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몽몽의 위기.(2)
뇌옥마군은 출혈로 인해 흐려진 눈빛으로 간신히 소교와 그 뒤의 다른 인질이었던 소녀들을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소녀들의 시선 속에는 아직도 증오 같은 것보다 공포가 지배적으로 가득했지만 그는 그런 시선이 더욱 견디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뇌옥마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성큼 한 발 더 앞으로 나선 소교가 그의 뺨을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마, 말로만 떠벌일 생각 말아요. 진정 용서를 바란다면 지금부터 행동으로 보여줘요.”
“행동…으로?”
“그래요! 정신 차리고 당장 일어서요! 그리고 당신보다 더 아픈 이 아이를 당신이 책임지고 데리고 나가는 거예요.”
뇌옥마군은 비로소 다시 고개를 들고 소교가 가리키는 소녀, 다리를 다쳤는지 발목에 붕대를 감고 친구에게 기대서 있는 소녀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겠군.”
뇌옥마군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힘겹게, 그러나 확실히 자신의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뇌옥마군은 내게 그랬듯 겉으로 드러난 행동과 달리 은연중 인질들을 보호하려고 애를 써왔고 소교도 그걸 눈치챘던 걸까…? 다른 소녀들은 어떤지 몰라도 소교 만큼은 벌써 그를 용서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몽몽! 건물 내의 부비트랩은 어떻게 되었지? >
[ 탁한의 부하들이 철수하며 일부… 북쪽 계단의 부비트랩을 제거했습니다. ]
한 쪽 통로의 부비트랩을 제거했다는 건 소교를… 결과적으로 인질들 모두의 탈출을 허용하겠다는 뜻인가?
나는 소교에게 안전한 통로를 알려준 후 자리를 떠났다. 좀 더 소교들과 뇌옥마군과의 일을 지켜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았다.
< 전경하에게 인질들이 그쪽 출구로 나갈 거라고 전해 줘. …투항한 범인 한 명과 함께 말야. >
[ 알겠습니다. ]
< 그 다음… 건물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
[ 알겠습니다. 전원 철수하도록 유도하겠습니다. ]
< …좋아. 현재 너의 정확한 위치와 상황은? >
[ 탈출로 바로 앞입니다. 탁한과 그 일당들은 부비트랩에 사용되었다가 회수한 폭탄의 일부까지 회수하여 이 곳에 추가 설치했습니다. 해당 폭탄들은 전자제어 장치로 기폭되므로…… ]
그 것들까지는 몽몽이 제어할 수도 있지만, 다른 수동식(?) 폭탄들이 폭발할 경우 같이 폭발할 것이니 결국 전체 폭발을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 아, 주인님! 지금 탁한이 저를 그의 수하인 소치에게 넘기고 있습니다. ]
< 뭐? >
[ 탁한은 지금 소치와 다른 수하들을 먼저 탈출시키려 하므로 이대로라면 곧 주인님과의 통신이 끊길 것 같습니다. ]
< 젠장! 어디로 가게 되든, 어떻게든 연락해! 그리고, 그리고…… >
[ 자체 보호 시스템 가동… 너무 걱정하지 마십… ]
빌어먹을! 벌써 소리가 끊어지고 있다. 소치 그 쌍BR 같은 놈! 뭐 이런 게 다 있어? 보스가 자기 놔두고 가란다고 칼같이 가버리는 거냐? 으~ 나도 그렇지, 당황해서 몽몽에게 제대로 지시도 못 내리고 말았잖아? 자체 보호 시스템…? 그래봐야 몽몽에게는 공격 기능이 없다. 형태 변화로 기동 능력을 갖출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건 에너지 소모가 너무 급격해 몇 분 움직일 수 없다고 했었다. 태양 에너지를 보충할 수 없는 지하에서라면 더더구나 안 될 테고… 젠장! 탁한 그 놈은 대체 왜 몽몽을 소치에게 넘긴 거야?
예전에는 물론이고, 몽몽을 만난 이후 몇 년 사이에도 몽몽 없이 움직이는 게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갑자기 몽몽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해지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어이없이 몽몽과 헤어지는 건 아니겠지?
나는 뜬금없이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을 지우려 애쓰며 그전에 파악해 놓았던 탁한이 이동했던 코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3층 휴게실로부터 1층의 공동 세탁소로 직접 연결되는 좁은 통로는 몇 년 전 폐쇄되었다고 하지만 그건 벽지를 한 겹 발라 놓았을 뿐 내부는 그대로였다. 그걸 타고 1층까지 내려가니 거긴 또 놈들이 바닥을 한번 더 뚫어놓아 결국 지하까지 다이렉트 코스였다.
도착한 곳은 역시 폐쇄… 아니, 전기 불이 들어오는 걸로 보아 사용은 하는 것 같지만 언제 마지막으로 사람이 들어왔는지 바닥에 먼지가 두껍게 쌓인 창고였다. 여기서부터는 탁한의 지도에도 입구를 정확히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지만, 바닥의 먼지 덕에 놈들의 발자국 발견은 쉬웠다.
나는 아무렇게나 쌓인 물건들 뒤쪽의 하수구 뚜껑 앞에서 잠시 멈춘 채 호흡을 조절하며 망설였다.
여기… 혹시 부비트랩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몽몽이 미리 알려 줬겠지만… 그래도 혹시 그 사이… 쳇…! 나란 놈이 몽몽이 없으면 이렇게 소심한 놈이었나? 아니지… 아니었잖아, 진유준! 나란 놈은… 그래, 막혔을 땐 일단 저지르고 보는 타입!
나는 결국 하수도 뚜껑을 잡고 단숨에 열어 젖혔다.
으~ 이 퀴퀴한 냄새… 하지만… 일단, 아무 일 없군.
그런데 뭐지? 이 아래야말로 오랫동안 폐쇄된 하수구일 텐데… 어째서 희미한 빛이 흔들리고 있는 거지…?
음, 빛이… 흔들린다?
나는 머리를 먼저 살짝 디밀어 상황을 살피고 안쪽에 촛불이 켜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려가 보니 내 키보다 약간 높은 정도의 커다랗고 둥근 통로가 양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한 쪽은 철망으로 막혀 있었고 다른 쪽으로 통하는 방향으로 듬성듬성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나를… 혹은 누구든 유인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은 불을 따라 전진하기 시작했다. 촛불이 있다고는 하지만 극히 일부밖에 밝히지 못하고 흔들리는 불빛이 오히려 음산함을 더하고 있었고 그 불빛에 비친 천장 쪽에 줄지어 설치된 폭탄들… 거기다가 이 거대한 관을 타고 흐르는 공허한 히이이이~하는 소리는 마치… 여자가 조용히 흐느끼는 듯한……
젠장! 액션 다음에는 공포 영화인가? 나 오늘 정말 여러 장르 섭렵하네. 익스트림 액션 서스펜스 심령 공포…
뭐야, 이게?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역시 촛불을 따라 옆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곧바로 커다란 공터 같은 곳이 나왔는데, 본래는 여러 곳의 하수도가 집결되는 지점일 뿐 것 같았지만 지금은… 아니, 언제인지 몰라도 누군가가 아지트로 삼은 듯한 분위기였다.
몇 개의 기름(?) 등불로 밝혀진 한 쪽에 돗자리가 깔려 있었고 그 옆에는 이불 같은 것도 개어져 있었다. 얼핏 노숙자나 영화 속의 괴인이 숨어서 살았다고 할 만한 풍경이었지만, 잘 보면 물건들 하나하나가 비록 낡기는 했지만 예쁘장한 색상과 디자인의… ‘여자의 물건’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물건들 사이에 기대에 앉아 있던 탁한…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으음… 결국 당신이 온 건가? 전경하는?”
“섭섭하겠지만 나 혼자야.”
나는 대답하며 탁한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작은 박스 같은 걸 보았다. 그 박스에서 나온 선 두 개 중 하나는 그의 뒤쪽에 사과 궤짝처럼 쌓여진 폭탄 더미들로 연결되어 있었고 또 하나는 소치와 다른 병력들이 달아났을 통로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탁한은 두 개의 스위치가 달린 박스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는가?”
“…글세.”
“여긴 말이야. 과거 이 에든버러 학원에 다녔었던 한 소녀… 너무나 아름답고 고결한 소녀의 낙원이었어. 비록 어둠 속의… 혼자만의 낙원이었기는 했지만… 그녀에게는 이곳이 위쪽의 화려하지만 끔찍한 지옥에서도 견딜 수 있게 해준 진정한 안식처였다고 하더군.”
누구… 아는 소녀의 얘기인 건가?
“그녀가 만약 소교… 마녀의 딸이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가면서도 꿋꿋한 그 소녀를 닮았더라면… 그렇다면 이런 황량한 낙원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녀는……”
“이봐!”
나는 탁한의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난 본래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타입이긴 하지만, 지금은 좀 곤란해. 먼저… 내 핸드폰 어떻게 했어.”
탁한은 자신의 말이 끊긴 걸 화내야 하는 건지 이런 상황에서도 핸드폰을 챙기려는 내게 어이없어 해야 하는 건지 갈등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곧 어떤 생각을 떠올렸는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이 된다.
“소치가 가지고 떠났지. 나중 당신을 찾아내 복수할 근거로 삼겠다고 하더군. 난 소용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훗~! 이제 보니 소치의 판단이 옳았던 것 같군. 전화번호는 지웠어도 제조번호나 그밖에 꼬리가 잡힐 만한 게 있는 폰이었던 모양이지?”
“그건 아니야. 어쨌든… 그럼 당분간은 소치나 당신 부하들도 내 핸드폰을 어쩌지는 않겠군.”
“글세… 그래서 지금 어쩌겠다는 건가? 그 핸드폰 때문에 내 아우와 부하들을 추적하겠다고?”
“…그래.”
“훗~!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핸드폰인지 모르겠지만… 난 더더욱 당신을 보내 줄 수가 없겠군.”
어? 야?
내가 뭘 어쩔 틈도 없이 탁한은 스위치 중 하나를 눌러 버렸고, 그 순간 몽몽이 납치된(?) 통로 쪽에서 꽈릉! 하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불꽃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