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5-1화 : 진화 혹은 각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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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15-1화 : 진화 혹은 각성.(1)


수집 가능한 이 시대의 모든 총격전과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내가 겪어 온 전투 데이터, 수많은 무공의 원리까지 총동원하여 몽몽이 만들어 낸… 아니, 아직 미완성이라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무공……

나는 그동안 이 무명의 무공을 틈나는 대로 반복 수련하여 몸에 익혀 왔다. 그러나 그래 봐야 고작 두어 달 정도의 수련이었을 뿐이었고, 실전급의 가상현실 속에서 아직 단 한 번도 살아남지 못했었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이… 죽음에 대한 느낌……

“콜린 대위…! 기다려 준 건가?”

왜인지 씨익- 지어지는 웃음과 함께 묻자 콜린 대위는 꿀꺽 마른침을 삼킨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우리 블러디 울프가 저항하지도 않는 상대를 공격한 경우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는 말은 행동으로, 그의 내려트려져 있던 총구가 재빨리 들리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팽팽했던 감정의 폭발치고는 지극히 정확하게 겨냥되는 총구의 움직임이 멈춰질 때까지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겨냥과 동시에 움직인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고 공이가 튀어나가 탄환을 발사시키는 과정… 보일 리도 들릴 리도 없는 일들이 거짓말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뒤로 몸을 젖히며 회전시키기 시작했고, 공기를 가르고 작은 폭풍을 일으키며 날아든 총탄이 굉음과 함께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직후, 회전을 계속한 내 몸은 거꾸로 뒤집힌 상태에서 뒤로 날았다. 들어왔던 문 바로 옆의 벽을 발로 짚는 순간, 두 번째 총탄이 그 옆의 시멘트를 파고들었다. 아랑곳없이 벽을 박차고 콜린 대위 쪽으로 몸을 날린 나는 계산된 순간의 허공에서 정글도로 바닥을 쳐 궤적을 바꾸었다.

추가로 발사된 두 발의 총탄이 내가 ‘있었던’ 허공만을 가르고 지나간 직후 찰칵~ 콜린 대위의 총이 점사에서 연사로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중대 공격! 공격~!”

뒤늦은 명령이었다. 그는 애초에 혼자 앞에 나서지 말고 부하들 뒤에 숨어서 지휘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고, 지금은 이미 온몸이 내 공격권에 든 상태이다. 나는 그의 총구가 연사로 불을 뿜기 직전, 먼저 발로 그 총구를 바깥 방향으로 걷어찼다. 총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총이 소유자의 손가락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손가락이 꺾여지는 걸 노린 일격이었다. 여기서 나의 작은 계산 미스는 상대가 일반 병사가 아니었다는 사실…! 내 발에 차여 패엑 젖혀지던 총은 그의 강인한 손가락과 손목의 파워에 막혀 멈추었고 결국 그의 총구 방향이 조금 바뀌었을 뿐인 셈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아직 내, 아니 몽몽의 계산 안쪽.

강하게 밀려나는 총을 잡고 버텼으나, 그러기 위해 한쪽으로 쏠린 콜린 대위의 신체 반대편으로 착지함과 동시에 나의 오른손은 그의 왼쪽 어깨, 왼손은 반대편 옆구리의 탄띠를 잡았다. 중심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내 금나수에 잡혀 버리긴 했지만 그의 완력은 엄청나서, 즉시 강렬한 움직임으로 뿌리치기를 시도하는 한편, 그의 총 개머리판이 내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과연 근접 전투에 자신감을 보일 만했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런 상황 역시 우리의 신(新)무공 범위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나는 머리를 숙여 개머리판을 피함과 동시에 그의 주위를 돌 듯 보법을 밟았다. 그의 허리와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가하며 엄지로 각각의 급소를 누르며 보법의 속도를 높이자 그의 완강한 육체도 더 견디지 못하고 내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맞붙어 얽혀 춤추듯 회전하면서도 목적했던 포인트로 이동하자 그제야 콜린이 내 의도를 알아채고 갈등의 빛을 떠올렸다.

전원 공격의 명령은 벌써부터 내려진 상태지만, 그때부터 나와 그의 몸이 계속 엉겨 붙은 채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아무도 섣불리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상관하지 말고 함께 쏴버리라는 명령을 추가로 내려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러던 그가 문득 뭔가를 깨닫고 입을 열었다.

“다, 당신 칼은……?”

나는 대답 대신 다시 씨익- 웃어 주었고, 콜린은 설마… 하는 표정이 되어 눈동자를 자신의 부하들 쪽으로 돌렸다. 조금 전 콜린의 총을 걷어차는 순간 적들의 머리와 진지 너머로 날려버렸던 내 정글도는 허공에서 부메랑처럼 커다란 반원의 궤적을 그리며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뒤다! 피햇!”

콜린이 고함소리로 경고했을 때에야 블러디 울프 병력들은 자신들의 뒤통수 쪽으로 날아드는 내 정글도를 발견했다. 맹렬하게 회전하며 진지를 스치듯 엄습하는 정글도 때문에 그 선상에 놓인 자들 세 명이 황급히 머리와 상체를 진지 안으로 감추고 있었다. 이 기습의 더 큰 성과는 순간적이나마 전원의 시선이 모두 날 떠나 있다는 점이었다. 밑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몽몽과 나의 새로운 무공은 물론, 맨몸으로도 총격전까지 제압하는 것이 기본 목표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항시 지니고 다니는 애병기 정글도 사용은 물론이고 상황에 따라 적들의 무기를 빼앗아 활용하는 기법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21세기형 무공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직전… 나는 오른손 검지 끝에 약간의 내력을 모았다. 그리고 그 사이 충실하게 방패막이가 되어 협조(?)해 준 콜린, 그의 목 뒤 마혈을 찍었다.

“정신 차렷! 난 상관 말고 쏴라!”

마혈이 제압되었음에도 고함을 지른 콜린! 그로 인해 대다수의 병력들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맙… 소사! 내가 점혈에 실수를…? 그럴 리가 없… 아! 설마, 이들의 생체 강화 과정에서 혈맥에도 뭔가 변화가……?

치명적인 변수의 발생이었다. 원인을 길게 따질 틈은 없었고, 난 즉시 콜린의 가슴에 장력을 날리고 그 반탄력으로 본래 예정된 지점으로 몸을 날렸다. 적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어대기 시작하며 무수한 총탄이 내 머리 위, 등, 무릎 옆의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다.

달라진 것은 없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쳤지만, 현실은 이미 어딘가 어긋나고 있었다.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감각은 여전했고 계속해서 이동하는 포인트와 타이밍, 어디에도 오류가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길함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이제 한 번만 더 이동하면 적의 진지 바로 앞, 나도 적과 똑같이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있는… 동등한 포인트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퍼억?!

내 몸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밀려났다.

한순간 머리 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나 자신을 비롯해 주변의 모든 흐름이 느려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오직 머리 속의 생각만이 제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맞은 것은 왼쪽 어깨뿐…? 깨끗한 관통…? 최소한의 피해다. 이 정도라면 오히려 행운에 가까운… 어…?’

몇 번째일까…? 죽음 직전에 모든 사물, 아니 시간 자체가 멈춰 버린 것만 같은 이 감각…! 적의 총구 중 하나가 내 머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확실한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카앙~!

어디선가 낯익은… 뭔가가 바위를 깨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였지 이 소리…? 왜 생각이… 아…! 적의 총이 발사되었다…! 날아든다…! 내 머리로… 나는… 피해야 하는데 내 몸은 움직여지지 않고… 어…! 손… 손인가? 내 오른손만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손바닥으로 총탄을 막을 수도 없고… 이대로… 이대로 난……’

쩡-!

벼락치는 굉음과 함께 번쩍, 정신이 들었다. 환상에서 깨어나듯 초감각의 세계에서 빠져 나온 나는, 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로 정글도의 넓은 옆면을 내세워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글도를 쥐고 있는 손바닥이 쩌릿쩌릿 울렸고, 웬일인지 적의 일제 사격이 멈춰 있었다.

나는 전후 사정을 따져 볼 것도 없이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려 본래의 목표 지점이었던 적의 진지 밑으로 피했다. 이동 후에는 총상을 입은 왼쪽 어깨가 움직여지지 않아 오른손의 정글도를 지팡이 삼아 간신히 몸을 가누고 앉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보다, 조금 전까지의 상황이 꿈을 꾼 것처럼 비현실적이고,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당사자인 나보다 더 기막혀하는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콜린이었다.

“그, 그 상황에서… 막은… 건가? 칼로… 총알을……?”

그는 내가 다급한 마음으로 날린 장력에 당한 심각한 부상으로 바로 옆의 자기 총조차 들어 올릴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지만, 그런 몸으로도 고개를 들고 내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조금 전의 상황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정글도를 날릴 때부터 그쯤으로 돌아오도록 던지기는 했었지만, 절대절명의 순간에 그런 타이밍으로 그렇게 정확하게 내 손안으로 돌아와 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더구나 바닥에 한 번 부딪쳐 튕겨 오른 후에 그랬다는 건……

어쨌든… 총알을 막아낸 정글도의 몸체, 손잡이로부터 한 뼘 정도 떨어진 부위가 조금… 패여 있었다. 말 못하는 칼에 불과한 녀석이라고 해도… 진심으로 고맙고… 그리고 미안했다. 천하제일인의 손에 들려 천하를 호령하면서도 흠집 한 번 생기지 않았다는 녀석이 나란 놈 만나는 바람에 이런 부상(?)을 입는 수모까지 당한 셈이니 말이다.

난 새삼 듬직하게 느껴지는 정글도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왼손 어깨의 혈도 몇 군데를 짚어 지혈을 했다. 강력 마취 수준으로 신경을 마비시키는 혈도 있지만 그런 혈도까지 잡아 놓을 경우 갈수록 전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약간의(?) 고통은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본래 계획대로라면 콜린의 총을 빼앗는 것으로부터 신 무공이 본격적으로 발동되었어야 했다. 그게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해 무산되고 이어 한쪽 팔까지 이 모양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다른 병력을 제압해 총을 빼앗을 수 있다 하더라도 자유롭게 두 가지 타입의 무기를 쓰기가 곤란한 상황이 된 셈이었다.

물론 총을 입수하게 되면 아쉬운 대로 정글도를 등에 메고 총을 쓰다가 이 정글도는 필요시에 다시… 음… 근데 그건 어째… 최후의 순간에 날 지켜 준 이 녀석을 경시하는 듯한… 아니, 아니… 무기 사용에 있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려나…? 하지만……

그래… 총은 고사하고, 이 정글도 없이도 총격전을 제압할 수 있는 무공이 필요하다고 했었던 건… 그건 분명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한 합리적인 대비책이다.

하지만… 현대 병기를 확보할 수 있을 때는 그걸 먼저 활용하여 정글도의 사용, 정확히 말하자면 내력의 소모를 줄이자는 생각… 내력을 마음껏 쓸 수 없는 현 상황에서 그건 분명히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안…이긴 인데… 그런데……

나는 새삼 정글도를 들어 녀석의 투박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이후… 특히 마군황에 등극할 당시의 나는 분명 이 녀석과 하나가 된 듯한 일체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음… 역시 현 시대로 돌아왔을 때부터인가…? 나는 이 녀석을… 휴대에는 너무 눈에 띄어 불편하고 사용에는 현대 병기보다 힘이 드는… 그런 어중간한 무기로 인식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때는 맨손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이용하는 싸움을 생각하고, 최적의 상황을 욕심낼 때는 현대 병기로 무장하는 걸 당연시하면서… 난 이 녀석을… 그저 생사금마도결을 펼칠 때만 필요한 칼로 여기게 되었던 건가…?

내 손의 터줏대감, 내 무공의 도구라기보다 근원, 그 자체인지도 모를 이 녀석을 난……

[ 주인님! 적의 움직임에 주목해 주십시오. ]

‘아…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몽몽. 새삼스러운 상념에 빠지게 되었다 해도 적들로부터 완전히 신경을 끄고 있는 건 아니었어. 난 지금…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중이 아닌가 말이다.’

“과연… 마스터께서 특별하게 생각하는 인물답다고… 해야겠지만……”

다시 입을 연 콜린은 ‘그래도 우리를 이길 수는 없어.’라고 말을 이었다.

자신의 부대에 대한 자신감 표출…이라기보다, 내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고 싶어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좌측 네 번째 벽에서 두 명이 두 번째 벽으로 이동, 우측 병력은 변화 없… 아, 한 명이 측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군.”

시야가 벽에 가려져 있는 건 물론이고 그 벽에서조차 등을 돌리고 있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 적들의 움직임을 정확히 짚어내자 당황한 콜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주저 앉아있는 자세에서 팔만을 들어 머리 뒤로 정글도를 휘둘러 짧은 원을 그렸다.

초인부대답게 소리도 없이 내 등 뒤 벽까지 접근했던 병사 한 명이 낮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 볼 것도 없이… 정글도를 통해 느껴지는 감촉으로 보아 총은 양단 되었고 그 주인의 몸도 상당한 깊이로 베어진 것 같았다.

철로 된 칼로 같은 철을 자르는 경지…! 지금까지도 같은 도검류를 상대로는 어느 정도 가능했었지만, 지금은 두꺼운 총의 몸체… 그런 것까지 이렇게 별다른 느낌도 없이 베어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몽몽… 우리의 대(對) 총격전용 신 무공… 너 그게 만드느라 수고한 건 아는데… 미안하지만, 그 중 적의 현대 병기를 활용하는 파트는… 당분간 빼야 할 것 같다.>

[…알겠습니다. 이유는 나중에라도……]

<뭐… 나중으로 미뤄야 할 만큼 복잡한 이유는 아니야. 그냥……>

나는 정글도를 짚고 몸을 조금 더 일으켜 두 발로 쪼그려 앉은 자세로 바꾼 다음 정글도를 다시 어깨에 걸쳤다.

<이 녀석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게 어디까지였는지… 그걸 잊고 있었던 것 같아서 말야.>

그래, 난 이 녀석으로 수천의 지하무림인 들과 싸워 그들의 정점, 마군황에 올랐었다. 화려한 생사금마도결을 펼칠 때나 내력이 바닥나 단순한 동작만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를 가리지 않고 나와 이 녀석은……

내가 기대고 있는 벽, 아니 담…? 하여간 양쪽에서 동시에 적이 튀어 나왔다. 나는 제자리에서 뒤로 뛰어올라 몸을 뒤집은 상태에서 담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날았다. 단숨에 두 개의 담을 뛰어넘어 몸을 회전시키고 착지! 조금 전의 위치를 기습하려했던 병력과 추가로 접근 중인 병력들 사이의 일시적인 사각 지대였다. 주어진 시간은 1초… 아니 그보다 조금 적다.

착지 직후, 몸을 바닥에 누인 나는 소리 없이 발을 바닥에 대고 밀어 담의 끝으로 미끄러져 갔다. 나와 담 끝이 만나는 순간 적의 군화 발이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발 앞까지 미끄러져 간 나를 발견한 놈이 흠칫 놀라서 시선과 총구를 내렸지만, 한 발 앞서 내 정글도의 섬광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며 그어졌다.

서걱! 총신과 몸이 베어지는 소리에 차이가 없었다.

그 사이 베어버린 놈의 뒤를 따르던 놈의 총구가 보다 정확히 내게 겨누어져 있었고, 나는 누운 채 정글도 끝으로 반대편 담을 찍어 내 몸을 놈 쪽으로 미끄러지게 했다.

쿠콰콰콰콱!

연사되는 총격이 바닥을 파헤치며 내 몸의 궤적을 쫓았지만, 나는 이미 놈의 바로 발 밑이었다. 이어지는 정글도의 백색 섬광……!

나는 몸을 일으키며, 쓰러져 있는 놈들이 떨어트린 총의 멜빵을 정글도 끝으로 걸어서 들어 올렸다. 그걸 뒤쪽 담 위로 날리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총이 산산조각 난다. 오… 과연 원판 직속부대의 실력.

날아드는 총을 공중 요격하다니… 물론 그로써 그 솜씨 좋은 병사는 내 종적을 놓친 거지만……

계속해서 적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환히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달리고 날고 때로는 천천히 걸으면서… 남은 일곱 명을 하나 하나 처리해 나갔다. 싸움이든 전투든 그 속의 흐름 혹은 전체를 이끄는 물결 같은 게 있으며 그 물결을 이해하는 자가 이긴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확인하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려나…?

마군황 때와 근접한 지금의 나라면 정글도 한 자루만 가지고도 전투의 물결을 지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면, 지나친 자기 과신일까……?

“어쨌든, 이제… 절반은 깬 건가?”

결국 마지막 6중대원까지 제압한 후 벽의 모니터를 향해 묻자, 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의… 끝났어요.”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이 28층에서의 싸움을 이해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그냥 올라오세요. 오늘 준비된 카드로는… 당신의 전투력을 진화시키는 역할 밖에 못할 것 같군요.”

란은 뉴스를 끝마친 아나운서처럼 헤드셋을 벗으며 모니터를 껐다. 나는 천천히 28층을 떠나 다음 층으로 올라갔지만 그녀의 말처럼 그 곳에는 아무도 날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남아있는 기척…이랄까? 아니면 그냥 기분일 뿐…? 하여간 29층에는 더 무서운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란 쪽에서 알아서 철수를 시켰다면 굳이 쫓아가면서까지 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잠시 후, 드디어 도착한 30층.

불과 하루 전에는 이웃집 놀러오듯 간단히 왔었건만 지금은 새벽부터 피 바람을 일으키고서야 간신히 당도한 원판의 아지트. 그 문 앞에 란이 혼자 서서 날 맞이했다.

“진유준님……!”

“…비켜.”

새삼 무뚝뚝한 말을 반복한 건, 그녀가 결코 날 환영하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부디 돌아가 주세요.”

“여자라고 봐줄 기분이 아니야.”

물론 말이 그렇지, 아무리 빡 돌아 있는 나라도 여자를 벨 수는 없고 일단 저 손에 들린 작은 권총부터… 응…? 뭐…냐? 이 여자 지금 뭐 하는 거야……?

란은 별안간 몸을 낮추는 가 싶더니, 무릎을 세워 아예 웅크리고 앉아 버렸다. 더구나 총구는 내가 아닌 자신의 가슴에 대고 다른 손으로 그 총을 감싸 보호하는 자세… 마치 무서운 어른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도사린 어린아이 모습 같아서 어이없기도 하고 우습기까지 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녀를 비웃거나 무시할 수가 없었다.

“당신의 시체를 넘지 않고서는 들어 갈 수 없다는건가?”

“그래요.”

“난… 오늘 원판을 죽이러 온 게 아니야. 대교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것도 녀석 뿐 일테니 말이야.”

“그래도… 안돼요. 아직… 마스터께서 일어나실 시간이 아니에요.”

“당신 지금… 놈의 취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이런 다는 거야?”

“그래요.”

어이없음과 함께 더욱 솟구치는 분노! 어째서 원판 주위의 인간들은 이렇게……

“…그럼, 얌전히 내 칼에 베이도록 해. 총소리를 내고 싶지는 않을 테니……”

나는 란을 향해 성큼 걸음을 떼었고, 그녀는 내게 빙그레 웃었다.

“걱정마세요, 진유준님. 이 곳은 완벽하게 방음이 되니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 해맑게 웃으며 죽겠다는 이 여자… 그게 단지… 주인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라고……?

끼릭~ 그녀의 총 방아쇠가 당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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