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30-2화 : 비행소녀(?).(2)
4-1. 비행소녀.(2)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떼거지 수하들 주체하기도 힘들 정도일 원판이 동생인 하연이까지 동원할 이유도 없을 거고… 더구나 하연이는 유일하게 원판의 말도 잘 안 듣는 녀석인 것 같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 녀석이 날 못 믿는다는 건가…? 아니면……
“…너, 심심했냐?”
“아니, 오빠 친구들도 재밌었고… 하지만 역시 산에 틀어 박혀있는 것보다는 오빠 쪽에서 일어나는 일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역시 그런 건가?
“…이번엔 인질구출 작전처럼 구경할 만한 일은 없어.”
“그건 가봐야 알지. 그리고… 오빠.”
“왜.”
“나, 지금 옷 입는 도중이야.”
“어… 그런가? 미안.”
나는 비로소 녀석의 아직 매우 추워 보이는 차림새를 깨닫고 등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았는데… 차츰 어찌 된 것이, 하연이를 설득해 고집을 꺾게 할 논리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대신 이번 자리에 녀석을 데려 간다 해도 큰 상관은 없지 않나… 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음… 아무리 마녀가 내 정체를 알게 된다 해도 자기 딸의 생명을 구해 준 나를 곧바로 공격하지는 않을 것 같고… 나 역시 소교가 함께 있는 한 ‘대교에게 손떼라’는 얘기를 노골적으로 하기 어려운 자리이다. 잘해야 탐색전 정도가 있을 예정이니 하연이에게도 큰 위험은… 아니, 오히려 녀석의 신분을 밝히면 오히려 만약의 불상사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지 않을까…? 원판과 DP라면 아무리 삼합회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알겠다. 가자, 함께.”
“정말?”
“그래. 대신… 어떤 자리에서든 얌전히 있어야 해. 뭔가 궁금한 게 있어도 나중에 묻고 말이야.”
“후후~ 알겠사와요, 오라버니. 고마워~!”
하연이는 비로소 콧소리를 내며 내 등에 매달려 왔고,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어떤 타입의 여동생을 원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술 냄새를 물씬 풍기며 애교를 부리는 여동생이라니…..
약 2시간 정도 후. 나는 결국 하연이를 대동하고 홍콩 행 비행기에 타게 되었다.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다시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자룡대주는 내게 좌석을 안내하며 지극히 친절하고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야, 나도 반갑긴 한데……”
나는 다소 어색한 태도로 자룡대주가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았다.
“무어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특별히 그런 건 아니고……”
“후후~ 그럼 제가 이런 차림인 것이 이상하십니까?”
사실 좀 그렇기는 했다. 마군황인 나 외에는… 아니 처음에는 내게조차도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지시하고 부려먹는데 익숙한 포스를 뿜어내던 여자가 하필 스튜어디스라는 서비스 업계의 최상위(일부 남자들의 생각일 뿐… 딱히 다른 서비스 직종을 비하려는 뜻은 아님! 어디까지나!) 복장을 하고 생글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음… 그렇다고 “당신은 그런 분위기보다 회사의 깐깐한 여자 상사, 혹은 최전방의 여자 지휘관, 아니면 여왕님(?)가 더 어울려”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겠지?
“이상하긴, 그런 차림도 잘 어울려. 난 다만… 바쁜 사람을 자꾸 오라가라 하려니 미안해서 그렇지 뭐.”
“별말씀을… 그보다 이 분은……”
자룡대주의 고개와 시선이 비로소 창가 쪽의 하연이에게 향했다. 녀석은 처음 따라 나섰을 때만 반짝 생기를 띠었을 뿐 오는 내내 찌뿌둥한 표정이었고, 비행기에 오른 다음에도 여전했다.
“이 녀석은 내 여동생. 어… 이번에 인질이 되었었던 애는 내가 여동생처럼 생각하는 애고, 쟤는 사촌이지만 진짜 여동생.”
“…그렇군요. 어쩐지 많이 닮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그래?”
하연이와 내가 닮았다…? ‘서비스 멘트’…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쨌든 고맙군, 그래.
“그럼… 편안한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난번과는 달리 말입니다.”
자룡대주는 의례적이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고, 나는 의자와 함께 몸을 적당히 뒤로 눕혔다. 이번에도 그리 기분 좋은 목적의 여행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지난번에 비하면 훨씬 여유가 있으니… 가는 도중만이라도 마음을 편히 갖고 자룡대주 말처럼 편안한 여행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유준 오빠……”
“음, 왜?”
하연이 녀석은 뭔가 불만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룡대주의 뒷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 여자도 유준 오빠 조직의 일원인 거야?”
“…그렇지 뭐. 근데 너 어째 자룡대주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자룡대주?”
“아… 그건, 우리 조직에서만 쓰이는… 암호명 같은 거지. 본래 이름은……”
“‘제니퍼 콘웰’, 이 항공사의 회장을 비롯한 경영 수뇌부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극동지역 최고 매니저. 자사의 광고 모델로 나설 만큼 미모에 치밀하고 빈틈없는 경영능력… 나이에 비해 풍부한 인맥까지 구축한 것으로 알려 진 여걸…! 애칭 미스 제이(J).”
“…잘 아네.”
“꽤 유명한 여자니까. 조금 놀랐어. 설마 저런 여자까지……”
“훗~! 이상하냐? 나 같은 놈은 저런 여자를 수하로 두고 있다는 게?”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하여튼, 난 저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왜 또오~ 뭐가 맘에 안 드는데?”
“그냥… 어쩐지 ‘란’을 닮은 것 같아서.”
“란? 니네 오빠의 비서…? 자룡대주와 그 여자는 별로 닮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 그 보다 닮았다면 또 그게 왜 기분 나쁘냐? 너… 란을 싫어하니?”
내 반문에 하연이는 슬며시 입을 다물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린다. 이 녀석… 란을 질투하는 건가? 하긴, 원판 녀석이 대교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대교를 질투할 정도니 원판과 공식적인 관계는 물론이고 기타 등등(?) 다른 곳에서도 무지 가까운 란을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군. 이런 걸 브라더 콤플렉스…라고 하는 건가? 이 녀석의 원판에 대한 애정은 아무래도 지나친… 어? 가만…? 자룡대주와 란의 닮은 점이 용모가 아니라면… 아무래도 자룡대주 역시 란처럼 ‘상급자(OR 마스터)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진 여자인 것 같다는… 그런 얘기 같지? 그럼 이 녀석은 지금 나와 자룡대주의 사이도 질투한다는 건가…? 흐음… 정말 그런 거라면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어쩐지 모르겠네.
“…어쨌든, 같은 비행소녀니까 잘 좀 봐줘.”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자룡대주… 미스 제이는 항공 업계의 인물이니 비행소녀, 넌 가출한 비행소녀……”
내 말장난에 녀석은 작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러네… 큭! 정말 그래. 훗, 쿡!”
음… 작게 쿡쿡대는 정도지만 꽤 오래 웃는 군. 나름대로 회심의(?) 말장난이었기는 하지만 반응이 예상 이상이랄까?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다, 그 말.”
“비행소녀…라는 말?”
“응. 엄마가 처음 ‘비행소녀’라는 말을 썼을 때… 후후후~ 그 때 난 엄마에게 ‘왜 옆집 앤이 하늘을 나는 소녀야?’라고 반문했었지.”
…옆집에 살던 ‘앤’이라는 계집애가 진짜 비행 청소년이었던 모양이군.
“후후~ 오빠는 때로……”
하연이는 슬며시 내 팔을 잡고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오며 말을 이었다.
“엄마 같아서 좋아.”
윽! 어, 엄마? 아빠도 아니고… 아니, 아빠 같다고 해도 그리 달가운 건 아니겠지만… 하여간, 제, 젠장! 내가 그렇게 노티가 나나? 졸지에 비행소녀의 엄마가 되어 버린 나는 매우 얄딱구리한 기분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비행소녀 진하연은 그에 아랑곳없이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쳇…! 하연이 이 녀석은 하여간… 음… 근데… 난 언제부터 녀석을 다시 하연이라고 하게 된 거지? 난 환생자들도 전생보다 현재를 기준으로 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대교만 빼고) 가급적 그들의 현재 신분과 이름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해 왔다. 특히 하연이, 아니 하은이 같은 경우는 전생의 모습이 되살아 날까봐 항상 경계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도 계속 무심결에 진하연이라는 이름과 이미지를 더 떠올리고 있으니… 으음……
< …몽몽. 앞으로는 너도 이 녀석 부를 때 ‘진하연’이라고 하지마. >
[ 알겠습니다, 주인님. ]
[ 하지만…… ]
< 뭐냐, 요몽. >
[ 진하연님은 그래도 진하연님인 것이…… ]
< 현생을 따르는 게 당연한 거라는 거… 너도 알잖아. >
[ 그야… 음~ 하지만 진하연님은 웬지… 전 본래의 진하연님이 더 좋은 걸요? ]
< …뭐가 본래의 하연이냐, 임마. 그런 건 상대적인 것으로… 우린 과거를 알고 있으니까 헷갈리는 것일 뿐이고 지금의 하연이, 아니 하은이가 본래인 게 맞지. 아무리 환생해도 전생과 같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다만…… >
[ 다만……? ]
< 대교… 대교처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환생을 한 경우만 빼고 말이야. >
[ 우웅~ 대교님의 경우는 저도 알겠지만… 그렇지만, 진하연님도 같은 이유로 환생한 거면요? 원판이나 주인님을 만나고 싶어서 말이에요. ]
< 그, 그건…… >
젠장! 요몽녀석… 껄쩍지근한 사안에 잘도 태클을 걸어오네.
< …나도 아직 그건 알 수 없지. 그러니까… 그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우선 하은이로 대하는 게 옳은 거 아닐까? >
[ …주인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래두…… ]
< 쯧~! 여기 비행소녀가 하나 더 있었군. >
[ 에? 어디요? ]
나는 슬쩍 턱짓하여 요몽 녀석을 가리켰지만 녀석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 저…요? ]
< 그려. 이 주인님께서 뭐라 하면 그냥 그런 줄 알 것이지, 아직 디버깅도 채 안 끝낸 어린 인공지능이 어디 감히…… >
[ 치이~ 또 그러신다. 전 버그 없다는 거 아시면 서…… ]
사실, 이렇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것 자체가 버그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굳이 녀석의 ‘개성’을 누를 생각은 없으니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무엇보다 난 귀여운 녀석들에게 너무 약해서리……
[ 아, 그런데 주인님. ]
< 왜 요몽. >
[ 그거요. 바로 그거! 왜 자꾸 저를 ‘요몽’이라고 부르세요? ]
< 어, 그건 그냥… 부르다 보니까…… >
[ 제 분신 1호와 통신할 때는 주로 텍스트 기반이어서 그러셨다는 거 알지만… 설마 말이나 전음을 쓰실 때도 한자 줄이고 싶으세요? ]
< …그려, 나 게으르다 이놈아. 세 글자 말하는 거 귀찮아서 한자 뺏다, 왜? >
[ 우~ 정말 너무 하세요. 처음부터 성의 있게 지어주신 이름도 아니면서…… ]
음… 좀 찔리는 군.
< 그건 애초에 좀 미안하다만… 근데 어감 상 요정몽 보다는 요몽이 쬐금 나은 거 같지 않니? >
짐짓 녀석의 눈치를 살피며 떠 봤지만, 녀석은 포옥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마음대로 부르세요. 어차피 한 끝빨 차인데요, 뭐. ]
윽! 이 녀석이……
[ …주인님! ]
< 어… 왜, 몽몽. >
설마 몽몽까지 합세해서 내 썰렁한 작명 센스를 따지려는 건 아니겠지?
[ 실은, 미처 보고 드리지 못한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
< 그래…? 뭔데? >
[ 이번 사건 도중, 저는 자체보호시스템의 일환으로 제한된 조건하에 코드 네임 요정몽, 변경 코드명 ‘요몽’의 카피 본을 이 시대 네트워크 상에 유출했었습니다. 요몽은 특별 관리 대상 프로그램이므로 백업 및 소스의 손상 가능성이 높은 루트로의 이동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
< 어, 그거야 하는 수 없는 일이었고… 또 나중에 잘 회수해서 요몽과 융합시켰다며? >
[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데이터에 국한된 사항이었습니다. ]
에…? 이건 또 뭔 얘기야?
[ 회수된 카피본의 코드가 일부 변경된 것이 체크되어 현재 조사중입니다. 변경은 극히 일부인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까지 악성 코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만…… ]
카피 본의 코드가 변경되었다…? 어, 잠깐…! 그걸 지금 조사중이라는 건……
< 지금 얘기는 혹시… 요몽 카피 본을 아직 소거하지 않았다는 얘기야? >
[ 그렇습니다. 코드 변경 원인 분석이 끝난 후 보고 드릴 예정이었습니다. ]
흐음~ 사실 좀 아까웠었는데 다행이군. …하지만 이건 반가워만 할 얘기가 아니네? 코드가 변경되었다는 건… 그… 카피 요몽 자신의 표현으로는 ‘한 동안 네트워크 상에서 멍하니 있었다’고 했던 그 때… 그 때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가? 나와 얘기할 때는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잠재적인 바이러스 같은 거에 감염되었다던가… 아니, 그건 좀 말이 안 되지. 이 시대에 요몽을 어쩔 수 있을 정도의 바이러스가 존재할 리가… 윽! 있을 수도 있겠구나! 원판이 가지고 있는 미래 로봇과 포로로 잡혀있는 미래 여자 싸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