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21-2화 : 마녀의 딸.(2)
“전, 전 다만……”
자룡대주의 음성이 작아지며 말끝을 흐리더니 바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다만 뭐! 다만 뭐냐고!”
[ 주인님! 목소리를 너무 높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전 천주께서 그냥 뛰어내리려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뭐?”
“낙하산을 잊으셨죠? 동생 분을 구출할 생각 때문에…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이긴 하지만……”
“야이 씨~ 당신 지금 장난쳐? 낙하산은 무슨 개뿔이 낙하산이야?”
“예? 그, 그럼 본래 맨 몸으로 뛰어내릴 생각이었다고요?”
“에이 씨! 이 여자가 증말… 내가 언제 낙하산 쓴다고 그랬어? 엉?”
“지, 지저스(Jesus)!”
이 여자, 나하고 얘기할 때는 계속 한국말 쓰는데 감탄사는 영어로 하는 군.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건 무슨 개그도 아니고, 날 막으려 했던 이유가 ‘당신 낙하산 까먹었어’였다고?
“그… 그럼 혹시, 전에도! 그, 2만 피트 상공에서 뛰어내렸을 때도, 그 때도 맨 몸이었다고요?”
“전에도 봐놓고 자꾸 헛소리할래? 당신 뭔가 다른 이유로 방해해 놓고 지금 생쇼……”
내가 제대로 추궁을 할 틈도 없이 그녀로부터 연이어 지저스 크라이스트니 뭐니 영어 감탄사, 내지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아~ 그럼 오키나와에서 계속 하늘을 보면서도 당신을… 내가 천주가 떨어지는 걸 발견하지 못했던 건… 그런… 그게 정말이면 당신은 정말… 오우~”
뭐야…? 정말 몰랐던 건가? 이, 이런…. 제기! 그러고 보니 그게 그럴 수도……
난 내가 부산 발 오키나와 행 비행기에서 뛰어 내려 바다로 떨어지는 과정을 자룡대주가 보았을 거라고…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오키나와 앞 바다에 떨어진 나를 그녀가 바로 건지러(?) 왔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했었던 건데…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자룡대주가 날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건 몽몽이 낙하지점을 미리 알려 줬기 때문이고, 이미 떨어져서 바다에 떠 있는 날 발견한 그녀는 당연히 내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고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제, 젠장! 뭐야! 정말 그래서 그랬던… 에이 씨! 여튼간! 씨아앙~! 당신이 타이밍 깨는 바람에 정말 죽을 뻔했단 말야! 하여간! 썅! 에이 정말……”
여전히 열 받아 있음에도 입 밖으로는 계속 에이 씨… 정도의 투덜거리는 수준의 말만을 내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수 만 배쯤 강렬하고 다양한 욕설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참을 수밖에 없는 건 상대가 여자인데다 날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었던 것도 본의가 아닌… 으… 그래도 이건 너무 어이없는……
[ …주인님! ]
응…? 그러고 보니 자룡대주와 통화하는데 중간에 몽몽도 뭐라고 했던 것 같다.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고 했었던가?
[ 일단, 통화를 끊겠습니다. 부디 진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
< 젠장! 재수 없으려니 오해도 그런…… >
[ 실은, ‘반드시’ 조용히 하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 에…? 반드…시? >
[ 회복에 집중하시라고 밝히지 않았지만… 현재의 장소가 바로 이번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 때문입니다. ]
에…? 뭐시라고라고라~? 그, 그러고 보니 오른 쪽으로 멀찍이 보이는 저 건물과 운동장은… 확실히 학교스러운(?) 분위기잖아? 게다가 상당히 낯익은… 에구~ 진짜다. 사진으로 봤던 에든버러 고등학교의 본관 건물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이를 악물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보았다. 어이없게도 겨우 수십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의 건물 모습이 사진으로 봤던 사건 현장의 기숙사 건물과 일치했다.
< 뭐,야? 정말 여기…인 거냐? >
[ 그렇습니다. ]
< 얼결에 다이렉트 지름길로 온 셈…? 아니, 그러고 보니…… >
놀랍긴 했지만… 비행기 진행 방향과 삐꾸 났다는 거리를 생각해 보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처음에는 나도 이런 다이렉트 코스를 선택하고 싶어서 몽몽에게 계산을 시켜 보기도 했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멀찍이 떨어진 강으로 먼저 낙하하는 길을 선택했던 건… 당연히 낙하지점의 안전성 때문인 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사건 현장 중심부로 직접 뛰어들 경우 나의 등장을 적에게 들킬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여긴 본래 맨몸으로 안전하게(강물에 비해서) 낙하할 수 없는 지점이니 만약 제정신으로(?) 이 루트를 택했다면 어쩔 수 없이 낙하산 같은 걸 이용했어야 했을 테니 말이다.
< 그, 그럼… 어쨌든 직접 떨어지는 바람에 들키지 않고 들어온 셈인가? >
[ 그렇지는 않습니다. 적들은 이미 주인님의 낙하를 알고 있습니다. ]
< 이런 제기~! 그럼 그 나마의 보람도 없는 거잖아? >
[ 아직은 확실한 정황이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별다른 대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적들은 주인님이 사고로 인해 추락사했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그러니 당분간 이대로 회복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
< 그야 누구라도 내가 떨어지는 걸 봤다면… 아니, 가만…? ‘봤다면’이 아니라, 지금도 보고 있는 거 아닌가? >
GM의 보고에 의하면 적들의 근거지이며 소교가 갇혀 있는 곳은 저 건물의 408호인데, 방금 그 408호의 창에 드리워진 커튼 너머로 뭔가… 아니, 커튼 너머의 움직임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커튼 자체가 부자연스럽게 조금 흔들렸던 것 같은데……
[ 그렇습니다. 낙하시의 상황 때문에 경계심보다는 호기심때문에 관찰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금 전 적들 간의 교신에 사용되는 무선 주파수를 찾아냈으니 곧 좀 더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 그, 그래…? >
어쨌든 간에 결국 최대한 빨리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걸 우선시해야 하는 상황인 건 변함이 없다. 그러는 사이 놈들의 관심이 내게서 멀어져 버리면 더욱 좋겠고…… 음, 근데 난 지금 전투복 바지에 상의는 항공점퍼 차림이다. 녀석들 눈에는 경찰 특공대쯤으로 보일 것 같은데… 무리하게 침투하다가 떨어져 죽은… 혹은 죽어 가는 특공대라고… 으으음~ 대한민국 특공대의 망신인 셈인가…? 아무래도 이번 일 끝날 때까지 그냥 홍콩 경찰 소속인 척 하는 게……
< 주인님. 자룡대주로부터 다시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
[ 이젠 연결하지 마. 그냥… 메시지로 응급환자 치료할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해 둬. ]
< 알겠습니다. >
제기…!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네. 그런 웃기지도 않은 오해 때문에 죽을 뻔했었다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덕분에 진신지체라는 경지를 맛보기도 했지만 그건… 아…? 어느 사이 감각이 많이 돌아온 것 같은데…? 어디… 조금씩 움직임을 시도해 볼까…? 목과 어깨… 팔… 허리… 허리 쪽은 아직 인… 웃~!
짜릿!? 갑자기 전기가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소름이 끼치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결국 전신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그 떨림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머리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확실하게 소유권(?)이 돌아오고 있었다. 움찔움찔 움직여 볼 때마다 관절마다에서 두둑, 뚝, 끼릭(?) 소리가 들려왔다.
< 다, 다행히… 기동이 되는… 거 같은데……? >
[ 후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니까, 저희가 아니라 주인님이 사이보그 같아요. ]
< 훗~! 그런가? >
요정 몽의 말에 웃기는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감각이 돌아오고 움직일 수 있게 된 것도 확실한지 몰라도 그 움직임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고, 약간의 움직임만으로도 엄청난 통증이 느껴지는 것도 여전했다. 아니, 통증은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 현재 주인님의 신체 손상도는, 일반적인 인체 회복 기능 기준으로 최소 43시간의 안정이 있은 후에야 식사 등의 기본적인 움직임을 권장할 정도입니다. 현 상황 극복에 필요한 최소한의 움직임을 단시간에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내력의 회복뿐이니, 앞으로의 상황 변화에 동요하지 말고 운기조식에 전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행히 이 곳은 행성 에너지 밀집도가 높은 편입니다. ]
그래, 그게 지금은 유일한 희망인 셈이다. 운기가 곤란할 정도로 막힌 혈도가 없는 데다 기의 흐름이 좋은 편이라 한두 시간 정도만 운기조식을 해도 뭔가 방법이 생길 것 같은… 어? 뭐…야?
< 야. 동요하지 말라는 거… 지금부터였냐? >
[ 예. ]
건물 입구에 얼핏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 싶더니만, 결국 두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사방을 경계하며 잠시 더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결국 천천히 내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둘 다 자동소총을 들고 있는 건 물론이고 방탄조끼까지 입고 있었다.
[ 나오기 전까지의 통신 내용으로 보아 저들은 주인님을 경찰 특공대로 판단하고, 주인님의 생존을 확인하면 포로로 삼아 경찰의 움직임을 추궁할 생각입니다. ]
< 그래……? >
나는 일단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대로 죽은 척 할까…? 아니면 포로가 돼? 그럴 경우 힘들이지 않고 적진에 침투하는 셈이 되는 거긴 한데…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침투만 해 봐야… 그건 침투가 아니라 말 그대로 포로가 되는 거다. 소교와의 재회에, 그것도 구출한답시고 와서 그게 무슨 쪽팔린 꼴인가도 찝찝했지만… 그보다는 놈들의 보스인 ‘탁한’이란 자도 문제다. G.M의 정보에 따르면, 상당히 과격 성향이면서도 머리 회전이 빠른 놈이라는데 과연 놈을 잘 설득해 시간을 끌 수 있을지 어떨지… 쳇…! 요즘 원판에게 몇 번 물을 먹어서 그런가? 말빨에 대한 자신감이 예전 같지가 않군.
“어이-!”
결국 다가선 놈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살아있나? 응?”
으음… 정말이지 어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