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수습 작업은 물론 하은이에게 먼저 시도되었다.
“…하은아. 네가 날 따라나서면 2층 애들도 온단다. 그러니 네가 주장하는, 그 애들과 함께 있기 싫다는 건……”
“오빠!”
“으…응.”
“그래도 할 수 없잖아. 오빠가 없는 곳에서 그 애들과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 말야. 솔직히… 아까는 괜한 허세였고, 만약 GM이 오빠 없다고 강압적으로 나오면… 그럼 난 금동이나 나 자신을 지킬 힘이 없어. 아직은 화이트 오빠를 따라서 한국을 떠나기도 싫고……”
녀석이 갑자기 약한 척을 하는 게 못미더운데다, 아침에 만났을 때도 아무 언급도 없었던 원판이 갑자기 떠난다는 말도 믿기지가 않아 전화를 해보니… 그 수신지는 정말 태평양 위였다.
“…보안 관계로 이 라인을 일시 폐쇄할 예정이었는데, 마침 먼저 연락을 해 주셨군요.”
란은 원판이 비행기 안에서조차 DP의 일… 즉 공무로 바쁘다고 했고, 곧 전화를 받은 원판은 정말 바쁜 척을(?) 해가며 간단히 지 할말만 한다.
“아… 그러니 나 없는 동안 내 동생을 잘 부탁해.”
“야! 내가 왜 너 대신……”
내가 뭐라 반박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전화가 끊기며… 그 틈에 얼핏 들려온 몇 마디 영어는 ‘## 회사를 추가 병합하라’…였다. 바쁘신 초거대 기업의 마스터에게 사소한 전화질로 귀찮게 하는 서민 친구가 된 기분이라고… 할까?
“유준 오빠. 화이트 오빠는 자기가 말한 건 반드시 지켜. 그러니… ‘네가 원한다면 호위를 철수시키마’라는 말도 실행되었을 거야.”
“넌 왜 또 굳이 호위병력을 철수시키라고 했는데?”
“그냥… 어제 화이트 오빠에게 신경질을 좀 부리다가… 암튼, 유준 오빠가 있으니까 상관없잖아.”
당췌 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리는 공주님, 그레이스 화이트 크라우드…! 난 녀석이 내 방을 나간 후에야 문득… 혹시 저 녀석은 원판의 사주를 받아 날 감시하는 역을 맡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당장 확인할 방법도 없고… 녀석이 들이댄 주장을 반박할 만한 것도 딱히 생각나지 않고…… 하는 수 없이 다른 쪽을 자르자, 라는 생각에 성원이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이런… 알고 보니 그 두 번째 수습 시도도 실패가 예정된 것이었다.
“실은… 어머니께서 네 걱정 많이 하시더라. 우리가 너와 함께 다니면서 왜 그러는지 눈치껏 알아보라고 하시던데… 야!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마! 여행 계획은 본래부터 있던 거고 우린 특별히 그래서 가자는 거 아니야. 여행은 여행으로 즐기자구! 오케이?”
결국, 녀석들마저도 여행의 숨겨진 목적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든 숨기면서 진행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원이 녀석을 용병으로 고용(?)한 어머니의 판단은 그렇다 치고… 이렇게 되면 2층의 비밀결사 자취생 소녀 두 명까지 포함해서… 날 뺀 전원이 간첩(?)일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차라리 그냥 혼자 튀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수습은커녕, 더 안 좋은 상황만을 확인했을 뿐인 나는 다소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 여행길에 올라야 했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의 키트 1호는 뒷자리 콤비 녀석들의 쾌활 바이러스에 감염되기라도 한 듯 평소보다 더 기운찬 엔진 소리를 내며 달렸다.
“근데, 우리 대체 어디 가는 거냐? 전처럼 또 발길 닿는 데로인 거냐?”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했을 때에야 준엽이가 그렇게 물었다.
“아니… 이번에는 목적지 있다. ‘신불산’이라고… 영남의 알프스라고 불린 댄다!”
준엽이와 성원이는 잠시 내가 말한 신불산을 지도에서 찾아보는 것 같았지만……
“거기 좋냐?”
“좋다.”
목적지에 대한 대화는 그게 다였다. 옛날부터 저 녀석들에게는 여행의 목적지가 그리 중요하지가 않았다. 노래와… 가능하면 춤까지 함께 하며 가는 동안의 흥겨움… 어찌 보면 여행의 즐거움을 가장 잘 만끽하는 스타일이고 예전 같았으면 나도 어느 정도 분위기에 동참을 했겠지만 오늘은… 음… 뭐…야.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저 녀석들이 왜 이렇게 얌전하지? 기어이 우리 아바마마의 허락까지 받아내 같이 따라나선 하은이 때문에 내숭이라도 떠는 건가…? 훗~! 나도 참, 이번만은 조용히 가고 싶었으면서도 막상 저 녀석들이 맹숭맹숭하게 앉아있는 걸 보니 또 괜히 갑갑해지는군.
“하은아, 거기 테이프 중에서 아무거나… 아니, 댄스 곡으로 좀 틀어 봐라. 뒷자리 녀석들 본색이 드러나게.”
“본색……?”
약간 의아해 하면서도 하은이가 노래를 틀고 볼륨을 높여주자, 녀석들은 결국 피가 끓는(?) 걸 참지 못하고 노래에 맞춰 버라이어티 생쇼를 펼치기 시작한다. 녀석들이 우려했던 하은이의 반응이 아하핫~ 웃어대며 박수를 쳐주는 것으로 나타나자 키트 1호는 차츰 더 광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음… 근데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들 운전자들의 눈에는 우리 패거리가 어떻게 보이려나? 녀석들은 그렇다 치고 웬 원숭이(금동이)까지 함께 난리 치고 있는 걸 봤다면……
“와우! 저 오빠들 제법이네?”
잠깐 들른 첫 번째 휴게실에서 하은이는 여전히 상처 관절을 가볍게 꺾으며 화장실로 향하고 있는 두 녀석을 보며 그렇게 감상을 밝혔다. 친구들을 긍정적으로 봐주는 건 좋지만 하은이까지 웬만한 여자들처럼 녀석들이 춤과 노래가 되는 남자라는 것만으로 호감을 가지고 보는 거에는 또 왠지 약간의 거부감이……
“키워 볼 만 하겠어,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걸? 미스터 랙스가 오늘 같은 차에 타고 있었다고 해도 말이야.”
응? 그런 단순한 반응이 아니었나?
“랙스…? 그건 또 누구냐?”
“LA와 뉴욕시 음반계의 실력자. 3년 전… 내가 그 계통에 관심을 보이니까 화이트 오빠가 제일 먼저 소개시켜줬던 사람이야.”
“…그 정도냐, 저 녀석들?”
“으음~ 미스터 랙스도 인정해 줬던 내 눈과 귀가 갑자기 잘못되지 않았다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 같아.”
뭐야, 이 녀석 나이는 어려도 DP 내에서 뭔가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고 했었는데… 그게 연예 기획사 같은 일이었나? 원판 녀석, 참 별의별 분야를 다 손대고 있나 보다.
그나저나… 나야 막귀라 그런지 녀석들의 춤과 노래를 몇 년째 지겹게 보고 들으면서도 잘은 못 느꼈었는데… 실은 미국 대중음악계의 거물까지 인정할 정도라는 건가? 물론 준엽이와 성원이 콤비는 고교 시절부터 댄스 대회란 대회는 거의 휩쓸고 다니며 연예 기획사라는 곳 몇 군데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은 적도 있긴 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인지 난 녀석들의 춤만 인정할 뿐 노래는 프로 수준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으음… 만약 정말 저 녀석들의 노래 실력까지 확실한 거라면… 그럼 우리나라 연예계 스카우터들은 전부 내 수준이라는 건가? 녀석들이 실력도 없으면서 얼굴만 반반한 걸로 주역을 맡은 자칭 가수들 뒤에서 백댄서나 해야 하는 현실에 열 받아서 연예계 진출을 때려쳤었던 걸 생각해 보면 말이다.
“어이- 유준아! 회비로 테이프 몇 개 더 사자~!”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음악 테이프를 파는 코너 앞에 멈춰 선 성원이가 그렇게 외쳤다. 그래서 나는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그냥 네 돈으로 사~!”
아무래도 회비로 낸 돈 외에는 개털인지 빈손으로 투덜대며 차로 돌아오는 두 녀석들. 저 녀석들… 지금은 비록 저렇게 궁상을 떨고 다니지만 하은이 말대로의 가능성이 있는 거라면, 이거 혹시… 저 녀석들에게는 몇 년 전이나 지금의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미래가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아니 다만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심각한 문제는 녀석들을 발견한 기획자가… 이 녀석, 하은이라는 것과 그 사부 격인 미스터 랙스라는 인물도 하필 원판과 관련되어 있다는 건데… 음… 그래도 정말 가능성이 있다면 녀석들을 밀어 주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걸? 두 녀석 다 내심 예전에 거절했던 일을 후회하는 것도 같았으니…
은근슬쩍 매니저 모드가 된 나는 뒤늦게 화장실 가는 척을 하며 그 앞에 녀석들이 기웃거렸던 음악 테이프 코너로 향했다. 녀석들도 차 뒷자리에서 보여 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을 테니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게…
음… 근데 이거 어째 여행의 본질이 흐려지는 기분이 드는군. 뭐… 얘들은 얘들대로 놀게 두고 난 나대로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면 되는 거긴 하지만…
[ 주인님! 조금 전 지나쳐 오신 회색의 승용차를 주의해 주십시오. ]
< 뭐? 미행…이냐? >
갑작스런 몽몽의 경고에 따라, 난 테이프를 고르는 척을 하며 슬며시 몽몽이 지적한 차를 살펴보았다. 몇 년 전까지 꽤 인기가 있어서 지금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간단히 말해 아주 흔한 차종이었는데, 운전석의 젊은 남자도 그렇고… 뒷자리에 타고 있는 짧은 백발의 노인도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 DP…? 아니면 GM? >
[ 아직 어느 쪽도 확실치 않으며, 심지어 미행 여부도 불확실합니다. ]
< 뭐…야, 그럼 왜? >
[ 조금 전 주인님과 함께 지나칠 때 스캔된 결과에 의하면, 뒷좌석의 노인이 상당한 내력의 소유자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지금까지의 현 시대 인물들과 비교하자면… GM의 첸, 그의 190% 정도로 추정됩니다. ]
이것…봐라? 첸의 두 배에 가까운 내력…? 그 정도면 장난이 아닌데…? 설마 GM의 장로 급까지 출동해서 우릴 쫓기 시작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혹시… 저 노인이 바로 소령, 미령 자매를 입양한 그 장로…?
난 일단 준엽이와 성원이가 좋아할 만한 최신 팝 음악 테이프를 몇 개 구입한 다음 내 차와 친구들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심 긴장한 채 몽몽이 말한 차 옆을 모른 척 스쳐 지나가 봤지만, 특별히 살기나 수상한 기색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얼핏 고개를 돌리는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음, 하은이와 금동이, 그리고 준엽이와 성원이까지 가까이 붙어서 있어서 누구를 본 건지는 아직 모르겠다.
잠시 후.
키트 1호는 다시 출발하고… 나는 새로 산 테이프를 틀어 가능성 있다는 친구들의 매니저 모드를 미약하게나마 수행하는 한편, 미행 당하는 자의 경계 모드로도 왔다갔다하며 운전을 해야 했다. 백발 노인의 차는 예상대로 우리 차를 따라 출발하더니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따라오는 것 같았다.
물론… 고속도로에서는 같은 차와 비슷하게 달리는 경우가 많으니 그것만으로 미행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니 어디… 속도와 차선을 변경해 가며 테스트해 볼까…
서울에서 목적지인 신불산까지 가는 데 걸리는 예상 시간은 대충 5시간 정도. 그중 절반이 넘어갔을 때, 나는 세 번째의 휴게실에 차를 세웠다.
“너, 속도위반 한 번 찍혔지? 조심해, 임마.”
성원이 녀석이 제 딴에는 날 생각해서 하은이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말했다. 녀석이 우리 중에 가장 운전 경험이 풍부하고 차의 속도를 감 잡는 데도 빠르다는 건 알지만… 이런 식의 충고는 좀 억울하군. 미행 차량을 테스트하는 데 집중하느라 단속 카메라를 못 봤을 뿐인데 그걸 말해 주기도 그렇고…
“오빠…! 저 차… 맞지?”
녀석들과 엇갈려서 화장실에서 돌아온 하은이가 미행 차량(이제는 확인된)을 슬쩍 눈짓하며 말한다. 역시… 이 녀석은 눈치채고 있었군.
“음, 그런 것 같다. 니네 DP와 GM,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야 당연히 GM이겠지. 우리 DP의… 음, 유준 오빠도 DP에 대해 많이 안다고 했지? 화이트 오빠가 내게 붙일 정도의 경호원들이 저렇게 무능할 리가 없잖아.”
“임마, 그건 GM도 마찬가지지. 걔들이야말로 이런 일에는 니들보다 더 전문가인데…”
“가만? 말을 하고 보니까 이상하네…? 확실히 그 두 곳의 병력이라면 최근까지도 나와 몽몽이 감시 받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자들이다. 그런데 오늘 저 차는… 으음… 이거 아무래도……”
“하은아. 애들 오면 니가 적당히 핑계 대고 시간 좀 끌어 줘.”
난 녀석들을 하은이에게 맡기고, 세 번째 휴게소까지 착실하게 따라와 주차를 하고 있는 미행 차량으로 향했다. 내가 차 문 앞까지 갈 때까지도 설마…하는 표정이던 운전석의 남자는 내가 똑똑, 차창을 노크했을 때에야 비로소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생?”
중국어…? 역시 GM이었나? 아니, 아니… 어째 내 신분을 아는 것 같지는 않은 눈치인데……
“왜 우리 뒤를 쫓고 있는 거지?”
나 역시 중국어로 답하자, 흠칫 놀란 사내가 머뭇거리며 좀처럼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날 보통 한국 사람으로 생각하고 중국어로 말하면 얌전히 물러가 줄 줄 알았던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당신보다는 뒷좌석의 노인장과 얘기해 봐야겠군.”
내가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떼자 사내는 재빨리 내 앞을 가로막았다. 미행이나 다른 건 잘 못해도 완력만큼은 자신이 있는지 태도부터 당당해져 있었다.
“그만두게!”
낮은 음성으로 사내를 제지한 뒷좌석의 노인이 천천히 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차는 거의 내 키트 1호 수준인데 사내가 문을 열어주는 태도나 분위기는 원판을 모시는 블러디 울프들 수준이다. 그런데… 차에서 내린 노인을 막상 보니, 이건 예상보다도 훨씬 작아서 잘해야 150센치 미터가 될까 말까 해 보였고 옷차림도 허름한 면바지에 공장 작업복 수준의 점퍼에 불과했다. 나이는 한 80… 아니 어떻게 보면 100세는 됨직해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기본 용모가 작고 초라하다 할 수 있었지만, 깊숙이 주름지고 가늘게 찢어진 눈매 속에 감추어진 두 눈동자… 천천히 나를 위 아래로 살펴보는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뿜어 나오고 있는 게 느껴진다고 할까…? 암튼, 보통 노인네는 결코 아니지 싶었다.
“허헛허~!”
문득 노인은 날카로워 보이던 눈매를 부드럽게 풀며 웃었는데, 그 입 안쪽의 이빨만은 젊은이들처럼 고르고 하얗게 빛나고 있다는 게 이채로웠다.
“역시… 늙으니까 눈도 예전 같지 않군. 두 마리 어린 용에 정신이 팔려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거대한 용이 지척에 있는 것도 알아보지를 못했으니……”
응?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럼 이 노인은 나나 하은이가 아니라 준엽이와 성원이를 쫓아왔었다는 건가?
“과연… 샘이 깊고 푸르면 하늘의 용이 모여 들 법도 하지. 역시 해동 땅으로 후계자를 찾아 나서길 잘한 것 같군.”
해동 땅…? 후계자…? 핫~! 이거야 원! 대체 이 노인이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준엽이와 성원이, 그 녀석들 오늘 인기 좋네? 미국 음반계 거물의 제자(하은이)에게 인정받은 데다, 이젠 웬 무협지 풍의 인물까지 나타나서 스카웃 의사를 보이다니 말이다.
“노인장께서 내 친구들을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얘긴가요? 언제부터… 음, 설마 오늘 차로 지나가다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자네 친구들이 어떤 인성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따라다닌 지 벌써 삼 개월이 다 되어 가네.”
녀석들이 막 제대했을 무렵이군. 그 때 어디선가 이 노인을 만났었던 모양인데… 하긴, 원래 나보다 그 녀석들이 더 무협지에 어울리는 타입이긴 했다. 음, 용모라면 나보다도 다소 쳐지는 성원인 빼야 할려나? 어쨌든 다른 신체 조건이야 두 녀석이 비슷한 급으로 나보다는 뛰어난 녀석들이라는 건 예전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물론 무공의 재능이란 건 일반적인 체격만으로 판단되는 건 아니지만 두 녀석이라면……
“아무래도 자네는 벌써 완성이 되어 있는 듯 한데… 필시 이미 훌륭한 사부를 모시고 있겠지?”
“…그렇긴 한데, 꽤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한 천삼백 년 전쯤이죠, 아마?
“으음~ 아깝군, 아까워…! 내가 자네 같은 자를 진작에 발견했더라면……”
“뭐, 말씀은 고마운데요. 이제 슬슬 자신의 신분을 좀 밝히는 게 어떨까요?”
슬며시 약간 빈정대는 투로 바꾸기 시작하자, 인자하게 웃는 표정이던 노인의 눈매도 스윽 다시 날카로워지는 것 같았다. 물론 난 그런 것쯤은 무시한 채 빙글빙글 웃어 주며 말했다.
“내가 실은 저 녀석들의 매니저랍니다. 후후~ 그러니 저 녀석들에 대한 건 후계자로 삼는 거든 무대에서 노래 부르며 춤을 추게 하는 거든… 뭐든 모두 날 거쳐서 계약을 해야 한다는 말씀! 오케이?”
“허어~ 요즘 젊은이들은 갈수록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무래도 좋으니까, 말씀해 주시죠. 뭐 하는 분인지… 내 친구들에게 무슨 일을 시키고 싶은 건지 말입니다.”
내가 처음 보는 노인에게 굳이 삐딱하게 나가 보는 건, 어렸을 때 상상하던 것처럼 무협물 스타일의 스카웃이라고 다 ‘정의의 사도가 되는 길’이 아니며, 암 생각없이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걸 실제 무림에서 몇 번이고 느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비화곡 시절 내가 좋아하고 친했던 무공 고수들 태반은 사회에 나오면 조폭에 살인마인데, 그들도 따로 만나보면 대체로 예의도 바르고(야후 장로를 포함한 몇 명은 제외) 멀쩡하게 보이는 타입인 것이다.
“당사자들이라면 몰라도… 자네에게 말해 줄 의무는 없겠지.”
역시..라고 해야 할까? 처음엔 그래도 여유 있는 은 거 고인의 풍모까지 보이던 노인이었지만, 내가 시비를 걸자 조금씩 위압적인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인은 슬쩍 시선을 돌려 우리 차 쪽을 바라보았는데, 내 친구 어린 용 두 마리께서는 여우(?)와 원숭이 커플에게 홀려 히히덕거리느라 이 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니 이 여행의 핵심인 내가 없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이 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온 것 않군.”
“훗~! 어째 내 입을 막고 싶어하는 눈치신 것 같군요.”
난 아예 노골적으로 말하며 슬쩍 휴게소 뒤쪽 방향을 턱짓해 보였다.
“대체 어떤 고인의 제자였는지 몰라도… 지나치게 광오하고 오만한 젊은이로군.”
말투까지 무협지 풍인 노인이 본격적으로 노기를 띠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