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2-2화 : 비밀결사 자취생(2)
2-3. 비밀결사 자취생(2)
쯧…! 그런 생각은 너무 오버겠지? 하은이나 얘들이나 철부지 애들도 아닌… 아니, 물론 소령이는 다소 철이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하여간 괜한 걱정을 사서… 윽! 아닌…가?
녀석들의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 하나를 들어 다락에 올려 주려던 나의 동작은 흠칫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결국 다소 어색한 태도로 박스를 내려놓았음에도 아무 것도 모르는 문 밖의 어머니께서는 그저 ‘우리 막내는 외국어도 잘하고, 일도 잘해~!’라는 흐뭇한 표정으로 보고 계실 뿐이었다.
“그럼 걔들 좀 더 도와주고 올라와라.”
“…예.”
어머니께서 돌아서시자마자 나는 문가에 서 있던 미령이의 팔을 잡아 방구석으로 이끌었다.
“앗! 매니악! 변태가 미령이 팔을 잡았다!”
손가락질을 해가며 외치는 소령이 녀석의 목소리에는 악의 없는 장난기가 섞여 있는 것이 여실했지만, 단호하게 내 손을 뿌리친 미령이 녀석은 정말 기분 나쁘다는 듯 내게 잡혔던 부위를 매만지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세게 잡지도 않았는데… 암튼! 니들 내 말 잘 들어. 여기에 어떤 목적으로 왔든지 간에 우리 부모님이나… 하여간 날 제외한 누구에게도 해를 끼쳤다가는 용서 안 해. 알겠어?”
비화곡 시절이었다면 이 정도 뜨뜨미직한 경고만 해도 알아서 겁을 먹어 주었겠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별로 먹혀드는 것 같지가 않았다. 벽에 등을 기대 선 미령이는 내 경고를 듣고도 태연히 피식 한 번 웃었을 뿐이고, 소령이 녀석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우린 아무도 해치지 않아요. 왜… 그런 걸 걱정하죠?”
“아니, 그야… 그게 정상이지만… 그러니까… 혹시나 해서……”
“으움~! 알겠어요! 소령이는 누구도 해치지 않겠어요. 약속!”
소령이 녀석이 불쑥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바람에 나도 얼결에 마주 손을 내밀었는데, 녀석은 새끼손가락을 거는 건 물론이고 거기다가 엄지손가락으로 도장까지(?) 찍고는 환하게 웃는다.
쯧…! 역시 소령이 얜 경계 대상에서 제외시켜도 될 것 같다. 대체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 몰라도 이건 소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동 급인 것 같으니……
“언니 말대로 우린 아무도 해치지 않아요. 더구나 고대 전설의 계승자라는… 대단하신 진유준님이 화를 낼 정도의 일이 생긴다면, 챈도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챈이나 인표와는 달리 다소 비꼬는 투의 말투. 그래… 결국 이 녀석이 문제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면서… 그건 대체 뭐냐?”
나는 미령이 녀석의 오른쪽 발목을 가리켰고, 녀석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내리더니 자신의 통이 넓은 청바지 자락을 살짝 들어올려 보였다. 몽몽의 스캔대로 녀석의 바지 속 발목 부위에는 가죽 검집이 채워져 있었고 얼핏 군용 대검을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작고 심플한 디자인의 칼이 꽂혀 있었다.
“후후- 호신용이에요, 호신용.”
“그것도 어린 소녀가 가지고 다니기에는 너무 험해 보인다만……”
나는 말을 하며 방문을 닫고 창문의 브라인드까지 내리고 나서야 조금 전 들어주다가 다시 내려놓았던 박스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 몽몽의 표현대로라면 ‘규격 외 총기’… 앙증맞아 보이는 크기와 디자인이었지만 확실하게 실탄 장전과 발사가 가능한 권총이 네 자루에 시퍼렇게 날이 선 군용 검이 두 자루, 별 모양 표창 같은 암기 다발 몇 개, 부비트랩 설치용 도구 등등… 완벽한 개인 게릴라 전 장비 세트였다.
“에티켓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요? 숙녀의 소지품을 그렇게 함부로 공개하시다니 말이에요.”
“…이게 숙녀의 소지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냐?”
“훗~! 그럼요. 요즘처럼 험한 세상… 게다가 저처럼 연약한 소녀에게는 필수품들이죠.”
미령이 녀석은 여전히 태연하게 웃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녀석의 발목을 가리켰다.
“왜요? 이 것부터 압수라도 하실 건가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령이의 오른쪽 다리가 스윽 들어올려졌고, 시건방지게도 내 눈앞에 자신의 발목을 위치시킨다. 어린 녀석치고는 도발적인 말투와 행동… 아니, 그보다 이 녀석… 어느 사이 기대고 있던 벽에서 등을 뗀 상태다. 한쪽 발로 균형을 잡으며 다른 발을 자기 머리 이상의 높이로… 게다가 이렇게 자연스럽고 천천히 들어올릴 수 있다는 거 하나만 봐도 보통이 아니다. 무림 시절처럼 내공을 쓰지는 못할지 몰라도 나름대로 상당한 수련을 거친 녀석임이 틀림없었다. 어쨌든……
“그래. 위험한 무기는 일단 압수……”
칭~!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녀석 발목의 칼이 뽑혀졌고, 그와 동시에 녀석의 발끝이 쭈욱 뻗으며 내 두 눈을 찍어왔다. 슬쩍 뒤로 상체를 젖히며 피했지만 그 것은 허초! 차올린 발이 허공에 세워졌을 때 이미 거의 거꾸로 서다시피 한 미령이의 몸이 교묘하게 비틀어진 디딤발을 중심으로 피잉- 팽이처럼 회전했다. 챈이 썼던 마지막 암수…? 아니면 역순의 연속기? 이 좁은 방안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른 온갖 시나리오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가 특별한 대응 없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분명히 위협적인 움직임이었음에도 웬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예상, 혹은 느낌대로 미령이는 서커스를 하듯 빙글 한 바퀴를 돌아서 제자리에 섰을 뿐 그 과정에서 아무런 공격도 해 오지 않았다.
녀석은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에 다소 실망하는 눈치면서도 짐짓 태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때요, 전설의 인물께서 보시기에는? 이제 조금은 자격이 있어 보이나요?”
“뭐…가?”
“…저도 멋으로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라는 말이에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런데 제 귀에는 그렇게 들렸어요. ‘너처럼 어린여자는 이런 것들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라고요.”
그게 아니라 그 반대의 입장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네 마음이야. 하지만 여긴 나의 집… 즉, 내 구역이야. 총기류는 압수할 거고, 물론 추가 반입도 금지야. 그게 싫으면 이 집에서 나가도록 해! 단… 네 말대로 험한 세상이니 그 칼 정도는 눈감아 줄게.”
“호호호~ 너그러운 배려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도발을 위한 도발에 시비를 위한 시비… 쳇! 처음부터 완전한 우리편이 아니었을 때의 미령이는 이렇게 사귀기 어려운 타입이었나?
“미령아, 난 다만…”
아니, 아니다. 내가 자꾸 비화곡 시절의 나와 헷갈리고 있을 뿐, 이 녀석은 본래 이랬다. 경계심 많고 도도하며 누구에게도 쉽게 지려고도, 마음을 열지도 않았다. 그 때는… 내가 이 녀석이 마음을 연 몇몇 사람들 중의 하나였고 나 역시 이 녀석을 충실한 수하라기보다 귀여운 막내 여동생으로 여기며 지냈었지만…
“뭐, 뭐예요.”
계속 빈정대는 표정이던 미령이가 문득 웃음기를 거두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 미안. 잠깐 그냥…”
“뭐가 미안하다는 거죠? 아니 그보다 당신… 나를 전에도 본 적 있어요?”
“…아니.”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날……”
“…난 그저 예전에 알던… 널 닮은 아이가 떠올랐을 뿐이야.”
“흥~! 누굴 닮았다는 건지 몰라도, 친하지도 않은 여자를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건 실례라구요.”
“그러니까, 미안해.”
다시 사과했지만, 녀석은 흥이 깨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우린 당신과 싸우려고 온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해지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니까 말이에요!”
쌀쌀맞고 얄미운 어조로 단언한 미령이는, 이어 ‘우린 다만 골든 차일드를…’이란 말을 꺼냈지만, 곧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 사이 우리 쪽으로 다가 온 소령이가 내게 한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니 언니 생각은 다른 것 같은데?”
나는 피식 웃으며 소령이가 내 쪽으로 내민 손바닥 위에서 초소형 술병 모양의 초콜릿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건 언니가 가장 좋아하는… 언닛!”
“금동이 친구는 우리 친구! 이 사람은 그레이스 정과는 달라. 그러니까… 싸우지 마.”
“아휴~ 하여간 언니는!”
미령이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소령이를 노려보았지만, 결국에는 녀석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일견 철부지 언니와 조숙한 동생의 역전 자매로 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소령이가 훨씬 어른스러운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식이야 어쨌든, 결국 나와 미령이의 쓸데없는 신경전을 막았으니…
“아, 잠깐 이 것 좀 볼래요, 오빠?”
소령이는 불쑥 내 팔을 잡아 자기 개인 짐으로 보이는 것들이 쌓인 쪽으로 이끌었고 나는 순간 황홀경(?)에 빠져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끌려가고 말았다.
그래… 내가 이 녀석들에게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건…
비화곡 시절의 경외와 존경을 담은 곡주님 소리도, 최근 재회 때의 경계와 거리감을 둔 당신, 진유준씨 같은 호칭이 아니라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오빠’ 소리…!
미령이의 화려한 발차기와 칼부림(비록 미수에 그치긴 했어도)에는 태연했지만 소령이의 오빠 어택 한 방에 극심한 타격을(?) 받은 나는, 녀석이 자기 가방 중 하나에서 지난번에 보았던 노트북을 꺼내고 있는 걸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이건… 나의 몽몽 3호!”
“…뭐?”
소령이의 말에 조금 전까지의 기분이 후욱-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언니가 자기 노트북에 붙인 애칭이에요.”
그 정도는 미령이 네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안다.
소령이가 자기 노트북에 어떤 애칭을 붙여 부르건 상관없지만… 하필 몽몽이라니…? 몽몽…! 내가 어릴 적 종류를 알 수 없는 동물인형에 무심코 붙였었던… 그리고 지금은 까마득한 미래에서 날아온 미래 인공 지능 로봇의 애칭이자 코드명…! 우연의 일치…? 하지만 그게… 그렇게 흔한 이름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