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6-1화 : 환생사태의 원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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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16-1화 : 환생사태의 원흉.(1)


대교에 대한 세뇌에 실패했다는 원판의 고백. 그건 한순간 내 머릿속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천년의 세월을 격해 이루어진 환생… 그러면서도 전생의 기억을 간직할 정도이기 때문이었을까…? 내 예상보다 강했어, 그 아이. 아직 뚜렷한 자아가 성립되지 않은 나이에는 세뇌도 수월한 법이거늘… 음… 난 본래 대교의 꿈속에 있는 인물을 다른 인물로 바꾸어 각인시키고 싶었지. 그 편이 당신의 복귀 후 더 흥미로운 상황을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원판이 슬쩍 내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지만, 난 아직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양쪽의 기억이 충돌하여 그 아이는 어느 쪽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거야. 그걸 다시 처음으로 되돌리는… 해제도 시도해 본 적이 있지만, 역시 실패했지. 그건… 훗~! 실패의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단순히 세뇌 실패의 부작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더군. 왠지… 그 아이 스스로 그 기억을 공백으로 남겨 두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할까……?”

천년 전의 소녀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혼란스러우니까… 그러니 당신을 사랑한 것이 아닐 거라는… 그렇게 말하던 대교가 떠올랐다.

“그게… 바로 부작용이잖아. 대교를 혼란스럽게 만든 그 자체……”

내가 비로소 낮은 음성을 흘리자, 원판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아아~ 그건 인정해. 하지만 난… 원인 제공을 누가 했던, 현재 그 아이의 상태는 그 아이의 의지에 따른 결과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야.”

원판의 세뇌에 저항하여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지켜냈다고 하면… 그래, 최소한 조작된 기억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저 녀석의 고백이 진실일 경우에만 그렇다는 거다. 단지 흥미로운 상황 연출을 위해서 사람의 기억을 조작하는 놈의 말 따위를 다 믿을 수는 없잖은가. 그리고 놈의 말이 맞다고 한다면 저 놈은 왜 굳이 대교가 자기를 기억하는 걸 바꾸려고 했을까?

나와 정정당당히(?) 경쟁을 해서 대교를 빼앗아 갈 자신이 있어서…? 자신감은 둘째치고 그게 게임의 묘미라고 생각하여… 어, 가, 가만…? 뭐…지? 왜 문득 내가 지금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거지?

“그런 이유로, 미안하지만 이제 나도 그 아이의 기억을 되살릴 수가 없어. 하지만 어제의 통화에서도 말했듯 당신의 입장은 천년 전과 그리 달라진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원판의 이어지는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 어제 밤의 통화…! 어제 저 녀석은 내게… 대교의 기억 속 남자가 자기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원판은 ‘누구일 거라고 생각해?’ 식으로 말했을 뿐인데 내가 그 말을 멋대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고는… 으~

그러고 보니 원판 저 녀석은 조금 전에도 역시 대교의 본래 꿈속 인물이 누구이며 누구로 바꾸려 했다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럴…수가……!

나는 비로소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고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난 이곳에 쳐들어오기 전의 그 몇 마디 되지도 않는 통화에서부터 잘못된… 으~ 제기! 이제 보니 지난밤의 내 폭주는 놈 탓을 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물론… 내가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계산한 의도적 말장난이었겠지만… 그래도 그 대단치도 않은 말장난에 간단히 말려든 것은 나이다. 아무리 대교의 일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쉽게… 으… 그래, 대교와 관련된 일이라 해도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빌어먹을… 나 밤새 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을……

“음~ 뭔가 반성해야 할 일이 떠오른 모양이지?”

썅~! 저 자식 또 내 속을… 으~ 안 돼! 더 이상 먼저 흥분해서 스스로 무너져서는……

“…그래. 반성할 게 너무나 많군. 너무 많아서 돌아가실 지경이야.”

“후후후~ 뭐든 쉬엄쉬엄하는 게 어때. 당신은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게 탈이라면 탈이지.”

병 주고 약 주는 저… 으으음~ 안 되지, 안돼. 반성은 반성 후 잘못을 번복하지 말아야, 그 의미가 있지, 안 그래 진유준?

“그래… 어쨌건, 결국… 네가 대교의 기억에 관여한 건 그녀의 꿈속 인물이 누구인가. 그 하나뿐이라 이거지?”

“…그렇지.”

“그리고… 대교의 본래 꿈속에 있던 남자… 너 아니지!”

“후후~ 글쎄……?”

원판은 역시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고 빙글빙글 웃는다. 이번에는 그리 약이 오르지도, 혼란스럽지도 않지만… 그러나 앞으로도 할 수 있을까…? 대교의 일에도 냉정을 잃지 않는 게 과연……

“음… 그런데 말야, 나나 당신과 재회했을 때도 스스로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는 걸 보면… 어쩌면 환생 후에 만난 제3의 인물에게 마음이……”

“됐어, 임마!”

나는 다시 날 도발하려는 녀석의 말을 끊고, 다시 한 번 짧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대교를 지키기 위해서는 대교의 일에도 냉정을 유지해야 하는 것!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면서도 또 그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방 안에… 의자 같은 건 다 어따 치웠냐? 어쨌건 간에 찾아온 손님인데 물 한잔 없는 것도 그렇고……”

내가 뜬금없이 손님을 자처하기 시작하자 원판은 피식- 웃으며 자기 무릎 위의 란을 가리켰다. 나는 즉시 그녀를 해혈해 주어 깨어나게 했고,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기절시켰던 내가 여전히 정글도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란은 그 사이 원판이 무사한가를 확인하다가 원판이 오히려 자신을 챙겨 주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기뻐하다가… 하여간 정신적으로 잠시 버벅거리다가는, 결국은 그래도 제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란. 방을 돌려놔 줘. 어제처럼… 정식으로 손님 대접을 할 수 있게.”

원판의 말에 란은 눈치 빠르게 우리가 ‘화해’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휴전 상태’가 되었다는 걸 알아채고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로부터 5분… 아니, 그 정도 시간도 채 안 걸렸는지 모르겠다. 보디가드 대기실에서 출동한 병력들이 란의 지시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가구며 장식들을 가지고 들어와 집안을 꾸미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어제와 비슷하게 멀쩡한 아파트로 탈바꿈시켜놓았다.
한쪽 벽의 대형 TV 모니터 같은 경우는 그냥 벽으로 착각할 만큼 정교하게 장치된 기계 문이 열리는 것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비교적 깔끔하게 재등장한 셈이지만, 다른 것들은 대부분 인력으로 처리되는 거라서 지켜보고 있자니까 조금 어이가 없었다.

원판 녀석도 다소 민망했던지 란과 작업을 마친 병력들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본래 이런 모습은 손님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건데 말야.”

“그보다… 저 블러디 울프 병력을 이삿짐 센터 직원으로 쓰냐?”

내가 결국 한 소리하자 원판은 새삼 천천히 자신의 아파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저들에게 미안하기는 해. 이 건물을 설계할 당시에는… 괜찮을 줄 알았거든. 완공되었을 때는 당신이 돌아올 날도 멀지 않았고… 그런데 설마 당신과 만난 후에도… 음, 그 얘긴 그만하지.”

원판은 녀석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말을 끊고는 먼저 어제처럼 소파로 가서 앉았고, 나도 그 얘긴 더 묻고 싶지 않아서 그냥 조용히 녀석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뭐… 굳이 상황을 유추해 보자면… 일단, 밤사이 겪은 27층부터의 구조만 봐도 아파트를 산 게 아니라 이 건물 자체가 놈에 의해 건설되었을 거라는 사실은 뻔한 거고, 조금 전 놈이 언급한 얘기는 아마도… 이 아파트가 완공되어 들어올 때쯤에는 조금 전과 같은 환경 속에서만 잠들 수 있는… 그런 증세가 없어질 거라고 예상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녀석이 왜 그렇게 지극히 적막할 뿐인 공간에서 밖에 잠들지 못하는지… 솔직히 그게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별로 말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지금의 내게는 그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다.

“음……”

나는 란이 가져다 준 모닝 티의 향을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하나 더 묻자. 너… 대교는 어떻게 찾아냈었던 거냐?”

“운이… 좋았지.”

원판은 먼저 그렇게 짧게 대답하고는 잠시 그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천년 전의 당신이 이 시대로 떠났던 장소를 찾아 본 것은 그저 호기심에 불과한 행동이었어. 그런데 거기에서 설마 비화곡과 연관된 전생을 가진 자를 만날 줄은……”

공식적으로, 현 시대 대교의 고향은 그냥 홍콩이라고만 되어있다.
그러나 역시 그녀의 진짜 고향은 중국 본토에서 내가 떠났던… 천년 전에는 인적 없는 산중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작으나마 마을이 있다는… 그곳이었던 모양이다.

“사영…! 이 시대에서는 ‘주성후’라고 불리고 있는 남자.”

에? 아닌…가? 대교가 아니라 사영을 먼저 만났다고?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를 만난 덕에 이 시대에서도 부녀의 인연을 맺게 된 대교를 확보할 수가 있었던 거야. 아… 과거의 사영, 주성후가 지금 어떤 인물인지는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토 출신의 도수로 홍콩에서 활약… 결국 독자적으로 사영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키워 삼합회에서도 손꼽히는 거물이 된… 그 계통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인물 주성후…!
그가 이 시대에서도 대교의 아버지이며 전생과 비슷한 살수의 길을 걸었다는 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운명론에 포함되는… 아, 잠깐…? 설마……

“원판. 너 혹시… 네가 그를 그렇게 만든 거냐?”

“음… 내가 암중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는 건 인정하지.”

“…나 때문에 대교를 확보해 놓은 건 알겠는데, 사영은 왜지? 왜 그의 인생까지 관여한 거지?”

“오해하지마. 그는 나와 만나기 전에도 어차피 그런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어. 난 대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가 세력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

“글세… 과연 그럴까?”

“편한 대로 생각해. 어차피 내 말은 좀처럼 믿지 못하는 모양이니……”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네가 지금까지 찾아내서 소위 ‘도움’을 준 환생자는 또 누가 있지? 하은이와 대교, 사영, 그리고……”

“그건… 노 코멘트!”

노 코멘트…? 역시… 최근 내 주위에서 일어난, 혹은 일어나고 있는 환생사태는 타임씨와 이 원판 놈의 합작이었던 건가……?

“참내~!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멀쩡히 현재의 다른 삶을 살아갔어야 할 그들을 왜 끌어들여서……”

“노 코멘트!”

“너 설마, 이 시대에 천년 전과 같은 사람들로 같은 세계를 만들려 한다거나…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하하~ 당신 정말 너무 하는 군. 모든 것을 그렇게 쉽게 알기를 바라는 건가?”

“아니, 뭐……”

쯧, 확실히 내가 너무 날로 먹으려 들었나?
발상부터가 비정상적일지는 몰라도, 저 녀석 나름대로 기나긴 세월 동안 준비하고 추진해 온 일들일 테니… 음……

“원판 넌 어제 분명, 앞으로 내게 거짓을 내놓지는 않겠다고 했었지?”

“…그랬지.”

“난 그 말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너도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는 것 같군.”

“노력이라… 아직은 그 정도만 믿어 주는 군.”

원판은 짐짓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도 일단은 마주 피식 웃어 주었다.
결과적으로… 놈을 추궁하거나 족치기는커녕, 밤새 혼자 광분해서 오버질 만 하다가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새벽의 전투에서 난 분명 잊고 있던 감각을 되찾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역시나 아직 확실해진 건 아니어도, 대교의 꿈 속 남자가 놈이 아닌 나일 가능성이 높아졌고… 원판 녀석이 비록 말장난은 해도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은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 물론 그런 판단도 역시 소위 놈에게 ‘말려드는’ 건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들지만…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지금의 이 판단은 믿기로 했다.
암튼, 그렇게 종합적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가운데 이번 일을 마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대교가 스스로 놈의 세뇌를 거부했다는… 난 그게 가장 기뻤다.

“으~아아아아음~ 음음……”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한 때문인지 나오기 시작한 하품을 늘어지게 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쳇~! 결국 요 며칠 계속 잠을 설친 셈이니… 나, 이만 갈게!”

잠시 친구 집에 놀러 왔다 가는 것처럼 간단한 인사를 하며 물러나자, 원판도 별다른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짧은 하품을 거듭하며 나가는 나를 란이 뒤따라 나오더니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곱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결코 곱게 돌아가시지 못할 겁니다.”

웃으면서 하는 얘기치고는 자못 살벌했고, 지금도 그리 곱게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마스터께서는 진유준님을 최대한 존중해 주고 계시며 저 또한 그럴 생각이지만… DP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알만하다. 아니… 원판 놈부터가 겉으로는 계속 날 동등한 존재로 대접해 주는 척을 하지만, 은연중 지 부하들에게 날 ‘최고의 사냥감’으로 인식시켜 놓은 거 보면 앞으로도 계속 뒤로 호박씨 깔 거라고 봐야 할 거다.
이 여자 같은 경우 아직은 판단하기가 좀 애매하지만……

“아무래도 좋은데… 이번이 마지막이고 앞으로는 올 일이 없을 거 같소.”

“과연 그럴까요…? 어제도 분명 비슷한 말씀을 하고 가셨지만 이렇게……”

“그거야, 뭐… 암튼, 내가 충고 하나 하자면… 누가 있는데서 아까처럼 그러지 좀 마슈. ‘아직은 솔로부대’ 염장을 질러도 유분수지……”

란은 그제야 아까 내 앞에서 펼쳤던 자신과 원판의 에로 쇼가 생각났는지 얼굴을 붉히… 응…? 뭐시여. 얼굴을 붉혀야 정상아냐?
이런 뻔뻔한 여자 같으니, 그렇게 태연한 얼굴로… 어, 어…? 왜 갑자기 내게 바싹 다가서는 거냐?

“후후~ 그 때문에 화가 나서 다시 오시지 않겠다는 건가요? 그럼… 제 생명을 구해 준 감사 표시는 지금 당장 하는 것이……”

“이봐, 그게 무슨……”

문득, 란의 얼굴에 비화곡의 취음란 각주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만 같았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거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색기 가득한 눈동자가 다가옴과 동시에 알싸한… 정체불명의 향기가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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