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1-2화 : 모자랐던 신화(神話).(2)
친절한 안내 멘트를 마친 직후, 내 정글도가 허공을 가르며 섬뜩한 푸른빛의 반원을 토해냈다. 예전의 세 개에서 하나가 모자란 두 개… 그러나 그때보다 월등히 빠르게 살인 초승달이 날았다. 다음 순간, 소군황의 차에서 끼이이익-! 하고 요란한 급정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전음 때문에 뭔가 날아드는 걸 알아챈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게 오히려 함정이었다. 급정거로 인해 부자연스럽게 멈추며 회전하던 놈의 차체는 오히려 정확히 청섬백의 사정권에 들었던 것이다. 가늘고 창백한 달빛이 차체를 가차없이 가르며 지나갔고, 다음 순간 육중한 외제 차체가 세 토막이 나며 각각 길 옆의 도랑에 쳐박혀 버렸다.
[ 주인님……! ]
< 음, 음. 그래, 몽몽. 조금 늦을 거 같아서 잔머리를 써 봤는데, 잘 먹혔어. >
[ 아, 저… 정말 죽일 생각…이셨어요? ]
< …그래, 요몽. 그리고… 아직 안 죽었으면 마무리할 거야. >
[ 주인님…! 이건… 이건…… ]
< 나답지 않다거나, 다시 생각해 보라는 소리 따위 하려면 아예 입 다물고 있어. >
나는 몽몽 남매의 잔소리를 원천 봉쇄하며 불행한 교통사고(?) 현장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 사실, 난 지금 소군황에게 감사하고 있어.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 수 있는지… 최소한 예전 마군황 시절 정도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잘 안 됐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어.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쉽게 본래의 능력이 나와 준다는 건 나 자신도…… >
내가 독백에 가까운 전음을 멈춘 것은 갑자기 뒤쪽에서 누군가가 맹렬하게 달려오는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기습…? 아니, 아니… 느낌상 어째 그런 기특한(?) 자는 아닌 것 같은데?
[ 주인님. 야후장로의 환생자, 천음마군(天飮魔君)입니다. ]
훗…! 몽몽 녀석, 새삼 그런 식으로 언급하다니… 내가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살수를 쓸지 모른다고 우려한 건가?
지하무림과 마군황의 실태에 실망했다며 떠난다고 했던 천음마군. 그런 그가 실은 계속 산 어딘가에 남아 있었는지, 빠르게 달려 내려온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은 채 날 지나쳐 계속 달려갔다. 나는 여전히 서두르지 않는 걸음을 옮기며 앞서간 천음마군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예상대로… 그는 길 아래에 처박혀 있는 차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흐음~ 소군황에게 ‘다시는 아는 체하지 마라’라고 선언할 때는 언제고… 자기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군.
[ 주인님! 현재 저 차체는 주인님의 공격에 의해 연료 탱크까지 손상되어 상시 폭발 가능성이 높습니다. ]
< …그래? >
천음마군은… 배신한 친구를 그래도 살리겠다고 온 힘을 다해 차 문짝을 떼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전에 한 번 칼을 맞대 봤기 때문에 그가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내력과 힘을 가진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천음마군도 친구의 몸이 더 망가지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그를 막고 있는 찌그러진 차체를 다루는 건 힘겨운 모양이었다. 나는 거리가 점차 가까워져 가면서 천음마군의 눈동자에 절망감이 떠오르는 것도 볼 수 있었기에, 점차 강하게 ‘도와줘야 한다’는 충동을 느껴야 했다.
…힘내, 천음마군!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알량한 마음속의 응원만을 하는 건 뻔뻔한 노릇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천음마군을 돕기 위해 달려가지 않았다.
내가 청섬백이 명중했던 장소까지 도착했을 때, 천음마군은 기어이 소군황을 차체에서 끄집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는 지저분한 논두렁 위로 힘겹게 소군황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가 차체로부터 십여 미터 정도 떨어졌을 때… 그제야 차체가 화악- 폭발했다. 사실 폭탄처럼 터졌다기보다는 불길이 일시에 번진 수준인 것 같지만… 그래도 만약 누구든 차체나 그 옆에 있었다면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아아~ 그래. 역시 당신은 그렇게 단명할 상이 아니었어.
나는 마음속의 안도감과 기쁨을 숨긴 채, 손을 들어 짝짝- 건조한 박수소리를 냈다.
“멋진 타이밍이군. 마치 시나리오로 짜여진 영화 속 장면처럼 말이야.”
나의 칭찬도 비난도 아닌 말에 천음마군은 천천히 소군황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고개를 들었다. 그는 길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마주 올려다보며 자신의 독문병기, 예의 정육점 칼을 꺼내 들었다. 차의 기름과 진흙에 범벅이 된 몰골로 칼을 들고 선 모습이 지극히 비장해 보였지만… 그는 그 칼을 내게 겨누지 않고 옆으로 던져 버렸다.
“…소인, 천음마군. 천주께 제 목숨을 걸고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목숨을 건 것은 알고, 말하고 싶은 게 뭔지도 이미 짐작하고 있기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천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저분한 현재의 모습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 당당한 태도와 눈빛이었던 천음마군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천주! 부디 제 목숨을 대신 가져가 주십시오! 한 번만! 이번 단 한 번만, 구영웅을 용서해 주십시오!”
친구의 용서를 대신 비는 건 예상했지만… 한 번…? 단 한 번만이라고?
“…천음마군. 사람의 생각과 성격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 그 자는 얼마 가지 않아 결국 내게 죽을지 모르는데… 그래도 굳이 지금 한 번 자신의 목숨을 바쳐 구해 줄 필요가 있을까?”
“그건… 그것이 끝내 이 친구의 운명이라면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제 눈앞에서 죽는 걸 좌시할 수는 없습니다.”
쯧~! 이 양반이 결국 사람 마음 약해지게 하네. 내가 오늘 마군황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 것도 친구 덕분이니… 흐으으음. 그래도 역시 이 정도에서 끝낼 수는 없지!
“우정… 좋은 거야. 엄청. 하지만……!”
나는 훌쩍 몸을 날려 천음마군과 소군황의 사이에 내려섰다. 내가 의식이 없는 상태인 소군황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리자, 천음마군도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더 이상 날 막는 어떤 언행도 하지 못했다.
“…그건 보통 사람들 얘기고, 내가 아는 지하무림인들은 마군황의 명령이라면 절친한 친구나 부모형제까지 칠 수 있는 자들이지. 안 그래? 난… 자네가 친구를 위해 마군황을 막아선 거,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비죽이 웃었고, 천음마군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는가 싶더니 끝내 고개를 숙였다. 사실 좀 더 개겼으면 나도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었지만…
“그러나… 자네는 조금 전 이미 한 번 목숨을 걸었지. 같은 지하무림의 동료를 위해 목숨을 건 것만은 칭찬받아야 할 일! 그 값으로 약간의 유해 기간을 주겠어.”
“예?”
절망했던 천음마군이 다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소군황의 처참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이 깨어나면… 24시간 주겠다고 전해. 그 시간 동안만은 치지 않을 테니, 그 사이 평생 날 피해 숨어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거나, 아니면 날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 보라고… 알겠나?”
“천주를 어쩔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아, 아니. 하여간 복명! 가, 감사합니다!”
결국 자신의 목숨을 건 대가로 친구의 목숨 하루를 얻었을 뿐이건만, 천음마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기까지 띄우며 넙죽 엎드렸다. 나는 그런 그의 옆에 소군황을 던지듯 내려놓고 돌아섰다. 천음마군에게는 미안하지만… 소군황 구영웅의 불행과 고통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30분 정도 후. 나는 다시 산속의 수련장으로 돌아와 내 전용 바위 위에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몽몽. 내 지시대로 시행했겠지?”
[ 예, 주인님. 주인님께서 대상 인체의 멱살을 잡는 형태로 접촉했을 때, 그의 신체에 추적 장치를 심어놓았습니다. 추적에 필요한 발신 기능과 함께 몇 가지 기본 정보의 수집까지 가능한 규모의 하위체가 사용되었으므로 저의 현재 기능이 11.6% 저하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좋아. 현재 놈의 위치는?”
[ 약 12.5KM 정도 거리의 병원에 후송되어 응급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
“일행은?”
[ 주변의 육성을 분석한 결과 현재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은 초사마군을 비롯한 일곱 명입니다. 천음마군은 응급실까지 따라가지 않고 떠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천음마군이야 자신이 놈에게 말했던 ‘아는 체하지 마라.’ 때문에라도 놈이 의식을 되찾기 전에 사라졌을 것이고… 다른 자들은 역시 ‘그 놈에게 내력을 몰아줬던 마군들인 모양이군.
“놈들의 구체적인 움직임은?”
[ 현재까지 청취된 대화로는 즉시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갈 생각은 없는 것으로 분석되지만… 아직 저항할 의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
“훗~! 당연히 그렇게 나와 줘야지.”
[ …청취 분을 직접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
“아니, 됐다. 난 좀 쉴 테니 네가 판단해서 특별한 사항이 있으면 알려 줘.”
[ 알겠습니다. ]
[ 저기, 근데요, 주인님. ]
“왜, 요몽.”
[ 아, 아니에요. 그냥… 쉬세요. ]
요몽은 뭔가 하고 싶은 듯 직접 모습까지 나타냈지만 곧 생각을 바꿨는지 얌전히 다시 사라졌다. 다른 때라면 궁금해서라도 캐물었겠지만, 오늘은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짐작이 되고 해서 나도 그냥 모른 체 하기로 했다. 나는 몽몽에게 말한 대로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하며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천년 묵은 술의 향기가 여전히 코끝을 맴도는… 간만의 기분 좋은 운기조식이었다.
[ 주인님! ]
몽몽이 날 호출한 것은 운기조식을 시작한 후 3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 소군황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그래?”
[ 공항으로 이동할 것이며, 이미 중국으로의 비행기편이 예약되었습니다. ]
< 그렇다면… 나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해야겠군. 놈들과 같은 코스의 비행기 좀 알아봐 줘. >
[ 알겠습니다. ]
나는 눈을 뜨고 끄응- 기지개를 한 번 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동이 녀석은 바로 옆 바위 위에 앉아 졸고 있었는데, 녀석도 잠이 깨더니 길게 하품을 하고는 나와 똑같이 기지개를 켠다.
“…천주.”
날 부른 것은 자룡대주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리를 피했던 그녀가 한 시간 정도 전부터 이곳에 돌아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보천구룡대를 대표해서 천주께 알려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대표’로서…라고? 전령인 셈인가? 하긴, 본래 굳이 재교육을 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여자인데다, 일단은 나의 제자이니 오늘의 나에게서 가장 안전한(?) 자로 뽑힐 만도 했다.
“…해봐.”
“초사마군을 비롯해 소군황 구영웅을 키운 자들은… 본토의 정계와 군사 조직에 상당한 인맥을 가진 자들입니다. 저희들도 최선을 다해 천주를 보필하겠지만……”
“그래서?”
“예? 그러니까… 조심, 하시라고……”
나는 바위 위에서 내려와 정글도를 걸치며 자룡대주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움찔 긴장했지만 내 접근과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자룡대주.”
“예, 천주.”
“…마군황을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이고 싶어도 결코 죽일 수 없는 지배자’… 그리고 ‘그 지배자가 죽음을 원하는 자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다’… 이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을 거야. 안 그래?”
“예, 예! 그렇습니다.”
“앞에 건 이미 증명한 바 있으니… 두 번째 명제는 이번에 증명해서 실감시켜 주겠다는 거야. 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 그렇…다면… 천주께선 정말 혼자서 그들을……”
“그래. 그리고… 그건 자룡대주 당신이 누구보다 바라던 일 아닌가? 개·인·적·으로도 말야.”
“예? 그건, 아니요, 그건, 저……”
자룡대주는 당황하여 입으로는 부인했지만, 속내를 들킨 안색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나는 쭈빗거리고 선 자룡대주로부터 물러나 추적을 재개하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남은 20시간 정도 동안 소군황이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 어떤 대비를 할 수 있을지… 은근히 기대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