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5-2화 : 진화 혹은 각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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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15-2화 : 진화 혹은 각성.(2)


2-6. 진화 혹은 각성.(2)

“에이 씨-! 관둡시다, 관둬!”

결국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철천지 원한이 있는 여자도 아닌데 내 앞에서… 더더구나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사람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로써 내 치명적인 약점을 확인시켜주는 결과가 되더라도… 말이다.

방법이야 어쨌든, 강화인간으로 구성된 두 개의 특수 부대도 막지 못했던 나의 진입을 막아낸 란…

그녀는 살기를 거둔 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천천히 방아쇠에서 손가락 힘을 풀고 있었다. 틱, 하고 방아쇠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척까지 느껴지는 걸 보아 나의 초감각은 아직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난 이미 더 이상 뭘 어쩔 의욕 자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진유준님.”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목소리의 떨림을 숨기지는 못했고, 게다가 란의 얼굴에는 이 짧은 나와의 대치 시간 동안 거짓말처럼 송글송글 식은땀이 솟아 있었다.

“아, 저… 죄송. 잠시만……”

란의 표정이나 태도는 이제야 자신이 손님 앞에서 실례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민망해 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결국 좀처럼 자기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간 내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고 일어나며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 몰랐어요. 진짜 죽음의 순간이란 것이 이렇게 무서운 건지……”

나는… 안다. 자의와 타의를 합치고 가상 현실에서의 경험까지 생각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무수히 생사를 넘나들었던 나이니 말이다.

“알았으면, 다시는 이따위 짓을 하지 마쇼. 더구나 그런 하찮은 이유 때문에……”

“역시… 친절하신 분이군요.”

란은 진심으로 감사하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에게는 결코 하찮은 이유가 아니랍니다. 마스터께서 오늘밤처럼 평온하게 잠드시는 건 매우 드문 일이거든요. 전… 그걸 반드시 지켜 드리고 싶었구요.”

“…이유는 아무래도 좋은데, 그 녀석의 기상시간은 언제지?”

이미 패배 선언을 했으니 당장 다시 어쩌기는 그렇지만, 녀석이 늦잠꾸러기라던가 하는 따위의 소리가 나올 때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마스터께서는… 이른 아침의 일출 속에서 깨어나시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날씨가 흐린 날의 아침을 싫어하시죠. 아~ 대신 빗소리를 듣는 건 좋아하세요.”

란은 조금 전까지 자신을 사로잡았던 공포는 어따 팔아먹었는지, 애인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는 십대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와 달리 나는 더욱 맥이 빠지고 말았다.

“이봐… 이거 보여?”

란은 내 엄지손가락이 가리키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보더니 아~ 하고 탄성을 울렸다.

“벌써 해가… 아… 신이여…!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그래. 자살 미수라고는 해도 어쨌든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으니 모든 것이, 특히 일출이 아름다워 보일 수밖에… 없는 건 없는 건데!

“좀, 억울하지는 않소?”

누구라도 좀 억울한 정도가 아닐 상황이겠건만 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진유준님과 블러디 울프 간의 전투에 너무 집중했었나 봐요. 시간이 이렇게 된 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음… 결국 제가 마스터께 드릴 수 있었던 시간은… 약 6분. 하지만 그 정도면 인간이 얼마나 많은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는지 아세요?”

으~ 졌다! 원판의 현 애인이자 개인 비서 겸, 보디가드 란…! 너 윈(Win)!

“본명… ‘조안 린’. 하버드 출신의 경제학 박사…! 그 학식에 뛰어난 미모와 화술을 더해 무장하고 미국 상류층 사교계를 점령했다는 동양의 마타하리.”

몽몽이 조사한 자료를 굳이 당사자 앞에서 상기시킨 것은 그만큼 그녀의 공식적인 신분과 오늘의 행동이 매치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런 여자도 사랑 앞에서는… 뭐, 그런 얘긴가?”

“그런… 얘기죠. 아니… 그 분에 대한 제 마음은 이미 사랑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란은 순간적으로 긍정과 부정을 구분하기 어려운 표정이 되는 가 싶더니 곧 그걸 지우고 사교적인 미소를 떠올렸다.

“음… 제 미국에서의 활동은 본래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 미국 중앙 정보국.)의 사주였다는 것도 조사하셨나요?”

“뭐… 그 정도까지는.”

어제 몽몽이 이 여자의 자료를 찾은 게 바로 CIA의 컴퓨터 속에서였다. CIA의 데이터로는 일단… 그들이 이 유능한 미인계 요원을 빼앗긴 게… 그러니까 이 여자와 원판이 만난 시점이 의외로 아직 1년도 채 안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CIA는… 헐리웃 영화 속에서 곧잘 묘사되는 것처럼 그렇게 우둔한 집단이 아니에요. 지극히 영리하며 집요하고… 그리고 잔인하죠.”

CIA 시절에 뭔가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 같군. 그래서 그곳에서 빼내 준 원판에게 더 충성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거 아닌가?”

란은 내 말에 대답 없이 몸을 돌린 후, 안의 통제실에 문을 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슬쩍 나를 돌아보며 반문했다.

“그렇게… 보이나요?”

“그거야 당신의 CIA 시절을 모르니 비교할 수가… 없긴 한데… 쳇! 그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말하니 더 이상 뭐라 할 꺼리가 없잖아!”

난 결국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잠시 내려 들고 있던 정글도를 다시 어깨에 걸쳤다. 차라리 안에 블러디 울프들이 매복을 하고 있다가 기습이라도 해와서 다시 분위기를 살려 주기를 바랬던 거지만, 불행히도 실내에는 아무것도… 응? 뭐야? 아무도는 둘째치고, 아무 것도 없다?

어제 봤던 소파나 응접 세트, 바닥의 양탄자… 심지어 벽의 장식물 하나까지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야말로 새하얀 벽뿐이었다. 어제의 화려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원판의 아파트는 규모만 클 뿐 정신병원의 독방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적막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유일한 가구라면 실내 가운데에 놓인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커다란 침대 하나… 그리고 그 위에 유일한 사람인 원판이 등을 보인 채 누워 있었다.

한쪽 팔을 세워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자세인 것으로 보아 원판이 잠에서 깨어난 건 분명한 것 같았지만, 난 웬지 모를 숙연함… 은 아니고! 하여간 실내의 상당히 비정상적인 분위기에 조금 당황하여 잠시 녀석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마스터께서는 주변이 정리되지 않으면……”

안내인답게 상황 설명을 하려던 란의 목소리가 힘없이 줄어들었다. 돌아보니 란은 어느 사이 나와 함께 들어왔다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넋이 나간 듯한 눈동자는 침대와 함께 눈부신 아침의 첫 햇살에 파묻혀 있는 원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비록 누군가의 칼에 일부가 잘려 나가긴 했지만… 여전히 아기 노루처럼 가는 연인의 흰 목덜미의 양쪽으로 냇물처럼 흐르는 머리칼과 한 폭의 미인도처럼 섬세한 라인의 어깨와 허리… 눈물이 흐를 정도로 눈부신 맨 살… 심지어 그의 허리 정도까지 밀려 내려와 감겨 있는 이불의 주름 모양에서까지 감동을……]

<요정 몽…! 유치한 소설 쓰지 마.>

[옙…! 으음~ 하지만 조금 전 저의 묘사… 그렇게 비현실적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하긴, 지금의 저 표정이라면 오히려 소설을 써도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란은 지금 완전히 맛이 가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매일 아침마다 이랬을 리는 없을 테고… 역시 조금 전 자신이 진씨 성을 가진 괴한의 난입에서 애인을 (실은 그의 아침잠을) 지켜냈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겪은 죽음 직전의 경험에 의해 고무된 감정 상태 때문에… 음, 대충 그런 요인으로 더 저런 상태가 된 거겠지? 정작 원판 녀석은 누가 들어왔는지 어쨌는지 관심도 없… 음? 저 녀석, 이제야 알아채는 것 같군.

“란……?”

“예, 마스터!”

조금 고개를 움직이며 부르긴 했지만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원판을 향해, 란은 마치 드라큐라에게 피를 빨리고 홀린 여자 같은 표정과 태도로 침대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원판에게 보이는 쪽으로 돌아가 섰고 원판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으음… 뭔가… 좋은 꿈을 꾼 기분이야. 아주 오래도록 기다려 온 꿈을……”

“그러시길… 바랬습니다.”

“후후… 아무래도 그 것은 그대의 덕분인 것 같군.”

원판의 말에 란은 한층 더 감동의 폭풍우에 자신을 맡긴 듯… 에…? 저 여자… 정말로 눈물까지 흘리고 있다.

<저 자식… 퍼질러 자기는커녕, 문 밖의 얘기를 엿듣고 있다가 수작 부리는 데 활용하고 있다는 데, 올인!>

[예…? 그런 것 같지는 않은… 음, 어쩌면 그런지도……]

요정 몽의 애매모호한 동의 속에서 나는 얼마간을 더 말없이 원판과 란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원판 놈의 멱살이라도 잡고 족칠 생각이었지만, 아직은 잡을 멱살도 없고…(옷을 안 입고 있으니) 더구나 지금 그랬다가는 저 여자가 말릴 틈도 없이 총 물고 쓰러질 것 같다.

쳇…! 사실 란이 자살 방어진을 펼치고 날 막아 버린 시점에서 벌써 내… 음, 일단 마군황 모드…라고 할까? 하여간 간만의 그런 모드는 벌써 풀리기 시작했던 거지만, 거기다 저것들이 저렇게 나오니 새삼 깽판 치는 것도 벌쭘한… 에…? 뭐…야, 이거? 으~ 쓰파! 그냥 확 쳐버려, 깽판?

이미 알고 있기는 했어도… 그래도 설마 했는데… 저 여자는 정말 내가 이렇게 십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다는 걸 까맣게 망각해 버린 걸까…?

란은 결국 천천히 상체를 숙여 원판에게 키스하기 시작했는데… 원판의 머리에서 이마로 거기에서 미간… 입술… 턱… 목덜미로 차근차근 내려가며 뜨겁고 촉촉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헛~! 나~참!”

어이가 없어서 소리를 냈지만, 란은 그조차 들리지 않는 듯 차츰 더 노골적으로 원판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원판 녀석은 아직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대로 그녀의 격정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고……

“졌다, 졌어!”

나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내가 정글도까지 바닥에 내려놓고 상의를 벗어 제치기 시작한 건 저 몰지각한 에로 쇼에 동참을…

하려는 건 당근 아니다.

본래 수통 하나에 술을 채워 온 건 밤새 대교를 지키다가 몇 모금할까 해서였으니 일단 한 모금 마셔 주긴 하고… 음… 좋군. 그리고 아깝지만 총상을 입은 곳에… 으~ 화끈… 한 걸? 본래 큰 상처일수록 진짜 고통은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찾아오기 마련이니 갈수록 화끈 운운하며 여유 부리기 어려워지겠지만… 제기! 여하간에 내가 지금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원판 저 놈 족치겠다고, 목숨 걸고 왔건 만… 원판 놈은 내가 온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내 앞에서 저 지랄하고 있고… 난 여기서 청승맞게 술 나발 불면서 총 맞은 거 치료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으~ 이거 새삼 또빡 돌기 시작하는 군. 그러고 보니… 내가 저 여자 몇 번이나 봤다고 이렇게 사정을 봐줘야 하지…? 썅~! 안되겠다. 당장… 으윽! 란, 저 여자 지금 어디까지… 저것들이 정마알~!

“야-!”

내가 내공을 담아 버럭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란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원망의 빛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난 더 참지 못하고 정글도를 들고 일어섰다.

“아… 당신이 왔었군. 좋은 아침~!”

짐짓 모르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손까지 들어 보이며 인사를 건네는 원판.

“너, 죽을래?”

“음… 화끈한 아침 인사로군.”

“정말 화끈한 인사가 뭔지 보여줘?”

내가 성큼 놈 쪽으로 다가서자 란이 재빨리 막아서며 총을 겨누었다.

으~ 이 여자, 흐트러진 옷이나 좀 가다듬고 뎀빌 것이지… 그리고 저 중국 옷은 또 단추 몇 개 푸니까 바로 훌러덩… 으으~ 지금 그런데 신경 쓸 때가 아니지.

다시 마군황 모드가 필요해! 마군황 모드으~!

“이런, 이런… 부상을 입었군.”

원판은 내 어깨의 총상을 보며 혀를 찼다.

“도홍은 없었을 테고… 4중대, 아니면 3중대에게 당한 건가?”

“아닙니다. 제가… 6중대 콜린 대위까지만 동원했습니다.”

“흐음… 그런데도 부상이라.”

원판 녀석의 얼굴에 떠오르는 실망의 표정이 웬지 무지하게 거슬렸다.

“진유준님은… 비록 부상은 당하셨지만 그건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과정의 실수였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또한 콜린 대위의 6중대를 괴멸하는 과정에서 그 시도의 본질을 깨달은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더 이상 다른 병력들과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제가… 막았습니다.”

옷매무새는 영판 불륜 현장을 급습당한 아줌마 형상이었지만, 원판에게 보고하는 목소리와 표정은 지극히 차분하고 절도 있는 여군장교쯤의 분위기이다. 그런 란의 보고에 원판은 비로소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뭔가… 진화, 혹은 각성의 조짐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그대가… 막았다고?”

“예, 마스터.”

란은 기쁘게 대답했고, 그 순간 내 정글도가 스윽- 그녀의 총을 베었다. 나는 그 직후 정글도를 휘릭 돌려 잡아 손잡이 끝 부분으로 그녀의 급소를 찍었다.

즉시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란을 붙들어 눕히고 나서 돌아보니 원판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그녀의 관찰과 분석 능력은 나도 감탄할 만큼 뛰어나지. 물론… 그렇게 실전에는 약하지만 말야.”

“실전에 약한 그녀가 어떻게……”

어떻게 날 막아냈는지 말해 주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공연히 그런 얘기 해 봐야……

“필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했겠군.”

젠장! 저 자식!

“아~ 너무 흥분하지 마. 내가 미리 지시해 놓은 게 아니야. 그녀라면 당신의 약점을 정확히 읽어낼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

“새꺄! 이 여자는 진심으로 자기 목숨을… 썅…! 그것도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

“음, 잠깐 기다려 주겠나? 설마 이대로 대화를 나누자는 건 아니겠지?”

원판 놈은 그 사이 조금 더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이불이 조금씩 더 흘러내리며 내 눈에 놈의 자연체(?)가 드러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니미~ 얼른 옷 쳐 입어!”

“후후- 몇 년 동안 자신의 몸이기도 했으면서 뭘 그러나.”

“닥치고 옷이나 입어! 니 말대로 할 얘기가 있으니까 말야.”

저 자식! 내가 재촉하거나 말거나 침대 밑에서 가운을 꺼내 걸치는 모습이 뭐가 저리 느긋해? 쓰앙~ 아무리 저 저게 내 영혼이 오랫동안 신세졌던 육체라도…

역시 한 대 줘 패고 시작해야… 응? 이 것… 봐라? 녀석이 이 쪽으로 다가와서 쓰러져있는 란을 챙긴다…?

으음… 뜻밖인 걸? 아무리 란이 아끼는 부하라도, 원판놈이 직접 저렇게 안아들고 자기 침대로 옮겨서 누여주기까지 할 줄은… 가, 가만? 으~ 나, 또 당한 건가…?

저 자식이 저렇게 침대에 앉아서 란에게 무릎베개를 해 주고 있으면… 그럼 내가 놈을 줘 패기가 어렵잖아!

“오해하지 마. 이건 애써 준 란에 대한 작은 보상이니까 말야.”

“니가 잘도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겠다.”

“흐음~ 당신 말야. 자신이 지금 너무 무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뭐?”

“여긴 나의 집이고… 이 집의 주인인 나와 란이 어떤 모습을 보이건, 그게 잘못인 걸까? 아니면 무단으로 침입하여 행패를 부리고 있는 당신이 잘못인 걸까……?”

“야! 그건… 하여간 모든 건 네가 먼저… 그래, 네가 대교에게 그런 수작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여기 쳐들어 올 일도 없었어.”

“먼저… 먼저라. 굳이 선후를 따지자면, 역시 당신이 내 몸을 차지했던 그때… 그때가 모든 일이 어긋나기 시작한 시점이 아닌가?”

“그, 그거야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또한! 대교는 본래 천년 전의 비화곡에서 내 여자가 될 예정이었던 아이…! 당신은 그걸 가로챘던 것뿐이야. 안 그런가?”

열 받지만… 논리적으로는 반박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내가 처음부터 하연이와 함께 이 녀석을 가장 꺼려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하나하나 따지면 결국 내가 도덕적으로(?) 극악남매에게 빚이 있다는… 제기…! 란 때문에 흐름이 끊기지만 않았어도 그냥 몰아붙일 수도 있었는데……

“너… 그래서 이러는 거냐? 내가 잠시지만 너의 비화곡을 멋대로 휘둘렀고, 또 대교를 차지해서…? 복수…라는 거냐?”

“후후후~ 복수라니, 내가 과거의 그런 사소한 일에 연연할 사람으로 보였나? 천만에. 난 당신이 너무 흥분해 있는 것 같아서… 사실 관계랄까…? 우리들 사이의 일을 되짚어 보았을 뿐이야. 어때, 조금은 머리가 식었나?”

“그래… 너무 식어버려서… 내 손이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그런 제어도 못할 것만 같아.”

“이런, 이런… 지금의 발언은 내 실수로군. 당신을 내려다보는 듯했던 말투, 사과하지.”

녀석 쪽에서 먼저 사과를…? 하지만 그것도 포함해서 역시 ‘치고 어르기’를 당하는 느낌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다소의 억지가 들어가더라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설사 복수라고 하더라도 얌전히 당해 줄 생각은 없어. 내가 의도해서 그런 일도 아니었으니…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대교는! 그녀는 안돼! 그녀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한 건, 바로 어제 네 입으로 한 약속이었어.”

“그래… 그랬지. 그리고 난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어기지 않아. 다만… 약속을 하기 전에 한 일이야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맞는 말이야. 하지만 대교의 기억은 앞으로도 계속 작용하는 거야. 그러니 네가 자신의 약속을 완전히 지키려면 대교의 기억을… 그래, 최면이나 세뇌 같은 거였겠지? 그것도 풀어 줘야 하지 않을까?”

“하핫~! 당신, 진심이야?”

“…그래. 대교가 정말 좋아했던 남자가 누구였는지… 그딴 건 상관없어. 그녀가 날 잊은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니까. 알겠나? 그녀의 기억을… 꿈을 온전하게 돌려놔!”

내 단호한 요구에 원판은 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애매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얼마간 자기 무릎 위에 잠든 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원판은 문득 다시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그 요구… 받아들이고 싶기는 해.”

“그런데 뭐가 문제지?”

“그게 말이야.”

원판은 웬지 씁쓸한 표정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실은, 실패했었거든. 실패한 세뇌는… 그걸 시도한 사람도 원래대로 되돌리기가 힘들어.”

나는 원판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패한 세뇌라니…? 그럼 대교의 기억은 대체 어디부터 얼마나 잘못된 거고, 진실은 대체 뭐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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