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3-3화 : 미국으로부터의 방문객.(3)
하연이 용의자 하은이는 주차장에 도착하여 내 차 앞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녀석이 입을 연 것은 내가 자기 가방을 넣으려고 트렁크를 열었을 때였다.
“오빠. 그 가방, 조심해서 다뤄 줘.”
“응? 어… 그래.”
순간 당황했던 건, 녀석이 그 사이 공항 안에서의 애잔 모드는 흔적도 없이 지운 채 묘랑 진하연스런 고고한 표정과 분위기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일단 부탁(혹은 명령?)대로 신중하게 가방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툭? 기본적인 느낌은 그랬지만 한편으로는 꿈틀…? 그런 움직임의 감각이랄까?
“야, 가방에 대체……”
나는 묻던 말을 문득 삼키며 얌전히 트렁크를 닫았다.
다른 사람, 그것도 사촌 오라버니씩이나 되는 이 몸에게… ‘쓸데없는데 관심 가지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나 해!’라는 의미가 살아 숨 쉬는 뻔뻔하고도 당당한 시선과 태도가 이렇게 자연스럽고 합당하게(?) 느껴지다니…
게다가 나의 장엄하게 수수한 키트 1호를 그리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아직도 문을 열고 탈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건……
“야, 너!”
나는 알 수 없는 반발심과 함께 녀석을 부르며 거칠게… 문을 열어 주었다.
“…미안. 춥지? 시동 걸면 금방 따뜻해 질 거야.”
결국은 비굴 모드의 나 진유준…! 이건 어디까지나 에티켓 하면 진티켓, 동생이든 누구든 여성에 대한 친절이 인생의 모토…는 좀 오버인가? 하여간 어디까지나 그런 거지 녀석의 소위 공주님(OR 여왕님) 모드에서 진하연의 향기를 느끼며 주눅이 든 건 결코 아니…지만… 솔직히 약간은……
어쨌든…! 차에 타고 시동을 걸어 놓은 상태에서 몇 분 정도 엔진을 돌리며 대기하는 동안에도 녀석은 계속 말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몽몽이 좀처럼 검사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어서 계속 혼란스런 기분일 수밖에 없긴 했지만… 계속되는 애매모호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일단 입을 열어 새삼 녀석을 불러 보았다.
“하은아!”
나는 무심히 돌아보는 녀석의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안전벨트 꼭 매라. 걸리면 벌금 3만 원이다.”
“…그래?”
“응.”
분위기 반전을 노린 대사치고는 너무 약했나? 그럼……
“아참!”
운전대를 움켜쥐며 조금 크게 소리치자 비로소 녀석이 조금 관심 있는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깜빡했는데… 반갑습니다! 빼어난 미모와 매력을 자랑하는 귀하의 귀국을 대한민국 커플제국군 산하 여동생 지원여단의 대표로서… 진심으로 환영합니닷~!”
나는 짐짓 군발스런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며 군대식 직각 박수를 몇 번 쳐 보였다. 그런 내 썰렁 개그쇼를 지켜본 하은이의 얼굴에 어이없음이라는 글자가 스쳐갔다.
괜한 짓을 시작했다 싶었지만 하다 말기도 뭐 해서 그냥 손을 뻗어 녀석에게 내밀며 말했다.
“15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오신 분으로서 소감 한 말씀 부탁합니다.”
마이크를 쥐고 있는 시늉을 하며 내민 내 손을 힐끔 내려다 본 하은이는 문득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 그리고 고마워 오빠. 제대로 인사도 않고 버릇없이 굴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환영해 주다니……”
‘어허- 새삼 그런 말 말고. 커플부대의 비밀병기로서 솔로 부대원들의 탈영을 가속화시킬 각오라던가, 그런 포부를 말해 보시오!’라는 후속 대사를 준비했었지만… 아무래도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다.
“미안해, 오빠. 나… 정말 반갑고 고마웠는데. 근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정말 진심으로 기쁠 땐 어떻게 해야 할지 그걸 잘 몰라서……”
“됐어, 임마.”
나는 공연히 멋쩍어져서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인사라면 몰라도… 고맙긴 뭐가 고마워. 당연한 거잖아, 동생을 환영하는 건.”
“그런…가?”
“그래. 그런데 솔직히… 나도 내 일에 정신이 없어서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 너의 귀국도 잊고 있었어. 그러니까… 오히려 미안한 건 나야.”
“…그런 거야말로 ‘당연한 일’이야. 오빠도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그런…가?”
역시… 과거의 진하연처럼 이 녀석도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일을 겪고 품은 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연이든 하은이든… 어느 쪽이든 결국 오래비인 내가 오늘만이라도 녀석에게 신경을 써줘야 할 듯 싶은데……
“음… 오랜만이니까, 여기저기 드라이브라도 하면서 구경해 볼래? 다시 가보고 싶은 곳 없니?”
차를 출발시키면서 묻자 녀석은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특별한 곳은 없어. 오늘은… 좀 쉬고 싶어.”
“그래? 그럼… 오늘은 일단 우리 집에서 좀 쉴래?”
보통은 가장 큰 어른인 외할머니 댁을 먼저 방문해서 인사드리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나는 무심코 그렇게 제안했고 녀석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좌석을 조금 뒤로 눕히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녀석을 보며 새삼 ‘그 년은(이모님) 우리 집 사람이 아니다’라고 모진 말씀을 하시던 외할아버지가 생각났다.
그랬던 그 분도 몇 년 전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당신의 말씀을 후회하시며 딸과 손녀를 그리워하셨다고 하지만……
< …몽몽. 분석 아직 멀었냐? >
[ 죄송합니다. 본래 영체 분석에는 시간이 걸리는데, 이 분의 경우 불확실성이 너무 많아 아직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
< 불확실성……? >
[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먼저 알려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이 분의 여행용 가방을 비롯한 소지품을 전반적으로 스캔해 본 결과입니다. ]
변태도 아닌 내가 여자애 가방 속까지 조사해야 하는가 싶긴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으려나……?
< 음… 여자애의 민감한… 거, 뭐냐. 프라이버시에 관한 건 빼고 해라. >
[ 알겠습니다. 우선… 여행용 가방 속 상단의 손수건, 내의 등의 90%가 아직 사용 전이며…… ]
< 어 야아~ 뭐 그런 것까지… 그런 얘긴 빼라니까! >
[ 죄송합니다. 하지만 현재 착용 중인 의복의 통일성과 고가 사양에 비해 단기 소모품류의 상표가 모두 다르며 일부 저가 품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듯합니다. 개인 성향과 일시적인 심리 변화의 변수에 의한 오차를 포함하더라도… 이 곳이 최초의 여행지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 그러니까 니 말은 그…. 여자들의 단기 소모품류가 거의 새 거이며 평소 안 사던 거니까… 결국 미국에서 바로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여행을… 그 것도 ‘여유있는 쇼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
[ 그렇습니다. ]
< 으음… 하지만 그런 요소들만으로 상황을 추정하기는 좀…… >
[ 그리고 또한, 가장 큰 문제는 제 스캔 기능으로도 여행용 대용량 가방 중 30%의 내용물밖에 확인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
< 에? 30%…? 그럼 나머지는? >
[ 70%의 용적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을 현 시대 엑스레이 장비로 비춰보면 역시 단순한 의복류가 들어있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지만, 그것은 외장에 그와 같은 영상 효과가 나타나도록 특수 처리가 된 것입니다. ]
< 그건 또… 무슨 소리냐? >
[ 예. 하은님의 가방에 현 시대에는 물론이고 제가 제작된 시대에서도 발표되지 않은 조합의 합성물질로 보호되는 공간이 있다는 결론입니다. ]
< 뭐시라고고고고고고라~? >
몽몽도 모르고, 스캔할 수도 없는 물질로 코팅(?)된 가방이라고? 나도 아까 가방에서 분명 이상한 느낌을 받긴 했었지만… 으~ 하은이 이 녀석, 이거… 이제 보니 진하연 용의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만땅으로 수상한 녀석이었잖아?
나는 새삼 슬쩍 녀석을 돌아보았지만, 녀석은 여전히 날 살짝 외면한 채 말없이 창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녀석에게 대뜸 ‘너 대체 정체가 뭐냐?’라던가, ‘너 뭔 사고 치고 온 거냐?’라고 물을 수도 없고……
“오빠.”
“으, 응?”
제기, 녀석이 되려 갑자기 먼저 불러서 좀 놀랐다.
“큰 이모 편지에는 오빠가 Soldier… 군인이라고 하던데……”
“어- 그거야 몇 달 전 얘기지. 나 제대했다.”
“흐응~ 듣기로는, 한국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 가야 한다지?”
“모두는 아닌지 모르지만… 하여간 난 다녀왔다.”
“COMMANDO? SEAL?”
“코, 코만도 비스무리한 부대.”
“비스무리……?”
우리 부대의 영문 표기에는 분명히 COMMANDO가 들어가고 훈련만큼은 미국 코만도들 못지 않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근데 녀석이 왠지 영화 코만도의 아놀드 행님을 연상하고 묻는 거 같아서 다소 겸손한(?)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이다.
사실 영화 속 아놀드 행님 정도의 전투력을 갖춘 특공대원이 이 세상에 있기나 할… 어? 아니지…? 지금의 나라면 가능할 수도 있으려나?
나는 현재의 내 능력들을 떠올리며 그것이 실제 전투에서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를 새삼 가늠해 보았다.
현대의 화력 전에서 내 무공의 파괴력은 그리 튀는 위력이 못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파괴력의 비교일 뿐, 무공고수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그럼 오빠. 강하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그야 뭐… 그냥 쌈 좀 하는 편이긴 해.”
다시 애매하게 대답해 주자 녀석은 피식 웃으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근데, 그런 건 왜 묻냐?”
“그냥… 왜, 물으면 안 되는 거였어?”
니가 날 과거의 원수로 인식하고 내 전투력을 사전 탐색해 보는 건 아닌가 찜찜해서 그런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
“그런 건 아니지만… 음, 그보다 네 가방 속에는 정말 뭐가 들어있는 거니? 그게… 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
“…궁금해? 뭔지?”
“그야……”
“그럼 차 세워봐.”
어랏? 이렇게 선선히 가방 속의 비밀을 밝혀 주겠다고 할 줄은… 음, 하여간……
곧바로 적당한 길가에 차를 세우자 하은이가 먼저 재빨리 차에서 내려 뒤쪽으로 향했다. 난 차 안에서 트렁크를 열어 주고 뒤늦게 내렸는데… 그 사이 가방을 뒤적뒤적 하는 듯하던 하은이가 불쑥 작은 권총 하나를 꺼내 날 겨냥했다.
“그거 알아, 오빠? 쓸데없는 호기심은 위험하다는 거……”
몽몽이 실탄까지 장전된 진짜 권총임을 알려왔고 녀석의 눈빛도 어느 사이 서늘하게 변해있었다.
“…장난치지 마라, 응?”
“쳇~! 재미없어. 놀라지도 않네.”
입술을 삐죽이며 총구를 거둔 녀석은 장난감 권총인 양 태연하게 핸드백 속에 넣었지만 몽몽은 분명히 실탄까지 장전된 진짜 권총이라고 했다. 비밀 가방 속의 첫 번째 물건이 저 딴 거면 대체 또 뭐가 나올지……
“후후- 근데 오빤 보기보다 민감한가 봐. 아직 아무도 이 아이를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아이…? 그게 무슨 소리… 엑? 뭐야? 어? 어…? 저건… 저 아이는……!
“자아- 인사해. ‘마이클’이야.”
하은이는 자랑스럽게 말하며 예의 작고 귀여운 털복숭이 아이… 너무나 낯익은 금빛 털의 원숭이를 들어서 내게 보이고는 소중한 듯 끌어안았다. 가방 안에서 갑갑했었던 듯, 인상을 찡그리며 끽끽-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던 금빛 원숭이는 문득 내게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몇 달 전 덴버에서 우연히 만난 아인데… 지금은 내 베스트 프렌드야. 어때, 귀엽지?”
처음에는 내가 아는 녀석의 자손이 아닐까 했지만, 녀석도 날 어렴풋이 기억하는 눈치라는 건……
“마, 마이클? 덴버? 미국? 걔가 우째? 어떻게… 어떻게 걔가 여기… 이 시대에……”
버벅이는 날 보며 하은이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참내-! 총을 겨눴을 때보다 더 놀라네. 얘가 그렇게 이상해? 얼마나 예쁜 애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걔가… 네 가방에……”
“검역 절차가 싫어서 숨겨 왔을 뿐이야. 걱정하지 마, 이 가방 안에는 얘가 무사할 수 있는 장치가 다 되어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가방도 문제는 문제지만 그보다는……”
금빛 원숭이는 하은이의 품에 안긴 채 계속해서 날 보며 고개를 갸웃대고 있었고 몽몽은 대교나 하은이 때와 달리 빠르게 판정을 내렸다.
[ 골격과 모든 구조가 100% 일치합니다. 저 원숭이는 금동이 본인… 아니 본원입니다. ]
“마, 맙소사. 역시 진짜 금동이?”
내 입에서 나온 자기 이름에 금동이는 드디어 기억을 되살린 것 같았다. 꺄아아- 놀란 계집아이 같은 목소리로 반가움을 표현한 금동이가 하은이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마이클?”
하은이의 놀란 표정을 뒤로하고 금동이는 내 쪽으로 펄쩍 뛰어 안겨왔다. 녀석의 두 눈에 인간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을 보며 나 역시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야, 임마! 너! 연옥도의 터줏대감! 전설의 짝퉁 금모신원(金毛神猿)! 나와 천우신의 친구…! 맞냐? 맞냐구?”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 외치는 내 말에 금동이는 꺅꺅대며 대답(?)했다. 아아~ 이럴 수가… 남아 있는 녀석도 있었구나! 1000년의 세월에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녀석도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