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22-1화 : 불우한 소녀.(1)
3-3. 불우한 소녀. (1)
소교를 구출하겠다고 홍콩까지 날아온 주제에 침대에 누워 오히려 구출 대상에게 간호를 받는 처지가 된 나는, 그 것만으로도 무지하게 껄쩍지근한 기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고 혼란스러운 건 인질인 소교가 ‘누굴 간호할 수 있는 처지’라는 상황 자체였다.
소교가 바로 마녀 여옥의 딸이라는 사실…? 그건… 내가 이 곳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 정보통인 GM에게 있어서는 소교가 마녀의 ‘숨겨진’ 딸이라는 사실도 그리 대단한 비밀이 되지 못하는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무리 GM 제공 정보의 신뢰도가 높아도, 소교가 하필이면 그런 여자의 딸로 태어났다는 건 지금도 좀처럼 믿고 싶지가 않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소교의 신분이 현재의 상황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더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인질범 일당들이 탈옥시키려 했던 자의 이름은 ‘용석천’.
그는 여옥과 비슷한 급의 삼합회 인물이지만 그와 여옥이 엄청 앙숙이라 서로 목숨을 노리는 사이라는 건 삼합회 내에서도 아주 유명한 사실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째… 소교는 어떻게 자신의 신분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고 있을 수가 있는 거지…?
설마… 소교가 자기 어머니인 여옥을 배신하고 처음부터 이들과 한패로 용석천의 탈옥에 협조한 거였다…?
하지만 왜…? 아니, 이유야 일단 어떤 사연이 있을 수도 있는 거라고 치고… 그렇다고 해도 그걸 이런 식으로…?
이 시대의 소교는 자신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던 친구들을 살해하는 데 협조하는… 그런 아이라고…?
아니, 아니… 이건 근본적으로 말이 안 되는 가정이다.
아무리 재수 없게 여옥 같은 여자의 딸로 태어났다고 해도 소교가 설마……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내 다리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 지혈해 주고 있는 소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지?”
“…예?”
“…설마 네가 저 자들과 한 패인 건 아니겠지?”
소교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힘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움직여 붕대 감는 걸 마무리했다.
“…이걸로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곧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될 거예요.”
“대답해, 임마. 넌 저 자들과 한 패가 아니야! 그렇지?”
“그건……”
빌어먹을! 왜 확실히 대답하지 못하는 거지? 소교, 너 정말……
“전 지금……”
“그녀는 지금 확실히 우리 편이지! 보면 모르겠는가? 응?”
“네 놈은 좀 빠져.”
“뭐?”
또 끼어들었던 제임스 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형님! 이거 우리가 정말 이 곳을 점령한 거 맞습니까? 저 계집애는 마녀의 딸이니 그렇다 쳐도 이젠 포로가 된 경찰 놈까지 우릴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요?”
제임스가 돌아본 자는 놈들의 보스 탁한이었다.
그는 말없이 바닥에 앉아 내 물건들(밖에서부터 압수당했던)을 살펴보고 있다가 그 중 핸드폰(몽몽)을 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할까요, 형님? 제가 한 번… 추궁해 볼까요?”
제임스 놈이 아까 날 찔렀던 칼을 들어 보인 채 건들대며 묻자 탁한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물러나라, 제임스. 너 답지 않은 흉내 내지 말고.”
탁한의 말에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얌전히 뒤로 물러섰고, 탁한은 그런 제임스와 소교의 사이를 지나 내게로 다가왔다.
조금 뜻밖이랄까…? 사진으로 봤을 때와 달리 흉악범의 험악함만이 느껴지는 남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에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과 강렬한 눈빛이 어우러져서 그런가…?
그, 체… 뭐라더라? 혁명아로 유명한 외국인과 비슷한 인상이라는 생각도 들고……
“넌… 홍콩 경찰이 아니로군.”
혁명인질범(?) 탁한은 날 내려다보며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전투복 옷감부터 틀려. 그리고……”
탁한은 고개를 조금 돌려 내 정글도를 비롯한 장비들을 턱짓했다.
“홍콩 경찰이 저 정도 장비만을 가지고 인질 구출 작전을 수행할 리가 없지.”
음… 그러고 보니 내가 지닌 장비라고 해봐야 정글도와 천잠사 묶음, 구급약 세트 정도밖에 없으니 경찰 병력이라 주장하긴 좀 어렵겠군.
뭐… 쪽 팔려서 순간적으로 생각한 적은 있지만 처음부터 꼭 홍콩 경찰로 위장하려던 건 아니었지만서도……
“신분증 같은 건 없고, 심지어 지니고 있는 구급약의 상표도 모두 떼어져 있더군.”
어… 신분증이 든 지갑은 혹시나 해서 차에 일부러 두고 온 게 맞지만, 구급약 같은 경우는 전에 심심할 때 통을 만지작거리다가 저절로 떼진 것뿐이다.
탁한은 거칠게 내 뒷덜미에 손을 대고 헤집어 보며 말을 이었다.
“흐음~ 역시 옷의 상표 같은 것까지 깔끔하게 제거한 건가?”
점퍼의 상표…? 아, 그건 목의 피부에 자꾸 쓸리고 까끌거려서 그랬을 뿐인데……
“형님. 제가 좀 더 철저히 살펴볼까요?”
소치가 나섰지만 다행히 탁한이 고개를 저어 주었다. 온 몸을 낱낱이 조사 당하기 시작하면 딴 건 몰라도 며칠 동안 갈아입지도 못한 속옷까지 소교와 다른 인질 소녀들 앞에 드러나 난감했을 텐데 말이다.
“경찰이 아니라면 더 볼일이 없다. 그보다, 혼자서 우릴… 더구나 칼 한 자루와 피아노 선 같은 것만으로 상대하려고 했던 모양이니, 마녀가 꽤나 비싼 돈을 들여 특급 도수를 고용했거나 아니면……”
탁한은 새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날 지긋이 내려다보더니 문득 상체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 사영회(死影會)에서 온 건가?”
‘사영회’…? 사영이 보스인 그 조직…? 거기 얘기가 왜 나오는 거지? 이 시대의 사영은 대교하고만 부녀지간이고 소교와는 아닌데 어째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나는 일단 그렇게 애매모호한 대답을 해 보았다. 뭐… 어느 쪽이든 아주 거짓말은 아니기도 하다. 사영과 대교가 내게 소교를 잘 부탁한다고 했던 건 비록 천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아~ 그래?”
내 애매모호한 대답에도 탁한은 듣고 싶은 얘길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하긴… 현재의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겠지.”
“이봐! 나에 대해 멋대로 추측하는 건 좋은데… 조금 전 내게 물은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였어? 정말 그래?”
내 반문에 탁한의 표정이 조금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사영회와 관계가 있든 없든 신경 쓸 처지가 아니라면 굳이 귓속말로 물었을 리가 없을 것 같아서 떠 본 거였지만, 그는 곧 표정을 풀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중요한 건 우리가 이 상황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 그 거지. 안 그래?”
“그거야……”
“네가 누구든… 넌 결국 침투 시도단계에서 실패했어. 하지만 이 일은 곧 끝나고 구출하려던 인질도 무사하게 될 거야. 당연히 너 역시 목숨을 건질 수 있을 테고… 그러니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은 이대로 얌전히 누워 있는 거야. 알겠나?”
소교의 안전보장…? 그리고 나도 해치지 않는다…? 그렇게 끝나기만 해 준다면 나도 불만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물론 프로로서 자신의 힘으로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걸 치욕으로 느낄 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난 탁한의 말을 끊으며 슬쩍 소교를 보았다. 물론 처음에는 굳이 소교를 아는 체할 생각이 없었지만, 탁한이나 실내의 누구라도 눈치가 좀 있는 자라면 조금 전 내가 소교에게 놈들과 한 패냐고 묻는 모습에서 이미 감을 잡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눈치채고 있겠지만… 난 저 소녀를 구하러 온 거야. 그녀가 무사할 수 있다면 난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
나는 천천히 소교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말했지만 내 시선을 따라갔던 탁한을 비롯한 인질범들의 시선은 얼마간 더 소교에게 모아져 있었다.
그 중 소치가 먼저 비웃음을 띠며 소교에게 말했다.
“훗~! 마녀는 역시 교활하군. 딸에게는 협상을 시키고 뒤로 칼을 들이대다니 말야.”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소교는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서더니 내게 물었다.
“당신, 당신 정말 어머니가 보내서 온 건가요?”
“…아니. 내가 부탁 받은 건 다른 사람에게서야.”
“그럼… 누구죠, 그게?”
“너의 언니, 아니 언니였……”
언니였던 사람이라고 정정하려고 했지만, 소교는 내 입에서 언니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이미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대, 대교 언니가…? 그, 그게 정말 이예요?”
뭐…야? 소교가 대교를 알고 있어? 난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그럴 리가… 언니가 그럴 리가……”
소교는 내 대답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혼란스럽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젓고 있었지만, 그녀보다 더 혼란스럽고 갑갑한 건 바로 나였다.
젠장~! 막상 사건 현장에 도착하니까, 뭐 이리 이상한 상황의 연속이야?
말단 쫄따구 제임스란 놈이 숨은 고수인 건… 숨은 고수란 게 본래 그런 거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어째서 소교는 인질 같지 않은 인질이며 인질범 보스 탁한은 내게 호의적(?)인 거고, 소교는 또 대교를 이미 알고 있는… 아니 아예 전생과 같은 관계처럼 보이는 거지?
맙소사! 그럴 경우… 대교의 친모도 바로 마녀 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