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4-2화 : 꿈속의 남자.(2)
2-5. 꿈속의 남자.(2)
으~ 으… 진정하자. 진정해, 진유준! 새삼 타임씨를 원망해도 소용이 없잖은가. 생각해 보면… 꿈속에서 내 얼굴을 보았다면 지금까지 모른 척 했을 리가 없다.
흥분해서 지래 짐작한 니가 너무 성급했던 거다.
“아니… 보았을 지도……”
윽~! 대교 너까지 날 애태워 죽이려고 작정을 한 거냐?
“이상하죠?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렸을 때는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사람 얼굴이 생각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음……”
대교는 아련한 표정으로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 같았지만 결국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하아~ 모르겠어요. 제가 왜 어렸을 때 그런 꿈을 반복해서 꾸어야 했는지… 어째서 언제부터인가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없게 된 건지……”
꿈을 꾸어도 얼굴만 나오지 않는 건 최근 일이고, 어렸을 때는 내 얼굴까지 보았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차츰 날… 잊어가고 있다는 얘기……?
“진유준씨!”
새삼 또렷하게 날 부른 대교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내게로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전 당신의 그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얘기를 흘려 들을 수가 없었어요. 저의 꿈… 지금의 제가 있게 한 그 꿈… 저 역시 그게 제 전생의 기억이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아…! 그런가…? 아까 대교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던 ‘꿈’이란 단순히 장래를 꿈꾼다고 할 때의 꿈이 아니라, 지금 말한 이 꿈…! 날 위해 노래하던 그 기억을 말한 거였나? 그렇다면… 그녀가 자신의 노래로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하려는 대상은 그 수많은 팬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던… 거야.>
“그렇지 않아요!”
내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춘 대교는 새삼 안타깝게 내 모습을 살피고 또 살폈다.
“아니… 아니,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제 꿈속의 그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전 왜 기억해 내지 못하는 거죠?”
<나와 달리… 대교 너에겐… 너무나 오랜 세월이었으니까.>
내 말에 대교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 어떤 현실에서도! 심지어 저 자신의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었다면!”
갑자기 격하게 외치기 시작한 대교의 모습 위로 천년 전의 그녀가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그게… 그게 당신을 향한 마음이었다면…!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맙… 소… 사!
<서, 설마… 그래서… 날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거야? 네가…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으니까……?>
대교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천년 전의 대교는 그래서 그때 진의 손을 놓을 수 있었던 거였구나. 천년 후의 이 시대에 나 혼자 보낼 각오를 할 수 있었던 건… 그 아득한 세월이 흐른 후에도 날 기억하고 있을 수 있다는… 그 정도로 자신의 마음, 나에 대한 사랑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대교… 넌……>
“만약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뭔가 잘못되었어요. 천년 전의 그 소녀가 사랑했던 사람이 당신이 아니거나……”
<말도 안돼!>
“아니면 그 소녀의 마음이 조금 부족했었거나……”
<그 것도 아니얏! 누구라도! 누구라도… 그 정도로 기나긴 세월이라면, 잊을 수도 있어. 난 결코 그걸 원망하거나 하지 않아. 오히려 잘못은 내가 한 거야. 널 그렇게 지내도록 두고 온 내가……>
왜… 고개를 젖는 거냐? 널 데려오지 못한 나보다 내 얼굴을 잊은 네가 더 잘못된 거라는 거냐? 이…
이 터무니없는 여자 같으니!
빌어먹을…! 어떻게… 더 어떻게 설명하지? 어떻게 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직한 녀석에게 ‘넌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하지?
“전… 당신이 사랑했던 그 소녀가 아닐 거예요. 그분 말처럼 그녀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은……”
<뭐?>
그분…? 그분이 뭐가 어째…?
대교의 입에서 나온 ‘그 분’이란 호칭이 불길하고 끈적하게 내 의식에 들러붙는 기분이었다.
<설마… 화이트 크라우드! 그 자를 말하는 건가?>
따로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대교의 표정이 이미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모든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나는… 어째서 오늘 원판에게 대교를 인질로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으로 안심을 하고 말았을까…? 어째서 원판이 대교를 그대로 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나는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안이하게……
[주인님!]
<난… 괜찮아, 몽몽. 괜찮다구!>
괜찮을 리가 없었다. 난 몽몽이 우려할 정도로 들끓어 오르는 심기를 제어하려 애쓰며 간신히 대교에게 전음을 보내야 했다.
<올 여름 DP의 홍콩 지사 오픈 파티… 대교, 넌 그날 처음 화이트 크라우드를 만난 게 아니지?>
“…그래요. 크라우드씨에게 듣지 못했나요? 제가 그 분을 처음 만나 건 이미 13년 전이나 전의 일인데……”
13년 전…! 그리고 대교의 기억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사라져버렸다는 내 얼굴…! 원판… 원판, 너어-!
“…미안해요, 진유준씨. 전……”
<그만해! 더 이상 말하지 마!>
나는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웃어 보였다.
<넌… 결코 날 잊고 싶어서 잊은 게 아닐 거야. 그러니까… 다시 기억하게 해 줄게. 다시 생각나게 해 줄게! 알겠어?>
“그, 그건……”
대교가 더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어 천잠사를 잡았다. 천잠사를 거칠게 잡아당김과 동시에 경공을 발동하기 시작했고, 대교 앞에서 떠나기가 무섭게 단숨에 호텔 옥상까지 달려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즉시 몽몽이 원판에게 전화를 걸도록 했다.
“…아, 진유준님?”
먼저 전화를 받은 것은 비취각주의 대리 격인 란이라는 여자였다.
“마스터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만……”
“바꿔.”
“진유준님. 무슨 일이신지 저에게……”
“잔말 말고, 당장 바꿔!”
놈이 자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 들려 온 녀석의 음성에는 정말로 나른한 잠 기운이 섞여 있었다.
“으음~ 무슨 일이지, 이 시간에……?”
“너지!”
“음… 대체 무슨……”
“너지 이 새꺄! 네가 대교의 꿈을! 기억을 건드렸지?”
멈칫하는 기색이 있은 후,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 그 얘기였군.”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잊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훗~! 벌써 대교와 과거 얘기를 나눈 건가? 뜻밖이군. 그 아이에게만은 더 조심스럽게 접근할 줄 알았는데……”
“닥치고, 확실하게 대답이나 해! 네가… 대교의 꿈속에서 내 모습을 지운 거지?”
“그게… 당신의 모습이라고 확신하는 건가?”
“뭐?”
“생각해 봐. 당신은 대교에게 누구의 모습을 더 오래 보여 주었지? 아니, 그 전에 대교의 첫사랑은… 누구였지?”
원판의 말이 뜨겁게 달군 비수처럼 내 몸을 파고들어 비집고 헤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그녀의 기억에 관여한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게 누구를 위해서였을 것 같은가?”
이 자식은 지금… 날 위해서 대교가 꿈속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대교는… 그녀의 진심은……?
“미, 믿을 수 없어.”
“후후~ 그 어떤 진실도 상관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당신과 그녀 사이에는 나라는… 원판이라는 존재가 있었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나는… 생전 처음으로 힘없이… 사람이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진정한 마음은… 내가 아닌 원판에게 있었다는 건가…? 과거에도… 지금도 여전히……?
“아, 그리고 말야. 다음에는 아무리 궁금한 점이 있어도 이런 시간에는 연락을 삼가 해 줘. 난… 단잠을 깨우는 사람이 가장 싫어.”
삑…! 얄밉도록 단조로운 전자음과 함께 전화가 끊겼고, 난 그 후로도 오래도록 몸을 일으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비화곡에서 시작된 대교와의 만남… 그리고 지금까지의 일들… 내가 대교와 함께 했던 그 모든 시간이 원판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허무하게 날려 사라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