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음~ 이제 와서 죽은 척해도 소용없어. 우린 네가 좀 전까지 움직이거나 눈을 뜨고 있는 걸 다 봤어.”
쳇…! 그러기야 했겠지만 높은 데서 떨어진 사람이 좀 움직이다 죽었을 수도 있지, 뭐 그리 단정적으로 나오실 것까지야… 아니, 가만? 그보다는 내가 살아 있는 것으로 단정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일단 말로 떠보는 건가?
눈을 감은 후에도 내가 놈들을 볼 수 있는 건 당연히 몽몽이 영상을 띄워주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G.M.이 제공하고 몽몽이 자막처리(?) 해주는 정보에 따르면… 이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의 이름은 ‘왕소치’. 두꺼운 안경도 그렇고 얼굴만은 얼핏 점잖은 학자로도 보이는 35세의 남자지만 총질, 칼질 양쪽에 모두 능란한 요주의 인물이며 성격은 신중한 타입이라고 한다.
“…뭐, 생사를 확인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말야.”
놈은 그렇게 말하며 철컥 노리쇠를 당기더니 총구를 천천히 내 오른쪽 무릎에 겨냥하기 시작했다. 신중한 타입이라고 해도 설마 누가 봐도 뻔한 상태의 내 몰골을 보고도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고, 게다가 몸에 고통을 가해서 확인해 본다는 취지까지는 이해하겠는데 하필 관절을 노린다는 건 좀……
제기~ 아직 반격을 하긴 어려우니 역시 그냥 눈을 뜨고… 아, 가만? 저 놈 방금 노리쇠를 당겼지? 그럼 역시 뺑끼……?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 때문에 당장 눈을 뜨며 ‘확인할 필요 없이 난 살아 있다’고 밝히고 싶은 걸 참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놈의 총구가 기어이 굉음과 함께 불을 뿜었고 난 뭔가 시작도 하기 전에 어이없이… 그런 식의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지우기가 어려웠다. 총구 앞에서의 초 단위의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내 머리 속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판단에 대한 믿음과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빠르게 교차하고 있었다.
경찰과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총의 장전도 하지 않고 건물 밖으로 나왔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놈이 총의 노리쇠를 또 살짝 당겨 공연히 소리를 낸 걸 보면 역시 날 떠보는 거다. 하지만…! 놈들은 경찰 측의 저격 위험까지 무릅쓰고 여기까지 나온 건데 그냥 떠보기만 하다가 그만둘까…? 나의 생사 여부와 관계없이 확인사살을 해 버릴 가능성도……
“에이~ 그만해요.”
뜬금없이 끼어 든 태평한(?) 목소리가 있었다. 살기 등등했던 소치가 맥이 빠짐과 동시에 짜증이 몰려온다는 표정이 되고 있었다.
“죽었을 거라니까요. 아직 살아 있다 해도 죽어 가고 있는 걸 텐데, 소치 형은 하여간……”
말끝을 흐리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신중하다’ 혹은 ‘겁이 많다’라는 표현을 생략했다는 것이 표정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소치와 함께 건물을 나와서 주변을 엄호하고 있던… 덥수룩한 장발머리에 전체적으로 약간 촌스럽다는 인상의 저 젊은(갓 스물) 녀석 이름은 ‘제임스 현’이다.
“소치 형. 내가 그랬잖아요. 이 자는 인간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있는 높이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고.”
“흥~! 제임스, 네 말대로 그 자가 정말 저 건물 높이 이상에서부터 여기 떨어진 거라면… 그런 거치고는 몸 상태가 너무 깨끗한 거 아닌가?”
소치는 내가 부딪쳤던 건물을 턱짓하며 말했고, 제임스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이 나도 이상하긴 해요. 내가 잘못 본 건 분명히 아닌데… 어쨌든 이미 죽었거나 그러고 있는 중인 건 확실한 거 같은데 그렇게 겁먹을 거 없잖아요.”
“내가 겁을 먹어?”
소치는 한 손으로 제임스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까불지 마! 네 놈이 운 좋게 한 형님께는 인정받았는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 넌 그저 철부지 망나니에 불과해!”
소치의 말에 제임스는 다시 뭐라 빈정대는 말투로 대꾸를 하는 것 같았다. 놈들끼리의 다툼은 일단 반가운 일이고 잘만 이용하면……
[ 주인님! 주의하십시오. 제임스라는 자에게서 적지 않은 내력이 스캔되었습니다. ]
< …뭐? >
[ GM의 챈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
챈이 이 시대에서 처음으로 만난 깊은 내력의 소유자여서 그런지 몽몽도 자주 그를 기준으로…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사진으로 봤을 때의 저 제임스란 놈은 촌스럽고 어리버리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에 기록상으로도 그리 대단한 범죄 경력도 없어서 난 놈을 적 진영 중 소위 ‘구멍’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저 놈이 챈 이상의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건… 맙소사! 막내가 저 정도면 나머지 놈들은…? 보스 탁한은 또 얼마나 고수라는 거지?
[ 현재 그와 대치 중인 소치라는 남자에게서는 별다른 내력이 감지되지 않고 있습니다. ]
< 그, 그래……? >
저 제임스란 놈은 어떤 이유에선지 동료들에게까지 내력을 숨기고 있는 건가…? 그럼에도 보스가 인정했다는 건… 보스인 탁한은 알고 있다는 거고, 탁한도 그에 못지않은 고수거나 그가 바로 제임스의 사부일 수도… 아니, 아니… 현재로서는 확인된 저 소치 외의 모든 적들이 챈 급의 고수라는 최악의 경우도 배제할 수가 없다. 으~ 내가 멀쩡한 몸이었다면 몰라도 하필 이럴 때 이런 놈들을 만나다니……
난 결국 죽은 척에 성공해서 시간을 번다 해도 이대로는 소교를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한두 시간 후면 뭔가 방법이 생길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적들이 일반적인(?) 마피아일 경우다. 그 정도 시간만에 어설프게 복구된 내력과 몸으로는 현대 무기로 무장한 데다 무공까지 고수인 자들을 처치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가 급히 새로운 작전을 짜내 보는 사이, 놈들 간의 짧은 다툼이 끝나고 있었다. 놈들 스스로 화해를 하거나 한 쪽이 한 쪽을 제압한 게 아니라 각자 머리에 쓰고 있는 헤드셋을 통해 보스 탁한이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소치는 결국 신경질적으로 제임스의 멱살을 놔주었다. 놔주었다기보다 거의 팽개치듯 밀어버린 거지만, 제임스는 여유 있게 몸의 중심을 잡더니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놈은 소치와 달리 내게 다가오는 걸음이나 내 옆에 몸을 굽혀 앉는 태도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지금의 난, 현천기공을 이용해 맥을 잠시 멈추는 것도 가능하고 호흡은 더 장시간 안 하고 버틸 수도 있다. 물론 음기를 이용해 피부의 온기를 감추는 건 더 쉬우니 시체를 가장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결국 생각을 바꾼 나는 맥과 호흡을 숨기지 않았다.
“호오~ 아직 죽지는 않았네? 그래봤자 이 상태로는 곧… 어?”
나는 슬며시 눈을 떴고, 내 눈과 마주친 놈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커졌다.
“하이~”
내가 입을 열어 인사하자 놈은 어이없다는 듯 핫~ 소리를 내며 웃었다. 놀라는 것은 아주 잠시였을 뿐, 놈의 얼굴에는 곧바로 매우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거, 이거……”
“뭐야?”
소치도 다가와 날 내려다보더니 곧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탁한 형님! 살아 있습니다. 의식도 있는 거 같고요!”
소치의 보고에 탁한은 “알았다. 데려와라.”라고 짧게 명령하는 것 같았다.
“하핫~! 소치 형, 미안! 내가 틀렸네.”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러는 척을 하면서 어느 틈에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놈은 마치 깜박 잊고 두고 갈 뻔했던 물건이 생각나 돌아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허벅지에 푸욱- 칼을 쑤셔 넣었다. 놈의 칼끝은 비교적 느리게… 그만큼 더 끔찍한 느낌과 함께 피부를 가르고 살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찔리기 전부터도 피하거나 반격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추락 후의 고통이 원체 지독했기에 칼질로 인한 통증이 상대적으로 덜하게 느껴졌다 점이었지만 두 눈 똑바로 뜬 상태로 칼침 맞는 기분은 무지하게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흐음~ 정말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인 건가? 아니면… 대단한 연기력을 가진 남자인 걸까?”
제임스 놈은 그렇게 지껄이며 천천히 칼에 묻은 피를 내 전투복 바지에 문질러 닦아 냈다. 나는 지금까지 ‘소교를 구해야 한다’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이로서 나 자신이 갚아 줘야 할 빛이 생겼다.
“아무래도… 겁쟁이는 네 놈 쪽인 것 같군.”
내가 기어이 한 소리 하자 제임스는 다시 살기를 번뜩이며 칼을 들었고 오히려 조금 물러나 있던 소치가 놈의 팔을 잡아 말렸다.
“그만둬! 형님이 원하는 건 살아있는 자야!”
“그야 뭐… 훗~! 그럼 즐기는 건 조금 뒤로 미루기로 할까? 어디 두고 보자고, 형씨!”
“…너야말로.”
그래… 너 이 XX! 정말 너야말로 두고 보자!
…얼마 후.
나는 결국 놈들에게 포획된 신분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자료로만 보았던 건물 내의 정황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수가 있었다. 1층에서 4층까지 각 층마다 한 명의 병력이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그들 중에 제임스 정도의 내력을 가진 자가 없다는 것은 우선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앞선 제임스와 소치처럼 자동소총과 방탄복을 갖춘 건 물론이고 수류탄에… 심지어 두 놈은 소총에 유탄 발사기까지 달고 있었다. G.M.의 정보에 따르면 그들 네 명 모두 중국 본토의 특수부대 출신이고… 나처럼 삐리리~한 무늬만 특공대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마는 눈빛이나 행동거지로 보아 ‘진짜’인 것이 분명했다. 그 중 한 놈은 폭약 전문가라더니 각 층마다 부비트랩도 장치되어 있는 모양이고… 하여간 첩첩산중인 셈이었다.
어쨌든… 드디어 나는 건물의 408호, 놈들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이곳까지 오는 과정이 그만큼 빡세고 파란만장했던 탓일까…? 구출 작전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건만 단지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숨이 나왔다.
나는 열려져 있는 문으로 들어서며 새삼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적의 위치와 무장 상태 등을 확인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기 위해 재빨리 움직이던 내 시선은… 그러나 곧 한 점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교복으로 보이는 짙은 회색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 눈에는 천년 전의 자태 그대로인 것만 같았다. 그런 소교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날 알아본다…?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날 바라보는 거지? 어째서 네 쪽에서 날……
“이쪽으로… 조심해서……”
소교는 날 업은 제임스에게 그렇게 말하며 실내 한쪽의 침대를 가리켰다.
날 업은… 으음, 제기. 재회의 감상에 빠져 깜박했는데, 난 지금 제임스 놈에게 업혀서 들어온 신세다. 천년만의 재회에 이게 웬 망신… 으… 아니지, 아냐. 이것도 다 작전! 어디까지나 소교를 구하기 위한 작전의 일부다! 위기에 빠진 미소녀를 구출하는 작전이라고 해서 그걸 꼭 잘생긴 미남 특수부대원만 하라는 법은 없는 것처럼, 구출작전도 꼭 스마트하고 멋진 스타일이어야 한다는 건 어느 나라 헌법을 따져봐도… 으음… 설마 있는 건 아니겠… 으아아악~! 썅! 으으으~ 제임스… 저 개부랄티 같은 놈…! 으으으으으~
쪽팔림에 의해 약간의 패닉 상태로 빠져들던 나는, 그 방심한 틈에 침대 위로 거의 던져지다시피 한 충격과 고통 때문에 잠시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귀로 소교의 앙칼진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짓이에요! 이렇게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에게!”
어…? 뭔가 이상한데…? 소교가 지금 제임스, 즉 인질범에게 오히려 큰 소리를 친 건가? 인질이 인질범에게……?
“어이~ 너무 그러지 마. 이자를 여기까지 업고 오느라 나도 꽤 힘들었다고.”
제임스 놈은 소교에게 변명조의 대꾸를…? 인질범이 인질에게……?
“그건… 알아요. 그러니까 내려놓을 때도 좀 친절하면 안 되나요?”
소교는 그렇게 말하며 제임스의 옆을 스쳐 지나 내가 누운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런 소교의 뒤에서 제임스 놈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친절? 하여간… ‘마녀의 딸’답지 않은 계집애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