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대한민국 모범청년인 이 몸, 진유준이 대한민국 모범 고교생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물론, 간혹 자칭이라고 주장하는 불경한 자도 있긴 했다. 그런 나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영광을 누린 인물 두 명이 있었으니, 바로 이준엽과 강성원이었다. 자주… 대다수의 몰지각한 자들은 오히려 내가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나와 ‘다소 다른’ 부류의 친구들이었다.
두 녀석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대한 멋을 부리고 다니는 차림새 덕에 어른들 눈에는 꽤 불량해 보였고, 실제로도 운동을 잘하고 다혈질이라 가끔 싸움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두 녀석은 의외로 착실하고 성품도 착한 친구들이었으며, 사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보다 인기가 훨씬 많았다.
준엽이는 공부도 잘했는데, 이게 바로 그가 우리 부모님께 빨리 인정받았던 이유였다. 처음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부모님은 “친구 좀 가려 사귀어라”라고 하셨지만, 준엽의 우수한 성적을 알고 나서는 경계심을 풀으셨다. 한편, 성원이는 드높은 효심으로 동네에서 유명한 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다리 불편한 어머니를 업고 남산에 오르곤 했는데, 그 명성을 알게 된 부모님도 성원을 반기게 되었다.
이런 사연들은 어른들이 청소년을 판단할 때 다소 편협한 기준을 적용한다는 예시가 될 수도 있지만, 그건 오늘 주제와는 다르니 패스… 아무튼, 기본은 이렇다. 두 녀석은 나와 만나기 전부터 단짝이었으며, 고교 시절엔 나와 함께 삼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두 녀석이 주축이었고, 나는 이빨 사이 고춧가루처럼 살짝 끼어 있던 형국이었다. 물론, 그렇게 내 위치가 미약했던 건 아니지만, 그만큼 두 녀석의 우정이 각별했다는 의미다.
음… 그런데 마치 만화나 소설 속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듯, 저 ‘역촌동 쌍절곤’ 녀석들과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는 동안에도… 정작 당사자인 두 녀석은 지금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물론, 실제로 싸우는 건 아니고 컴퓨터 게임일 뿐이지만, 그래도 두 녀석의 눈빛은 장난이 아니다. 15년 우정도 잊은 채, 격투 게임 속 캐릭터가 자신들의 분신인 양 상대의 빈틈을 노리며 쓰러뜨리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이제… 그만 하지?”
음… 역시 대답은커녕 반응도 없군. 5판 3선 승제, 2대 2 동점 상황에서의 결승전이니 집중할 만도 하지만…
“<몽몽… 무승부 만들어 버려.>”
[옙!]
시키긴 몽몽 시켰는데, 대답은 요정 몽이 했다…? 아, 깜박했군. 앞으로 이런 정도의 가벼운 일 처리는 요정 몽이 전담하기로 했었다. 몽몽은 좀 더 대교 보호 체제 구축에 집중하고 말이다.
암튼… 녀석들 눈에 보이지 않는 요정 몽이 내 컴퓨터 속으로 스르륵 사라진 후, 에너지 게이지가 훨씬 많이 남아있던 성원이가 조금씩 당황한 빛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 어?”
미묘하게 기술 거는 타이밍을 놓치기 시작한 성원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고 손놀림도 어지러워지는 반면, 기회다 싶었는지 더 신이 나서 기세를 올리는 준엽이의 표정이 보였다. 이윽고, 게임 속에서 두 녀석의 애용 캐릭터 화랑과 피닉스가 동시에 기술을 걸었다.
“으아아아아아~”
허무하게도 동시에 양쪽으로 쓰러져 버리는 화랑과 피닉스에 완전 동화된 듯, 합창으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던 두 녀석은 문득 또 동시에 ‘다시 결승전’을 외쳐댔다.
“됐다!”
조용하나 단호하게 일갈한 내가 재빨리 키보드를 장악하여 게임을 종료시켜 버리자, 두 녀석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노려본다.
“그럼 최종 승부는……”
“음, 이번엔……”
“니들, 대체 뭐 하러 온 거냐?”
내가 삐딱한 표정으로 묻자 준엽이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야, 너 보러 왔지, 뭐.”
그제야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성원.
“음… 그런 녀석들이 오자마자 게임질이냐? 응?”
“흐~ 알잖냐. 우린 승부가 걸리면 정신 못 차리는 거.”
“그건 안다만, 얘들아. 이번 승부는… 경품(?)이 대체 뭐냐?”
“어… 그야 뭐……”
두 녀석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하은이가 나간 문쪽으로 향한다.
“내참~!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치부터 담그냐?”
“에이~ 형! 왜 그래에~!”
다시 내게 아양을 떨기 시작하는 두 녀석. 뭐… 나도 겉으로야 신경질을 내는 척했지만, 이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이쁜 여동생을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뒷마당 권력이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두 녀석 다 메모 준비해.”
내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메모지를 찾는 준엽과,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일단 솔깃한 표정이 된 성원. 나는 두 녀석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금딱지 시계, 금괴 한 상자, 물방울 다이아, 현금……”
“뭐, 뭐냐, 그게.”
“우리 하은이에게 접근이라도 해보고 싶으면 내게 1차로 바쳐야 할 뇌물 목록이다.”
나의 당당한 선언이 있은 후 잠시 침묵이 흐르는 실내. 결국 두 녀석은 스윽 눈빛 사인을 주고받더니 불시에(?) 내게 협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15년 콤비답게 눈부실 정도로 척척 맞는 동작으로 내 양팔을 잡아 침대 위로 던지더니 장난스런 주먹과 발길질, 베개찜질(?)이 무차별적으로 이어진다.
“으으~ 하은아~! 이 놈들이 니 오래비 잡는다 잡어!”
무심한 하은이는 내 절규(?)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녀석들의 집단구타와 그 명분을 외치는 외침이 계속 이어진다.
“여동생 팔아서 팔자 고치려는 거냐? 에잇! 에잇!”
“차라리 널 먼저 제거하는 게 낫겠다! 죽어랏! 이잇! 이엽!”
훗~! 그래… 친구들아. 비록 장난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너희들에게 이렇게 맞고 있으니 차라리 맘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다. 난 너희들의 이런 모습을… 너희들이 모르는 세상에서 거의 잊고 살았단다.
아무리 살아남기에도 바빴고… 점차 사랑하게 된 소녀의 생각에만 가득하게 되었다 해도… 그래도 그게 정당했다고 할 수는 없지. 게다가 무림에서 복귀한 후에는 더 무심했으니… 그래… 더 때리고 또 때리렴. 그래야 내가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지. 그래 친구들아, 얼마든지 얼마든… 지…
음…? 이거 어째… 강도가 조금씩 더 세지는 듯한……
[ 주인님! 조금 전부터 부상 부위의 출혈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일부 미세 혈관의 파열일 뿐이지만 주의하시는 편이…… ]
에구, 미리 지혈용 혈도를 잡고 그 주변 근육에 내력을 집중시켜 보호하고 있었는데도… 으음… 아무래도 이런 식의 숨은 사과는 이 정도에서……
“야, 이, 이제 그만……”
“좋아! 이대로라면 보낼 수 있다!”
“그래! 악마의 방해 없이 하은씨를 우리 품에……”
이 것들이… 정말 진심 아냐, 이거?
“에이 쒸! 이 것들잇!”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성원이 녀석의 팔꿈치 치기를 피함과 동시에 발 쪽을 타고 앉은 준엽이 놈의 발을 잡아채어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오우~ 멋진데? 특공대 갔다오더니 확실히 달라졌어.”
“글세 말야. 우리의 협공을 빠져 나오다니… 음, 이렇게 되면 쉽게 제거하기 어렵겠는 걸?”
“그래, 그렇다면 역시……”
두 녀석은 이번에도 동시에 손을 내밀어… 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기 시작한다.
“장난이었던 거 알지?”
“그러엄~! 우리가 유준일 얼마나 좋아하는데……”
“됐다, 이놈들아! 앞으론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짐짓 계속 소리를 쳐봤지만, 자연스럽게 피어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는 없었다.
예전과 같은 한바탕 장난의 폭풍우(?)가 지나고 난 뒤, 그제야 과일 접시를 들고 들어온 하은이 때문에 잠시 녀석들의 흥분상태가 더 지속되기는 했지만… 하은이가 다시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들은 목소리부터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복학 신청은 했냐?”
“아니, 아직… 너희들은?”
저 녀석들은 대학교도 같은 곳에 지망했었고, 준엽이는 널널하게 성원인 간당간당하게… 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같이 붙었다.
“우리도 아직 안 했다. 다음 주쯤 갈까 하는데… 유준이 넌?”
“글세… 난 생각 좀 해보고.”
“왜? 뭐 딴 계획 있어?”
“어쩌면 1년 정도는 쉬어야 할지도… 아, 이거 우리 부모님께는 아직 말하지 마라.”
“유준아. 너…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거냐, 군대에서?”
내 두 달 여의 이상증상은 가족들을 통해 친구들에게까지 전달되었고 지난번에 잠깐 봤을 때 확인했을 테니 다들… 특히 이 녀석들이 날 걱정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뭐, 군대에서 별일은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거짓말은 아니다. 군대에서는 분명히 별일 없었고, 별일은 제대하고 생겼던 거니……
“다만… 복학하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래. 너희들은 군대 있을 때 제대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 무지하게 생각해 두고 그러지 않았냐?”
두 녀석은 입대도 비슷한 시기에 했는데, 나보다 석 달쯤 빨랐었던 만큼, 현 시간대 기준으로는 그 정도의 기간을 녀석들이 먼저 사회에 복귀했던 건데… 눈치를 보니 그 사이 별다른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야 뭐 우리도 군대에 있을 땐 그랬지만… 음, 하긴… 유준이 넌 우리와 달리 뭘 계획하면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지.”
날 잘 알고 있는 녀석들답게 이해도 빠르다. 이번 경우는 내가 녀석들을 약간 속인 거라고 해야겠지만…
음… 그나저나, 생각해 보니 아까 하은이에게 부탁하려고 했던 일은 이 녀석들을 통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사실 하은이 같은 경우는 나도 아직은 좀 불편한 구석이……
“아, 그보다 유준아. 너 이번 주에는 시간 있냐?”
“시간…? 그건 왜?”
“제대하고도 우린 아직 서울에서만 빌빌댔다. 복학하기 전에 여행이나 좀 다녀 볼까 해서… 너도 같이 가자.”
어랏? 이게 웬 떡…?
안 그래도 내가 하은이나 이 녀석들에게 부탁하려고 했던 게 함께 여행을 가자는, 혹은 우리 부모님께는 그러는 것으로 말해 달라는 거였는데 이 녀석들이 먼저 이런 얘기를 꺼내다니! 음…
대교에게 생길 수도 있는 만약의 사태는 G.M.에게 의뢰를 해 놓았으니 난 다만 며칠이라도 산속에서 수련하며 상처를 치료하고 싶었던 건데… 어쨌든, 이 녀석들과 함께 가는 거라면 부모님들께서도 전처럼 걱정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건… 마치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타임씨?) 날 위해 스케줄을 맞춰주는 듯한 타이밍의 전개로군.
“…좋아, 가자. 내일이라도 당장! 그래… 어머니께도 지금 말해야겠다.”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녀석들은 내가 무슨 일이든 결정이 내려져도 진행 전에 반드시 계획부터 세우고 검토하는 타입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서두르는 모습에 다소 의아해 하는 것 같았다.
역시… 어머니께 여행 보고를 하고 허락, 혹은 동의를 받는 과정은 예상했던 대로 수월했다. 녀석들이 그만큼 우리 집에서도 신뢰를 받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랄까?
“여행…? 오빠! 나도 같이 가고 싶어!”
으잉? 하은이 녀석, 넌 또 왜 나서는 거야? 얘들이 확보된 이상 넌 빠져야 한다구.
“야, 오빠들끼리 가는 거야. 넌……”
순간 내 등을 찌르는 두 줄기의 살기…?!? 감히 이 몸 진유준님께 그런 불손한 기운을 뿜어대는 게 어떤 놈들인가는… 물론 돌아볼 것도 없었다.
“유준이 말대로 남자들끼리 가는 거라 좀……”
“그래요. 하은씨가 많이 불편할 거예요.”
짐짓 반대라는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잔뜩 기대에 찬 녀석들의 저 표정!
“괜찮아요. 오빠들 귀찮게 안 하고 착하게 따라 다닐게요.”
그에 질세라, 아니 한 술 더 떠 순진한 소녀 마스크(?)를 쓰고 내숭을 떨기 시작한 정하은!
“큰 이모! 허락해 주세요. 오빠랑 같이 가는 거니까 괜찮잖아요. 네?”
“그, 글쎄다.”
에구… 약해지지 마세요, 어머니. 저 녀석들이 착실하고 선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제 기준이고, 어린양과 함께 내보내도 될 정도로 착한 늑대들인지는 친구인 저도 장담할 수 없는… 아니, 잠깐…? 어린양? 하은이가? 으~ 오빠 모드에 빠져 있느라 내가 잠깐 헷갈렸다. 녀석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원판의 분신에 가까운 극악녀…! 그러니 보호대상이 되어야 할 건 오히려 저 순진 무구하고 여린(?) 내 친구들인 것이다.
“하은아! 그만 둬. 아무리 어쩌니 해도 결국 서로 불편할 뿐이야. 넌 내가 나중에 어디든 따로 데려가 줄 테니……”
- 싫어.
녀석은 고개를 저으며 갑자기 독일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 나보고 며칠 동안 혼자 2층 계집애들과 마주하고 있으라고?
< 그거야… 그냥 원, 아니 니 오빠 화이트에게 가 있으면 되잖아. >
- 화이트 오빠는 오늘 출국한다고 했는걸?
< 에…? 진짜? >
뜻밖의 말로 날 잠시 머뭇거리게 만든 하은이는 다시 어머니께 매달리다시피 하며 설득 작업에 들어갔고, 나의 두 친구는 슬며시 내게 다가섰다.
“방금, 뭐…랜 거냐, 니 동생?”
“…난들 알겠냐.”
성의 없는 내 대꾸에도 두 녀석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영어도 아닌 것 같던데……”
“음… 외국에서 살다 온 애하고 사귀면 이런 문제가 있겠구나.”
꿈도 야무지시지, 내 가엾은 친구들…! 에구구… 앞으로 이 녀석들에게 대체 어떻게 하은이를 설명해 줘야 할지 막막하다. 자칫 하은이의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초특급 생체강화전사들 손에 아작이 날 수도 있고 더 운이 나쁘면 천년 전의 극악서생께서 친히 출동하여 고문의 진수를 만끽시키며 생지옥을 보여주는 수도 있을 거라는… 으… 어느 것도 친구들이 간단히 믿어 줄 만한 구석이 없는 얘기들뿐이로구나.
“니들… 일단, 지금은 가라. 준비할 건 따로 통화해서 상의하자.”
난 녀석들을 보내고 나서 하은이를 따로 설득하든가 대책을 세울 생각이었는데… 근데, 녀석들을 바래다주려고 나오는 길에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신다고요?”
중국어로 그렇게 묻는 소녀는… 당근 미령이었다. 녀석이 2층 계단 옆에 서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고, 이어 소령이도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레이스 정과 골든 차일드도 함께 이 집을 떠난다면… 저희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겠죠?”
제, 젠장! 그게 또 그렇구나!
“와아~ 산으로 가요, 산으로! 소령인 한국 온천에는 한 번도 못 가봤어요!”
내 속도 모르고 그저 신이 난 소령이까지 보며, 성원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야아…! 이번에는 중국 미소녀들…이냐? 며칠 사이… 니네 집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잠시… 나중에 물어주게, 친구들.”
으~ 이게 뭐냐. 난 조용히 요양 겸 수련을 쌓으러 떠나고 싶은 거고 이번에는 며칠씩 집을 떠나도 부모님께서 걱정하지 않으시길… 그걸 바랬을 뿐인데… 근데 왜 이렇게 복잡해지는 거냐고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