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25-2화 : 천년 전의 원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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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25-2화 : 천년 전의 원한.(2)


“아아~ 그게 말이죠. 저희가 그 기분 나쁜 아저씨에게 끌려가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아직 저희가 외부 데이터 통신이 가능했던 시점에서 몽몽 오빠가 저를 다른 시스템으로 전송시켰어요.”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아니, 잠깐…! 얼핏 생각을 했던 것도 같은데…

으, 맞다.

“임마! 그럼 왜 여태까지 연락을 안 한 거야? 아무 연락이 없으니 당연히 그런 게 안 되는 줄 알았지!”

“본래 안 되는 거 맞아요. 이 시대 무선 데이터 통신망의 대부분은 아직 노이즈가 많아서… 그런 루트로는 저처럼 중요한 프로그램의 전체 이동이 금지되어 있거든요. 만약을 대비한 백업도 마찬가지로 금지고요. 하지만 이번에는 본체의 자체 보호 시스템이 가동된 상태라 한시적인 조건을 걸고 카피되어 나온 거랍니다.”

“카…피?”

“히잉~! 싫어요! 전 원본과 마찬가지란 말이에요. 나중엔 다시 하나로 융합될 거고요. 그러니까 이상하게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카피 본이 원본을 자처한다…? 하긴, 얘 같은 경우는 우리 시대에 횡행하는 불법 복사와는 개념이 틀리겠지?

“어, 미안해! 하여간… 음… 그래, 그렇다면… 이쒸! 그럼 마찬가지잖아? 왜 연락을 이제야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 줄 알아?”

“으웅~ 죄송해요. 하지만 결국 저희들이 우려했던 대로 였었어요. 이동 도중 기억 데이터가 일부 유실되는 바람에 전 한동안 네트워크 속에서 방황해야 했다구요. 제가 어디에 왜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처음엔 무서워서 혼났다구요.”

“그, 그랬냐? 에구~ 사정도 모르고 자꾸 야단쳐서 미안하다.”

“아, 아뇨. 분명히 무섭기도 했지만… 후후~ 덕분에 도중엔 재밌는 일도 많았는 걸요, 뭐.”

녀석… 나름대로 흥미로운 모험 같은 걸 즐겼다는 투로군. 네트워크 속에서의 모험이란 게 어떤 건지 난감이 잡히지가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랬다면 다행인데… 근데 그럼 어떻게 회복해서 돌아온 거냐?”

“남은 기억을 토대로 어찌어찌 주인님 시스템으로 돌아갈 수 있었거든요. 거기 백업되어 있는 데이터를 이용해서 대부분의 기억을 복원할 수 있었어요.”

흠, 난 얼마 전 검은 자금을 빼돌려 재원을 확보하자마자 몽몽이 현존하는 최대 용량의(보통 쓰는 하드 크기 기준) 외장형 하드를 부탁해서 허락했었다. 그때는 그냥 이런저런 정보 저장용인 줄 알았는데 자기들의 ‘기억’까지도 백업해 놓은 모양이다. 하긴, 우리 시대에도 게임 소프트 자체를 복사하면 불법이지만 세이브 파일은 아니지 아마?

“하지만 역시… 백업된 데이터에는 주인님을 따라 신불산으로 떠나기 전까지의 기억만 있어서 또 얼마간 감을 잡지 못했어요. 대체 왜 저만 남겨졌을까… 그게 이상해서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혹시나 하고 우리 사이트에 가봤더니, 거기에 몽몽 오빠가 사건의 정황을 올려 놓았더라구요. 그래서 그 후에야 주인님과 연락할 루트를 찾게 되었지요, 뭐.”

과연 내 시뮬레이션대로 몽몽은 우리 사이트에 납치된 이후의 상황을 올려 놓은 모양이군.

“하아~ 그랬구나. 암튼 고생했다. 근데… 우리 사이트 주소가… 뭐였지?”

“에? 너무 하신다! 우리… 아니 주인님 자신의 사이트 주소도 까먹으셨어요?”

쳇…! 말투를 보니 요정 몸 맞구나.

“그렇게 됐다. 암튼… 너하고 이렇게 일반 전화로 통화하니까 기분이 좀 묘하다, 야. 꼭 진짜 사람하고 통화하는 것 같아.”

“헤에~ 그러세요? 전 마찬가진데… 암튼 나중에도 또 이런 식으로 얘기해 봐야겠네요?”

“그래. 그러자. 그리고 이제…”

“예…? 거기 왜 그렇게 시끄럽죠?”

“어, 이건…”

고개를 들어보니 통화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나타난 헬기가 빠르게 가까워져 오고 있었고 당연히 요란한 엔진음과 바람 소리도 커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기다리던 사람들이 오느라 그래! 조금 있다 다시 통화하자!”

“예! 이 번호는 몽몽 오빠가 가까워지면 중복되니까…”

난 요몽에게 녀석이 임시로 개통했다는 다른 번호와 우리 사이트 주소를 들은 다음 일단 전화를 끊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 머리 위를 헬기가 지나가며 쿠콰콰콰~ 폭포 같은 굉음을 쏟아냈다. 도로 가에 비상 주차, 아니 착륙한 헬기에서 구양대주가 먼저 뛰어내렸고 그 뒤로 자룡대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헬기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 속에서 중국 전통 복장을 입은 구양대주의 옷자락과 자룡대주의 검고 긴 머리채가 휘날리는 모습이 묘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 옛날의 구양대주와는 얼굴도 다르고 백발의 긴 수염도 없지만 그래도 왠지 같게만 느껴지는 지금의 구양대주가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서두른다고 했습니다만… 늦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늦고 빠른 건 아직 모르겠고, 암튼 고맙소.”

“별말씀을…”

“자룡대주. 당신도 왔군.”

나는 비교적 반가운 표정을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자룡대주는 전의 당돌한 태도는 어따 팔아먹기라도 한 듯 쭈빗거리는 태도로 시선을 내렸다.

“저, 저어… 괜찮으십니까? 저 때문에…”

아… 글쿤! 난 아까 이 여자 때문에 맨땅에 헤딩했었지?

솔직히 떨어진 직후에 통화할 때는 정말 졸라 열 받았었는데… 하지만 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새삼 지금 또 뭐라고 하기도 좀 그렇군.

“괜찮아.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나는 그녀에게 피식 한 번 웃어 주고는 헬기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굳이 또 열 받은 모습을 보여주며 군기 잡지 않아도 매우 조신한(?) 태도로 내게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폼이… 기껏 부활한 마군황이 자기 실수(라기도 좀 애매하지만) 때문에 골로 갈 뻔한 사실만으로도 알아서 기가 팍 죽은 모양이었다.

“우선!”

헬기가 출발하자마자 나는 구양대주에게 무선 인터넷이 가능한 노트북을 요청했다. 헬기가 도시를 벗어나기 전 요정 몽에게 필요한 정보를 다운 받기 위해서였는데… 우리 멋진 구양대주께서는 이미 알아서 노트북을 준비해 왔는지 즉시 내게 건네주었다.

이미 전원이 켜져 있고 첫 화면이 GPS(Global Position System, 전 지역 위치 파악 시스템), 일반적으로 지리정보 시스템이라 부르는 게 떠있는 걸로 보아 내가 노트북을 찾을 걸 예상하고 준비했다기보다는 본래 이걸로 다른 팀에서 보내주는 정보를 수신 받는 시스템인 모양이다.

어쨌거나… 정말 여러모로 고마운 노릇이었다.

“먼저 말씀해 주신 지점들은 입력해 두었습니다! 다른 지하무림 식구들이 보내오는 정보가 본사에 도착하면 거기서 또 이 곳으로 전송해 줄 겁니다!”

“본사?”

“예! 일단 저의 비서실을 중간 연락처로 지정했습니다!”

구양대주의 민간인 신분은 자룡대주처럼 경제계의 인물이라고 하더니 기업의 본사가 홍콩에 있었나 보다. 암튼 나는 구양대주에게 받은 노트북을 가지고 헬기 한 쪽 구석에 짱 박혔다.

짱 박힌다고 해봐야 좁은 헬기 안이라 거기서 거기지만 굳이 구양대주와 자룡대주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인 건 물론 보안상의 문제도 문제고… 사실 익숙하지도 않은 노트북과 중국어 OS에 버벅대는 모습을 보이기도 싫어서였다.

다행히 두 사람이 알아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줘서 나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어찌어찌 더듬더듬(?) 웹 브라우저를 띄우고 우리 사이트에 접속해 보았다. 접속과 함께 떠오른 첫 화면은… 요정 몽 녀석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귀염을 떠는 사진(?)이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이렇게 내가 따로 접속해 보는 거 자체가 처음이군. 몽몽이 올린 글은 운영자 게시판에 있다고 했지…? 음… 음음… 소치에게 끌려가는 과정은 대충 추정했던 것과 비슷했었던 모양이군. 하수구 끝에 미리 준비해 놓은 수중 장비를 이용해 어느 정도 포위망을 벗어난 다음 역시 따로 대기 시켜놓은 고속정으로 갈아타고… 에… 그 후에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배로 갈아탔다 이거지?

이 게시판에도 계속 위치 정보를 남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만… 그래, 이거만 알아도 추적에 훨씬 용이해지지!

<구양대주! 자룡대주!>

<하명하십시오, 천주!>

<하명하십시오, 천주!>

음… 그러고 보니 이들과의 전음 대화는 처음인가? 게다가 무림에서도 동시 스테레오(?) 전음은 별로 써본 적 없어서 그런지 느낌이 좀 색다르군.

<방금 내 다른 정보원으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받았어. 지금부터 내가 알려주는 배의 특징을 수색 팀들에게 전달하고 암중에 추적해 줘. 앞서 내린 ‘전파 수색’은 물론 계속 병행하면서 말야.>

<존명!>

<존명!>

흐음~ 구양대주는 그렇다 치고 자룡대주까지 똑같이 반응하니 정말 무림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군. 어쨌든… 하아아~ 이제야 조금 안심이 되기 시작한다. 이들과 이들이 동원하는 지하무림의 도움이 있다면 몽몽이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 중이든 찾아내서 구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좀 아까 했던 내 시뮬레이션의 결과… 그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우리 사이트에 올려진 글에서도 몽몽은 내 예상대로 계속 놈들과 있으며 구조 전파를 발신하는 길을 택했다고 나와있다.

그런데도 왜 자꾸 몽몽이 스스로 탈출을 시도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 그러니까 내가 느낀 소치나 다른 놈들의 성격과 행동 패턴에서 뭔가 불안한 부분이 있었던 건가?

소치 놈이 곧 몽몽에게 뭔가 시도할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 몽몽도 할 수 없이 무리하게 탈출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그런 결론을 내릴 정도로 소치에 대해 잘 알고 있지가 못하다.

대체 뭘 근거로 난… 내 머리 속은 그런 결론을 도출한 거였을까?

나는 안도와 불안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다시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심하게 흔들리는 헬기 안에서 제대로 운기조식을 하기는 힘들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나마 라도 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약… 30분 후.

나는 눈을 뜨고 구양대주를 돌아보았다. 얼핏 그가 무전을 받는 기색이 느껴져서 였는데, 구양대주의 표정만 봐도 기다리던 소식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주! 놈들을 발견한 모양입니다. 현재……>

역시… 결국 지하무림 식구들이 소치를 비롯한 놈들의 배를 발견하고 포위 중이라는 보고였다. 반가운 소식이긴 했지만… 이대로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다른 소식, 전파 쪽은 아직도 잡은 곳이 없나? 전경하 쪽에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쳇…! 어떻게 된 거지? 놈들이 확실하게 해상에서 확인되었는데도 아직 전파는 안 잡혔다고…? 몽몽이 벌써 구조신호조차 보내지 못할 정도로 에너지가 떨어졌을 거 같지는 않은데 어째서……

나는 다음 명령을 잠시 유보한 채 몽몽이 구조신호조차 보낼 수 없는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 떠오른 가능성은 소치가 무심코 몽몽을 전파가 통과할 수 없는 재질로 이루어진 선실이나 상자 같은 곳에 보관을 하고 있는 경우였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소치가 몽몽을 직접 보관하고 있지 않는 상황이므로 오히려 몽몽이 수월하게 그 상자나 선실을 빠져 나올 수가 있었을 것이므로… 그 가능성은 제외.

그렇다면 다음 가능성은 몽몽이 내 시뮬레이션대로 탈출을 시도했다가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인데… 탈출 시도 때 소치가 몽몽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반사적으로 총을 쐈다거나… 여간의 이유로 몽몽이 파괴… 최소한 손상은 입었다…?

빌어먹을! 가능성 있는 얘기다. 기록에는 소치 놈의 사격 실력이 상당히 좋다고 되어 있다. 물론 몽몽은 조직 구조 조정으로 기체를 단단하게 하면 이 시대의 소총류 직격에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만약 탈출을 위한 운동능력과 그 후 바다 위에 떠있기 위해서 필요한 형태 위주로 조정된… 그러니까 결국 충분한 방어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총을 맞았다면… 그래서 그대로 바다 속에 빠진 거라면… 더 이상 자신의 위치조차 알리지 못하는 몸으로… 저 깊고 깊은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버린 거라면…

“놈들을 완전히 포위하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

“존명!”

“우리가 도착하는데 걸릴 시간은?”

“10분… 아니 7분 뒤입니다.”

나는 무릎 위에 있던 노트북을 접어 구양대주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정글도를 잡았다. 몽몽은 로봇에 불과하고 소치는 인간이며 소치에게 고의성이 있고 없고도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이대로 몽몽을 잃게 되는 거라면… 나는 놈을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구양대주가 말한 7분 정도가 지난 후.

내가 탄 헬기는 몽몽이 알려줬던 그대로의 배… 소치 놈들이 타고 있는 배를 중심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문가로 나가 내려다보니 배의 갑판에 서 있는 소치와 다른 탁한의 부하들 네 명이 질린 듯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헬기는 천천히 고도를 낮추며 다가가기 시작했고 놈들은 여전히 각자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자기들이 먼저 헬기를 공격해야 할지 어쩔지 망설이며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소(?) 정상적이지 못한 심리 상태의 내게도 현재 바다 위에 펼쳐진 광경은… 확실히 이채로운 장관이었다. 놈들의 배를 포위하고 있는 수많은 배들은 얼핏 평범해 보이는 어선이며 위압적인 분위기의 순찰선, 멋들어진 요트…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각각의 배마다 타고 있는 사람들의 차림새도 자신들의 배와 맞게 그물질을 하던 어부, 순찰 중인 군인, 항해를 즐기던 민간인…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지만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건 그들 전부가 무장을 하고 소치 놈들을 겨누고 있다는 점이었다.

헬기는 드디어 놈들 바로 머리 위의 10여 미터쯤 상공에 도착했고, 나는 그대로 뛰어내렸다. 내가 갑판 위로 쿠웅! 내려서자 배의 앞머리가 한 순간 가라앉았다 떠오르며 출렁출렁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비틀대던 놈들이 저마다 자기 옆의 뭔가를 잡아 몸을 가누며 그 와중에도 내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놈들 중 누구도 섣불리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고 선두의 소치가 날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너, 넌 대체 누구냐?”

소치는 주변의 바다… 아니 그 바다를 거의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배들을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저들이… 본토의 병력과 해적이 함께… 그리고 다른 놈들도 다 대체 뭐야? 엉? 대체 정체가 뭐야, 넌?”

“…지하무림.”

“뭐?”

“그런 게 있어. 그보다… 네가 가지고 갔지? 내 거.”

“뭐야. 설마, 그… 핸드폰을 찾으러 왔다는 건가?”

“그래.”

“하핫~! 어이가 없군! 네 놈 때문에 챙겨뒀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닥치고, 대답이나 해. 지금 가지고 있어? 없어?”

“훗~! 이미 부셔… 버렸다면?”

“죽어, 넌.”

소치는 다시 핫! 하고 웃으려고 한 듯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듯 팽팽하게 긴장해 있던 손가락 역시 당겨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떨고 있는 놈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고, 놈은 갑자기 침을 튀며 외치기 시작했다.

“젠, 젠장! 뭐야? 멋대로 우리 일에 끼어 든 건 너야! 모든 걸 망친 게 너라구!”

뒷걸음질을 치며 고함을 지르던 소치의 손가락이 움찔 당겨지려는 순간, 나의 정글도가 먼저 스윽- 놈이 포함된 공간을 그었다.

“어, 어? 어?”

깨끗하게 양단 된 자신의 총에서 부품이 투둑거리고 떨어지는 것을 내려다보며 계속 뒷걸음질을 치던 소치가 뭔가에 발이 걸린 듯 비틀대다 털썩 뒤로 주저앉았다. 나는 놈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난 지금 분명 놈을 베어 버릴 셈이었는데… 그런데 왠지 베어지지 않았다. 내게 망설임이 있기 때문인가…? 설마 내 의식 속에도 인간이 아닌 로봇을 해친 건 그렇게까지 죽을죄는 아니라는 인식이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몽몽은 내게 있어 그런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당연히 난 이 자를……

“노, 놓쳤어! 놓친 거라구!”

뭐?

“버린 게, 아, 아니야! 일부로 떨어트린 게 아니야!”

변명…? 거짓말…? 하지만 버벅대며 날 올려다보는 소치의 저 눈빛은……

“내, 내가 갑판에 있을 때… 갑자기 벨이 울려서… 이상했지만 꺼내 들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웬일인지 손에 힘이 빠져서 놓쳤는… 그랬을 뿐이야.”

쳇…! 겨우 이런… 정도의 놈이었나?

“어디지? 아니… 언제쯤이었지?”

내가 묻자 소치는 다시 기억을 더듬어 얌전히 대답해 준다. 나의 걷잡을 수 없던 살기도 이미 어지간히 수그러들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놈 때문에 그렇게 초조하고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허탈하고 억울해서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그건 살기와는 좀 달랐다. 나는 결국 소치로부터 시선을 돌려 그 뒤의 다른 잔당들을 돌아보았다.

“당신들은 어때? 대장의 복수… 시도해 볼 텐가?”

“…나는 현재 부대장 ‘조선’. 복수는 포기하기로 하지. 탁한 대장님이 목숨을 걸어도 이기지 못했다면… 우리에게도 불가능한 일일 테니 말이야.”

대답한 것은 1층에 있던 각진 얼굴의 남자였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문득 소름이 끼치는 걸 느껴야 했다.

이런…! 그러고 보니… 말이 잔당이지 저들이야말로 탁한의 특수부대 시절부터의 부하들인데… 내가 너무 열 받아서 소치 놈에게만 집중한 게 실수였나? 말로는 복수를 포기한다고 하지만… 저 눈빛은 소치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한데… 뭐지…?

나는 비로소 놈들의 기색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 전 대답한 탁한 다음의 계급인 듯한 자도 그렇고 다른 세 명 역시 이미 각자의 총구를 내려트리고 있어서 언뜻 항복의 뜻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표정은 아직 결코 항복한 표정이 아니었다.

저 자… 조선이란 자의 한 손이 뭔가 부자연스럽다.

저 손안에… 설마 또 자폭용 스위치가 있는 건가…? 몽몽이 있었다면 진작 알았을… 젠장! 또 뭔 생각을 하는 거냐, 진유준! 바로 그 몽몽을 찾으러 나선 길이 아닌가! 놈들이 자폭하기 전에 피해야… 아니, 아니… 잠깐. 이 놈들이 지금 자폭까지 생각한다는 건……

“…좋아. 그럼 이번엔 이렇게 너희들을 잡아 경찰에 넘기는 걸로 끝내기로 하지.”

“이번…엔?”

“그래.”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 여차하면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피할 태세를 갖춘 채 조선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복수하고 싶으면 나중 언제든 날 찾아와도 좋아. 물론 그전에 탁한이 먼저 생각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지만 말야.”

내 말에 조선의 안색이 일변했다.

“탁한 대장님이… 아직 살아 계시다는 말인가?”

“도망치느라 바빠서 라디오 뉴스조차 듣지 못한 모양이군.”

조선은 내 말을 믿어야 할지 어쩔지 갈등하기 시작한 듯 했고,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탁한도 다음엔 자폭 따위로 작전을 끝내고 싶지는 않을 걸?”

“그, 그야……”

머뭇거리던 조선의 시선이 슬며시 다른 부대원들에게 향했고, 그는 다른 자들도 동요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내 눈을 마주 노려보기 시작했다. 얼마간 말없이 망설이던 그는 결국 천천히 자신의 손바닥을 펴 그 안의 소형 리모컨을 드러냈다.

“당신… 이름은?”

“진유준.”

“좋아.”

조선은 폭탄의 리모컨을 내 손에 건네주며 굵은 입술 한 쪽을 올려 미소를 지었다.

“우리 부대는 본래 방어가 아니라 공격 전문… 특히 히트앤드런’이 특기지! 당신이 누구 건… 다음엔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기대하지.”

사실 이만한 사건을 일으킨 놈들에게 잘도 ‘다음’이란 것이 있겠나 싶기는 했지만 그건 이들이 알아서 할 노릇이고… 나는 그대로 놈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천주.”

다시 헬기에 오른 나에게 구양대주와 자룡대주는 그렇게 인사했다. 그러나 나는 물론 고개를 저어야 했다.

<여기… 이 지점을 중심으로 전파 수색을 계속해줘.>

내가 가리킨 노트북의 GPS 화면을 들여다보던 구양대주와 자룡대주 중 자룡대주가 먼저 전음을 보내 왔다.

<전파 수색이라면… 저자들이 가져갔다던 천주의 핸드폰을……>

<그래. 그걸 찾으려는 거야. 그 안엔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기억… 아니, 데이터가 담겨 있어.>

<…알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다른 수하들에게 수색 재개 명령을 전달하기 시작한 구양대주와 자룡대주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뭐… 만약 뭔가 불만을 표시했더라도 무시할 생각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으려나? 그보다… 소치 말대로 놈이 몽몽을 어쩌지 않고 그냥 바다에 떨어트렸을 뿐이라면, 몽몽은 꼭 내가 생각했던 형태가 아니더라도 어떤 방법을 써서든 수면 위에 떠서 구조 전파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건… 그만큼 출력이 약한 전파밖에 못 보내고 있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로 역시 바다 깊숙이… 쳇! 아니, 아니야! 몽몽 녀석이 그렇게 어설플 리가 없어! 현대 병기에 의해 파손된 상황이 아니라면 반드시 어떻게든 버티고 있을 거다.

나는 고개를 저어 자꾸 기어오르는 불안감을 털어내며 노트북의 메신저를 켰다.

  • 요몽.
  • …예? 저요?

메신저 화면에 나와 달리 빠르게 요정몽의 답신이 찍혀왔다.

  • 그래 바쁘니까 줄여서 부를게.
  • 우~ 그거 한자 줄인다고 무슨… 하여간 알았어요!

요몽은 언제나 명령 대기 중입니닷!

  • 내가 알려주는 시간대에 놈들의 배가 위치했을 지점, 그리고…

나는 요정몽에게 근처 바다의 해류와 기상 상태 등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몽몽이 떠내려갔을 만한 지점을 계산하도록 지시했다.

요정몽은 자기도 그런 계산을 얼추(?) 할 수는 있지만 보다 완벽하게 할 수 있는 다른 컴퓨터를 해킹해 들어가겠다며 메신저 접속을 끊었는데… 아마도 그런 계통의 연구기관 컴퓨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요정몽 녀석은 언제 결과가 나오는지 예상 시간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전경하나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도 연락이 올 기약이 없으니… 나는 다시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입장이 된 셈이었다.

뭐랄까… 문득 피곤함 같은 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탁한의 부대원들 때문에 잠깐 긴장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리 대단한 내력을 소모한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는 간단히 마무리를 지은 셈이었다.

그런데도 왠지 맥이 빠지는 건… 역시 불과 한나절 정도의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사건을 겪었기 때문일까…? 몽몽을 찾는 일은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노트북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헬기의 창 밖으로 펼쳐진 넓고 푸른 바다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보았던 그 어떤 바다보다 넓고 우주 공간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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