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2-3화 : 비밀결사 자취생(3)
2-3. 비밀결사 자취생(3)
노트북… 어쨌든 몽몽3호라는 걸 켜서는 사진 파일을 열어 보여주기 시작한 소령이. 녀석은 자기 집에 찾아 온 친구에게 자신의 앨범을 보여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고, 대부분이 금동이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다. 금동이와 소령이 둘 다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게 나오긴 한 거 같긴 하지만…
“이거……”
내가 노트북을 가리키며 입을 열자 소령이는 배시시 웃으며 화면 넘기는 것을 멈추었다.
“작년 겨울에 찍은 거. 금동이가 너무 예쁘게 나왔어! 그쵸?”
과연… 때마침 녀석이 자랑스러워 할 만큼 잘 나온 사진이 떠있었군. 어딘지 몰라도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금동이 녀석뿐만 아니라 소령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는 모습이 꼭 두 마리의 어린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다.
“그래, 예쁘구나 둘 다……”
“후후~ 금동이가 더 예뻐.”
“…근데, 너의 이 노트북은 언제부터… 음, 왜 그런 이름을 붙였니?”
“몽몽 3호? 그야 세 번째 몽몽이니까 그렇죠.”
“아니, 그러니까. 몽몽이란 이름 자체가 뭔가… 노트북에는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아서……”
돌려 묻는다고 한 것이 오히려 실수였을까…? 소령이는 조금 샐쭉한 표정이 되어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빠도 이상해요…? 난 그 이름이 제일 좋은데……”
“아니, 그게 아니라!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그게, 나도 오히려 그 이름 무지 좋아하거든! 실은 나도 어릴 적에 금동이처럼 털 복숭이 인형에… 아니 금동이와는 많이 다르지만 하여간… 인형에 그 이름을 붙인 적이 있거든. 한국에서는 귀여운 강아지를 그렇게 부르는 경우도……”
애써 변명하듯 덧붙이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령이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며 숨가쁘게(?) 반문했다.
“정말? 정말 오빠도 몽몽이란 이름이 좋아요?”
“어… 정말이야.”
“오빠 인형에도 같은 이름을 붙였다고요?”
“…그래. 어릴 때 잠깐 이었지만……”
소령이는 이제야 동지를 만났다는 듯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지만, 그 사이 우리 옆으로 다가와 선 미령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네요. 전설의 인물께서 실은 여자애처럼 인형에 이름을 붙이며 노는 남자였다니……”
“야~! 어릴 때 잠깐 이랬잖아. 그 때도 인형을 가지고 논 것이 아니라 그냥 집에 장식된 인형일 뿐… 아니, 그보다 미령이 너! 계속 날 비꼬는데… 대체 불만이 뭐냐?”
“불만이요? 그런 거 없어요. 다만 다들… 언니는 그렇다 치고, 항상 모든 일에 철저했던 챈까지 어제 처음 만난 남자를 간단히 ‘전설의 인물’이라 인정하고 고개 숙이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것 뿐.”
“…넌 날 인정할 수 없다는 거구나.”
“…그래요.”
“뭐, 나도 너에게 딱히 인정받을 생각은 없다만… 암튼, 지금은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지금은…? 그럼 나중에는 나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의 근거를 보여 줄 수 있다는 말인가요?”
“굳이 내가 보여 준다기보다… 너희들이 내 주위에 있는 이상 원하든 원치 않든 보여질지도 모르지. 너희들도 명색이 정보 전문가 아니냐.”
“…말해두지만, 난 이번 일을 더 이상 오래 끌 생각 없어요.”
“나도 말해두지만! 어떤 식으로든… 누구도 다쳐서는 안 돼!”
“물론 그런 일은 나도 원치 않아요. 하지만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 훗~! 설마 정당방위조차 금지하시는 건 아니겠죠?”
“미령이 너 정말……”
제길…! 원판 녀석 일만 해도 스팀 받고, 골치 아픈 일이 차고 넘칠 것 같은데 이 녀석까지 이렇게 나오면…
“우~ 그만해, 그만!”
소령이 녀석이 조금 목소리를 높이며 끼어 들었다.
“왜 그러는데? 응? 왜 싸우는 건데?”
지극히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 소령이는 미령이와 날 번갈아 지긋이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 다 자꾸 이러면… 이번엔 내가 화낸다?”
“언니, 난 그저……”
응…? 소령이의 어린애 같은 협박(?)에 미령이가 갑자기 기가 죽는 걸? 호오~ 예나 지금이나 단순 순딩이인 듯한 소령이도 화를 내면 무서운 구석이 있는 모양이지?
“어, 나도 뭐 별로 싸우자는 건 아니었어.”
일단 나도 한 발 빼고…
“실은 소령아. 난 미령이와도 친하고 싶단다. 근데 저렇게 사나우니… 네 동생 남자친구 없지?”
“응? 그야 미령이는 남자를 싫어해서… 하지만 한 사람에게만은……”
“언닛!”
“아, 미안! 말 안 할게.”
다시 입장 역전… 이번엔 미령이가 발끈했고 소령이가 사과해야 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소령이는 사과를 하는 한편 짓궂은 표정이 남아 있었고 미령이는 눈에 띄게 당황하여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절대 말 안 한데도?”
“아, 알았어, 언니. 그리고… 우린 이제 짐 정리를 마쳐야 해요.”
미령이의 뒷말은 내게 한 거고… 우회적인 축객령인 셈이다. 아무래도 지금은 이쯤에서 물러나…려고 했더니만, 소령이 녀석이 내 팔을 잡는군.
“짐 정리는 천천히 해도 돼.”
“언니~!”
미령이는 더욱 눈살을 찌푸리며 소령이를 노려보았지만, 소령이는 좀처럼 고집을 꺾으려 들지 않았다.
“오빠는 아직 몇 장 보지도 않았는 걸?”
“사진 보여주는 게 뭐가 그리 급하다고… 하아~ 알았어 언니. 맘대로 해.”
짐짓 신경질적인 말투로 내뱉으며 물러났지만, 녀석도 말하는 도중 뭔가 깨달은 것 같았다. 소령이는 다시 열심히 금동이와 자기 자매들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신나게 설명까지 곁들이기 시작했고… 나도 비로소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소령이는 소령이 나름대로 절실하게 나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금동이를 돌려달라고… 말이다.
사실… 난 소령이가 어린아이처럼 직접적으로 투정을 부리고 영악한 미령이가 지 언니를 컨트롤하며 나나 하은이에게 협상을 해 오는… 그런 상황 전개를 예상했었다. 근데 어째 정반대의 양상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미령이는 하은이도 아닌 나에게까지 이렇게 호전적으로 시비를 걸어오고 오히려 소령이가 나름대로 고등 외교전술(?)을 펼쳐올 줄은…
으음~ 그리고 소령이와 금동이가 다정하게 찍은 사진들을 계속 보고 있자니 확실히 마음이 약해지는군.
하은이도 순간적인 변덕으로 금동이를 데리고 다니는 건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음… 아무래도 여러모로 하은이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려 하는군. 난 심판으로서 공정해야 하지만… 솔직히 난 귀여움에 약한 타입이라… 응? 뭐야?
“아, 이건……”
비교적 시간을 두고 사진을 넘기던 소령이는 어느 순간 당황하며 재빨리 화면을 넘겨 버렸다.
“언닛! 그런 사진까지 남을 보여주면 어떻게!”
조금 떨어져 서서 안 그런 척하면서도 계속 관심 있게 지켜보던 미령이가 빼액 소리를 질렀고, 소령이 녀석도 이번에는 얼굴을 붉히며 쑥쓰러워한다. 금방 다른 사진으로 넘어가 버리긴 했지만, 그 전에 띄웠던 사진은 어딘가의 온천에서 찍은 것으로 보였는데… 금동이야 당연한 거지만 소령이와 미령이까지 원초적인 모습의…
“크흠~! 음… 뭐, 온천 수증기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사진인 것 같은데 뭘… 아니, 그보다 난 니네들처럼 애들한테는 관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에구… 어색해진 분위기를 넘기기에는 적당한 대사가 아니었나…? 소령이 녀석까지 불쾌한 표정이 되는 거 보니… 음, 하지만 소령이 알몸 정도야 옛날에 안고 잔 적까지 있었어도 아무 일 없었다. 물론 그 때문에 혼자 벽에 머리 박으며 생쇼를 하긴 했지만…
“우리 이젠 어린애 아닌데……”
“응……?”
소령이 녀석… 다른 디렉토리를 열어 검색하는 폼이, 지들이 어린애가 아니라는 증거 사진을 찾는 것 같다.
그러자 미령이 녀석이 달려들어 아예 노트북 전원까지 꺼버리는군. 그리고는 날 ‘이런 음흉한 놈팽이 같으니!’라는 눈빛으로 노려보기 시작한다. 물론 내가 무심결에 고개를 더 내밀고 관심을 표명한 건 인정하지만… 에… 그건 그냥 단지 호기심… 순수한 궁금증이었을 뿐인데… 음, 억울한 건 억울한 거고… 벌쭘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다른 얘기… 사실은 현재 가장 궁금한 건이나 또 꺼내 보기로 할까?
“음~ 소령아, 니 노트북 이름 말인데, 너도 나처럼 그냥 무심코… 우연히 만든 이름이니?”
“아뇨. 실은……”
…쯧! 실은…까지는 쉽게 나왔는데 문득 입을 다물고만다. 그 대신 뜻밖에 미령이가 웃음을 앞세워 고발(?)해 온다.
“후후~ 실은 언니가 언니의 왕자님과 만날 증표래요.”
“뭐?”
“야아~! 안돼!”
소령이가 다급하게 소리를 치는 바람에 입을 다물… 었다기보다, 미령이 녀석은 처음부터 거기까지만 말할 생각이었던 눈치였다.
“훗~! 알았어, 언니. 나도 말 안 할 게.”
“치이- 미령이 너……”
나로서는 두 자매의 보복성 폭로전이 더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눈치를 보니 자연적으로는 그럴 것 같지는 않군. 내가 옆에서 어떻게 잘 부추기면… 쳇! 그건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어머니께서 녀석들에게 줄 과일 접시를 들고 오셨으니…
‘어리지만 그래도 웬만큼(?) 큰 처자들’ 방에 아예 자리 잡고 앉아 있는 나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다소 불안해하는 시선 때문에 나는 일단 어머니와 함께 녀석들 방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친해진 거니? 넌 전에는 여자 앞에서 영 숫기가 없더니… 군대 갔다 오더니 이런 것까지 변했네?”
“나참~! 군대 문제가 아니라,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사실 나도 어머니 말씀처럼 여자 애들 앞에서는 무조건 맥을 못 추던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환경적으로 또래 여자 애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던… 그러니까 남녀공학이 아닌 중학교 다닐 때 정도였을 뿐이었는데… 그 동안 식구들 앞에서 너무 내숭을 떨었었나?
“그리고… 쟤들은 여자라기보다는 애들이잖아요, 애들.”
문득 ‘우리 이제 어린애 아닌데…’라던 소령이의 주장이 떠올랐지만 지금도, 앞으로도 무시하기로 했다.
“하긴… 그런데 얘! 저 아이들, 무슨 애들이 보면 볼수록 인형 같니 그래.”
3층으로 돌아오신 후에도 계속 얘기를 꺼내며 연신 감탄하시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께는 두 녀석이 거의 금동이 수준으로 신기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두 녀석의 삼촌이라 자처하며 방 계약을 대신한 챈… 아니 그를 가장한 G.M. 요원에게도 상당히 좋은 인상을 받으신 모양이었다. 젊은이가 아주 점잖더라, 깍듯하다, 예의 바르다… 그런 표현이 주로 쓰이고 있었다. 사실 우리 집 방들이 노는 경우가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은근히 까다롭게 입주자를 선택하기 때문인데… G.M. 녀석들은 역시 수단이 좋은 모양이다.
그거야 어쨌든… 저 두 녀석이 쳐들어 온 이상 대교에게 가는 일은 또 미뤄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하은이 녀석이 돌아 온 후 상황 돌아가는 걸 확인해야 하니……
내 방으로 돌아간 나는 원판 녀석에게 하은이에 대해 묻는 메시지를 보냈고, 그 사이 요정 몽이 호릉-모습을 나타내며 입을 열었다.
[ 주인니임! 그냥, 무심코, 우연히… 정말 그렇게 정하신 거예요, 몽몽 오빠 이름? ]
<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는 난 본래 작고 귀여운 녀석들에게는 그런 이름을 붙이곤 해서…… >
[ 우~ 너무하세요. 너무 성의가 없으셨던 거 아닌가요? 덕분에 제 이름까지…… ]
< 전에 이미 얘기해 줬던 것 같은데 새삼스럽긴… 불만이면 니들 마음대로 바꿔도 좋아. >
[ 정말요? 으음… 그럼…… ]
[ 전 괜찮습니다. 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좋습니다. ]
< 에… 몽몽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 어때 더 미안해진다. 아, 그리고 넌 어떻게 생각하냐? 소령이의 노트북 이름…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니? >
[ 몽이란 단어의 연속 사용 발음에 대한 인간의 선호도로 보아 우연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님과 저희들이 현재 처한 상황에서는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
< 아무래도… 그렇지? 난 사실 소령이가 몽몽3호 어쩌고 했을 때부터… 음, 일단 원판 생각이 먼저 나더라. >
[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경우, 주인님 외에 저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언급하신 인물뿐이므로 이미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
< 만약 그렇다면…… >
나는 새삼 창가 쪽을 바라보며(녀석들의 방이 바로 내 방 아래다) 나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 저 녀석들… 지금은 일단 소령이 만이라고 치고… 왕자님이라… 대체 원판은 소령이를 어떻게 찾아내어 어떤 의도로 무슨 말을 했었던 걸까? >
[ …너무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주인님. 저의 판단으로는… 현재 주인님께 가장 유리한 요소는 적이 ‘시간 제한’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
< 그래… 그건 그렇지. 근데 문제는 그런 요소가 달랑 그거 하나인 것 같다는 거다. 물론 대교를 인질에서 제외시킬 수 있었던 것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빌어먹을 게임과 대교 지킴이 노릇을 병행하는 게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가능할지…… >
어떤 면에서는 대교를 인질에서 제외시키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질은 어디까지나 안전할 때나 인질… 즉, 그럴 경우 짝퉁 여자사갈(?) 여옥 정도의 위협은 원판이 알아서 막아 줄… 아니, 어쩌면 이미 지금까지 그래 왔으려나…? 확실히 대교에게 있어서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호막일지도……
< …쯧! 하지만 역시 싫어. >
[ 예? ]
< 아, 아니다. 그냥…… >
그래.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해도 그런 녀석을 믿고 대교의 안전을 맡길 수는 없다. 여옥 따위와는 비교도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그 녀석… 독을 독으로 제압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다. 게다가 그 놈도 어쩌면……
< …어쨌든, 몽몽. 네 말대로 너무 초조해 하지 않도록 할게. 이제 겨우 시작이고… 훗~! 어찌 보면 타임 씨라는 밑도 끝도 없는 대상을 상대로 싸우겠다고 할 때보다는 나은 건지도 모르고 말야. >
[ 그런 긍정적인 사고 흐름이 상황에 더 도움이… 아, 원판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
내가 보낸 메시지의 답장이었다. 하은이는 저녁 식사시간 전까지 돌려보내겠다는… 마치 여동생이 놀러간 친구 집 부모님이 보낸 것 같은 내용이었다. 나 역시 ‘우리 애 일찍 좀 집에 돌려보내라’는 메시지를 보낼까도 했지만, 현재 적대관계인 비밀결사 요원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므로… 더 하은이를 재촉하게 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메시지 보내는 걸 그만둔 나는 다시 거실로 나와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 이따가 저녁 먹고 말이죠. 저… 밤 마실 나갈 거거든요. 그러니까 도시락 좀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