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31-1화 : 어사조(御使組)의 태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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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31-1화 : 어사조(御使組)의 태동.(1)


4-2. 어사조(御使組)의 태동.(1)

“평소 천주의 복장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비행기가 홍콩에 상공에 도달했을 때, 자룡대주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숙녀의 식사초대를 받았을 때의 복장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몇 가지 준비해 봤습니다.”

에구, 난 내가 왜 자룡대주가 비행기만 달랑 태워주고 말 것이라 생각했던 거지?

“어~ 그건 그렇긴 하지만… 에- 난 자룡대주가 그런 거까지 신경 써 줄은……”

난 말끝을 흐리며 하은이 녀석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내 쪽에서 먼저 부탁해 놓고 금방 취소라고 하기 미안해서였지만 하은이는 웬일인지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피식 웃을 뿐이었다.

“당연한 건데 뭘 그래? 유능한 ‘여비서’라면 말야.”

“야 임마. 자룡대주는 내 비서 같은 게 아니야. 자룡 대는 본래……”

본래 지하무림 최강의 수호조직이며 마군황 직속 무력집단…이라는 설명을 해주기는 뭐해서 잠깐 망설였을 때였다.

“명칭은 상관이 없습니다만……”

하은이가 굳이 비서라는 말을 강조해서 기분 나빠하는 건가 싶었지만 자룡대주의 표정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앞으로 저희 자룡대를 천주의 ‘어사조(御使組)’로 삼아 주신다면 그 또한 영광이겠지요.”

응? 어사…조…? 어… 그러고 보니 마군황에게는 어사조라는 호위대겸 비서 역할을 하는 집단이 있다고 듣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건 결국 오랜 세월동안 명칭만이 존재하는 유령단체였다고 할까……? 초사마군(貂蓑魔君)에게 들은 얘기지만, 첫 번째 마군황이었던 패도 선배는 당시 구중천(九重天)에서 심혈을 기울여 선발한 어사조를 곧바로 해체해 버렸다고 했었다. 워낙에 혼자 싸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패도 선배의 마군황 취임 당시에 는 워낙에 큰 전쟁을 앞두고 있어서 모든 인력을 그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두 번째 마군황인 나 같은 경우는 애초에 단기 집권을 하고 은퇴할 생각이어서 처음부터 만들지도 말라고 했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 역대 마군황들의 비서실 역할은 그냥 가까운 아무나 임시로 맡는… ‘그 때 그 때 달라요’였던 것이다.

“어사조…라? 흐음~ 필요 하려나, 이번엔?”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룡대주를 보았고 그녀는 기대에 찬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홍콩 공항에 내린 후, 나와 하은이가 자룡대주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공항의 사무실 중의 한 곳이었다. 자룡대주가 미리 비워놓은 모양인 실내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나는 어사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원판과의 문제도 그렇고 이번 일처럼 대교에 대한 일들을 처리함에 있어 가까운 곳에서 항상 도와줄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하기는 했다. 물론 내게는 이미 최고의 개인비서 몽몽과 요몽이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녀석들이 모든 일을 처리해 줄 수는 없다. 소교 구출작전 때의 일만 생각해봐도 구양대주와 자룡대주 등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되었을지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필요할 때만 도움을 청하는 것과 달리 나와 관련된 일에만 완전히 매진하게 하는 건… 음… 아무리 내가 마군황이라고 해도 지금까지 만나본 구양대주나 자룡대주처럼 본래 본업이 있고 더구나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 에~ 가만있자… 혹시……

“자룡대주!”

“예, 천주.”

“혹시 지금 노는 보천구룡대나 마군들 없나?”

“예?”

“직업도 없이 놀고 있는 백수 마군들 없냐고.”

“그, 글세요. 저도 그 것까지는 잘… 아, 하지만 몇몇 마군들은 성향 자체가 현실과 동떨어진 이들이니 평소에는 말씀처럼 ‘놀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긴… 뭐, 좋아! 그럼 그런 마군들이나 보천구룡대 원들 리스트를 좀 작성해 줄래?”

“죄송하지만 저로서도 마군들 전부는……”

“참고 삼으려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알아봐 줘. 어차피 조만간 전원을 내가 직접 만나게 될 테니 말이야.”

“…복명.”

< 몽몽. 전에 얘기했던… 대교 보호를 위한 ‘확장체제’ 있지? >

[ 예. 주인님의 명령대로 실행은 보류 상태입니다만, 조직 구성에 필요한 인력 명단을 1차 적으로 확보해 두었습니다. ]

< 에… 애써 준비해 줬는데 미안하지만, 그 인력… 아무래도 지하무림인들로 써야겠다. 무엇보다 돈으로만 고용한 자들에 비해 ‘믿을 수 있는’ 이들 일테니 말이야. >

[ 그러실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과거의 일백마군(一百魔君)들 데이터를 참조하여 재구성해 본 청사진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

역쉬~ 우리 몽몽이다.

< 훗~! 그러냐? 그럼 곧 진행을…… >

[ 그보다 주인님. 지금 혹시…… ]

응?

“오빳!”

으윽! 놀래라! 정하은 이 기집애… 왜 갑자기 코앞에 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어랏? 그보다 얘가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거지? 어…? 그러고 보니 나 지금……

“대체 뭐야아~?”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와 보니 하은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의 자룡대주 역시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참~ 대체 왜 그걸 또 입은 거야?”

나는 현재 나 자신이 입고 있는 감색 양복과(내가 언제 이런 걸 입었지?) 하은이의 말과 나 자신의 기억(?)을 재검토해 본 다음에야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난 어차피 패션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주는 대로 입을 생각이기는 했는데… 그런 의식이 좀 지나쳤었던 모양이다. 자룡대주가 건네주는 옷을 입어 보았다가 하은이가 고개를 저으면 다시 다른 걸로 갈아입고… 그런 행동을 무의식중에 기계적으로 거듭하다가 하은이가 마지막 옷에도 고개를 젖자 다시 최초의 옷을 입어 버리는 무한루프의 행동을 했던 것이다.

[ 죄송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행동 이상을 체크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

무의식 상태에서 몽몽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움직였었다니, 나도 참……

“어… 그게, 난 그냥… 아무래도 이 옷이 맘에 들어서 말야.”

난 조금 어색하게 나마 웃으며 상황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하은이는 더 어이없어하며 내 어깨 쪽을 손가락질했다. 그제야 생각났지만, 이 옷은 입자마자 좀 끼는 느낌이 들어서 상체에 힘을 주어 봤을 때 어깨 죽지 부분이 부득 소리를 내며 조금 뜯어졌었다.

“하아~ 이런 건 화이트 오빠하고 똑 같네.”

“뭐?”

“뭔지 몰라도 자기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자기가 뭘 입는지, 먹는지 조차 모르는 거 말야.”

“야아~ 누구나 가끔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뭐가 똑 같다고……”

“흥~! 너무 지나치다구, 오빠들은!”

이런 제기……

“아무튼! 빨리 그 옷 다시 벗어. 약속 시간은 아직 남았지? 빨리 나가자.”

“뭐야? 새로 사러 가자고? 야. 난 그냥 저기 멀쩡한 것들 중 아무 거나 입을래. 양복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른 옷들을 가리켰지만 하은이의 태도는 완강했다.

“미스 제이! 당신도 이의 없죠?”

녀석은 자룡대주를 돌아보며 씨익- 극악남매 전용 미소를 날렸고, 자룡대주는 애써 마주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은이 녀석에 끌려가다시피 시내의 백화점으로 가는 동안, 나는 저장된 기억을 좀 더 되돌려 보았다. 물론… 자룡대주가 이미 내가 입을 옷을 준비해 놓았다 고 했을 때 하은이 녀석은 ‘그게 당연한 거’라고 했고 표정도 밝은 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때 굳이 자룡대주를 내 개인 여비서로 치부(그녀의 화려한 진짜 신분을 알면서도)하는 발언을 했고… 그 후로 옷을 입으러 가는 동안은 오히려 입을 다물고 조용히 따라오기만 했었다. 쯧…! 결국 녀석은 ‘옷을 골라주는 권리(?)’를 새치기 당했다고 생각해 삐쳤던 건가? 게다가… 가만 보니 자룡대주의 눈치도 어째 심상치가 않고… 거참…! 마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먼저 다른 마녀들을 만난 기분… 아니 비행 소녀들이었던가? 하여간 중간에서 상당히 부담스럽네 그려.

“그러니까~ 오빠에게는 미스 제이가 고른 엄격한 디비전(Division) 스타일이 어울리지 않아. 역시 발데사리니 쪽이 좀 더……”

하은이 녀석은 의류 전문 층에 도착하자 내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종알대기 시작했고 나는 재빨리 자룡대주의 안색을 살펴 보았다. 그녀는 아직 비교적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기분 탓이었을까? 난 이미 두 여자 사이에서 살포시 불꽃이 일어나는 광경이 눈에 보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사실 천주께는 다소 파격적인 아방가르드 풍도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먼저 저쪽 ‘휴고’ 매장으로 가 보실까요?”

“뭐, 그래요. 아니, 아니… 셔츠는 그래도 이 ‘제냐’로 몇 개 봐두고 가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이런 제기~! 내 눈에 옷들은… 특히 양복은 다 거기서 거기 같은데 대체 뭔 소리들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게다가 오기 전부터 난 분명히 비싼 옷이 싫으니 ‘싸고 적당한’ 걸로 하자고 했는데… 근데 이 매장들 옷은 전부 아무래도……

“야, 야! 잠깐, 잠깐!”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하은이를 말리려 했지만, 녀석은 대뜸 금동이를 내게 맡기는 것으로 오히려 내 행동을 막아버렸다.

“후후~ 오빠는 잠시만 가만있어. ‘내가’ 오늘 오빠의 썰렁한 패션을 조금이라도 개선해 줄 테니까 말야.”

하은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룡대주도 지지 않고 맞받는다.

“그렇습니다. ‘제가’ 알아서 코디 해 드릴 테니 천주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젠장…! 무서워서 못 말리겠다. 결국 난 두 여자가 정작 당사자인 나를 뒷전에 둔 채 경쟁적으로 무수한 옷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걸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패션 매장을 앞에 둔 그녀들이 뿜어대기 시작한 아우라(?)도 나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으며 너무나 낮선 용어들이 난무하는 토론 역시 끼어 들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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