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36-2화 : 지례(九拜之禮)를 받다.(2)
“뭐… 오빠가 그렇게 심각하게 나오지 않아도 나 역시 그 애를 괴롭히는 일은 내키지 않았어.”
“그랬…냐? 니가?”
“치이- 오빤 대체 날 어떤 여자로 보는 거야?”
하은이는 곱게 눈을 흘겼지만, 곧 표정을 풀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금방 알겠더라. 그 애가 참 착하고 순수한 아이라는 거……”
그야 당연한 얘기지. 우리 소교는 확실히 ‘우리 남매와 달리’ 그런 단어들의 상징이지. 암!
“그리고… 그렇게 바보가 아니라는 것도.”
응? 그 것도 당연한 얘기긴 하지만 왜 굳이 강조하는 거지?
“유준 오빠… 오빤, 그 애가 자신의 엄마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글세, 세상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미움받는 거 정도는 알겠지. 하지만 그게 오해라는 생각에 애써 변호해 주는… 뭐, 결국 부모(엄마만?) 잘못 만난 가엾은 아이지.”
“과연 그럴까?”
“…아니라는 거냐?”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틀리다고 생각해. 그 아이가 엄마가 자신 앞에서만 쓰는 가면에 언제까지나 속고 있을 리 없어. 어렸을 때는 몰라도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더 확실하게 엄마의 정체를 알게 되었겠지. 그럼에도 모른 체 하고 있는 거야.”
뭐야…? 하은이는 지금, 어제 내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었던 건 여옥뿐 아니라 소교도 마찬가지였다는 말을 하는 건가?
“물론… 나쁜 뜻은 아닐 거야. 자신이 모른 체하는 이상 마녀도 그런 딸 앞에서만큼은 나쁜 짓을 하기가 어려울 테니 말이야. 어렸을 때의 원숭이 살해나 바로 어제의 불안한 자리도 그렇고… 그 애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자기 엄마를 막고 있는 거야. 줄곧… 자기 엄마가 어떤 사람이란 걸 알았을 때부터……”
“…그거야말로 정말 비약이 심한 추정일지도 모르지만… 어째 나도 동의하고 싶다.”
“훗~!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인데, 너무 사실처럼 말했나?”
“아니. 니 말이 맞을 거야. 내가 아는 소교는… 그 애는 그럴 만해.”
확실히 듣고 보니 소교다운 선택과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는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하면서 적극적이고, 약하면서 강했다. 조금만 세게 잡아도 부서질 것만 같은 아이가 곧 죽어도 남을 챙기기나 하고……
“오빠.”
“…왜?”
“아니, 그냥 불러봤어.”
“싱겁기는……”
이 녀석, 그러고 보니 내가 이 녀석을 너무 편협하게만 봐왔던 걸까? 날카로운 관찰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을 거란 건 알았지만, 자신이 읽어낸 걸 냉정하게 분석하여 뭔가에 이용하려고만 들 녀석으로 여긴 것도 사실인데… 그런데 이제 보니 따뜻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 그런데……
“하은이 너. 너도 소교처럼 꿈을… 어렸을 때부터 같은 장면을 보는 꿈을 꾼다고 했었지?”
“…어, 응. 하지만… 예전의 일이야.”
쯧…! 나도 참. 하은이의 왕성한 호기심을 뭐라 할 처지가 못되는군. 어제 이미 ‘지옥 같은 꿈’이라는 얘기를 들었음에도 자꾸 궁금해지니 말이다.
“듣고… 싶어?”
“어… 그렇긴 하지만 얘기하기 싫으면 하지 마.”
“…그래. 얘기 안 할래.”
“…미안. 물어봐서.”
“아냐.”
하은이는 짧게 대꾸한 후, 지금까지의 녀석과 달리 입을 다물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은…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더는 물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아아~ 그러고 보면… 전에 신문의 해외토픽인가, 그냥 가십란에선가 자신의 전생을 완전히 기억한다는 사람의 얘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쇼프로에서 가끔 스타의 전생을 최면으로 알아보는 코너가 나오기도 했었고 말이다. 당연히 그때는 시청률을 노린 유치한 장난질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중에는 진짜 자신의 전생을 기억해 낸 사람이 있었던 걸까?
[ 주인님. 소령님으로부터의 연락입니다. ]
소령이? 그 녀석도 혹시 전생의 기억을… 에구. 생각이 자꾸 그 쪽으로만……
“여보세요?”
“여보세요? 유준 오빠?”
“후훗- 그래, 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앞서는군. 최근에는 여기저기서(?) 자주 듣게 된 소리긴 하지만, 이 녀석의 오빠 소리는 이상하게 유달리 귀에 쏙쏙 들어온단 말야?
“웬일이냐, 네가 전화를 다 하고?”
“어디세요? 지금 여긴 큰일이 난 것 같아요. 아니, 났어요!”
어랏…? 무슨 일이지? 장난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어디세요? 바로 돌아올 수 있어요? 네? 네?”
“야, 야, 소령아! 진정하고… 진정하고 얘기해 봐. 대체 무슨 일인 거야?”
“오빠 친구들요. 그 오빠들이 납치됐어요. 지금 방금.”
…뭐니, 이건 또.
“듣고 있어요? 네?”
“그래. 듣고 있어. 네가 본 거야? 정말 납치된 거 맞아?”
“예! 제가 봤어요! 그치만 멀어서… 제가 가기 전에 달아나 버렸어요.”
빌어먹을…! 요즘 납치가 유행이냐? 왜 거기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거지? 게다가 준엽이와 성원이라니… 걔들은 그런 일 당할 이유가 없는… 없…지가 않나? 젠장! 역시 나 때문인 건가? 여옥이 벌써 거기까지……
“오빠? 듣고 있어요? 여보세요?”
“…그래. 듣고 있다. 미령이는? 그 녀석은 어딨지? 가까이 있으면 좀 바꿔 줘.”
“갔어요! 미령이가 그 차를 쫓아갔어요!”
“그, 그래?”
상황 설명은 아무래도 미령이가 잘 할 것 같았지만, 놈들을 추적해 간 거라면 오히려 다행이다.
“…좋아. 잘 들어 소령아. 내가 그곳에 돌아가려면 넉넉잡아 두 시간 정도는 걸려. 물론 최대한 더 빨리 가려고 노력할 테니 넌 그곳에서 날 기다려. 알겠지?”
“예. 알겠어요. 그런데… 지금 전화가 왔어요.”
“뭐?”
“오빠 친구들 중 한 명의 휴대폰을 제가 가지고 있는데……”
“일단 받아 봐.”
“예.”
전화가 끊기고, 나는 초조하게 다시 걸려오기를 기다렸다.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하은이도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설마 또 마녀나 CR이……”
“아직 모르겠다. 방금 일이 벌어진 모양인데… 제기!”
아무리 원판이 일반인들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어도, 아무리 지하무림 사람들을 만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어도… 그래도 지하무림에 내 주변 사람들의 경호를 지시했어야 했다. 조금만… 한 번만 더 생각했어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소령이의 전화가 다시 걸려온 것은 1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오빠? 여자였어요. 나이든 여자 목소리였어요. 나쁜 놈들과 한 편 같지는 않았고, 저, 한국말 능숙하게 못해서 적당히 말하고 끊었어요.”
쯧…! 우리 어머니나 녀석들 어머니 중 한 분의 전화였었나 보다. 녀석들이 나중에 받을 오해는… 그렇다 치고……
“소령아. 그 전화 말야. 내 친구들이 떨어트린 것 같으니? 아니면……”
“나쁜 놈들이 일부러 놓고 갔어요. 제가 달려오는 걸 보고 바위 위에 올려놓는 것 같았어요.”
이것 봐라…? 굳이 친구들의 휴대폰을 연락 수단으로 놓고 갔다는 건… 적어도 원판이나 마녀가 보낸 자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CR들 중에서 새로운 놈들이 나타났을 가능성을 가장 크게 봐야 할까…? 쳇…! 만약 그런 거라면 그 납치가 전문인(?) 놈들을 정말 닭뼈다귀 취급을 해 줄 테다!
“…소령아. 네가 목격한 걸 차근차근 얘기해 줄래?”
“예. 그럴게요.”
소령이는 그 사이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비교적 차분하고 순서에 맞게 상황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소령이에게 놈들의 전화가 오면 내 전화번호를 알려 주라고 지시한 후 전화를 끊었다. 조금 맥이… 빠지는 기분이랄까…? 결코 안심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금 전까지의 긴장감이 왠지 억울(?)하기도 하고……
“…어떻게 된 거래, 오빠? 어떤 자들인지 알 것 같아?”
“그, 게… 그 놈들은 봉고차 타고 왔다는군. 야구방망이 들고 말야.”
“봉고차? 야구방망이? 그게 중요한 단서야?”
“뭐… 단서라면 단서겠지.”
“그래서 어떤 놈들이라는 거야?”
하은이는 계속 재촉했지만, 난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준엽이와 성원이가 동네 양아치들과 시비가 붙었다가 끌려간 것 같다는 얘기… 이 것도 심각하긴 심각한 얘긴데, 조금 전까지의 마녀와 CR에 비하면 역시 무게감이 좀……
[ 주인님. 성원님 휴대폰으로부터의 연락입니다. ]
왔나…? 대체 어떤 놈들인 걸까?
“여보세요?”
“어~ 너냐?”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어제 우릴 물 먹인 XXX가 너냔 말이다, 이XXX야! 우리가 누군 줄 알아? 이 XX한 XX!”
썅~! 입에 화장실 걸레를 물고 다니는 놈이군. 내가 제대와 동시에 머리 속에서 폐기해 묻어버린 욕지거리들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쏟아 놓다니……
“거, 누구신지부터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핫~! 아직도 모르겠어? XX아? 어제 호텔에서 자빠져 잔 XX는 지금도 같이 있냐?”
어제… 호텔? 이 놈들 그럼 혹시……
[ 음성 대조 결과 어제 하은님이 숙박한 업소의 종업원 중 한 명이 분명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
그렇…군.
“야! 야아! 왜 말이 없어? 놀랬냐? 응? 이 XXXX야! 니 친구들 살리고 싶으면 언능 튀어와! 아~ 그 삼삼한 XX도 데려오고! 알았어? 짭새들 부르면 죽는다~!”
“아, 예. 알아모시겠습니다. 근데… 내가 있는 곳이 좀 멀어서 갈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데……”
난 나름대로 정중히 사정을 설명했고, 놈은 계속 온갖 신선한(?) 욕설을 놀라운 감각으로 승화시켜 예술의 경지에 오른 듯한 화술을 자랑했다. 그래도 그럭저럭 대화는 통해서 몇 분 후에는 반갑게(?) 재회할 장소와 시간을 정하게 되었다. 놈들이 그 어떤 놈들이고, 내가 어떤 욕을 먹었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잠깐이지만 ‘별거 아닌 축에 속하는 일’이라는 인식을 가졌었던 나 자신이에게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화가 났다.
“하은아.”
나는 전화를 끊고 하은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손님이었다.”
“우리?”
“응. 어제 내가 너 데리러 갔을 때… 그 호텔 종업원 두 명이 뒤에서 나와 너에 대해 이상한 소리들을 했었어. 그래서 내가 지배인에게 한 소리했지. 직원들 교육 좀 잘 시키라고.”
“그래…서?”
“바로 짤렸대.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시작해 보려 했는데 나 때문에 끝장이 났다고… 그래서 손 좀 봐줘야겠다는 군.”
“오빠…를?”
“응.”
“…우리 민박집 위치는 나 픽업할 때 알려진 거네?”
“그렇겠지.”
“어쨌건 배짱도 좋은 사람들이네. 근데… 오빠. 마녀나 CR도 아니라는데 표정이 왜… 왜 그렇게……”
“친구들이 자기 때문에 개처럼 맞았다는데 속 좋을 놈 없다.”
“많이… 때렸대?”
“응. 자랑하더라.”
“…따라가도 돼? 내가 원인 제공자는 맞는 것 같으니……”
“아니, 안돼.”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자애가 볼만한 광경이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