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35-3화 : CR의 또 다른 의미(3)
혼란스러웠다.
나도 갈수록 저 CR의 삼인조가 처음의 생각보다는 악한 놈들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아무래도 너무 지나치다. 열 받아서 뵈는 게 없어진 자룡대주가 여왕님 모드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에 대한 저 놈들의 반응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놈들 혹시 맞는 것을 즐기는 SM 취향의 변태들…? 음… 아닌…데? 아무리 봐도 저건 즐긴다기보다는…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누나에게 심한 장난을 쳤다가 혼나며 정말 겁먹은 남동생들 모드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아, 가만…?
나는 새삼 다시 실내를 돌아보았다.
난 요즘 게임은 별로 해 본 게 없긴 했지만, 게임기 옆에 수북히 쌓여있는 게임들은 케이스의 그림만 봐도 하나같이 단순하고 귀여운 캐릭터가 나오는 게임뿐이었다. 그건 TV 옆에 쌓여있는 DVD나 일반 테이프들도 마찬가지여서 자룡대주에게 틀어 주었던 영화 말고는 전부 만화영화나 특촬물(특수촬영실사물)이었다.
오… 게다가 우리 한국의 불후의 명작 ‘우뢰매’도 있잖아? 엄청 반갑… 에구,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천주! 죄송하지만, 제가 먼저 나가도 되겠습니까?”
“어- 그럼, 그럼. 맘대로 해. 갑갑했을 테니.”
“감사합니다.”
자룡대주는 그사이 조금은 더 진정되었는지 내게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하여 대비했지만 문 앞의 쌍라이트 문어 형제들은 여전히 두려워하는 태도와 함께 좌우로 길을 텄다. 그 사이를 당당하게 통과해 걸어 나가 버린 자룡대주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야 야황이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으음… 진유준님의 수하답게 정말 무시무시한……”
“저기, 이봐. 이런저런 사정은 둘째치고… 여하간 좀 창피하지는 않아?”
“아, 예. 조금은. 하지만… 저희들이 본래 연상의 여인에게는 약해서……”
“연상의 여인? 자룡대주가 대체 몇 살로 보여? 저 여자, 내가 알기로 스물다섯인가 여섯인가 그런데… 댁은 아무리 봐도 그보다는 많아 보이는 걸?”
그랬다. 내가 지금까지 말을 함부로 한 건 싸우는 도중이라 그랬을 뿐이고 말이다.
“네, 뭐. 그렇게 보이긴 할 겁니다. 하지만……”
뭐야? 왜 그렇게 씁쓸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거야? 뭐… 자기들이 그동안 고생을 지지리 많이 하고 살아서 나이보다 겉늙어 보인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건가?
“하하~ 어쨌든 정말 혼났습니다. 아무리 마편동 형제의 ‘암시’가 풀렸다고는 해도, 대신 이성을 잃은 상태였는데 그걸 기세로 제압해 버리다니 말입니다. 이거, 진유준님보다도 무서운 누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뜬금없이 밝은 척을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중요한 단어가 나온 것 같다.
“암시…라고?”
야황의 얼굴에 다시, 아니 조금 전보다 더 어두운 그늘이 지는 것 같았다.
“…예. 평소에는 지극히 얌전하고 순박한 친구들이죠. 아무래도… 이제 겨우 열한 살에 불과한 소년들이니까요.”
으음… 그런 건가? 아까 나와 싸울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좀처럼 믿어지지 않지만, 역시 정신연령은 그거 밖에 안 되는 건가?
“게다가… 정신연령은 그 절반 나이의 수준에 불과합니다. 사실 저희들 타입의 실험체에게 발생했던 가장 흔한 부작용이라고 합니다. 전… 운이 좋은 편이었죠.”
어랏…? 뭔가 얘기가 좀……
“…열한 살이 정신연령 얘기한 거 아니었어? 거기서 또 뭐가 절반이라는 거지?”
“열한 살이라는 건 ‘실제 나이’를 말한 겁니다.”
에…? 이건 또 뭔 소리래?
“…저희들처럼 처음부터 성인의 육체로 배양된 실험체는 처음 만나시는 모양이군요.”
이, 이런 제기! 원판, 그 가이시키! 대체 무슨 짓까지 한 거냐?
“그, 그게… 사실이라면, 넌 지금 몇 살이라는 거지?”
“열셋. 후후- 실은 소교 아가씨보다도 어린 꽃다운 나이죠.”
꼬, 꽃다운 나이? 으… 미치겠네. 이걸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다. 사실이라면 원판 그 놈은… 그 놈은 정말……
“설마… 지금 화가 나신 겁니까?”
“…그래. 썅! 자기 스스로 선택해서 육체를 조작한 거라면 몰라도… 정말 태어난 것부터 그런……”
제, 제기! 문어 형제! 쟤 내들은 또 뭐야? 왜… 아까와 얼굴이 달라진 거야?
“또 하나의 부작용……”
계속 조명이 없는 복도에 서 있어서 잘 몰랐는데, 지금 막 엉거주춤 방안으로 들어오는 문어 형제의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와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심한 부상을 당한 후 회복력이 작용할 때는 세포의 노화 역시 촉진됩니다. 음… 오늘 진유준님께 당한 일격은 저들의 모습을 저보다 십 년 정도 더 형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군요.”
야황의 말에 문어 형제는 환한 실내등 아래에서 서로의 얼굴과 자신의 손 같은 것을 살피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곧 자신들이 이제 완연한 ‘중년의 얼굴’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았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 동안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없어서 잊고 있었을 뿐, 자신들의 운명만큼은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젠장! 신경 쓰지 말라고…? 사실은 이제 겨우 열한 살밖에 안 먹었다는 놈들이 저렇게 침울한 40대 노숙자 분위기로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버리는데… 저게 신경 안 쓰이는 비주얼이냐?
“…또 궁금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너야말로 더 할 말 없냐?”
“…글쎄요. 태어난 이후 줄곧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일들이 많아서… 그래서 오늘 더 말수가 많아진 것 같지만… 그런데 이상하군요. 그러면서도 막상 그렇게 물으시니 딱히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빌어먹을…! 갑자기 기분 정말 더럽게 꿀꿀해지네.
“그럼……”
야황은 끄응-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룡대주가 그냥 나가버려서 아무런 조치를 받지 않았음에도 그의 배에서는 더 이상의 출혈이 없는 것 같았다.
“가려고?”
“살려 주신다니… 가야죠.”
“어디로 가려고?”
“…글쎄요. 마스터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그 분께 돌아가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런 경우에의 지침은 없었거든요. 그러니 당분간은 지금까지처럼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실패했을 때의 지침이 없었다고…? 그건 또 무슨 의미이지? …어쨌든.
“다시 여옥에게 돌아가겠다고?”
“예.”
“그럼 또 나와 싸우게 될 텐데… 알지? 봐주는 건 한 번뿐이다.”
“예. 하지만 진유준님도 기억해 두십시오. 마편동 형제와 달리… 전 오늘 스스로 암시를 걸지 않았습니다. 자기 최면이란 게… 다소 궁색해 보이기도 하지만 효과는 절대적입니다. 아마…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도 오늘의 저를 생각하시면 곤란한 경우를 당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냐…? 하지만 다음에 달라져 있을 사람은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군요. 진유준님도 다음에는 진심으로……”
“아니, 난 항상 진심이야. 다만… 나 얼마 전에 총 맞았다.”
“예?”
“못 들었냐? 니네 마스터에게 쳐들어갔다가 블러디 울프 2개 중대와 싸웠지. 그리고 이틀 전에는 소교를 구하려고 가다가 비행기에서 맨몸으로 추락해 버렸어. 그 후에도 바다에서 상어들과… 뭐, 하여간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난 지금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야. 본래의 전투력에서… 잘해야 10% 정도? 오늘은 그랬지.”
자랑하려고 늘어놓은 말이 아니다. 난 아무래도 저렇게 보기와 달리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과 또 싸우긴 싫었다. 그래서 실제 격차를 알고 앞으로는 가급적 게기지 말라는 뜻에서 해 준 말이다.
암튼… 야황은 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늠해 보려는 듯 물끄러미 날 바라보고 있더니, 결국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하시는 군요. 마스터나 당신이나 말입니다.”
하아아- 긴 한숨이 이어지더니, 곧 쿡-하고 웃는다.
“…결국 우리는 정말 CR… Chicken ribs에 불과했던 모양입니다.”
“뭐?”
Chicken ribs… 계륵…? 버리기에는 아깝지만 결국 먹을 건 없는 존재라는 무지 유명한 말?
“그녀의 말대로 저희는 결국 그런 운명……”
“야, 야!”
이런 제기! 얘기가 왜 그렇게 비약되는 거야? 그녀는 또 누구야? 원판 비서 ‘란’?
“하지만……”
응?
“이젠 정말 이대로 끝내고 싶지가 않아졌습니다.”
어이- 비관론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새삼 타오르는 표정이 될 건 뭐냐.
“아니, 그게……”
제기! 저 녀석 어째… 정말 진심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제까지는 뭔가 허무적인… 목숨을 담보로 싸움을 걸어 온 녀석치고는 어딘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날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결국 야황은 마편동과 함께 지하실을 떠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언젠가 반드시… 당신과 마스터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당신을 상대로 저희들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나는 자칭 계륵들이 서로를 부축해 가며 사라진 후에도 얼마간 나가지 못하고 놈들의 지하 아지트에 앉아 있었다. 막판에 얘기가 어찌 꼬이는 바람에, 오늘은 어딘가 느슨했던 야황이 앞으로는 더 무서운 적으로 변해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찜찜하긴 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놈들의 탄생비화(?)가 마음에 걸렸다. 처음 들었을 때는 당연히 그 ‘비인간적인 실험’ 자체에 분노했다. 지금도 물론 그런 감정은 마찬가지이지만… 그와 함께 드는 새삼스런 의문…
‘원판은 대체 이 시대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제기. 아무리 생각해도 나 하나 때문에 이런다고 하면 오버다. 세계 정복…? 정신 나간 만화 속 악당들처럼 그딴 거라도 노리는 걸까…? 하지만 왠지… 그런 건 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한, 그 녀석은… 천 년 전의 비화곡 시절에도 비화곡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전쟁을 벌인 적은 없었다. 정식 도전이나 사소한 시비를 가리지 않고 완벽하게 맞받아쳐 상대 진영을 초토화시킨 전적은 셀 수도 없었지만… 그 모든 싸움을 잘 살펴보면 역시 ‘정복욕’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단지 적을 없애고… 그리고……
즐, 긴, 다…? 그래, 그거였다. 내가 비화곡주의 흉내에 충실하려고 열심히 놈의 과거를 알아봤을 때 느낀 건 역시 그거였다. 그렇다면 녀석은 지금도 그런 건가? 이 새로운 시대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세력을 넓히고 군대를 만들며 심지어 새로운 종족을 탄생시키면서까지… 그렇게 놀고 있는 건가…? 새로운 장난감이 무진장 많은 가게에 초대된 어린아이처럼……?
[ 주인님! 코드명 원판으로부터의 메시지입니다. ]
뭐? 호랑이도 제 생각하면 메시지 날린다더니……
“어떤가! 나의 아이들은 잘 성장했는가? ^^”
이런 우라질 놈.
< 몽몽. 내가 말하는 대로 찍어서 답장 보내 줘. …썅! 잘 컸드라. 드럽게 잘 커서 칼도 잘 쓰고 팔도 문어처럼 휘어지고, 죽여도 부활하는 예수 다 됐더라. 됐냐? >
[ 문장이 길어서 나누어 보냈습니다. ]
쳇, 그딴 건 알아서 할 것이지 일일이 알려 주기는……
“그 아이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칭하던가?”
응…? 뭐야? 설마 그 대화를……
< …계륵. >
[ …전송했습니다. ]
“일단 거기까지는 깨달은 모양이군. ☆_☆ 고마워. 잘 지도해 줘서.^ε^”
에이 쒸-!
< 너, 이모티콘 자꾸 쓰지 말라고 했지? 몽몽! 그냥 전화 연결해. >
[ ‘이모티콘 자꾸 쓰지 말라고 했지?’까지 전송했습니다. 그리고… 전화는 수신 거부 상태입니다. 해킹을 시도할까요? ]
< …됐다, 젠장! >
이 자식! 문자로만 하자는 거야?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조금은 봐줘. 재밌잖아~♡ /\ /\ ♡ ▽ ♡”
으흑~! 이 자식, 정말 장난치고 있잖아?
< 너, 진짜 죽는다? 하트 붙이지 말랬지! >
[ 전송했습니다. ]
< 썅-! 무슨 사내새끼가… 남 볼까 무섭네. 변태 커플인 줄 알 거 아냐. >
[ 전송했습니당! ]
< 야, 야! 그건…… >
[ 야, 야! 그건! 전송했습니다앙~! ]
< 야, 요몽! 장난치지 마! >
[ 헤헤~ 죄송! 하지만 주인님께선 유독 이 사람에게는 냉정을 잃으시는 것 같아서…… ]
< 그… 그래. 그건 인정해. 음… 고마워, 요몽. 도그동도 쓸 때가 있다더니…… >
[ 도그동…? 그거 욕이죠? ]
< 아니, 뭐… 에… 어쨌든 요몽 넌 이제 잠시 빠져 줘. >
[ 우에- 고맙다고 하시면서도 바로 계륵 취급하시네. ]
계륵…! 그래. 놈은 아무래도 야황이 스스로를 계륵으로 인식할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던 거다. 아니, 그보다는 처음부터 나와 접촉함으로써 그걸 깨닫게 되는 것까지 계산했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렇다면 처음 그들에게 CR이란 명칭을 부여할 때부터 그런 의미까지 포함했다는 건가? 하지만… 대체 무슨 의도로…? 그들에게 자신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깨닫게 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 …CR은 너에게 대체 뭐냐? …라고 보내 줘, 몽몽. >
[ 알겠습니다. 전송했습니다. ]
묻는다고 놈이 제대로 가르쳐 줄 것이라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 후 도착한 원판의 답신을 보며 얼마간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힌트조차 없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차차 알게 될 것임. 그러니까 그때까진 계속 나의 아이들과… 즐쌈 하셈.^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