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0-2화 : 귀물(貴物)이 귀물(貴物)인 이유.(2)
5-1. 귀물(貴物)이 귀물(貴物)인 이유.(2)
“천주……”
문득 들려온 작은 음성 때문에 돌아보니, 나의 여제 자(?) 자룡대주였다. 표정을 보니 날 부르려고 했다기보다는 걱정이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나온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반대파의 보스 초사마 군은 괴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흣하~! 어찌된 겁니까? 설마 천년 전의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쓰읍- 이 노인네가 자꾸…! …쳇. 그렇다고 지금은 화를 낼 입장도 못되잖아. 암호문을 풀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
“…뭐. 솔직히 그래. 좀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 내 말에 초사마군과 그 일파들은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피식 마주 웃어주며 덧붙였다.
“하지만… 아주 생각이 나지 않는 건 아니야.”
그래…! 천우신이 비록 장난을 좋아하긴 해도 이런 상황을 생각 못하고 날 곤란하게 했을 리가 없다. 생각하자. 다시 생각해보자 진유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었던 요소를 빼고도… 천년 전의 시대에 적응했던 진유준만이 가지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거… 그건 역시 나의 정글도와 생사금마도결(生死金魔刀訣)이다. 나는 상자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먼저 정글도를 틀에 내려놓았다. 잠금 장치에 작용하는 건 정글도의 무게라는 점도 그렇고, 정글도와 틀과의 사이에 미세하나마 공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우신도 정글도의 전신 형태를 정확히 측정한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른 손을 천천히 그 옆의 틀에 맞추어 대보니……
“아- 딱 맞아요! 마치 방금 본인의 손으로 찍어낸 것처럼!”
자룡대주가 감탄성과 함께 외친 것처럼 손모양의 틀은 정말 내가 직접 찍은 것처럼 정확히 내 손과 일치했다. 문득, 내가 내공을 얻은 후 유일하게 맹렬하게 권각법을 수련했었던 연옥도의 숲이 떠올랐다. 도결 수련에 비하면 극히 짧은 수련기간에 불과했지만 그 곳의 나무에는 분명하게 내 장법(掌法)이 시전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천우신은 그 곳에서 내 손바닥 모양을 채취했겠지? …좋아. 그럼 내 손… 내 손이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다시 천우신이 남긴 암호문을 입으로 낮게 중얼거려 보았다.
“검은 하늘… 검은 하늘이라……”
내가 할 수 있는… 내 손으로 열 수 있는 검은 하늘… 현천(玄天)… 현천기공(玄天氣功)…? 그래…! 현천기공은 생사금마도결의 기본이 되는 내공 심법이며 지금은 나만의 독문 심법! 그리고 그 현천기공의 열 세 번째 결(訣)은… 태양현현(太煬現顯)으로 시작되는 양강계열의 운기법으로서, 패도선배가 현역 시절 가끔 선보이면서 독립적인 무공으로 오해를 받았고… 그래서 나중에는 태양마공(太陽魔功)이란 별칭까지 붙었던 심결이지. 처음에 무심코 문장을 풀이해서 읽었던 게 오히려 실수였던 셈이다. 현천이라는 표현을 글자 그대로 현천기공에 단순 대입한 것만으로도 모든 암호가 풀려 버리기 시작한다. …현천기공의 열 세 번째 심결은 강력한 열화를 발현하기 위한 운기법이며 그 중 일곱 번째 식(式)은 그 열화를 손끝으로 방출하는 구체적인 기법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장의 다섯 명의 영웅이 길을 연다는 건, 다섯 손가락 끝으로 동시에 열화를 방출하는 오봉신화(五峯神火)를 쓰라는 뜻! 나는 천우신의 암호문 해석이 끝남과 동시에 그 뜻에 따라 내력을 손가락 끝에 모아 오봉신화를 펼치기 시작했다. 다시 문득… 연옥도 시절이 떠올랐다.
…연옥도 생활도 1년이 거의 다 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나의 현천기공이 생각보다 빨리 목표했던 경지에 도달해 가는 것에 고무되어 천우신 앞에서 오봉신화를 펼치며 자랑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천우신은 감탄과 함께 이렇게 말했었다.
“오오~ 정말 다행이네, 친구! 어제 내가 실수로 아궁이의 불씨를 꺼트렸었거든! 부싯돌도 다 떨어져서 이 일을 어쩌나 고민했었다네!”
“이런- 제기! 현천기공의 열세 번째 비결이 ‘부싯돌 신공’밖에 안 되는 줄 알아?”
나는 천우신의 엉뚱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아 투덜대긴 했지만, 결국 그 후로는 정말 가끔 인간 부싯돌 구실을 해야만 했었다. 그 때는 그렇게 대충(?) 넘어갔었지만… 나중 그 일을 이렇게 인용했다는 건, 사실 그 때 그 친구도 누구보다 내 무공 성취를……
철컥-! 하는 소리에 나는 잠시의 추억에서 깨어나야 했다. 반가운 금속성의 소리는 물론 내 눈앞의 상자 어디선가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 성공하셨습니다, 주인님. ]
[ 와아아~ 역시 성공! 성공! ]
요몽의 환호성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어보니 구양대주와 자룡대주를 비롯한 인정파 인물들도 감탄과 안도의 표정을 떠올리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반대파 인물들의 대부분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며 술렁대기 시작했다. 음, 그래도 무리의 보스 급이라 그런가? 초사마군과 소군황만은 아직도 별로 기가 죽은 표정이 아닌 게 다소 불쾌한 걸? 뭐… 내가 곧 두 번째 상자까지 열어젖기면 알아서 찌그러지겠지만 말이다.
[ …이 상자의 잠금 장치는 특정 무게가 가해졌을 때 동작하는 단순 장치와 다섯 곳의 소규모 지점에 설치된 형성기억합금에 의한 동작이 일치되어야 해제되는 복합 장치였습니다. 당시에 어떻게 형성기억합금을 만들어 이용할 수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합금의 가공 형태로 보아 제작 자체는 우연한 결과의 산물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의 기록에는 이런 형태의 금속이 화산 부근에서 드물게 발견되어 신묘금(神妙金), 복룡철(復龍鐵) 등으로 불리며 중요한 기관진식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
몽몽의 추가 설명은 나름대로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난 당장 눈앞의 일이 더 궁금해서 바로 두 번째 뚜껑부터 열었다. 그러나… 애써 연 것치고는 보람이 적다고 할까? 상자의 바닥에 또 다른 암호문구인 듯한 글자가 잔뜩 새겨 있을 뿐, 그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뭐… 전부터 이 첫 번째 상자에는 두 번째 상자를 위한 안배가 있을 뿐이라고 들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크게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안부 편지 한 통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는데… 으음- 혹시 이 암호문 자체가 안부 편지를 겸하는 건 아닐까? 나는 상체와 고개를 좀 더 숙이며 첫 눈에도 이상했던 문장, 아니 글자의 집합체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아무리 글자들의 뜻을 연결하려고 해 봐도 앞뒤가 안 맞지를 않았다. 이런, 이런… 아까처럼 최소한의 문장이 이루어지지가 않으니 뭔가 연상할 수도 없잖은가. 그렇다면 이거… 아무래도 퍼즐처럼 조합을 해야만 해석이 되는 방식 아닐까…? 그러고 보니 글이 새겨진 패턴도 바둑판처럼 일정한 것이… 좋아, 그럼 숫자부터 파악해 보자. 가로 한 줄이 총 30글자이고… 어, 세로로도 딱 30글자네? 오호~ 역시나 전형적인 퍼즐식 암호 형태의 냄새를 팍팍 풍기는 구만! 그렇다면 글자의 배열 패턴을 알아내는 것이 관건인데… 천우신이 내게 사용했을 법한 배열 패턴이라면 대체 어떤 것이 있을지… 음… 으음… 응…? 뭐…지? 갑자기 웬지 거북한 기분이…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든 것은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의 정수리쯤에 뜻드미직 한 바람기가 느껴지고, 그와 함께 야릇한 향기와 비릿한(?) 냄새가 어우러져 풍겨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무심히 고개를 들어 본 나는 머리 위의 밤하늘을 가득(?) 메운 각양각색의 사람 얼굴에 흠칫 놀라 외치고 말았다.
“뭐, 뭐야? 뭐?”
나도 놀랐지만 그 사이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더 화들짝 놀라며 일제히 썰물처럼 뒤로 물러났다. 내가 정신을 암호풀이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다른 지하무림 사람들은 인정파와 반대파를 가릴 것 없이 나와 상자 주위로 모여들어 핏발선(?)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고딩 1학년 초기, 학교에서 열심히 혼자 영어 샘님께서 숙제로 내 준 문장을 해석하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주변의 친구 놈들이 전부 모여들어 내 해석을 베끼고 있었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고 할까…? 그때는 다음 영어 시간에 선생님(별명 타이슨.)께서 나와 내 거 베낀 애들 모두 해석 개판이라고 핵 펀치를 날렸었던… 그래서 한동안 왕따를 당했었던… 음, 흠! 공연히 아리따운 추억까지 떠올렸군, 그래.
“죄송합니다, 천주. 모두들 선대가 남긴 귀물의 수수께끼를 궁금해했던 터라… 음, 방해가 되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구양대주가 대표로 사과를 해와서 나는 손을 저어보였다.
“아, 아니야, 구양대주. 다들 당연히 궁금했겠지. 어… 그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조금 전처럼 모두 너무 달라붙지는 말아 줘.”
“그렇다면… 허용하시는 거리까지만 접근하겠습니다.”
“그럼. 1미터쯤… 그래, 지금 자룡대주가 서 있는 정도!”
“감사합니다, 천주. 명을 받들겠습니다.”
구양대주가 먼저 복명하고 자룡대주 옆으로 서자, 물러났던 자들도 다시 일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양한 군웅들의 무수한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비화곡주에 마군황으로 이어지는 ‘주목받는’ 생활을 거쳐 온 나로서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무엇보다 조금 전처럼 저 많은 남자들이 바로 가까이에서 일제히 남자의 숨결과 남자 냄새를 뿜어내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어… 그러고 보니 일백마군은 본래 여자의 비율이 매우 낮았는데, 그나마도 오늘 모인 중에는 달랑 두 명뿐이다. 연세가 좀 있으신 저 아주머니 마군들은 처음부터 조금 뒤로 빠져있던 것 같으니 좀 전에 날 애워 쌓던 남자 냄새를 조금이나마 중화시켜 주었던 야릇한 향기는 역시 자룡대주에게서 났었던 모양이다. 특별한 향수를 쓴 것 같지도 않은데도 기분 좋은 향기가 있다는 건 자룡대주가 그만큼 괜찮은 여자라는 반증이려나…? 음… 방금의 생각은 누가 알았다면 오해할 만한 패턴의 생각이었을까…? 하지만, 뭐… 난 그냥 순수하게 그녀를 평가했을 뿐, 절대로 이상한 마음을 품은 건 아니었다. 난 확실한 배반은 고사하고 그럴 폼 비슷하게 잡는 것조차 우리 대교에게 미안해서 못한다. 암! 나는 오직 대교! 천우신은 오직 소령! 우리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일편단심 민들레파 조직의 친구들! 훗…! 하마터면 실제 입 밖으로 ‘오직 대교’를 외칠 뻔했다. 생각해 보니… 나와 천우신은 연옥도에서 강호로 복귀한 첫날, 첫 자축 파티에서 그 구호를(?) 외치며 건배했었다. 후후~ 그때는 나나 천우신, 둘 다 각자의 천사들에게 자신의 진면목도 밝히지 못했었던… 말하자면 짝사랑 동지였었군. 나도 당시엔 꽤나 복잡한 입장이었지만 천우신 역시 소령이와 어렵게 재회를 하고도 밤새 삼육구 게임이나 해야 했던 처량한… 처량한… 삼육구…? 어? 가만…? 혹시… 그게 그 친구가 남긴 암호문의 해독 패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