중이라 근처 대학교 개학 때까지는 방이 놀고 있을 가능성이 많고… 게다가 새로운 세입자가 오기 전에 내가 청소하고 도배까지 해야 하고……

“그리고… 한 가지 알아두십시오. 어머님께는 다른 우리 요원이 챈님으로 변장을 하고 다음 입주자 계약을 했습니다.”

“어…? 아주 가는 게 아니고, 교대…였어? 게다가 챈 같은 거물이?”

“어, 그건… 으음… 기분 나쁘신 겁니까? 골든 차일드일을 진유준님께 맡긴다 하고도 저희들이 계속 주변에 머무는 거 자체가?”

“아니, 그건 아니고… 음… 알겠어.”

“이해해 주십시오. 골든 차일드는 그만큼 저희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니, 정말 괜찮테두! 선조…들 일도 그렇고 난 정말 천이단을 좋아하거든. 자넨… 아쉽지만 잘 가게. 자네 말대로 인연이 있다면 또 볼 수 있겠지.”

음… 여기까지도 다소 얍삽한 반응이었는데… 다음 달과 다다음 달에 계약이 끝나는 방 두 개에도 GM 환영…이라고까지 하면 너무 노골적이려나? 뭐… 사실 내 입장에서야 몇 명에게 감시 받든 그게 그거니까 방 놀리느니 그냥… 으음… 그러려면 우선 금동이를 당분간 인질로(?)……

내가 주인집 아들내미다운 머리를 굴려 보고 있는 사이 집에 도착, 나는 결국 GM 자취생 추가 확보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택시에서 내리며 인표와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음… 근데, 저 녀석 얘기 중간에 잠깐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마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이었을까? 굳이 캐묻기도 뭐해서 그냥 넘어 갔었는데… 막상 보내고 나니까 조금 신경이 쓰이는 군. 아… 어머니께서 2층 계단에 나와 계시네? 설마 벌써……?

“뭐… 예요?”

내가 짐짓 모르는 채 하며 묻자 어머니께서는 계단으로부터 두 번째 방, 인표가 있던 곳을 턱짓하셨다.

빼꼼이 열려 있는 문 앞에 쓰레기 봉투 몇 개가 놓여져 있는 것도 그렇고 안에서 대청소 중이라는 분위기……

“나도 참…! 이런 건 또 첨 봤다. 잘 있던 얘가 느닷없이 아침에 갑자기 방을 빼달라고 해서 놀랬더니 웬 화교 한 명을 함께 데려왔지 뭐냐. 학생이 인터넷 뭐시긴가로 광고를 해서 자기와 교대 식으로 들어 올 입주자를 찾았다나? 하여간 요즘 애들은……”

교대 식이 아니라 교대 맞아요, 어머니. 뭐… 어머니께서는 그냥 모르고 계시는 게 속 편하시겠지만 말이죠.

“게다가 다음 입주자는 또 봐라 곧 바로 들어온다고 저렇게… 하여간 이렇게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듯 사람 바뀌는 건 처음이다. 꼭 뭐에 홀린 거 같기도 하고… 게다가……”

“…뭐, 어쨌든 우리야 상관없잖아요. 신분에 문제없고 방세만 잘 내면……”

“그야 그렇지. 아, 그런데 넌 앞으로 집안에서고 어디서고 웃통 좀 벗고 다니지 마라.”

“훗~! 하은이 때문에요? 뭐 어때요, 동생인데.”

“아니 그보다……”

“하이~!”

응? 이게 웬… 낯익은 소프라노…? 에구, 이거 설마?

나는 어머니와 얘기하느라 돌리고 있던 고개를 다시 원룸 쪽으로 향해 보았다. 거기엔… 마악 방에서 나오던 소령이가 비짜루와 쓰레받기를 든 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어, 너, 어……”

으~ 하마터면 어머니 앞에서 아는 채를 할 뻔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내 반응을 눈여겨보지 않으신 것 같았지만… 젠장! 인표 녀석이 안 하고 간 말이 이거였나? 교대자는 챈이 아니라 저 소령이… 아니, 저 녀석만 달랑 보낼 리가 없지. 세트로… 그래, 미령이 저 녀석까지!

“아… 이 것들은 문 앞에 그냥 버리면 될까요? 주인집… 아드님!”

“얘, 뭐래는 거니? 아무래도 안 받을 걸 그랬다!”

“…괜찮아요. 쓰레기 봉투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은 거예요.”

어머니는 반사적으로 내게 묻기는 했으나, 내가 정말 중국어를 알아들을지는 모르셨는지 의외라는 표정으로 새삼 아들의 얼굴을 올려다 보기 시작하셨다.

“나참…! 정말 너희들이 들어 올 생각인 거야?”

“후후~ 그래요. 거기 서 있지만 말고 좀 도와 줄래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녀석들 쪽으로 다가가 쓰레기 봉투를 들어 옮겨 주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니… 뻔한 건가…? 하은이의 신분과 나라는 복병 때문에 협상과 무력 사용이 모두 불발로 그친 지금… 금동이를 되찾는 방법으로 챈, 아니 저 녀석들은 하은이와 정면대결을(?) 택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누가 누가 더 친한가…

금동이가 과연 누구를 더 따르는지 하은이 앞에서 시위하려고 하는… 음… 근데 문제의 금동! 미소녀 세 명이 각축전을 벌일 정도로 인기 좋은 우리 금동 옹 당사자께서는 어디에 있는 거지?

“어머니, 금동이는요?”

“그 녀석은 슈퍼에 있다. 못 봤냐? 동네 꼬마들이 몰려와 난리가 아니다. 니 아버지 말로는 그 녀석이 먹는 과자가 엄청 잘나가기 시작했단다.”

“음… 그 녀석이 복 덩어리 같지 않아요?”

“…뭐, 이젠 그런 생각도 좀 들긴 한다만… 그리고 넌 또 언제부터 중국어를 그리 잘했니?”

“…모르셨어요? 저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 중국어였잖아요.”

“그랬…니?”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의 위대성(?)을 실감하시겠다는 표정이 된 어머니를 뒤로 하고 나는 본격적으로 소령이와 미령이의 이사를 돕기 시작했다. 두 녀석 다 생글대면서도 짐짓 날 모르는 척 하고 있었지만… 난 기뻐해야 할지 어쩔지… 사실 반갑기야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걱정이었다. 앞으로 집안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신분을 가진 소녀들 간의 전쟁’을 생각하면… 으~ 이 녀석들 설마 우리 집 안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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