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39-1화 : 천우신이 남긴 귀물(貴物).(1)
“난 결국 소군황 구영웅을 향했던 정글도를 거두고 다시 내 전용 좌석 바위로 올라가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내 속마음은 둘째치고…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상황은 소군황이 구영웅이 내 공격에 견뎌낸 것은 물론이고, 이후의 일까지 자신의 페이스로 몰고 가는데 성공한 셈이었다. 그 때문인지… 우리 인정파 사이에서도 불안해하는 술렁임이 일고 있었다.
“[저기… 주인님. 전 잘 모르겠지만…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거 아닌가요?]”
“<하는 수 없어, 요몽.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반대파의 뿌리가 너무 깊은 것 같아. 저 놈이 주장하는 ‘독재자 거부론’을 믿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금 반대파까지 힘으로 군기를 잡는 건 무리인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의 1차 계획은 실패한 셈이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가 유리해. 반대파들이 처음부터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시작했거든.>”
“[으음~ 혹시 그게 바로 저 사람? 저 사람이 뭔가 많이 부족하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주인님의 맹공을 받아낼 정도로 고수인데도요?]”
“<그럼 뭐하냐. 지 생각은 하나도 없는 허수아비 놈인 것 같은데.>”
“[에? 그래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조금 전 공격했을 때, 놈은 위기의 순간마다 순간적으로 눈동자가 딴 대로 가더군. 바로 지 사부 초사마군이 있는 쪽으로 말야. 그리고 그건 나와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마찬가지였어. 즉…! 저 놈은 지금 지 사부가 미리 교육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을 뿐인 거지.>”
“[와아- 싸우는 도중에 그런 거까지 보셨어요?]”
“<임마. 싸울 때 제일 중요한 게 바로 상대의 눈이야, 눈. 거기서부터 상대의 심리를 읽어야 한다구.>”
“[글쿠나…! 근데 만약 눈 돌리는 게 저 사람의 그냥… 단순한 습관일 뿐이면요?]”
윽, 이 녀석이 내가 혹시나 하고 불안해하는 점을 잘도 찍어 내내?
“[아, 그리고 싸우는 도중에 딴대 보고도 주인님의 공격을 막아냈으면… 그것도 나름대로 대단한 거 아닌가요?]”
“<요몽. 너… 오늘 유난히 날카롭다? 뭐 잘못 먹었니?>”
“[아뇨. 아시다시피 저도 인간들처럼 하루에 세끼 꼬박꼬박 찾아 해 먹지만(가상현실 속의 음식을 말함. 당연히 요몽에게는 진짜 음식)… 아침에 카레. 점심 때 햄버거… 이상한 건 없었는데요? 아, 카레에 들어간 소고기의 유통기간이 간당간당했었는데… 어, 그럼 뭔가 잘못 먹으면 눈치가 빨라지는 수도 있나요?]”
이건 계속 똑똑하게 진화를 하는 건지, 하다가 마는 건지 구분이 안 가네.
“<…됐다. 그 얘긴 나중에 하자.>”
결국 대충 녀석의 말을 막기는 했지만, 사실 요몽이 지적한 사항은 꽤나 중요한 점이다. 비록 순간이지만 ‘분명히 한눈팔면서도 강하다’라는 건 뭐, 그렇다 치겠는데… 만약 놈이 지금 자기 의지로 상황을 이렇게까지 몰고 온 거라면… 정신적인 측면이 그렇다면 놈은 정말 강적이라는 얘기니까 말이다.
나는 조금 전까지 큰소리친 것과 달리 조금 불안해지며 새삼 소군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놈은… 이제 내 시선은 관심이 없다는 듯 계속 자신의 사부와 구양대주의 움직임에만 주목하고 있어서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결국 놈에 대한 관찰을 일시 보류하고, 양측의 움직임과 예의 귀물에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천년 전 천우신과 지하무림의 수뇌부들이 함께 준비했다는 ‘진유준 감별 물건’들은 처음부터 나와는 꽤 멀리 떨어진, 양측 진영의 중간쯤에 준비되어 있었다. 구양대주와 자룡대주는 조금 전 내가 나 자신의 감별을 수락한 이후, 초사마군 일파들과 함께 귀물들을 둘러싼 채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논의나 상의가 아니라 말다툼 수준이랄까…? 정말 이 것으로 완전 증명이 되겠느냐는 초사마군 측의 새삼스런 딴지와 그에 대한 구양대주의 어이없어하며 반박하는 반응… 뭐, 그런 내용의 대화였다. 저런 거 하나만 봐도 현재의 지하무림이 마군황 강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는 증거인 셈이었다.
“[…주인님. 현재까지의 스캔 결과, 초사마군과 그의 측근으로 판단되는 인물들… 총 일곱 명에게 전혀 내력이 탐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혹시… 저 일곱 명이 모두 소군황 녀석에게 자신들의 내력을 몰아 주었다는 건가?>”
“[확인은 어렵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 시대에서는 일반적인 운기조식 등의 에너지 축적 방법을 써서 저 소군황이란 인물의 현재 내력 수위를 이룰 수 없습니다. 또한 현재는 행성의 자체적인 영약류 생성 및 발견 가능성도 1% 이하라고 판단됩니다.]”
그래. 그랬던…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소군황의 무공에 대한 재능을 평가 절하할 근거는 되지 못할 것 같다.
천년 전… 흑주에게 그녀의 두 사부와 고려무사 신정안 세 사람이 자신들의 진원진기(眞元眞氣)를 모두 전해주어 환골탈태(換骨脫胎)시켜 준 경우도 있었듯이, 희생정신이 투철한 고수들이 힘을 모아 단시간에 절정 고수를 탄생시키는 건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역사적으로 비화곡을 비롯한 사마외도에서 무수히 많은 고수들의 내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어 고금 제일의 언터쳐블 고수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까? 특히 원판이라면 주저 없이 비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 그런 고수를 가공해 냈을 텐데 말이다.
그건… 누가 진원진기를 전해 줬을 때 그걸 온전히 받아들여 소화해 내는 데에도 역시 천재적 체질과 재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제3자의 인위적인 편법으로 하는 건 원판 정도의 머리 천재도 불가능했었다 하고 말이다. 또한 타인에 의한 진기 전수는 일정한 한계점(이 수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다고 한다)에 이르면 더 이상 불가능해지는데, 기록에 따르면 이 때 더 욕심을 부릴 경우 100% 주화입마(走火入魔)라고 했다.
그런…고로, 적어도 소군황은 일곱 명의 마군들 진원진기를 모두 소화해 낼 수 있는 체질과 재능, 위장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만약 진원진기가 전해진 게 최근의 일이라면 아직 제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부분도 있을 테니, 지금 당장은 물론이고 장래에는 더욱 무서운 상대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으음… 이건 어째 내 직관력과 요몽의 직관력(?) 승부가 된 기분이 드는 걸? 저런 육체적 재능을 가진 녀석이 뚜렷한 자기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조금 전 냉랭하게 녀석을 평가했던 내 꼴이 우스워지게 될 것이다. 물론 꼴이 우스워지는데 끝날 문제도 아니고……
내 생각이 차츰 비관적인 쪽으로 방향을 잡는 사이, 드디어 합의를 본 구양대주와 초사마군 일파가 합동으로 귀물들을 내 앞으로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잠깐!”
낯익고 우렁찬 음성이었다. 지금까지 내 시선조차 회피하며 침묵을 지키던 천음마군이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대사를 앞두고 개인적인 행동을 해서 모두에게 죄송하지만… 전 이만 이 자리를 떠날까 합니다.”
저 양반… 아니, 저 청년은 또 왜 저래? 어랏? 갑자기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내 내 그려?
“마음대로들 하시오. 날 일백마군에서 제명하고 살객을 보내도 좋소. 난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천음마군!”
쳇. 내가 물으려던 걸 소군황 녀석이 먼저 물어봐 버리는 군.
“난 더 이상… 지하무림의 식구가 된 이후 품고 있던 마군황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소!”
으읏-! 찔린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못하다는 소리잖은가.
“또한…! 난 더 이상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한 사내의 변질에 실망하기도 싫소.”
응? 가장 절친한… 친구? 그럼……
“천음마군! 당신의 그 말은… 나 구영웅을 배신하겠다는 뜻이오?”
으음~! 천음마군이 저 쪽에 섰던 건 소군황 녀석과의 의리 때문이었군.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 되는… 어, 저건 어째 상당히 낯익은 일발장전(?)의 징조 같은 걸?
내 예감이 맞았다. 천음마군은 곧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혀 크게 크하하하핫~! 하고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홍연대소(哄然大笑)…라고 하던가? 무협영화나 소설에 보면 선이 굵은 호걸이 공연히 말끝에 우렁차고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는 자주 장면이 나오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사람 별로 없었고, 가끔 있기는 해도… 난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야후장로처럼 그런 웃음이 어울리는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건 그런데… 오늘의 야후장로, 아니 현재의 젊은 천음마군의 웃음은 겉으로만 웃고 있을 뿐 예전의 그 호탕하고 후련한 맛이 없었다. 대신 가까웠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비통함마저 느껴지는… 우는 대신 웃는… 그런 웃음 같다고 할까……?
내가 천음마군의 웃음소리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이 다른 마군들에게도 전해지는 모양이었다. 지난번에는 그의 돌출 행동을 언급하며 불만을 표했었던 마군들도 오늘은 오히려 그를 동정하는 듯한 표정이 되어 있으니 말이다. 물론… 누구보다 동요하고 있는 건 당사자인 소군황 구영웅으로서, 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입술을 깨물고 천음마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천음마군의 대소(大笑)가 끝나자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을 그 어떤 경우에도 배신하지 않고 평생을 함께 할 친구로 여겼건만… 당신은 지금 날 버리려 하는 군. 그것도… 어리석게도 함께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시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소군황의 차가운 성토에 천음마군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런 눈빛으로 소군황을 마주 노려보며 말했다.
“먼저 배신당한 것은 바로 나야! 함께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시기를 앞두고…라고? 난 너의 그 사람을 저울질하는 말이 역겨운 거다! 다시는 날 아는 체하지 마라!”
와우~! 역시나 야황살후(夜皇殺厚), 야후장로의 본성!
천음마군은 딱 부러지게 결론을 맺더니, 파앗- 박력 있게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난 더 군소리 없이 시원스럽게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천음마군이 그렇게 떠난 후 소군황을 돌아보니… 참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안면 근육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순간, 나는 그의 눈동자가 ‘원망’으로 추정되는 감정을 담아 자신의 사부에게로 향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호오~ 이거, 이거… 천음마군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천음마군이 소군황을 크게 흔들어 준 걸 고마워 할 수밖에 없겠군. 일단 나는 저 소군황이란 자의 본질을 확신할 수 있어서 심리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었고… 소군황은 반대로 심리적인 타격을 받았으니 말이다.
“호홋~! 어려울 때 끝까지 곁에 있어주는 친구의 수로 그 사람의 사람됨을 평가한다고들 하던가요? 그런데 소군황은 평생지기가 가장 먼저 떠났으니 이를 어쩌나?”
어허~ 자룡대주, 상처 입은 남자를 괴롭히면 쓰나.
“…훗! 여자의 좁은 소견은 어쩔 수가 없군.”
이런~ 더 괴롭혀도 되겠다, 자룡대주. 더 해, 더!
“여자의 좁은 소견이라고요? 흥~! 그럼 어디 남자인 구모씨의 대견을 한 번 들어볼까요? 당신은 설마 천음마군처럼 의리에 있고 우직한 사내가 당신의 사소한 실수 정도에 마음이 상해 등을 돌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음… 마치 내 마음 속 격려(?)를 듣기라도 한 듯 포문을 여는 자룡대주. 역시 내 임시 제자답군.
“왜 대답이 없죠? 하긴…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당신이 지금 평생지기조차 외면할 정도로 대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자아- 당신 입으로 확실히 말을 해봐요! 당신은 정령 자신이 지하무림의 굳건한 천년 결속을 사분오열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요? 그런가요?”
자룡대주의 거듭되는 융단 폭격에, 조금 진정기미를 보이던 소군황의 안색이 더욱 악화되는 것 같았다. 그런 그를 위해 다시 초사마군이 앞으로 나섰지만,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사부를 저지했다. 그리고 스스로 입을 열어 자룡대주에게 말했다.
“지하무림의 결속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허상!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자칭 2대 마군황에게 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 자룡대주께서는 쓸데없는 시비를 걸지 마십시오!”
“전 지하무림의 미래가 걸린 일인데 쓸데없는 시비라니요! 당신은 정말 당신의 그 알량한 논리를 다른 지하무림 식구들까지 따른다고 생각하나요?”
“알량한… 논리?”
소군황의 다소 기운이 빠진 듯한 반문에 자룡대주는 더욱 냉소를 번득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당신은 지하무림의 마군황 체제를 ‘독재’라고 규정했죠? 하지만 그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서투른 일반화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은 지하무림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특성을 간과했기 때문에 그 특성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체제 역시 이해하지 못한 거예요. 마군황 체제는 바로 우리 지하무림인 스스로가 지하무림을 위해 탄생시킨 최적의 결과물이란 말이에요.”
오오~ 뭔가 있어 보이는 대사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파이팅- 자룡대주!
“…훗! 현 시대에 있어 우리 지하무림의 특성은 자룡대주께서 더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현재의 지하무림에게는 ‘거대한 적’이 없습니다. 삼합회…? 본토의 정부…? 그들은 우리의 실체를 아예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적이 될 수도 없죠!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억지로 고대 독재자의 부활이라는 황당한 신앙으로 회귀해야 하는 겁니까!”
이, 이런… 이 녀석도 이제 보니 만만치 않네? 아무리 억지로 암기과목에 통달한 것뿐이라 하더라도 기본 성적은 낼 수 있다…이건가?
“지금, 말한 번 잘 꺼냈어요, 소군황! 당신이 말한 것처럼 우리 지하무림이 역사적으로 이렇게까지 완벽에 가깝도록 정체를 숨겨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죠? 그건 바로… 저분!”
응? 나? 어… 갑자기 날 가리키는 바람에 조금 놀랐다.
“그래요. 바로 천주께서 부재중이기 때문이었어요. 우리 지하무림이 필요 이상으로 분산되어 철저히 지하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던 건… 그건 결코 자랑스런 역사가 아니라, 단지 그만큼 약했다는 부끄러운 과거에 지나지 않아요. 안 그런가요? 소군황, 당신은 자신이 지하무림인 이라고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고백해 본 기억이 있나요?”
“…자룡대주 말 대로요. 난 아직까지 내 신분을 밝힌 적이 없죠. 하지만…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둠에서 어둠으로 이어지는 대하(大河)’라는 지하무림 고유의 정체성마저 부인하려는 겁니까?”
“아아~ 맞아요. 지하무림의 그 확고한 정체성! 그게 우리 지하무림의 탄생 비화이며 기본 정서죠. 그래요… 알아요. 하지만 과연 우리의 선조들은 어둠에서 어둠으로 이어지는 ‘신세’를 좋아서 인정했을까요? 아니… 아니에요. 내가 아는 한, 지하무림이 강호에서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신분을 내세울 수 있었던 건 오직 초대와 저기 계신 2대 마군황과 함께였을 시기뿐이었어요. 물론 당신이 말한 것처럼 역대 마군황들께서 우리 지하무림의 크나큰 희생을 강요한 듯 보이는 일이 있었음은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때 초대께서 지하무림을 이끌어 전쟁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과연 지하무림은 아무런 희생자 없이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을까요? 천-만에요! 오히려 세외의 세력에 우리의 국토와 동포가 짓밟히는 가운데 함께 힘없이 스러졌을 뿐이었을 거예요! 그럴 운명의 지하무림을 이끌어 역사 속의 ‘승자’로 만들어 주신 분이 바로 초대였어요. 또한~! 그런 자랑스런 역사는 2대 마군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죠. 초대 이후 쇠퇴해 가던 지하무림을 이끌어 당시의 강호상에서 최고 무력 집단이던 비화곡과 자웅을 겨룸으로서 지하무림의 위상을 드높여준 분이 누구였죠? 또, 당시까지 실전되었던 지하무림의 비전을 부활 시켜 주신 건 또 누구였죠? 또, 당시 최고의 정보 조직이었던 천이단(天耳團)과 우리의 관계를 발전시켜 사상 유래 없는 정보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준 분은 또 누구였죠? 그리고……”
으음- 천이단은 지금도 이름 바꾸고 건재한데 그건 모르고 있는 걸까? 근데 그보다… 소군황 녀석도 나름대로 뭔가 반론을 생각해 보고 있는 것 같은데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자룡대주는 거의 신들린 듯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거… 자룡대주는 아무래도 꽤 오랫동안 자신들의 역사를 연구해 왔나 보다. 처음 나서기 전까지 말이 없었던 건 저런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느라 그랬던 모양이고… 에… 그러니까, 그렇게 준비된 주자로서 막힘없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모습이 보기 좋긴 좋고… 내 칭찬도 약간 낯간지럽긴 하지만 듣기 나쁜 건 아니고… 그렇지만… 거참. 난 대부분 천년 전에도 지겹도록 듣고 겪은 얘기들이라 솔직히 점점 지루해지는데… 이를 어쩐다? 여기서 대충 끊거나 그냥 딴 생각하며 시간을 때우는 건 날 위해 저렇게 방방 뜨고 있는 자룡대주에게 너무 미안한 노릇이니……
[주인님!]
<오- 몽몽. 왜?>
[죄송합니다. 그리 반갑지 않은 보고입니다.]
<…뭔데?>
[조금 전 지하무림의 귀물, 외형적으로 ‘상자’의 형태를 띄고 있는 대상물 두 개를 스캔해 보았습니다.]
상자들은 본래 모두 세 개라고 했다. 하나는 모종의 장소에 붙박이로 설치된 거라 여기 있는 건 두 개다. 저 두 상자를 내가 잘 클리어하면 다음엔 그곳에 가기로 되어 있는 건데… 그런데 그보다.
<어이- 다른 것도 아니고 천우신이 날 위해 마련한 안배니까 내 힘으로 열어 볼 생각이라고 했잖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나와도 주인님 스스로 해결하시기를 기다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뭐…야? 혹시 천우신이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이상한 걸 넣어 놓은 거야? 에이- 그럴 리가?>
[…실은 스캔에 실패했습니다.]
<뭐?>
[외장의 잠금 장치 구조까지는 스캔되었으나, 내용물이 있는 안쪽 표면에 ‘스캔 차단 코팅’이 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맙소사! 또 몽몽의 스캔이 차단되었다고?
<설마… 또 원판이라는 거냐?>
[천우신님이 대상물을 제작할 당시의 과학기술로는 코팅에 사용된 물질을 합성할 수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지금까지처럼 코드명 원판에 의한 일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씨앙~! 그 빌어먹을 변태 시키는 대체 어디까지 장난을 쳐 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