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4-4화 : 꿈속의 남자.(4)
2-5. 꿈속의 남자.(4)
블러디 울프 개개인의 전투력도 만만치 않은데 그들이 진법까지 갖추어 공격해 온다면 내 쪽의 승산은 더더욱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란의
‘게임을 벌써 끝내려 드는 거냐’
는 발언은 이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몽몽. 보조화면 꺼.>
[예?]
드물게 몽몽이 반문했지만, 나는 거듭 명령을 내려 몽몽이 보여주던 혈재진의 구성과 예상 흐름도를 사라지게 했다. 혼자 차분히 연구할 때는 몰라도 실전에서 그런 걸 일일이 보면서 싸울 수는 없을 것 같았고, 혈재진 연구라면 비화곡 시절에 이미 꽤나 열심히 해 뒀었다. 그때는 나름대로 실감나는 원판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보다-!
“뭔가… 달라.”
나는 그렇게 말하며 놈들의 혈재진 앞으로 먼저 다가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좌우로 퍼지며 학익진이 연상되는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는 놈들의 움직임과 각자가 점하고 있는 방위… 그리고 이후 이어질 공격 루트와 방어 형태… 모든 것이 몽몽이 분석해 주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명확하게 느껴졌다.
소위 교과서적이다…라고 할까? 정밀 기계의 부품들처럼 빈틈없고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게 블러디 울프가 펼치는 혈재진의 약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진짜 혈랑대는 달랐다. 저렇게 자기 위치와 의무만을 판에 박힌 듯 훈련한 느낌을 주지 않았기에 그들이 펼치는 혈재진은 훤히 보이는데도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이 펼치는 진은… 사람처럼 살아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블러디 울프 병력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자신들 마스터의 지론을 내 입으로 들어서 인 것 같지만, 이런 틈도 그냥 넘길 내가 아니다.
이형환위(以形換位)!
이 신법을 펼칠 때 내 귀에는 마치 빨대로 비눗물을 불어 방울을 만들어 내는 것 같은 후루루루룽~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적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다만 내 움직임에 따라 분신이 환상처럼 수십 개로 나뉘어지는 것만을 목격하게 된다고 했던가?
블러디 울프들은 내가 펼치는 이형환위에 두 번째로 순간적인 반응유보 상태로 들어갔다. 그건 불과 0.5초나 될까 싶은 찰나였지만, 지금의 내가 진의 중심부로 뛰어들며 삼시전결을 날리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퍽!퍽!퍽!
동시에 울린 참격음과 함께 세 줄기의 선혈이 터져 나왔고, 움직이고 있으나 죽어있던 진은 그로써 제대로 발동 한 번 못한 채 와해되기 시작했다. 레건 중위의 검은 얼굴이 일그러지며 괴성과 함께 단독으로 돌진해 왔다. 차라리 그의 거칠고 무모해 보이는 공격이 겉만 번지르르했던 짝퉁 혈재진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무모한 건 무모한 거다. 나는 간단히 레건 중위의 대검을 막아내고 그의 손목을 그었다.
그는 그래도 기가 죽지 않고 검을 다른 손으로 바꿔 잡았고, 나는 곧바로 그의 옆구리에도 깊숙이 칼질을 해 주었다.
어떤 면에서는 마군황 시험 막바지 때보다 더 맛이 간 상태의 나…! 그런 나에게 분명히 강하지만 뭔가 부족한 블러디 울프들은 너무나 맥없이 베어지고 찍혀 쓰러져 갔다. 이런 일방적인 전개는 나도 뜻밖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쪽 벽에 설치된 또 다른 모니터에 떠오른 란의 얼굴은 더욱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요! 불과 어제까지의 당신 전투력은 결코… 결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죠?”
“그 땐 내가 이런 기분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간단히 란의 의문에 답해 주고는, 자신들의 이름 그대로 전원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블러디 울프들 사이를 통과해 걸어갔다. 광장 끝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잠깐 걸음을 멈추고 놈들에게 말했다.
“신체 강화 인간 제군들…! 시대를 초월한 생체과학의 산물답게… 당장 죽지만 않으면 알아서 회복할 거라고 믿겠어.”
“그건……”
란이 대신 뭐라 입을 열려 하기에 이번에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아님… 말고.”
“…진유준님. 정말… 어제와 같은 분이 맞는 건가요?”
나는 더 이상 대꾸해 주지 않고 걸음을 떼어 위층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광장 급의 공간을 출입하는 통로치고는 동시에 라면 두 사람도 겨우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좌우 폭이 협소한 계단이었다. 그렇게 좁은 데다 조명조차 없는 계단 끝에는 다시 금속제 문이 있었고 거기도 일단 잠겨 있지는 않았다.
[주인님!]
몽몽의 경고와 함께, 내가 막 통과한 문 어귀의 벽이 퍼억! 소리와 함께 파이며 파편을 날렸다. 그걸 슬쩍 확인한 다음 정면을 보니, 아래층과 비슷한 숫자의 혈랑대가 늘어서 있었다. 복장이나 장비도 거의 같았지만 이번에는 전원이 개인화기를 들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몸체에 소형 전자 장비가 달려있는 것도 그렇고… 나로서는 처음 보는 디자인의 소총이었다.
“블러디 울프 6중대 대장, ‘콜린’ 대위요.”
나는 선두에 서서 자기 소개를 하는 흑인 남자를 무시한 채, 재빨리 전체 상황을 살폈다.
27층과 달리 28층은 복도와 문으로 위장하는 것도 생략해 버렸는지, 보다 넓은 공간이었으며 구조 자체의 의미가 달랐다. 처음부터 협소한 통로를 통과해야만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입구로부터 절반 이상 떨어진… 내가 경공을 최대치로 쓴다 해도 최소 1-2초는 걸릴 만한 거리의 지점부터 두껍게 돌출된 구조물들로 진지가 구축되어 있으며 양쪽 벽에도 기둥 같은 것이 늘어선 것도 본래의 용도보다는 엄폐물로 쓰여지기 위한 것 같았다.
즉, 이곳은 처음부터 화력전을 대비한 장소인 것이다. 물론 방어 쪽에 철저히 유리하게끔 말이다.
“우리도 이곳에서 봤지만……”
다시 입을 연 콜린 대위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그쪽 벽에도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고 아래층의 상황이 그대로 중계되고 있었다.
“마스터께서 말씀하신 대로의 인물… 아니, 괴물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근접 살상을 위주로 한 특수전능력은 7중대보다 우리 6중대가 한 수위…! 그래서 처음엔 미스 란에게 27층 사수를 우리에게 맡길 것을 요구했었지. 하지만… 그랬다면 크게 후회할 뻔했군. 이 세상에 괴물은 도홍 대령님과 론 중령님뿐이라 생각했는데……”
콜린 대위는 씁쓸하게 웃으며 한 손을 들었고, 그의 수신호에 따라 6중대 병력들이 일제히 엄폐물 뒤로 몸을 숨기고는 내 쪽으로 총구를 집중시켰다. 현대로 돌아온 이상, 아니 돌아오기 전부터도 난 이런 전개까지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내 쪽에서의 선재 기습도 아니고 이미 은폐 엄폐한 상태로 날 노리고 있는 저 총구들을 상대로… 내가 어디까지 해 낼 수 있을까……?
[ 주인님! 더 이상은 감정대로 행동해선 안됩니다! ]
몽몽과 요정 몽이 동시에 나타나 양팔을 벌리고 막아섰다.
< 아니… 지금이야말로 실전에서… ‘그걸’ 해 볼 때야. >
[ 그만두십시오! 그건 아직 이론에 불과할 뿐 실전에서 적용되기 어렵습니다. 주인님 역시 알고 계시잖습니까! ]
< 그래… 아직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지. >
무림을 떠나기 전부터도 나와 몽몽은 현대전을 대비해 왔다. 현대로 돌아와서까지 무림에서처럼 싸우는 생활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처음에는 단순히 흥미 거리로써, 그리고 대교를 데려오지 못했을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현대전에 대한 대비라면, 당연히 나 자신도 현대 무기로 무장하고 훈련하는 게 기본일 것이다. 명색이 특공병 출신이라고 무기만 있으면 특별한 추가 훈련 없이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쪽 훈련에는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었지만… 대신, 적과 달리 무장하고 있지 못할 때를 대비한 훈련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떻게 하면 맨몸으로 적의 총격을 피해 반격할 수 있는가’, 이게 기본 목적이지만…
물론 말처럼 간단하고 쉬울 리가 없었고, 무엇보다 먼저 필요했던 건 그 목적을 위한 새로운 무공의 탄생이었다.
야전과 실내, 상대 병력의 전투력과 심리 상태… 여하간의 모든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총격전의 예상되는 총격 루트와 회피 포인트, 타이밍 등등을 계산하여 하나의 무공처럼 정립하는 것…! 내가 어렸을 때 봤던 만화와 최근의 어떤 영화에도 비슷한 설정의 무술이 등장한다. 물론… 현실에서 그런 환상의 무술을 만들어낸다는 건 내가 본 만화 속의 천재 무술가들이나 영화 속의 시스템 이상의 슈퍼컴퓨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내게는 이미 몽몽이라는 더 환상의 아이템이 존재하므로 그런 목적의 무공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는 가능했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의 총격전 분석이란 전제 조건에는 모순이 있으니, ‘모든’이란 말이 어차피 불가능한 개념이란 점이다. 따라서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무공일 수밖에 없고…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걸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가… 아니, ‘사용할 의지가 있는가’였다.
[ 대교 님의 기억은… 아직 진실을 확실히 알게 된 건 아니잖습니까. 부디 진정해 주십시오! ]
< …몽몽. 대교의 꿈속 남자가 누구건… 그건 원판 말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지 몰라. 하지만… 원판 그 놈이 대교의 기억을 건드린 건 용서할 수가 없어. 내가 물러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
나는 내가 잠시 멈춰 있는 동안 고맙게도 대기 상태로 있어 주고 있는 콜린 대위와 그 수하 병력들을 새삼 돌아보았다.
“여기서, 이 정도로 멈추거나 돌아가야 한다면 말야… 저 원판 녀석에게 끝까지 끌려 다니게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야. 그럼 앞으로도 대교와… 그녀의 기억을 지켜 줄 수가 없잖아.”
그래… 난 지켜 주고 싶다. 대교의 기억… 꿈속의 남자가 설사 내가 아니라 하더라도… 난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꿈을 온전히 지켜 주어야 한다. 내가 그녀의 꿈속에 들어가는 건 그다음의 일……
결심을 굳힌 나는, 천천히 어깨 위로부터 정글도를 들어 다시 팔과 함께 아래로 내려 트렸다. 아직 단순한 자세 변화일 뿐이었지만, 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 병력들의 긴장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적의 긴장이나 동요… 그런 요소들에 대한 감지가 ‘그런 것 같다’를 넘어 확실히 보이기 시작한다는 건… 내 감각이 극한까지 끌어 올려졌다는 증거…! 그리고 그건 내 육체와 정신의 밑바닥부터 죽음을 실감하기 시작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