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31-2화 : 어사조(御使組)의 태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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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31-2화 : 어사조(御使組)의 태동.(2)


4-2. 어사조(御使組)의 태동.(2)

그로부터 몇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을 때… 당연히(?) 아직 쇼핑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 시간동안 계속 두 여자들의 쇼핑에 질질 끌려 다니는 폼세로 옷과 액세서리를 걸쳐 보는 모델 역할이나 향수를 맡아보는 실험용 몰모트 신세가 되어야 했다. 물론 금동이를 봐주는 보모 역할은 기본이었고 말이다.

사실… 난 아들만 있는 집의 막내답게 어머니께 딸래미 노릇까지 하느라 꽤 자주 어머니의 쇼핑을 따라 다닌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여자들의 쇼핑 시간이 얼마나 길어 질 수 있는 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보통의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의 쇼핑에 동행하고도 잘 버티는 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나도 오늘 이 두 여자를 따라 다니는 쇼핑은 영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 2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한 번 딴지를 건다고 걸어 보기는 했었다.

“이봐, 여자 분들! 난 분명히 싸고 적당한 거로 하고 싶댔잖아! 근데 지금까지 댁들이 고른 옷은 물론이고 넥타이, 넥타이 핀, 향수, 손수건 하나까지… 나참! 좀 전의 그 넥타이 핀 하나만으로도 라면이 대체 몇 그릇 인지 아냐? 최소한 수 천 그릇이라구. 난 지폐나 수표를 몸에 감고 다니는 건 싫어!”

이럴 때 하필 왜 라면 값과 비교할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두 여자에게 내 말은 전혀 먹혀 들지가 않았다.

“오빠! ‘싼 게 비지 떡’이란 말도 몰라? 이 정도는 최하의 레드 라인이라고.”

“야, 비지떡도 나름대로 맛있어.”

“설마 천주께서 이런 정도의 매장에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이봐 자룡대주. 난 당신처럼 상류층 사람이 아니야.”

나름대로 설명을 덧붙였었어도 두 여자는 잠깐 날 무시하거나 의아해 하는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1시간 정도가 더 지났을 즈음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걸고 이의를 제기해 보았었다.

“어이~ 이봐들! 이제 슬슬 약속시간에도 신경을……”

“아직 멀었잖아! 조금만 더 오빠. 금방 끝난다니까?”

“그렇습니다, 천주. 만약의 경우에는 10분 내에 약속 장소까지 모실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해 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시간의 홍콩 도로 사정을 몽몽이 계산한 바로는 아무리 빨라도 30분 거리라는데 대체 무슨 루트를 준비해 놨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내 두 번째 항의는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씹히고 말았었던 것 이다.

스스로 생각해 봤을 때… 난 정말 남자치고는 여자들의 쇼핑을 잘 따라 다니는 편인 것 같다. 결국 오후 시간을 전부 탕진한 현재의 시점까지도 겨우 두 번밖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입으라면 입고 벗으라면 벗으며 따라 다녔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조금 전, 아니 약 한 시간 전부터 두 여자는 마침내 본래의 목적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오빠. 이 빨간 털모자 어때? 어울리지! 그치?”

“…그래. 그런 것 같다.”

“…천주! 거기에 이 흰 목도리를 두르니까 더 귀여워요.”

“그렇…군.”

“꺄아~ 오빠! 이 빨간 장갑 낀 모습 좀 봐!”

“저기… 하은아.”

“어머? 어머, 천주! 이렇게 귀여운 바지도 있어요!”

“이, 이봐 미스 제이……”

으~ 안 되겠다.

“두 사람! 이제 그만 좀 해 줄래? 응?”

나는 결국 참을 수가 없어서 인상을 화악 구기며 말했고, 그제야 두 여자는 조금 찔끔 하는 기색을 보이며 행동을 멈추었다. 난 두 여자가 번갈아 입히고 감고 씌워준 온갖 아기 옷과 용품으로 치장된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동이’를 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이제 그만! 끝! 디 엔드으~! 투비 컨디션(?) 없음!”

“오빠아~ 왜에?”

“뭐가 왜야, 임마! 대체 오늘 두 사람 다 뭐하러 여기 온 거야?”

“죄, 죄송합니다, 천주. 원숭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만……”

“그래 오빠. 금동이가 장갑 낀 거 재밌고 귀엽지 않 아? 봐. 금동이도 좋아하잖아.”

“넌 저게 좋아하는 걸로 보이냐? 금동이가 털이 없냐? 또 털장갑 끼고 털모자 쓰게? 응? 아,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이봐 자룡대주! 여기와서 여태까지 대체 몇 시간이나 지난 줄 알아? 엉? 어째서 아직까지 내가 옷은 고사하고 손수건 한 장도 못 사야 하는 거냐고!”

“실은… 지금까지의 모든 물건들은 이미 계산을 끝냈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필요하실 때……”

“뭐, 뭐야? 설마 그걸 전부 산 거였어? 이봐아- 난 나중에 이런 매장 차리고 싶은 게 아니야. 난 다만 오늘 당장 입을 옷 한 벌 사고 싶은 거였잖아! 그러니 그 외에는 전부 물러! 취소! 알겠어?”

날 위해 거금을 쓰고도 야단을 맞게 된 자룡대주는 다소 섭섭한 눈치이면서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지만 하은이는 아직 눈곱만치도 반성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 모처럼 느긋하게 쇼핑 한번 하는 가 했더니…
알았어 오빠. 금동이 거는 나중에 더 사기로 하고 지
금부터 다시 진짜 오빠가 입을 옷 보러 가자.”

“야아~!”

또 무한루프 인 건가 싶어서 하은이 녀석의 팔을 잡
아 말리려 했을 때였다.

[ 주인님! 구양대주로부터의 연락입니다. ]

몽몽의 알림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하은이 팔을
놓으며 몽드폰을 들었다. 그런데… 이걸 반가운 소식이
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 어쨌든 최소한 오늘 쇼핑의
끝을 알리는 벨소리이기는 했다.

“천주. 속하입니다. 아무래도… 오늘의 만남은 재고
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구양대주의 보고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길지 않은
통화였지만 마녀 여옥 측의 움직임에 대한 새로운 사
실을 알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과연 구양대주가
‘만남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할 만한 상황인 것
도 틀림없었다. 물론 조금(?) 위험해 졌다고 해서 간
단히 물러날 나는 아니지만 말이다.

“…유준 오빠?”

구양대주 쪽의 송화음을 들었을 리는 없지만 눈치
빠르게 내 표정을 읽었던 모양이다. 새삼 날 부르는
하은이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의 철모르는 아가씨의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누구야? 아니, 무슨…일이야?”

“어- 그게, 우릴 애타게 기다리던 노인네께서 쇼핑
빨리 끝내고 오라는 군. 알겠죠, 숙녀 분들?”

나는 싱겁게 웃어주며 농담 비슷하게 던져 봤지만
자룡대주는 물론이고 하은이까지도 굳은 표정을 쉽게
풀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마녀 급 비행소녀들끼리의
치열했던 경쟁이 진짜(?) 마녀의 움직임에 의해 끝나
게 된 셈이라고나 할까?

우리 일행이 약속 장소가 있는 건물에 도착한 것은
약속 시간을 약 40분 정도 남겨두었을 때였다. 건물자
체는 일견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8층 짜리 상가
건물이었지만 약속 장소인 중국식 레스토랑은 8층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 업소로서 꽤 유명한 레스
토랑이라고 했다. 그 곳의 주인은 지하무림 사람이라
고 하니 사태가 나쁘게 흘러 갈 줄 알았으면 다른 곳
을 선택하는 편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서
어쩔 수는 없었다.
착잡한 건 착잡한 거고…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기
에 난 우선 자룡대주가 미리 몇 시간 빌려 놓았다는
옆 건물의 미용실로 향했다. 자룡대주가 그 미용실을
확보해 놓은 것은 전문가들에게 조금이라도 내 용모를
다듬게 해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준비의 마무리를
하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없어
서 나는 들어가자마자 대기하던 미용사들을 내보내 버
렸다. 내가 머리에 물만 묻혀 조금 가다듬고 나서 면
도를 시작하니까 그 동안 얌전히 뒤에서 기다리고 있
던 하은이가 비로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훗~! 이제 보니… 나름대로 괜찮은데?”

나는 손에 든 정글도를 일시적으로 거둔 후 턱밑을
매만져 보며 하은이를 돌아보았다.

“뭐가? 옷? 너 임마! 이제 보니-라고? 너 역시 날
위해 그렇게 난리 친 게 아니었던 거지?”

“치이~ 난리를 쳤다니! 아니, 뭐… 솔직히 우리가 약
간 흥분하기는 했지만 결국 정말 오빠를 위해 그랬던
거야. 안 그래요, 미스 제이?”

하은이 녀석의 말에 자룡대주도 얼른 고개를 주억거
리는 군. 마지막에 분위기가 이상해지니까 그제야 일
사천리로 합의를 보고 단 몇 분만에 옷을 골라 준 것
들의 말을 믿기는 어렵지만… 뭐, 이제와서 더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내가 조금 전 괜찮다고 한 건 옷이 아니
라 지금의 오빠 분위기… 그런 복장으로 하고 있는 행
동을 말한 거야.”

나는 정글도로 턱밑의 구석에서 만져졌던 수염 몇
올을 마저 밀며 물었다.

“뭐? 이렇게 정글도로 면도하는 거?”

“후후~ 그래 웬지 야성미가 있어 보이는 걸? 안 그
래요, 미스 제이?”

“아, 예. 물론 전 더 야성적인 천주의 모습도 알고
있긴 합니다만……”

상어 때려잡던 얘기하는 거로군.

“쳇-!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는 몰라도… 둘 다
계속 그렇게 빤히 날 지켜보고 있을 거야? 정글도로
면도하는 남자 첨 봐?”

공연히 쑥스러워진 내가 딴대 보라고 손을 젓자 자
룡대주는 즉시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지만 하은이
녀석은 역시 그런 제스처조차 없다.

“처음 보는 게 당연하지! 누가 그런 엄청난 칼로…
근데 정말 괜찮아? 그러다가 베지는 않아?”

“물론! 하루 이틀 하는 짓도 아닌데, 뭐.”

그러고 보면… 내가 정글도로 면도를 하기 시작한
건 연옥도에서부터였으니 벌써 2년 가까이 되는 건가?
확실히 처음에는 좀 불편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익숙
해져서 현대로 돌아 온 지금도 정글도로 면도하는 게
훨씬 더 편하다. 집에서야 부모님들 시선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 시대의 면도기를 쓰기는 하지만 말이다.
난 정글도를 가볍게 허공에 휘둘러 수염의 잔해를
떨어내는 것으로 면도를 마쳤다. 그러고 나서 세수를
하는 것으로 준비를 끝내자 다시 하은이 녀석이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오빠는 대체 오늘 누굴 초대한 거야? 아니면 오빠가 초대를 받은 거야?”

“응? 그러고 보니 내가 아까 내 쪽에서 초대하는 거라고 했었나?”

“분명히 그랬어. 그런데 미스 제이는 초대를 받은 거로 얘기했고 말야.”

“음~ 그게 그러니까… 내가 먼저 초대한 건 맞아.”

마녀 여옥 측에서 먼저 날 초대할 경우에는 그녀의 저택이나 별장 등… 나로서는 완전히 적지로 가야 할 것 같아서 먼저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그 쪽이거든. 보통의 경우에는 그 쪽에서 날 대접해 줘야 하는 게 맞잖아? 그 쪽에서 그 걸 강조하는 바람에 결국… 장소는 내가 정한 곳이어도 식사 대접은 그 쪽이 하기 로 되었지.”

“결국 서로가 초대를 한 게 맞다 이거지? 흐음… 흔한 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인 초대인 것 같네?”

서로 좋은 의미로 만날 경우에는 그렇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경우에는 단지 ‘주도권 다툼’이었을 뿐이지.

“그런데 오빠. 내가 듣고 싶은 얘기가 그게 다라고 생각해?”

어느 사이 하은이 녀석의 얼굴에서는 다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내가 구양대주와 통화를 하며 분위기가 달라졌을 때부터 궁금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대도 나름대로 계속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야… 아니겠지. …좋아. 시간이 별로 없으니 전부 요점만 정리해서 얘기해 주마.”

나는 양복 상의를 마저 입고 하은이에게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오늘 내가 만날 사람들은 며칠 전 내가 구해 준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야. 그 소녀가 바로 금동이와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고 말야.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소녀의 어머니 쪽이 나와 적대관계라는 거야. 여자라고는 하지만… 삼합회 최악의 마녀라고 불리는 인물이지.”

“삼합회의 마녀?”

“혹시 들어 본 적 있니?”

“아니. 하지만 삼합회라면… 그거 국제적인 중국 마피아잖아.”

“…그래. 여하튼 상당히 위험한 조직인 건 알지?”

하은이는 우선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곧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대체 뭐야? 오빠와 그 소녀가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도 되는 거야? 아니, 참. 주가혜는 어쩌고?”

“오버하지 마라, 임마. 그 소녀는 그냥… 하여간 기본적인 상황은 그래.”

“…알겠어. 대충.”

“삼합회의 마녀… 뭐, 이름은 ‘여옥’이래. 그 마녀 여옥은 지금까지 내 정체나 자신과 나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어. 난 혹시 그녀가 날 안다해도 단편적인 부분일 거라고 판단했고… 최소한 오늘의 만남은 그리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따라 오겠다는 것도 크게 말리지 않았던 거야.”

“지금 그 말은… 상황의 변동이 생겼다는 말?”

“그래. 아까 내가 백화점에서 받은 보고는 갑자기 마녀 측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졌다는 거였어. 마녀 측에서 어떤 경로로든 내 정체를 알아챈 게 아니라면 보이기 어려운 움직임… 뭐,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무지 많은 조직원들을 비밀리에 이 쪽에 집중시키기 시작했다는 거야. 아무리 평소에 적이 많은 여자라고는 해도 오늘은 자신의 딸을 구해 준 은인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하는… 그런 자리인데 말이야.”

내 추가 설명에 하은이 녀석은 더욱 심각한 표정이 되어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런 표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갑자기 살짝 웃음기를 머금으며… 예의 진하연 모드가 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난 이쯤에서 빠지라는 얘기 같네?”

“…그래. 미안하지만.”

“내가 여기까지 와서 ‘예스-‘라고 할 거 같아?”

“그야……”

“좋아. 난 빠질 게.”

응?

“정말? …좋아 그럼 넌 자룡대주와 잠시…….”

“하지만! 그건 금동이 역시 그런 위험한 자리에 데려가지 않는다는 조건에서야. 금동이를 데려가겠다면 나도 따라 갈 거야. 반·드·시·!”

쳇~! 그럼 그렇지. 그럼… 어쩐다? 물론 금동이를 소교와 만나게 해 주고 싶기는 해도 그건 오늘 반드시 해야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늘 만약 험악한 상황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때 금동이가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바로 나다.
사실, 무림에서와 달리 내가 행동하는데 있어 가장 불편한 점은 정글도 같은 도검류를 함부로 지니고 다닐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얼마 전의 인질 사건 때도 정글도를 확보하는 일이 가장 큰 문제였듯이 오늘 같은 자리에서도 정글도는 일단 내 손을 떠나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전에 정글도를 적당한 곳에 숨겨두었다가 긴급한 상황 발생했을 때 바로 가져다 줄 수 있는 운반책… 금동이의 역할이 무지 중요한 것이다.

“…한가지만 묻자. 지금 들은 얘기 정도로는 ‘위기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니?”

“아니. 위기감은 충분해. 나도 중국 마피아가 얼마나 위험한 자들이란 거 정도는 아니까.”

“그럼 왜 굳이 따라 나서려는 거지? 금동이가 그렇게 걱정이 되는 거라면……”

“아니. 사실… 나도 금동이가 보통 원숭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폭력적인 상황에서라면 내 쪽에서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고 말야.”

하은이 녀석은 옆에 있던 금동이를 안아들며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난 사실… 그냥 오빠를 따라가고 싶을 뿐이야. 누굴 만나고 어떤 일을 하는지… 그걸 가능하면 가까이에서 보고 싶을 뿐이야.”

“…그게 뭐 그리 궁금하냐?”

“훗~! 오랜만에 만난 오빠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사는 지… 동생이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 그야……”

젠장! 뭔가 비논리적인 것 같으면서도 반박하기 어려운……

“알겠다. 같이 가자.”

윽! 나 왜이래? 이렇게 간단히 동의해도 좋은 문제냐, 이게?
나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이미 하은이 녀석은 내 허락에 기쁜 웃음을 지은 후였다.

나는 하은이를 데리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내내… 심지어 목적지인 건물의 8층에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생각해 보았다.
난… 대체 왜 이 녀석을 끝끝내 데리고 가는 걸까?
굳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면… 애초에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도 너무 쉽게 하은이의 동행을 허락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그 때는 상황이 달랐지 만… 그렇지만… 음… 그리고 아까 하은이가 ‘난 빠질 게’라고 말했을 때… 그 때 난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웬지 아쉽다는 생각을 먼저… 쳇! 뭐지? 난 대체 왜……
결국 나는 머리 속이 더 복잡해지기 직전에 하은이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 멈췄다. 이유는 어찌되었든 이미 결정된 일이다. 이제부터는 다가오는 모든 상황에 집중해서 해결해야만 한다. 그래야 하은이의 안전도 함께 보장이 될 테니 말이다.

나는 새삼 각오를 다지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사진으로 봐두었기는 했지만, 8층은 과연 입구부터가 중국 전통의 분위기를 살린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구양대주는 8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이 레스토랑의 인테리어가 당(唐)나라 시대의 이미지를 따온 거라고 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째 내가 다녀왔던 송나라 시대에 더 가까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 당나라 다음에 바로 송(宋)나라였으니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인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음… 그러고 보니 그 시대와 비슷한 분위기의 이런 장소에서 당시의 멤버 4명(?) 나와 소교, 하은이, 금동이까지 함께 하게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웬지 묘한 감흥이 일기도 하는 군.

“넌 어떠냐, 여기?”

난 무심코 하은이에게 물었지만 녀석은 별 느낌이 없는 것 같았다.

“글세? 그냥… 괜찮네 이국적이고.”

훗- 이국적이라…? 하긴 지금의 녀석에게 본국적(?)인 건 중국도 한국도 아닌 미국식이려나? 원판도 날 만날 때 외에는 거의 현대식 생활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고 말이다.

“그보다……”

나와 함께 점소이, 아니 지배인인 남자의 안내를 받으며 실내를 가로지르던 하은이가 창가 쪽으로 유일하게 누군가 서 있는 테이블 쪽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아이야?”

“응. 그래.”

천년 전과는 달리 현 시대의 스커트에 스웨터를 입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과거의 그때처럼 사랑스런 그 소녀는 물론 소교였다.

“생각보다 예쁜 아이네?”

“그러냐?”

“그런데 누굴 좀 닮은 듯도 하고……”

“응? 누, 누굴?”

“글쎄……”

아직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일단 조금 기분 나쁘다는 기색을 떠올리는 것으로 보아 첫 눈에 소교가 대교를 닮았다는 점을 느낀 것 같다. 아직 대교 얘기까지는 안 해 줬는데… 역시 여자들은 그런 쪽에 감이 빠른 걸까?

“어서 오세요, 진대인.”

소교는 우릴 맞으며 며칠 전 인질 상태에 있을 때와는 달리 갓 피어오르기 시작한 개나리꽃처럼 웃으며 인사를 해 왔고 나 역시 나도 모르게 반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소교에게는 미안하게도 오늘 나의 관심은 곧바로 그녀 뒤쪽에 서 있다가 이제 앞으로 나서는 이 여자, 마녀 여옥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진대인. 저는 여옥이라고 합니다.”

마녀 여옥… 그래, 드디어 실물을 만나게 되는 구나.

“우리 아이의 목숨을 구해주신 얘기를 듣고 꼭 한 번 만나서 감사 드리고 싶었습니다.”

마녀는 한참 어린 나에게 먼저 깍듯한 태도로 고개 숙여 인사를 해왔다.
소위 침 못 뱉는다는 웃는 표정에 날 반기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기까지 하다.
게다가 실물은 내가 항상 경찰 자료사진을 보며 재수 없다고 부르짖던(?) 것에 비해 평범한 느낌… 아니 객관적으로 보면 비교적 고운 축에 드는 용모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여옥이 날 정중하게 테이블로 안내했고, 나는… 내심 조금 당황해서 자신의 얼굴이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쩐지 불안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아야 했다.

내가 생각보다 더 동요하게 된 것은 실제의 여옥이 그간의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가 아니었다.
상대는 예상외로 마녀 같지 않은 분위기로 날 대했고 나 역시 오늘만은 가급적 싸우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여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울컥, 주체하기 어려운 살기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대교… 그래, 대교가 바로 이 여자 때문에 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대교는 이 여자 때문에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고통받고 잠들 수 없었을까…?
제기~! 역시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이 당장에……

“저어- 진대인?”

소교였다. 여옥 옆에 앉아있는 소교의 음성이 들리고 그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왔을 때에야 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할 수 있었다.

“자리가 불편하시기라도……”

“아, 아니. 괜찮아. 그냥 좀……”

그래… 그랬었지. 지금은… 오늘은 소교와 하은이를 생각해서 참아야 한다. 뭔가 말을 돌릴 거리가… 음……

“훗~ 실은 지금 입고있는 옷이 좀 거북해서 그래.”

“예?”

“이 옷 말야. 내 동생이 숙녀의 초대를 받았는데 평소처럼 가면 되겠냐고 우겨서 할 수 없이 새로 산 옷이 거든. 난 사실 항상 아무렇게나 입고 다녀서 혼자서는 넥타이 멜 줄도 모르는 사람이야.”

“후후- 그랬었군요. 그럼 오늘도 넥타이를 풀고 좀 더 편하게 계셔요. 저희 어머니도 격식을 그렇게 따지시는 분이 아니에요.”

“아니 뭐… 기왕 입은 거 그냥 버텨 보지 뭐.”

“그렇지 않아요.”

응? 여옥? 당신은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우리 아이 말대로 전 격식을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정말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래야… 식사도 더 맛있게 하실 수 있지 않겠어요?”

훗-! 정말 계속 마녀답지 않게 나오시는 군요, 여옥 여사.

“그렇게 배려해 주신다면…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나는 속마음과 달리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넥타이를 벗고 와이셔츠 목 단추 하나와 손목 단추까지 풀어 버렸다.
그러자 옆자리의 하은이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우리 오빠가 이렇다니까. 이렇게 예쁜 아가씨 앞에서는 좀더 신사다워 보라구.”

“아, 아네요. 소탈한 모습이 더 보기 좋으신 걸요.”

“수혜…양이라고 했죠? 오빠한테 그런 말 해 주지 말아요. 순진해서 뭐든 진심으로 받아들인다고요.”

“어머? 전 진심인데……”

하은이 녀석,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잘도 너스레를 떨며 소교를 상대하기 시작하는 군.
뭐, 이 정도 상황에서 쫄 녀석이면 애초에 따라 나서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난 겉으로는 귀여운 동생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모습(진심이기도 하다.)을 유지하면서도 당연히 신경은 맞은 편의 마녀 여옥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 역시 지금은 나처럼 자신의 딸인 소교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만 언제 마녀의 본성을 드러낼 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구양대주의 보고에 의하면 현재 아래층의 여러 상가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섞여 손님을 가장하고 있는 부하들의 숫자가 대충 잡아도 100여 명이다.
저 여자가 날 ‘확실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건 물론이고 여차하면 이 건물을 비린내 나는 피바다로 만들 의향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 이 건물에서 그런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게 할 유일한 희망은……

“…소교.”

나는 소교와 하은이의 대화가 잠깐 끊겼을 때를 놓치지 않고 녀석을 불렀다.

“그 때 다친 친구들은 좀 괜찮아?”

“그럼요. 다들 진대인 덕분이라고 제게 대신 감사 인사를 드려 달라고 했답니다.”

“그런 건 됐고… 그보다 자꾸 대인, 대인 그러니까 내가 엄청 노인네가 된 것 같다. 앞으로는 그냥 오빠라고 불러 줘.”

“아……”

소교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여옥에게 시선을 돌렸고 여옥은 더욱 다정한 엄마의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무나. 이렇게 멋진 오라버니가 생겨서 좋겠구나.”

여옥의 말에 소교는 더욱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런 그녀를 흐뭇한 눈으로 웃으며 바라보는 두 사람… 살인마녀 여옥과 극악군발 진유준!
그래, 오늘 우리가 이미 서로 상대의 정체를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체 생까고 ‘좋은 사람’을 연기하고 있는 건 오직 저 사랑스런 소녀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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