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1-3화 : 모자랐던 신화(神話).(3)
나는 자룡대주의 기대에 찬 시선을 뒤로하고, 어느덧 먼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배신자 혹은 반역자에 대한 추격을 재개한 내 발걸음은 목적에 비해 지극히 가볍고 상쾌했다. 산을 내려가자마자 우선 내 차 키트 1호를 몰고 놈들이 향한 공항 방향으로 출발했는데, 예전의 마군황 때와 달리 이번에는 금동이도 함께였다.
< 몽몽. 소군황 녀석은 어때, 공항에 도착했나? >
[ 아직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
< 음… 그럼 놈의 몸에 심어놓은 하위체로 놈의 핸드폰 번호도 알아낼 수 있겠냐? >
[ 가능합니다. 하지만 해당 인물이 소지 중인 핸드폰은 근거리 접근 시 이미 스캔하여 번호를 확보해 두었습니다. ]
< 오호~ 역시 우리 몽몽이군. 좋아. 녀석에게 전화해 봐. 그냥… 일반 라인으로. >
[ 일반 라인. 알겠습니다. ]
일반 라인이라는 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회선을 쓴다는 의미로, 만약 놈이 발신자 확인 서비스를 쓰고 있다면 내 전화번호가 찍힐 것이다. 물론 아직 놈은 내 번호를 모르고 있겠지만 말이다.
“…여보세요?”
“어- 나다.”
“예? 누구십니까?”
“벌써 내 목소리를 잊었니? 나야, 마군황 진유준.”
감도 좋은 몽드폰을 통해 놈이 숨을 삼키는 기색이 전해져 왔다.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등의 기본적인 질문조차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의 기세와 달리 잘도 도망치더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겠지만… 너 혹시, 천리추종향(千里追從香)이란 걸 아나? 난 이미 그걸 네 몸에 묻혀 두었는데 말야.”
“…그,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할 리가……”
“있어.”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정도로 아는 것 같기는 해도 어쨌든 들어는 본 모양이다.
“남은 시간은 20시간 11분 정도… 그 사이 내게서 어디까지 달아날 수 있나 보자.”
나는 놈의 마른 침 삼키는 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과거의 무림에서 간혹 쓰였다는 천리추종향이란 건 본래 그 특별한 향수 외에도 그 향을 맡을 수 있게 훈련된 짐승을 추격에 이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러나 물론, 나의 ‘천리추종몽’은 훨씬 첨단을 달리고 있기에… 이런 것도 가능하다.
< 몽몽. 놈의 반응은? >
[ …대상 인체의 신경계 반응과 체온 및 심장 박동 등의 변화로 보아, 소위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역시 주위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도주보다 저항의 의지를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속마음은 어쨌든, 아직은 버틸 만 한 모양이군. 암, 그래야지. 아무리 ‘소’자가 붙었다고는 해도 내가 없는 사이 ‘군황’의 이름을 가지고 절반에 이르는 지하무림을 장악하던 자이니 말이다.
나는 본격적으로 쫓기는 자의 심정이 되기 시작한 소군황과 달리 여유 있게 차를 공항에서 조금 떨어진 시내 쪽으로 몰기 시작했다. 손에 익은 무기 종류는 충분했지만 그 밖에도 필요한 걸 몇 가지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자룡대주에게도 말했지만… 이번 소군황 토벌 작전의 요는 ‘나 개인의 힘으로’이다. 지하무림 내부의 일이니 G.M.의 힘을 빌릴 수는 없고 자룡대주와 구양대주를 중심으로 한 자들의 도움도 받아서는 안 된다. 도움은 고사하고… 모두에게 내 행적 자체를 숨길 필요가 있기 때문에, 난 곧 내 차도 부산 초입의 적당한 곳에 주차해 놓고 맨몸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는 경공으로 초고속 이동, 사람들 많은 곳에는 인술(忍術) – 아직 미완성이지만 – 을 쓰고, 전자 장치로 출입구가 잠긴 건물들을 공연히 통과해 가는 등… 연습도 할 겸해서 난 내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미행을 따돌렸다. 그러는 중간중간 발견되는 가게에서 옷과 비상식량을 구입하는 등 쇼핑까지 마치고 나니 소군황과 통화한 후로도 3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다시 얼마 후. 나는 며칠 사이 몇 번이나 와봐서 익숙해진 공항에 들어서며 몽몽에게 물었다.
< 놈들이 아직도 떠나지 못했다고? >
[ 그렇습니다. 권력과 금력을 이용해 특별 좌석을 확보하려 했지만, 자룡대주가 동결 시켰기 때문에 30분 후에 출발하는 정기 노선에 탑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 여자, 시키지도 않은 짓을… 으음… 하지만 내가 ‘혼자 한다’는 선언을 확실히 전달하기 전에 한 짓인 모양이니 뭐라 할 수는 없겠군.
나는 본래 약속된 시간이 될 때까지는 놈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을 생각이었고, 그래서 놈들의 바로 다음 비행기 편쯤을 타려고 했었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음… 내가 이번에 비행기 밀항으로 생각해 본 방법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적당한 사람을 골라 적당한 곳에 잠재운 후 용근확골공(用筋擴骨功)을 써서 그로 변신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비교적 난이도가 낮긴 하지만 내게 옷과 여권 등을 빼앗긴 사람에게 미안해서 곤란했다. 돈으로 보상한다고 해도 그에게 그보다 중요한 어떤 일정이 있을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 두 번째의 난이도가 높은 방법인데… 이건 지금까지 실전에서 써 본 적이 없어서 잘될지 모르겠다.
< …몽몽. 공항의 체크 장비들을 부탁해. 금동이에게는 따로 찾아 올 수 있도록 약도와 비행기 넘버를 알려주고. >
[ 알겠습니다. ]
몽몽이 금동이에게 녀석만 볼 수 있는 입체 영상을 띄워주는 사이, 나는 나대로 이미 알고 있는 공항의 구조를 다시 한 번 머리 속에서 그려보았다. 잠시 후, 금동이는 어디론가 먼저 후다닥 달려갔고 나는 공항 직원 전용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혼자라도 상관은 없을 것 같았지만 마침 몇 명의 남자들로 이루어진 직원 일행을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옆으로 따라 붙었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자신의 기척과 존재감을 죽이고 특정한 사람들의 일행으로 녹아드는 것은 인술(忍術)의 기본이다. 문제는 한 사람씩 통과하며 신분증을 체크하는 곳이었는데, 나는 그 앞에서도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가 일행 중 한 사람이 통과할 때 그에게 바짝 붙어서 함께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카드 체크 기계와 함께 서 있던 직원들의 시선을 속인 것은 잠영귀보(潛影鬼步). 순간적으로 특정인을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면서 다른 이들에게 한 사람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상위 인술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잠영귀보의 대가가 바로 흑주(黑珠)였다. 사실 내가 그동안 틈틈이 연습해 온 인술의 대부분은 주직촌(珠織村) 이후 조금씩 인간적이 되어갈 당시의 흑주에게 몇 가지 비결을 캐물어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인술만큼은 나도 아직 흑주의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출입구를 통과해 어느 정도 가던 중 뒤에서 들려 온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에 돌아보니, 내가 통과했던 출입구에서 뒤늦게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 여자 직원이 자기의 눈앞을 유령 같은 형상이 통과했다며 겁에 질린 채 주저앉아 버린 모양이었다.
에고고- 지난번의 어설픈 하이재킹에 이어 이번에는 유령 소동이라니… 여러모로 항공사 사람들에게 미안하게 됐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고…
난 결국 계속 초고속 경공과 잠영귀보를 번갈아 써서 귀신 놀음을 하며 목표 지점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식의 나의 이동이 멈추고 안착한 곳은 비행기의 화물칸이었다. 노력에 비해 초라한 곳이기는 했지만 금동이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노력과 난이도에 비해 허무한 일은 하나 더 있었다.
< 내 인술의 경지가 아직 부족하니 몇 번(?) 들킨 건 그렇다 치겠는데… >
나는 푸짐하게 쌓여 있는 짐들 사이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 그래도 현재로서는 최고의 기법을 동원한 건데… 어떻게 금동이 네가 더 빨리 와 있냐, 그래? >
내 탄식(?)에 금동이는 기분 좋게 킥킥대며 익숙한 태도로 물건 더미 위로 기어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천년의 세월 동안 혼자 꿋꿋하게 살아 온 금동 옹께서는 이런 밀항에도 익숙해 있는 건지 별로 불만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하은이가 금동이를 만난 게 미국이라고 했는데… 그때도 누가 데려간 게 아니라 지가 알아서 놀러 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나도 뭐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시골 동네의 공동창고에 몰래 숨어 들어갔을 때처럼 미지의 보물들에 둘러싸인 기분이 약간 들기도 하고… 다 큰 지금은 더 완전히 야전 체질이 되어 있는지라, 이런 곳에서 결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이 그리 불편하지도 않고 말이다.
나와 금동이가 자리를 잡고 얼마가 지나자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실내의 기압 같은 것을 조절하는 장치가 승객 칸보다 미비해서인지… 곧 어색한 부유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비행기가 일정 고도에 올라 기체가 안정화 상태에 이르는 과정까지 생생하게 몸으로 전해지는 것이 오히려 재미있기도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대로 밀항의 색다른 재미만을 즐기는 것으로도 충분했겠지만…
< 몽몽. 놈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알려 줘. >
내 요청에 몽몽은 곧바로 비행기 내부를 투시하여 그 중 놈이 앉아있는 좌석을 보여주었다. 마군황께서는 화물칸인데 반역자 놈은 VIP석이라… 흐음- 이런 부조리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어디… 위치도 대충 알겠다, 전화를 걸 것도 없이…
< 어이- 소군황! >
[ …주인님의 전음에 그의 심장박동이 급격히 빨라지고 있습니다. ]
그렇겠지. 승객들 중에 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소나마 안심한 상태였을 테니 말이다.
< 몽몽. 소군황의 음성을 실시간으로 전송해 줘. >
[ 알겠습니다. ]
< 소군황, 구영웅! 너, 너무 여유부리는 거 아냐? 이런 식으로 내게서 달아날 수 있겠어? >
“…훗! 걱정하지 마시오. 한국을 떠나고 나면 곧 당신 쪽에서 여유가 없어질 것이오.”
이게 이제 아주 대놓고 하오체를 쓰는군.
“…당신이 다른 추종자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혼자서 날 치겠다는 선언을 한 것도 알고 있소.”
흐음- 설마 자룡대주가 놈에게… 아니, 오히려 공동 통신망 같은 것을 통해 사방에 광고를 때렸겠구나. 이건 모든 지하무림인들이 암중에 지켜봐야 할 일이니까.
“산에서 날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오!”
< 흣! 음… 흣!흣!흐~! >
내가 나도 모르게 괴이한 웃음소리를 전음으로 보낸 건, 손잡이를 부여잡고 가늘게 떨고 있는 놈이 잘도 허세를 부린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웃음기가 조금 가라앉은 다음 진심을 담아 조용한 어조의 전음을 보내 주었다.
< 남은 16시간 13분… 20초. 편안한 여행이 되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