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36-1화 : 지례(九拜之禮)를 받다.(1)
내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간신히 야황 녀석들의 지하실에서 나온 건 그 녀석들이 떠나고 나서도 아주 한참이 지난 후였다. 야황 녀석들에게서 느낀 꿀꿀함을 몇 배나 능가하는 원판의 정신공격 메시지 때문에 기운이 빠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계속 나의 아이들과… 즐쌈 하셈.^o^~♬”
제, 제기. 그놈 메시지가 자꾸 떠오르네. 나보고 오늘처럼 아무것도 모른 체… 계속 즐쌈이나 하라고? 이 거지발싸개(오랜만이다 이 표현) 같은 놈……!
[ …주인님! ]
< …왜. >
[ 자룡대주를 발견했습니다. ]
응…? 아, 자룡대주. 그녀가 근처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건 당연한데, 뭘 새삼스럽게 발견했다는 표현까지 하고 그래?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어 몽몽이 알려주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건물 옆에 쌓인 목재들 위에서 달빛을 쓰고 앉아 있는 자룡대주가 보였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며 몽몽이 굳이 그녀를 상기시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룡대주.”
“이, 이제 나오셨습니까?”
“…그래. 울고… 있는 거야?”
“아- 아닙니다. 달빛이 눈부셔서 그만……”
“진정하셈.”
윽, 무심결에 나도 그만… 아직 정신적 데미지가 남았나?
“예, 예?”
“아, 아니… 울지 말라고. 물론 충격이 컸겠지만……”
음… 일단 의례적인 위로의 말을 꺼내긴 했지만 과연 이 여왕님께서 충격을 받기는 받았을까?
“뭐, 자룡대주는 강한… 여자잖아.”
강한 ‘누님’이라고 말할 뻔했다.
“음… 하여튼 오늘 일은 잊고 앞으로는……”
“아뇨.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저는… 결코 강하지도 못합니다. 제가 정말 강했다면 어찌 오늘 같은 식으로 천주를 위험하게 했겠습니까.”
“그… 그거야,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뭐.”
“…적어도 마군황을 호위하는 보천구룡대가 그래선 안됩니다.”
물론 잘 지켜주면 나야 고맙지만……
“…기습당했지?”
“예. 그것도 화장실에서.”
에…? 이 여자 그래서 더 열 받았던 건가?
“큼, 음… 본래 기습엔 장사 없는 거야. 더구나 방심하고 있을 때 그렇게 강한 놈들에게 기습당했다면 나도 당했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손도 못 쓰고 순식간에… 아니, 그보다 제가 무엇보다 분한 건… 기습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랬다고 해도 전 그들을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거라는 점입니다.”
…그건 사실일 것이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여자는 자신의 선조인 천 년 전의 초상희에 비해 너무 약하다. 느껴지는 내력은 엇비슷하지 않나 싶은데도 뭔가 근본적으로 빠진 듯한… 무림인이라는 느낌 자체가 별로 없다고 할까……?
“그래도… 훗! 아까는 자룡대주가 오히려 압도적으로 놈들을 제압했었잖아. 상대를 제압하는 데는 그런 방식도……”
“예? 그건… 그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 여자… 열 받아서 뵈는 게 없었을 뿐, 놈들의 본성을 알고 한 행동이 아니었군.
“뭐, 어쨌든 말야. 육체적인 전투력만 보면 그 녀석들이 확실히 자룡대주보다 앞설지도 몰라. 하지만 아군과 적군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 보스에 대한 종합적인 서포트 능력은 자룡대주가 몇 배나 위라고 생각해. 당연히 난 그런 자룡대주가 필요하고 말야.”
“……”
“위로하려고 괜히 하는 말이 아니야. 알지?”
“하지만 저는 역시… 이대로는 어사조, 아니 그 전에 보천구룡대의 일원임을 자처할 염치도 없습니다.”
이런… 이 여자, 왜 이리 계속 오버야? 보스인 내가 실수를 혼내기는커녕 애써 토닥여 주고 있는데 말야.
“죄송합니다, 천주. 진작 말씀드려야 했는데……”
응?
“실은… 전 무공을 거의 쓰지 못합니다. 배우지 못했습니다.”
“에~? 진짜?”
“예. 전대 사부가 제게 내력을 먼저 전수해 주긴 했지만 그 직후 사고로 그만……”
뭐시여. 수련을 게을리 한 정도가 아니라……
“그럼… 전혀? 기초도?”
“예. 운기법의 기본만 조금……”
이런, 이런… 내 입으로 무공보다 다른 서포트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험한 세계에서 무공을 ‘전혀’ 못한다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앞으로 원판과 얽히며 즐쌈… 아, 아니 하여간… 더 험한 상황을 만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전… 정말 오늘처럼 분한 날이 없었습니다.”
‘사실 전 연약한 여자예요'(?)라는 고백 후, 새삼 모질게 이를 악무는 자룡대주.
“지금까지 살아오며 이렇게 저 자신이 환멸스럽게 느껴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 더러운 마초 근성으로 똘똘 뭉친 사내들의 아집과 편견 속에서도… 오히려 그걸 비웃고 당당하게 능력으로 그들을 이겨왔습니다. 야만적인 힘 따위, 의지가 없는 힘, 신념이 없는 폭력 따위… 얼마든지 지성과 이성, 지혜로서 굴복시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건 당신 말이 맞……”
“하지만!”
이 여자… 또 내 말 안·듣·고 있다.
“하지만… 오늘 제가 그렇게 그 단순한 폭력에 무기력하게 굴복당하고… 그로 인해 천주께서 위험에 처하게 될 줄은… 전, 전… 그게 너무 분해서… 분해서……”
“저기, 사실 오늘은 그렇게 큰 위기는 없었……”
“천주!”
에그머니, 놀래라!
“전… 힘이 필요합니다! 사내들, 아니… 적을 압도할 수 있는! 최소한 지성이 폭력에 굴복 당하지 않을 만큼의 힘!”
무슨 말 인진 알겠지만, 꼭 이렇게 얼굴을 들이밀고 얘기할 필요가 있는 건지… 게다가 아무래도 댁은 이미 나름대로……
“강해지고 싶습니다! 미치도록!”
뭐, 뭐하도록…? 으~ 여자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게다가 지 입술을 얼마나 독하게 물었는지 피까지 찍- 흘리며 노려보고(?) 있으니까 무서워 죽겠네.
“뭐, 뭐… 그야 무공도 본래 어느 한 쪽보다는… 강유일체(强柔一體)가 되는 게… 그게 가장 이상적인 경지라고 하지.”
나는 자룡대주의 압박에 대항하여(?) 모처럼의 그럴듯한 용어를 써가며 애써 조금 웃어 보였다.
“후후- 좋아. 각오가 그렇다면, 내가 구양대주에게 얘기해 줄 테니 그에게……”
“그건 안됩니다!”
“엉? 왜?”
“구양대주는 비록 저보다 한참 위의 연배이며 제 사부 못지 않은 고수인 것도 틀림이 없지만… 그래도 현재 저와 그는 같은 서열입니다.”
아차차- 그렇지, 참? 같은 서열끼리 사제지간이 되면… 그게 비록 정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입장이 애매해질 수도 있겠다.
“어- 그러면 다른 마군들 중에서 서열이 높은……”
…자가 있을 리 없지. 본래 일백마군은 모두 서로 평등 관계이며 보천구룡대와도 마찬가지이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마군황 직속의 보천구룡대가 조금 높다는 인식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남은 건……
“…나?”
내가 손으로 나 자신을 가리키자 비로소 자룡대주는 무서운 얼굴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번거로우시겠지만, 저도 기초는 잡혀 있다 자부하니 조금만 지도해 주시면… 그리고 본래 마군황은 지하무림 모든 이들의 사부입니다. 천주께서 절 지도해 주신다고 불만을 가질 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게…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도 누굴 가르치고 어쩌고 할……”
윽, 거부의 뜻을 비추자마자 또 대뜸 다가온다. 저 눈물 찍, 피 찍, 부담스런 얼굴로!
“아, 알았어. 알았다구. 하지만 알다시피 난 굉장히 바빠. 그러니까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도 되겠어?”
“아-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주!”
에구구, 이제야 겨우 인상을 펴며 물러서는 군. 어… 근데 넙죽 절까지…? 어라랏? 감사의 뜻을 보이는 정도인 줄 알았더니 연속해서 계속… 아홉 번…? 으… 구배지례(九拜之禮)로 더 나를 옭아매겠다 이거지?
나는 문득 둘째 형의 말, ‘여자는 다 요괴다’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팔자에 없는 저 여자 제자를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기분 탓이었을까…? 휘엉청 밝은 달빛 아래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룡대주의 얼굴이 섬뜩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음… 그래서 결국 그래서 저 여자의 사부님이 되어주기로 한 거야?”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하은이가 물었다.
“뭐, 일단은.”
“뭐가 ‘일단은’이야! 되면 된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나는 기내의 맨 뒤편 복도 끝에 서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지난밤의 귀신 모드는 흔적도 없는) 자룡대주를 힐끗 확인한 다음, 조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사제의 관계는 사부인 내 쪽에서 얼마든지 아무 때나 깰 수 있어.”
“그럴지는 몰라도… 오빠가 그럴 마음은 있고?”
“그야… 뭐, 자룡대주의 무공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오르면 적당한 핑계를 대고……”
“쯧쯧~ 그 땐 이미 늦어. 아니지? 오히려 때가 되면 오히려 저 여자 쪽에서 그걸 바랄 걸?”
“…뭔 소리냐, 그건?”
“차암- 유준 오빠는 다른 건 다 아는 척 하면서 여자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는 것 같아. 그러니 그렇게 이용을 당하지.”
“…자룡대주의 페이스에 내가 말려든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에게 말했던… ‘강해지고 싶다’는 얘기는 믿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 해도 그건 언제든 제어하면 되고.”
“흐응~ 어째 이미 거미줄에 걸린 남자의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걸?”
“…쳇! 니 맘대로 생각해라.”
나는 조금 퉁명스럽게 대꾸해 준 다음, 좌석을 뒤로 조금 더 기울여 몸을 눕혔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조금 나른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훗~ 하긴, 오빠는 ‘온리 주가혜’인 남자니까 미스 제이도 쉽진 않겠네.”
쳇! 정하은 이 녀석, 오래비가 좀 쉴 틈을 안 주네 그려.
“야,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냐? 자룡대주는 나를… 쳇! 아니다. 암튼, 나와 자룡대주 사이를 이상하게 연결시키려 하지 마라. 저 여자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건 네가 생각하는 연애감정은 아닐 테니 말야.”
“호오오~ 그건 또 무슨 얘기지?”
“구체적인 얘기는 생략!”
“치이- 왜 얘길 하다 말아?”
“…자룡대주의 개인 프라이버시인 얘기니까 그렇지.”
사실 말을 멈춘 것은 개인 프라이버시이며 우리 지하무림의 내부 사정도 포함된 얘기이므로, 적 보스의 여동생이기도 한 하은이에게는 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제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은 그렇다 쳐도 일부로 알려 줄 것까지는 없으니 말이다.
“하여간 비밀도 많은 오빠라니까. 에효오~ 그래서 애써 따라다녀 보는데도 소득은 별로 없고…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모색해 봐야겠네.”
참 내. 저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니까 오히려 의심하기가 민망해지네. 뭐, 그렇지 않아도 녀석이 원판의 스파이일지 모른다는 가정은 그리 타당한 게 아니었지만 말이다.
“음… 음, 음. 그래… 역시 주변 사람들을 통하는 게 제일 빠르겠어. 아무래도 유준 오빠 친구들이 가장 어수룩한 거 같으니……”
…스파이 맞는 거 아냐, 이 녀석?
“아, 근데 오빠.”
“또 뭐어~ 잠 좀 자자, 잠 좀. 넌 금동이하고나 놀아.”
“흥-! 내가 지금 금동이하고 어떻게 놀아?”
아차…! 무심결에 실언했다.
금동이는 지금 동물 우리에 갇힌 채 이 비행기의 화물칸에 실려 있다. 아무리 인간 못지 않은 금동이라도 인간 사회에서는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 자룡대주도 녀석을 우리와 같은 좌석에 앉게 해 줄 수는 없었다.
“흐음… 말 나온 김에 정말 아래에 내려갔다 와볼까?”
“야, 야. 참아라.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이제 한 시간도 채 안 남았다.”
“그래도……”
이 녀석,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닌 것 같군.
“넌, 금동이와 잠시라도 떨어지는 게 그렇게 싫으냐?”
“당연하지.”
쯧…! 어디까지 진심인지 몰라도 G.M.과 이 녀석 간의 금동이 분쟁은 좀처럼 해결의 가닥이 잡히지 않는군.
“근데 오빠. 어제 만난 수혜가 왜 원숭이 알레르기가 생긴 줄 알아?”
“뭐?”
“후후~ 우리끼리 있을 때 진실을 들었지롱~”
으음. 전설의(?) ‘롱~체’를 얘한테서 듣게 될 줄이야. 과거 아동들 사이에서 고난도 언어구사력의 척도이며 가장 보편적인 정신공격 무기… 예의 ‘~했지롱!’. 그러나 이미 한국 토종 아동들 사이에서 사용빈도가 낮아지며 쇠퇴 기미가 엿보여 뜻 있는 언어 유희계의 인사들이 탄식하고 있다는……
“어때. 알고 싶어?”
“응? 어… 글쎄? 나도 그게 그 얘 자신의 문제보다… 그 애 어머니와 관련된 뭔가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
“칫! 뭐야? 오빠도 이미 감 잡고 있었구나?”
하은이는 재미가 없어졌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지만, 곧 지가 알아서 얘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음… 아마 수혜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였을 때였나 봐. 그 당시 그 애는 사실 그 애 집에서 일하는 정원사가 키우는 원숭이와 종종 놀곤 했었대. 그때는 알레르기 증상 같은 게 전혀 없었고 말야. 그러던 어느 날 그 애의 엄마가 그 애를 데리고 유명한 음식점을 가게 되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던 거지.”
“…음식점에 간 게 뭐가 문제냐?”
“오빠라면 나보다 더 잘 알지 않아? 중국 요리의 팔대 진미로 꼽히는 것들 말이야.”
“그야 뭐……”
팔대 진미라… 과거와 지금의 팔대 진미가 같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화곡 시절에는 확실히 별의별 요리를 다 먹어봤었다. 특이한 걸 꼽자면 소교가 구해 줬던 두꺼비 술을 비롯해서… 어? 자, 잠깐. 혹시… 언젠가 한 번 메뉴에 있었지만 내가 거부했었던……
“설마… ‘원숭이 골’ 요리 말하는 거냐?”
“후후- 맞아. 바로 그거야.”
“이런, 그래서 소교가 충격을 받고……”
“응. 그랬대. 그 음식점이 떠나가라 울부짖은 건 물론이고, 그 후에는 원숭이만 봐도 거부반응이 나타났다는 거야. 어때… 웃기지?”
“뭐…? 웃겨? 그 얘기 어디가 웃기다는 거냐? 설마 너도 그런 요리를 좋아는 거야?”
“에이- 아니야. 나도 그런 혐오식품은 질색이라구! 내가 웃기다는 건 그런 얘기를 하는 수혜의 표정이었어. 그 애는 우리와 달리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인 것 같아.”
“우리와 달리?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소교가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 여러 가지로 말을 시켜봤는데, 좀 아니다 싶은 얘기 할 때는 표정관리가 안 되는 아이였어. 거짓말을 완전히 꾸며낼 수 있는 성격도 아닌 것 같았으니… 아마도 그런 음식점에 갔던 경험도 분명히 있기는 했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 그 아이는 더 심각한 일도 목격했을 거야. 음……”
하은이는 뭔가 더 생각해 보는 듯 주춤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그 애 엄마가 협박할 대상에게 원숭이 머리를 잘라 보냈다던가 하는……”
“…그거, 대부 패러디(?)냐?”
“훗~ 대부의 ‘말 머리’ 장면에서 연상한 건 맞아. 어쨌든 내 생각은 그래. 당시의 수혜는 그런 엄마의 끔찍한 행동을 멈추고 싶었던 거야. 그렇지만 현실은 자기 주장을 펼 수 있을 정도의 나이도 아니었고… 그게 스트레스가 되어 몸에 극단적인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켰던 거지. 결국 그 아이의 엄마가 그런 짓을 그만두었는지, 그 아이 눈을 피해 더욱 은밀하게 계속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그럴 듯…하기는 한데, 너무 비약이 심한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이번에는 비약이 조금 적은 추측 하나 더 얘기해 볼까?”
“…그래. 해 봐라.”
“그럼 그 전에… 수혜는 분명 지난번 인질극으로 오빠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오빠는 예전부터 그 아이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금동이도 마찬가지고!”
음… 그 정도야 어제의 자리를 같이 한 이상 뻔히 알법한 얘기지.
“그래. 하지만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냐. 더구나 너무 오래 전이라 그 애는 기억을 못하는 것 같고 말야.”
“그렇게 잘 아는 게 아니라고? 내 생각에 그 아이의 꿈속에 나오는 금빛 요정은 바로 금동이고, 또한 그 아이의 하늘을 채운 첫사랑의 상대는 바로 유준 오빠인데?”
쳇…! 여기까지는 증거부족에 엉성할 뿐인 논리인데… 그렇지만 사실 전부 어지간히 맞는 얘기라서 엄청 찔린다.
“…야. 내 얼굴이 그렇게 달덩이처럼 생겼냐?”
“그 무슨 어설픈 회피? 꿈이란 건 본래 상징적이기 마련이라구. 하지만 오빠가 동굴을 기억하는 걸 보면 바닷가 동굴이란 건 현실의 반영이었을 텐데… 거기가 어디야?”
이 녀석, 이젠 아예 확신을 가지고 들이대는군. 게다가 어제 내가 군대 얘기까지 꺼내며 동굴 얘기를 무마한 것도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고… 하는 수 없군.
“거기가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아.”
“흐응~”
하은이는 비로소 내게 항복을 받아냈다는 듯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네 말대로 나와 금동이는 그 아이를 잘 알아. 하지만… 생각해 봐. 그 애가 왜 그 기억을 잃었을 것 같냐?”
“…그 것도 그 애 엄마 탓이었던 거야? 마녀 여옥.”
에구, 아무리 마녀라고 해도 전부 뒤집어씌우는 건 좀 찔리지만… 하는 수 없지. 얼굴에 고강도 합금 깔고……
“그래. 역시 우리 조직도 관련된 얘기라 자세한 건 얘기해 주기 어렵지만, 그 당시의 기억을 되찾을 경우 힘들어지는 건 그 아이 자신이야. 그래서 난 앞으로도 계속 진실을 숨기고 싶어. 물론… 너에게도 그걸 부탁하고 싶고 말야.”
“……”
“너, 솔직히 나 몰래 또 그 아이를 만날 생각도 있었지?”
“그야, 뭐……”
“네 행동을 내가 일일이 간섭할 수는 없겠지만, 나보다 그 애를 위해서라도 그건 삼가 줬으면 좋겠어.”
“음… 그건 핀트가 어긋난 부탁인걸? 내가 왜 그 아이를 걱정해 줄 거라고 생각해?”
웃, 이건 약하지만 한 방 먹은 셈이다. 방심…했다고 할까? 아무리 친근하게 수다를 떠는 사이가 되었다 해도, 그런 상대에게도 무조건 친절을 베풀 타입이 아니었다, 이 녀석 정하은은!
“그럼… 날 위해서는 안 될까?”
“흐응~ 부탁하는 태도가 영……”
“…어떻게 부탁하면 될까? 무릎이라도 꿇으란 얘기야?”
“중요한 부탁이라면 당연히… 에?”
하은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날 째려보기 시작했다.
“뭐야? 그렇게 정색을 하면 재미없잖아. 쳇…! 알았어, 알았다고! 아무리 궁금해도 수혜와 오빠의 과거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을게. 됐어?”
“고마워, 하은아.”
“대신! 언제고 내가 지정하는 날은 나와 하루 종일 쇼핑해 줄 것!”
윽, 이 녀석… 어제처럼 또 나와 금동이를 교보재 삼아 놀고 싶은 건가?
“OK?”
“O, OK.”
“O~K!”
으음… 영어의 OK도 꽤 전천후 표현이 되는구나. 암튼, 어영부영 큰 희생 없이(과연?) 하은이를 소교에게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