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3-2화 : 미국으로부터의 방문객.(2)
1000년 전 무림의 극악녀 묘랑(苗琅) 진하연…! 그녀도 대교처럼 환생을 했다…? 대교처럼 날 쫓아서…? 아니, 그럴 리가 없잖은가!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원판이고 그 원판 또한 그녀의 친오빠이다.
물론 환생의 개념까지 가면 전생의 남매라는 관계가 계속 유지될 리가… 아니, 일단 사촌이지만 조금 멀어진 건가…? 진하연은 내가 원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 해도 진짜 원판도 아닌 내가 뭐 볼 게 있다고 날 따라 환생할 정도로… 눈에 콩깍지 쓴 대교라면 몰라도… 아니, 아니 젊은 처녀의 마음이란 게 오묘엉뚱할 수도… 아니, 그래도 정도라는 게… 아니… 으으~ 젠장! 아니아니 하다 보니 뭐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 주인님! 사진만으로는 아직 확실한 판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판단은 잠시 유보하셔도 될 듯합니다. ]
“그…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닮은 거 아냐? 이렇게 닮은 애가 하필 내 사촌 동생으로 나타난다고…? 우연치고는 좀… 뭐… 어찌 되었든 반갑긴 하다만……”
그랬다. 난 확실히 녀석이 정말 내 여동생이었기를 바랬고 그래서 떠나기 전에 녀석과 의남매를 맺기도 했던 거다. 물론 녀석도 기쁘게 받아들였었지만 그게 그렇게 강한 감정이었다고는… 어…? 가만?
난 문득 처음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떠올렸고, 그와 함께 전신에 살포시 소름이란 놈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과거의 진하연 그 녀석이… 만약 어떤 식으로든 내가 가짜 오래비였다는 걸 알게 되고… 그리고 그걸 자신들 ‘극악남매에 대한 우롱이며 모독’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면…? 그럴 경우 이 녀석의 환생은 나에 대한 배신감과 복수가 목적인……”
우오오~ 몽몽 제발 그건 절대 아니라고 말해 줘! 내가 진하연 녀석과 지내면서 항상 느낀 것은 ‘적이 되면 X된다’였거늘……
[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습니다만……. ]
“어, 야아~! 너까지 그럼… 으아~ 이건 여자 사갈의 등장 따위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특급 비상사태잖아. 당장 특단의 조치를… 조치, 조치…라고 할 만한 게… 에 그러니까……”
[ 으응~? 이상하네? 주인님은 진하연님을 좋아하시면서, 또한 왜 그렇게 두려워하시는 거죠? ]
요정 몽의 의문에 나는 먼저 에효~하는 한숨으로 답했다.
“그게… 나에게 그 녀석은 그야말로 쥐약이란 말야. 난… 예를 들어 설사 오리지널 원판이 되살아나서 날 노린다 해도 두렵지 않아. 아니, 솔직히 무지 무섭긴 한데… 그래도 까짓거, 그러면서 한판 뜰 수도 있어. 하지만… 진하연 그 녀석은 계속 진심으로 날 대했는데도 난 녀석을 속였고(양심의 압박), 원판과 달리 녀석은 여자이기도 하고(페미니즘 OR 마초 차원?)… 그리고 네가 말했듯, 난 정말 녀석을 좋아한다구(초코파이의 마음.). 그런 녀석이 적이 된다면 내가 어떻게 싸울 수가 있겠어.”
[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
[ 하지만, 주인님. 전생과 달리 현재 주인님은 분명히 그녀의 ‘진짜 오빠’입니다. ]
“…아참. 그렇구나. 비록 ‘사촌’이라는 사족(?)이 붙긴 하지만……”
[ 더구나 아직 아무 것도 확인된 것은 없습니다. ]
“그야 뭐… 하아~ 넌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만약 하연이도 환생 거라면… 으음~ 그래, 알겠다. 일단 확인부터 해보자.”
나는 몽몽의 권유대로 판단을 유보하며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뭔가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어서 마이카가 생긴 기쁨은 저 멀리로 날아간 상태였다.
과거의 의여동생 진하연과 붕어빵처럼 빼닮은 현재의 외사촌 여동생 정하은… 그녀를 마중 나가는 길은 마치 무림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험난했다.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탓인지 몽몽이 뽑아 준 최적 루트까 지도 생각보다 많이 막히는 바람에 여유 있을 줄 알았던 시간이 차츰 촉박해지기 시작한데다……
“아이 쒸~! 또 미친 듯이 끼어 드네? 야 이- 10% 야!”
요정 몽을 의식해서 가급적 고운 말을 쓰려고 노력했지만 가끔씩 개념 없이 끼어드는 차량이나 아무 곳에서고 손님 태우려고 서버리는 일부 택시들의 횡포가 내 인내심을 몇 번이고 시험했다. 특히 일명 깜박이, 방향지시 등을 제대로 켜지도 않고 곡예 운전을 하며 추월해 가는 싸가지 운전자들은……
“으으~ 저 10%! 새또! 죽으려면 저 혼자 죽을 것이지 민폐를……”
[ 진정하십시오, 주인님! 심박수와 호흡횟수가 전투 시에 준한 상태입니다. ]
“그, 그래. 진정해야지. 제기-! 운전을 하면 성격 버린다지만… 나처럼 수양 깊은 고수가 그럼 안 되지. 암!”
말은 그랬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에 큰 형 차 끌다가 사고 났을 때도 내 과실은 적었는데 상대방의 노련하고도 더러운 사고처리에 말려들어 덤태기 썼던 기억도 나고……
“뭐, 지금은 그런 식으로 당할 나도 아니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조금씩 마음을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간만에 운전을, 그것도 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신 사납게 변한 서울 거리에서 하다 보니 성격이… 음, 솔직히 버린다기보다 그냥 본색이 드러나는 거겠지만… 하여간 무림에서 걷거나 마차 타고 다닐 때를 생각하면 나 역시 너무 여유가 없었다는 반성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여유를 가지고 다른 좁은 차로에서 나오는 차들에게도 양보를…
에? 이봐, 이봐! 누가 당신들까지 줄줄이…
씨아…ㅇ… 음, 크흠~ 음…
하여간 양보 운전을 하며 간혹 인사까지 받으니 마음 상할 일도 적고…
윽! 이 새 같은 택시! 벌써부터 깜박이를 켜고 들어간다고 알렸는데도 그거 비켜주기 싫어서 빵빵거리고 지랄을~!
[ …주인님! ]
“안다, 알아. 오랜만이라… 하지만 곧 적응할 거야. 그리고 난 명색이 대한민국 모범청년 아니냐. 난 결코 저렇게 싸가지 없는 운전자의 한 사람이 되진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장담했지만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본 후 몇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그래도 사고 나면, 그리고 지 잘못인데도 나한테 뒤집어씌우려는 놈이 있으면… 나 말리지 마라.”
[ …알겠습니다. ]
마지막 마음가짐은 쬐금 문제가 있는 건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공항에 어지간히 다와 갔을 때쯤에는 얼마간 울컥했던 감정이 거의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도착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2시 30분에 맞출 수 있었는데 주차장에서 또 전쟁(?)을 치르며 시간을 잡아먹고 말았다.
결국… 하은이가 탄 비행기의 승객들이 나오는 국제선 출구까지 갔을 때는 이미 거의 대부분의 승객들이 빠져 나온 후였다.
< 빌어먹을, 얼굴을 알고 있으니 피켓이고 뭐고 그냥 살펴보면 된다 싶었는데 늦어 버렸으니…… >
나는 혹시나 하고 출구가 완전히 빌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항 내 방송을 해 주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첫 만남 혹은 재회부터 약간 꼬이는… 음, 아닌가……?
내가 가려던 장소 앞에 낯익은(!) 소녀 한 명이 서 있었다. 사진과 달리 선그라스를 쓰지 않고 부드러운 흰털 코트의 깃에 살짝 묻혀있는 그녀의 모습은……
[ 저의 복원 사진과 98% 일치합니다. 유효 거리에 도달하는 즉시 영체 스캔을 실시하여 진하연님과의 일치성을 조사해 보겠습니다. ]
< …그래라. 내 영체 확인 기능(?)은 아무래도 대교에게만 작동하는 것 같으니 말야. >
어쩐지… 대교 때와는 달리 그 어떤 확신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하은이나 하연이 어느 쪽으로 불러야 할지 모를 녀석이었지만, 먼 기억뿐인 외사촌을 만난다는 애매함보다 사랑스런 여동생과 재회하게 되었다는 반가움이 더욱 강하게 일어나는 건… 단지 너무나 닮은 용모여서 일까?
아니면 흰 코트에 붉은 핸드백을 메고 있는 모습이 그 두 가지 선명한 색을 가장 좋아하던 진하연이 연상되어서였을까? 혹은……
나는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가기 시작했고 녀석은 달아나듯 무심히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녀석은 핸드백 말고도 자기 몸무게 정도는 나감직한 여행용 가방을 끌고 힘겹게 움직이고 있어서 딱히 걸음 속도를 높이지 않았어도 금방 녀석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부르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바로 녀석이 문득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나까지 멈칫하고 말았다. 걸어가던 방향에는 공중전화 박스가 늘어서 있었고, 녀석이 다시 고개를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장소로 돌리는 것으로 보아… 만나야 할 사람을 찾는 방송을 할 것인가, 아니면 전화를 먼저 할 것인가를 망설이는 것 같았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예민한 내 청력이 녀석의 혼잣말을 놓치지 않았고 잡아냈다.
“역시… 여기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건가, 나란 애는……”
인간의 음성과 그리고 혼자 웃는 얼굴에서 ‘쓸쓸하다’라는 감정이 이렇게까지 절실하게 실릴 수 있는 걸까?
대체 저 애는……
“뭐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건 아니지만……”
젠장! 그 따위 말이 어딨어?
“야! 진하……”
아차, 하연이라고 부를 뻔했다.
“너, 정하은! 맞지?”
녀석이 비로소 날 돌아보고는 그대로 굳어졌다.
“미안! 길 막혀서 늦었다! 많이 기다렸지?”
무지하게 전형적인 대사를 치며 성큼 더 다가섰지만 녀석은 가늘게 내려 감겨가던 눈꺼풀을 선뜻 올려 크고 촉촉한 눈동자를 드러냈을 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러다가 약산성에서의 진하연처럼 어린아이처럼 달려들어 안기는 거 아닌가도 생각했지만 녀석은 계속 기뻐하는 건지 그냥 놀란 것뿐인지 모를 표정으로 날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 기억하겠니? 니 사촌오빠, 진유준이야. 뭐… 어렸을 때 보고 벌써 십 오 년이 넘게 지났으니 기억을……”
“기억하고 있어.”
“엉?”
“기억하고 있다고!”
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녀석은… 불쑥 여행용 가방 손잡이를 내게 내밀었다.
“오빠 차, 어딨어?”
“어, 저쪽 주차장에……”
큼직한 자기 가방을 내게 넘긴 하은이는 얄짤없이 몸을 돌려 내가 가리킨 쪽 출구로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군말 없이 가방을 끌어 녀석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자 요정 몽이 재빨리 나타나 알려왔다.
[ 진하연님은 주인님께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은가 봐요. ]
순간 멈칫했던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 요정 몽… 그런 걸 ‘지나친 친절’이라고 하는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