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3-1화 : 미국으로부터의 방문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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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3-1화 : 미국으로부터의 방문객.(1)


1-3. 미국으로부터의 방문객.(1)

대교의 방한 이후 3일째 되는 날, 오전. 대교의 한국 체류 기간과 CF 촬영 일정 정도는 굳이 몽몽을 이용할 것도 없이 공개되어 있었다. 난 모르고 있었지만, 방한 4일째인 내일 서울의 모 이벤트 홀에서 콘서트를 염과 동시에 그 콘서트 현장의 열기를 촬영한 것도 CF에 삽입될 거라고 꽤 오래 전부터 여러 매체를 통해 광고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대교의 팬 카페에 접속해 있는 상태의 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진작에 발견했었지만, 나에게 알리는 건 망설였다 이거지?”

[ 죄송합니다, 주인님. ]

“니가 죄송할 건 없지. TV고 뭐고 아무 것도 안 보고 지낸 건 난데 뭐. 어쨌든… 네가 확인한 바로도 이틀에 걸친 콘서트가 끝나면 다시 일주일 동안 CF 촬영이나 국내 방송에 출연을 하는 등… 이 카페에 올라온 대로의 일정이라 이거지?”

[ 그렇습니다. 대교님이 소속된 기획사에도 같은 일정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다만…… ]

“다만?”

[ 항공편의 예매가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출국일과 시간대는 임의 변경될 수도 있다고 추정됩니다. ]

“그 정도 페인트야 유명인에게는 기본일 테고… 여옥이란 여자 사갈 쪽 움직임은 어때?”

[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만, 현재의 체제로는 모든 루트를 감시할 수 없어 속단은 어렵습니다. ]

“역시 인력을 이용한 확장체제 구축이 필요하다는 건데… 으음~ 문제는 재원 확보……”

나는 의자가 기울어지는 만큼 뒤로 몸을 눕힌 채 천장을 쳐다보며 세상에서 가장 더러울지 몰라도 가장 위대한(?) 단어를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돈… 돈이라……!”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하는 영화나 만화 같은데 보면 보통 근미래를 알고 있다는 장점을 이용하여 큰돈벌이를 하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대표적인 것이 복권 번호를 알아내어 거액의 당첨금을 꿀꺽 해버리는 걸 테고… 어떤 영화에서는 악당이 미래의 잡지 한 권을 확보함으로써 경마며 스포츠 경기에 걸린 돈을 싹쓸이해서 미래를 싸그리 갈아엎을 정도의 거부가 되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몽몽, 너에게는… 가까운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는 없다 이거지?”

[ 그렇습니다. 전 사용자 ‘진’과 함께 출발할 당시 제게 기록된 데이터에는 전 세기에 걸친 언어와 기본적인 문화, 위험 지역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만이 존재했습니다. 현 시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모두 주인님과 만난 이후에 수집된 자료들입니다. 대신, 높은 확률의 분석을 통한 예측은 가능합니다. ]

“하긴, 너라면 경마의 우승 예상마를 뽑아낸다거나 주식의 등락을 예측하는 일도 어렵지 않겠군. 그중 경마가 가장 빠른 방법인 것 같기는 한데 그런 걸로 돈을 버는 건 어째 좀……”

[ 우웅~ 왜요, 주인님? 경마는 국가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사업 아닌가요? ]

“그거야 그렇지만 요정 몽. 모름지기 돈이란 자신의 노력으로 버는 것이 정석…이긴 한데… 솔직히 공돈도 좋긴 좋지…만, 나의 모토는 ‘대한민국 모범청년’ 명백하게 도박 삘이 나는 걸로… 음… 그게 나의 모토… 이긴 한데… 솔직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불과 며칠 만에 거액을 벌어들이는 건 불가능하고… 이번엔 결국 ‘약간 덜 모범적인 방법’이라도 쓸 수밖에 없는 건데… 그러니까 경마든 은행강도든… 아니, 강도질은 좀 오버고 사기 치는 정도는… 음? 내가 왜 이러지?”

젠장. 돈돈돈 하면 돈다더니, 공연히 머리 속이 복잡해지고 말도 꼬인다.

[ 주인님은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으신 거죠? 하지만 기왕에 약간 덜 모범적인 방법까지 각오하셨으니… 이런 건 어때요? ]

요정 몽이 제시한 방법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나는 먼저 피식 웃고 말았다.

“별다른 피해자가 없게… 전 국민의 통장에서 10원에서 100원 정도씩만 빼내서 모으자고……?”

[ 우습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단기간의 재원 확보에 주인님의 죄책감을 최소화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판단됩니다. ]

“몽몽 너까지… 음, 하지만 얘들아. 그건 죄책감 운운하기 이전에 뭔가 좀… 내가 뭐 앵벌이도 아니고……”

일단 거부감을 먼저 표현하긴 했지만, 솔직히 꽤 끌리는 제안이기도 했다. 물론 내 무공이나 몽몽의 능력이라면 합법적으로 돈을 버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니… 음……

“그럴 거면, 차라리 앵벌이 두목을 치는 게 낫지.”

[ 예? 앵벌이 두목이요? ]

“그래. 기왕 불법도 각오한 거, 이번만은… 막나가기로 하자.”

[ 우웅~ 주인님이 막나간다고 하시면 왠지 겁나던데…… ]

“쯧! 짜식이…! 암튼, 몽몽. 지금부터 내가 알려주는 사람들의 재산을 추적해 줘.”

나는 몽몽에게… 통장에 달랑 29만원 있다고 하면서도 온 일가가 떵떵거리고 사는 모 인물을 비롯한…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거물급 정치인들이었으며 현재는 은퇴한 이들의 이름을 몇 명 말해 주었다. 나처럼 정치에 무관심한 녀석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이들이고 나름대로 나라를 위해 뭔가 이룬 인물들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런 것과는 별개로 나랏돈을 해먹어도 너무 많이 해 먹은 사람들……

“소위 돈 세탁을 했겠지만, 넌 추적 가능하겠지? 어차피 날 포함한 우리 국민들의 돈을 앵벌이, 아니 강도질해서 빼돌린 것일 테니 싸그리 빼내 버려.”

[ 알겠습니다. 계좌 추적에 약간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대교님의 출국 전에 가능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

“그래야지. 그리고 아마… 우리에게 필요한 금액은 우스워질 정도로 많을 거야. 꼭 필요한 자금만 챙겨 두고 나머진……”

몽몽이라면 그 돈을 온 국민의 통장에 나누어 입금시키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제대로 공정하게 돌려주는 방법인 걸까? 그럴 경우 근거 없는 입금이니 그자들이 정부에 압력을 넣어 도로 회수해 갈 수 있을 것도 같고… 쳇-! 너무 골치 아픈 돈을 건드릴 생각을 하고 만 건가?

“일단, 같이 챙겨 둬. 어떻게 본래의 주인들에게 돌려줄지는 차차 생각해 보자.”

나는 문득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렇게 간단한 명령을 내린 것만으로 그런 엄청난 일을 처리해 버리다니… 비화곡에서 원판 노릇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쉽게 결정하지 못했을 일인 지도 모른다.

[ 그게 소위 ‘검은 돈’이란 건가 봐요?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 준다면… 결국 주인님은 이 시대의 홍길동! 의적이 되는 셈이네요? ]

“그런 거 아냐, 요정 몽. 난 그저… 가로채도 양심의 가책이 덜할 것 같은 돈을 생각해 냈을 뿐이고… 그게 어떤 돈이든 나 역시 도둑에 불과한 거야. 그걸 부인하고 싶지는 않아.”

[ 흐응~ 하지만 주인님은 대부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 줄 생각이신 거잖아요. ]

“아, 글쎄 그래도 결국 도둑인 거고- 나도 나쁜 놈인 거라니까?”

[ 알아요, 도둑질은 나빠요. 하지만… 주인님은 나쁘지 않아요. ]

“…너, 정말 알아듣긴 한 거냐?”

[ 그럼요. ]

요정 몽의 고집스런 대답에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눈을 뜨고 녀석을 보았다. 아무래도… 이 녀석을 대한민국 모범요정으로 키우기에는 부모격의 나에게 너무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사실 이 녀석에게 인간의 도덕관념을 가르치기에는 기준이 너무 모호하기도 하고……

“암튼, 한 가지는 너희들 앞에서 선언하고 넘어가야겠다. 난 앞으로……”

응? 뭐지?

[ 주인님의 부모님께서 복귀하셨습니다. ]

< 나도 문소리 들었다만… 웬일이시지? …암튼, 이 얘긴 좀 있다 해야겠다. >

오늘은 가게의 정기 휴일이라서 두 분은 간만에 데이트하신다고 아침 일찍 함께 외출하셨었다. 근데 어째서 이렇게 금방 들어오신 거지?

나는 약간 의아한 기분으로 거실로 나가봤는데, 날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어머니의 표정이 뭔가 수상(?)했다.

“아들! 잠깐… 아니, 아예 외출 준비하고 나와라.”

잠시 후.

나는 집 옆의 골목에 서서 다소 어이없는 기분으로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떠냐, 아들!”

“어떠냐뇨? 오늘 그럼 이거 사러 나가셨던 거예요?”

“그래. 니 제대 선물이다.”

“하핫~! 이거 참……”

나는 어이없음에 기쁨이란 양념을 치고 그리고 또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의 도가니탕이 되어 언제까지나 부모님의 깜짝 제대 선물을 바라보았다. 비록, 아무리 봐도 10년은 되었음직한 노구(?)에 상큼할 정도로 촌스러운 디자인을 자랑하는 ‘중고차’라지만… 비화곡에서만 잠깐 잊었을 뿐, 어디까지나 저렴한 서민으로서의 삶에 익숙했던 나에게 마이카 선물은 몽몽을 돌려받았을 때 못지않은 행복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것저것 다 해서 백만 원 들었다. 싸지?”

…기쁨이 조금(?) 줄어드는군.

“이것저것 빼고…가 아니라 다 해서 백만 원이요?”

“그, 그래. 봉두 아저씨 후배가 하도 잘 써서 속은 거의 새 거 같다더라.”

뒤늦게 수습에 나서셨지만, 아버지께서는 이미 ‘이 여편네는 하여간 아무 때나 싸게 산 거 자랑이로군.’이라는 표정으로 인상을 긁고 계셨다.

“아하핫~! 봉두 아저씨 소개면 확실하겠죠. 선배 친구 분이라고 거저 주신 거나 마찬가지지만… 실제로는 못해도 삼 사백은 나갈 것 같은 물건인데요?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짐짓 그렇게 말하며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타보았다.

[ …다음 부분의 삼십 일 이내의 교체를 권고합니다. 브레이크 라이닝, 오른쪽 미등, 우측 창문 모터, 엔진 브라켓…… ]

< …안 고쳐도 되는 부분을 먼저 말하는 게 빠르지 않겠냐, 몽몽? >

[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당분간 운행 자체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

“그럼… 저, 잠깐 몰아 볼게요. 두 분도 타실래요?”

“아니다. 니 아버지께서 봉두 아저씨하고 술 한잔 하신단다.”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아버지의 50년 친구 봉두 아저씨가 골목 끝의 치킨 집에서 치킨을 사들고 막 모습을 드러내고 계셨다. 나는 잠깐 나와서 차량 등록에 필요한 비용하고 보험료 빼고 나면 정말 차를 꽁꼬나 다름없는 차를 소개해주신 아저씨께 인사를 드리고, 다시 차에 탔다. 일단 시동을 걸고 핸들을 잡고 있으려니 잠시 흐려졌던 기쁨이 다시 되살아나서 나는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고 말았다.

[ 흐음~ 주인님, 정말 기분이 좋아 보여요. 이렇게 낡고 원시적인 기계를 선물 받은 게 그렇게 기쁘신가요? ]

< 그야 뭐… 암튼, 내 차가 생기면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게 있었지. >

“가자, 키트!”

음… 역시 썰렁하군. 그럴 줄 알면서도 그냥 해 본… 어? 정말 자동으로 기어가 변속되네? 어라랄~? 전면 계기판까지 갑자기 키트와 똑같이 변화해서 붉고 노란빛이 스륵 스륵~

[ 안녕, 마이클~! ]

< 안녕 키… 아니, 아니… 너냐, 몽몽? >

[ 그렇습니다. 방금… 인기 TV외화에 등장했던 인공지능 탑재 차량 캐릭터, 키트(KITT: Knight Industries Two Thousand)를 언급하신 것으로 판단하여 제가 임의로 제어 장치를 가동시키고 가상현실을 구현해 보았습니다. ]

< 후후~ 난 몽몽 너라는… 이미 어렸을 때의 꿈을 넘어선 초드림머신을 얻었지만… 그래도 추억이란 건 또 느낌이 다른 거라서… 어쨌든 고맙다, 몽몽. >

[ 저보다는 요정 몽이 AI 시스템이 탑재된 캐릭터를 좋아하여 데이터를 수집해 놓았기 때문에 즉시 적용이 가능했습니다. ]

< 어, 그래? 땡쓰다, 요몽~! >

[ 후후- 별말씀을… 달릴 때는 주제가도 틀어드릴게요. ]

< 그… 뚱뚜구따가따강~뚱뚜구따가따강~ 그거 말이지? >

[ …… ]

< 미안하다. 다신 흉내 안내 마. >

[ 주인님은 다 좋은데… 너무 음치예요. ]

< 알았대두, 씨이~ >

몽몽 남매와 키트 놀이를 하며 노닥거리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부모님들은 나의 그런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얼른 시동을 켜니 어머니께서 운전석으로 다가오셨다.

“항상 조심해서 운전해라.”

“예. 걱정 마세요.”

“한 바퀴 돌아보고… 좀 감이 잡히면 공항에 가는 거 잊지 마라.”

“예? 왜요?”

“얘가, 얘가 이렇다니까? 지난주에도 말해 줬건만.”

지난주라… 그러고 보니 산에 가기 전에 언뜻 무슨 소릴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쯧! 이럴 때마다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다. 무림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타임씨와 한판 뜰 생각뿐 다른 모든 일에 신경을 끄고 지내 왔으니……

“그, 왜… 둘째 이모 딸이 미국에서 귀국한다고 했잖니. 그 애 마중 좀 나가라는 거야.”

“에? 그랬…어요?”

둘째 이모의 딸래미는 둘째치고 이모님조차 언급되지 않은 게 벌써 언제부터였는지… 참.

“근데… 제가 꼭 가야 해요? 오늘은 제가 시간이 좀……”

일단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어머니는 스윽 상체를 숙여 운전석의 나에게 낮게 입을 여셨다.

“너 말년 휴가 나왔을 때 큰애 차 끌고 나갔다가 사고 친 거… 누가 아버지 몰래 수습해 줬더라?”

“…어마마마입죠.”

“비행기 도착 시간은 2시 30분이라더라.”

“옙! 확실하게 픽업해 옵죠.”

“근데 너, 그 애 얼굴 기억나니?”

“아뇨. 꼬맹이 시절에만 봤는데요, 뭐. 솔직히… 이름도 잘 생각 안나요.”

어머니께선 낮게 한숨을 내쉬시며 사진 두 장을 내미셨다. 장녀이신 어머니의 둘째 동생 분은… 사실 외가 쪽에선 거의 내놓은 자식이라고 할까…? 좀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어서 어머니의 한숨도 이해는 간다만… 음… 그건 그런데… 이번 한숨은 좀 다른 의미도 섞여 있는 듯 싶었다.

“딴 사진 없나요? 이런 사진들로 어떻게 알아봐요?”

“편지에 그 두 장밖에 없었다. 썬그라스 좀 벗고 찍은 걸 보낼 것이지, 얘도 참.”

어딘지 낯익다는 느낌은… 아무래도 친척이라는 선입견에서 온 느낌일 뿐일 테고, 두 장 다 전신 사진이라 얼굴이 작게 나온데다, 짙은 선그라스를 쓰고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며 얼굴의 일부를 가리고 있어서 아무래도 실물과 매치시키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 애 이름은 하은이, ‘정하은’이다. 그리고 미국 이름이 그리스… 뭐라던가?”

“…’그레이스 정’이라고 여기 사진에 적혀 있네요. 영어로.”

“음, 그래. 그래스정. 방송해서라도 꼭 찾아라.”

“예, 뭐. 어찌 되겠지요. 다녀올게요.”

확실히 공항 로비의 방송이나 이름을 쓴 피켓을 드는 등의 일반적인 방법도 있겠지만……

< 몽몽, 이거 맨 얼굴로 복원해 봐라. >

[ 알겠습니다. ]

< 아, 잠깐! 그 명령은 취소다. >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대교와 관련된 일 외에는 몽몽을 이용해서 편하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해 놓고도 또 습관적으로 녀석을 이용하려들다니… 습관이란 역시 무서운 거다.

얼결에 생긴 마이카 1호를 몰고 출발한 나는 동네를 벗어나기도 전에 길가의 적당한 곳에 차를 붙여 세워야 했다. 추억이나 감상은 감상이고, 역시 현실은 현실……

< …계기판이 너무 정신없어서 안되겠다. >

즉시 키트 모드가 해제되자 차는 본래의 다소곳하고 허름틱한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런 녀석의 계기판 위 보드를 가볍게 두드려 주며 말했다.

“니 본래의 모습이 어떻든… 너도 나름대로 괜찮아. 앞으로 잘해 보자구.”

[ 후후- 이 차도 주인님 같은 분을 만나서 기쁜 것 같아요. ]

“훗~! 설마 그럴 리가……”

몽몽이야 진짜 인간에 가까운 인공지능 로봇이라지만, 난 사실 어렸을 때부터 기계 종류는 뭐든 좋아하고 아끼는 성격이라 ‘단순 기계의 의인화 버릇’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쨌든… 짝퉁 키트 1호, 네 첫 번째 임무는 비운의 공주님을 모시는 일이로구나.”

마지막으로 본 것이 아마도 녀석이 세 살인가 무렵의 꼬맹이였을 때였으니 벌써 십오 년 정도는 된 셈이다. 그때의 녀석은 참 꾀죄죄한 못난이여서 비운의 공주님이라는 표현은 통 어울리지 않았었는데… 지금의 사진을 보면 그야말로 대변신을 해서 늘씬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미녀가 된 것 같았다.

“하긴, 걔도 이제 다 컸으니… 음, 이거 어째……”

모종의 게임 속의 전형적인 설정과 비슷하다고 할까? 어렸을 때의 못난이 여동생이 초특급 미소녀가 되어 등장! 어렸을 때 잠깐 본 걸로 주인공을 계속 연모해 왔네 어쨌네 하는 택도 없는 소리를 해가며 야릇한 분위기의 상황을 조성하는… 내가 전에 그 녀석에게 특별히 잘해 준 적이 있었던가…? 으음~ 바보 같은 생각을 해버렸군. 다른 건 다 둘째치고라도, 나는 친척 아이에게까지 껄떡대는 변태도 아니고… 게임 속에서 ‘평범한 용모’라고 주장하며 실은 미소년인… 싸가지와 줏대 없는 캐릭터도 아니다.

“자아- 이제 정말 가자, 키트!”

[ 잠깐, 주인님. ]

“왜, 몽몽.”

[ 죄송하지만, 허락도 없이 사진의 확대 복원 작업을 시행하였습니다. ]

“그래? 음… 기왕에 했다니 한 번 보자. 하지만 다음에는… 어-? 뭐야, 이거?”

나는 눈앞에 확대되어 떠오른 녀석의 선그라스와 머리카락 너머의 얼굴을 보며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하은… 하은이… 설마 이 녀석이 진하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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