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2-1화 : 가슴이 아파도 웃을 수 있다.(1)
5-3. 가슴이 아파도 웃을 수 있다. (1)
소군황 놈과의 통신을 끝낸 나는 잠시 운기조식을 하며 상황의 변동을 기다려 보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놈과 놈의 일파 중 누구도 비행기 안을 뒤져서 날 찾아볼 엄두를 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역시 놈들은 중국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홈 그라운드에서 승부를 거는데 올인 한 것 같았다.
“<몽몽. 난 지금부터 운기조식에 들어갈 거야. 넌 그 사이 금동이와 좀 놀아 줘야겠어. 그러니까…>”
나는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다음, 몽몽을 금동이의 머리 크기에 맞는 머리띠 형태로 변환하게 했다. 내가 머리띠 형태의 몽몽을 들고 부르자 금동이는 조금 의아해하는 기색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금동이는 곧 자기가 먼저 손을 내밀더니 익숙한 태도로 몽몽을 받아 머리에 썼다. 천 년 전 연옥도에서도 이런 식으로 몽몽을 쓰고 놀거나 교육받은 기억이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금동이의 엄청난 기억력은 몽몽의 가상현실을 통한 교육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영화 제목이… 론, 뭔데… 아, 론머맨. 직역하면 잔디 깎는 남자…던가? 하여간 그 영화에서 정신지체 청년의 지능을 가상현실 장치로 향상시키는 내용이 나왔었다. 가상 현실을 겪게 하면서 뇌에 자극을 주어 지능을 향상시키던가 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중에는 그 효과가 너무 지나쳐서 정신지체였던 청년이 놀라운 지적 능력을 가지게 된 건 물론이고 강력한 초능력까지 쓸 수 있게 된다는 설정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그 청년이 자기 자신을 프로그램화하여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고, 결국 전 세계 전자장비를 장악하여 ‘사이버 세계의 신’, 그것도 엄청난 호전성과 악의를 가진 악신(惡神)이 되는 결말이었었다. 음… 금동이에게 계속 가상현실 기술을 쓰게 한다고 해서 설마 그런 괴물 원숭이가 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영화 속 캐릭터라고 칠 경우, 영화의 막판에 원판은 알고 보니 적의 중간보스에 불과했고 금동이가 바로 숨은 최종보스였으며 인간을 초월한 지능과 초능력으로 무장한 하이퍼울트라몽키마왕이었다는 반전이…
문득 떠오른 영화 때문에 잠깐 극단적인 상상을 하게 되었지만, 난 곧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젖고 말았다. 몽몽의 가상현실 기능에 그렇게 위험한 부작용이 있었다면 금동이보다 내가 먼저 악신이 되어도 수백 번은 더 되었을 테니 말이다.
나는 결국 그대로 몽몽에게 금동이를 맡기고 눈을 감았다. 최근 소교 때문에 몇 번 비행기를 타고 갈 때도 느꼈지만, 신불산처럼 기가 충만한 장소가 아닌 데다 고속으로 날아가는 중이어서인지 기의 흐름이나 양이 미친X 널뛰듯 변화하고 있었다. 물론 승객 칸과 달리 이 곳은 흔들림이 더 심하고 공기의 질조차 좋지 않았다. 운기조식을 하기에는 최악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직 내가 공격을 재개할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고 놈들 쪽에서의 공격 가능성도 거의 없으니 비행기 안에서만이라도 여유를 가지고 여행 기분을 즐기자…라는 식의 생각도 안 드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마냥 긴장을 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은 내가 훨씬 유리한 입장일지 몰라도, 2라운드가 시작될 때쯤에는 그 입장도 역전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난 그때부터 소군황 놈이 언급했던 ‘인간의 무공으로는 어쩔 수 없는 현대 무기’로 무장한 채 미리 대비하고 기다리는 적진을 뚫어야 한다. 그 것도 정면으로 당당하게 압도적인 무위를 보이며 놈의 저항을 깨야 하는 것이다.
난… 나는 정말 할 수 있을까…?
운기조식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별생각 없이 먹던 음식물이 목에 걸리는 것처럼 비관적인 질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불산처럼 기가 충만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도… 난 나의 전투력을 극한까지 발휘할 수 있을까…?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정말 내 무공으로 현대의 강력한 무기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계속 그런 식의 수많은 자문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의 자답은 한결 같았다.
…물론! 말밥이지! 암! 할 수 있고 말고! 난 마군황! 나 진유준은 지하무림의 마군황! 반역한 수하 따위… 그 어떤 무기를 들고 달려들어도, 그 어떤 방어진을 펼치고 숨어도, 밟아 주고 유린하고 굴복시킬 것이다! 그 것은 마군황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
잠시 주춤했던 기의 흐름이 다시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며 나라는 바다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문득 운기조식을 멈추고 눈을 떴다. 아주 잠깐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생체 시계로는 그 사이 이미 두 시간 가까이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아지경에 빠져있는 동안 몽몽은 금동이와 아주 제대로 놀아(?) 주었던 건지… 천하의 금동이가 전에 없이 지친 모습으로 씩씩대고 있었다. 결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금동이에게 손을 내밀었더니 녀석은 순간적으로 경계하며 크으-하고 날카로운 이빨까지 보인다.
“<진정해, 금동아. 나야, 나.>”
나는 얼마 간 녀석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후에야 녀석에게서 몽몽을 회수할 수 있었다.
“<…테스트 결과는?>”
“[총 45종의 개인 화기와 민간 및 전투헬기 등 소군황 측에서 동원 가능성이 큰 병기들을 중심으로 한 반응을 테스트 해 본 결과, 매우 현실적이며 효과적인 대응을 보였습니다. 기존에 확인된 금동의 지능과 운동능력 이상의 전투력 수치를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해당 병기들과의 전투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핫~! 이거야… 원. 난 남은 시간 동안 녀석이 그런 무기들을 만났을 때 피하는 훈련을 시키려고 사전 조사를 시켜봤던 건데… 이미 경험이 있는 것 같다고? 그 것도 도망치는 게 아니라 전투까지 벌여…? 대체 어떻게… 아, 하여간!
나는 뜻밖의 결과에 놀라 금동이를 돌아보았다.
“<야, 너… 넌 대체 그 동안 어떻게 살아 온 거냐?>”
나의 어이없어하는 질문에도 금동이는 태연한 얼굴로 날 멀뚱멀뚱 올려다볼 뿐이었다. 마치 ‘이 험한 세상, 짬밥 한 두 해 먹은 것도 아니고 뭐 그런 거 가지고 놀라슈?’라고 반문하는 것만 같았다. 금동이가 저 작고 귀여운 용모에 비해 너무나 기나긴 세월을 살아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난 그 동안 녀석의 그 세월을 너무 가볍게 봤었던 모양이다.
“<하아아~ 이거, 이거… 참. 이번에는 널 두고 다닐 생각이 아니긴 했다만… 아무래도 넌 이미 나보다도 역전의 용사가 되어 있었나 보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금동이를 향해 가볍게 경례를 해 보였고, 녀석도 여유 있게 마주 경례를 해 온다. 새삼스럽게 경례를 보낸 것은 옛 전우를 몰라 본 것에 대한 사과의 표현이기도 했다.
[ 한 가지… 테스트 도중 총기를 사용하는 인간으로 소군황을 설정해 본 결과, 금동은 현재 소군황에게 상당한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소군황이 주인님의 정글도를 일시 점유할 당시, 회수하러 갔던 금동과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때 금동이 입은 피해가 적개심의 원인으로 분석됩니다. ]
“피해…? 금동이가 그럼 놈에게 부상이라도 당했단 말이야? 근데 왜 보고 안 했어?”
[ 극히 미미했기 때문입니다. 육안으로 확인이 어려우시겠지만… 금동의 두부 상단의 체모가 약 2.7미리 정도 잘려 나간 상태입니다. ]
에…? 2.7미리…? 드, 듣고 보니 금동이의 헤어스타일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손을 뻗어 금동이의 머리를 만져 보려고 했지만, 금동이는 내 손을 거부하고 피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난 무심결에 풋-하고 웃고 말았지만 금동이는 그게 더 분했는지 한 손으로는 잘려 나갔다는 머리 부분을 가린 채 다른 손으로 비행기 바닥을 탕탕 내리치며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아, 미안! 미안! 진정해! 진정!”
거듭 사과를 하며 달래니 조금 진정하는 것도 같았지만, 녀석은 ‘씨앙~ 역시 이상한가 봐’라는 태도로 머리를 감싼 팔을 내리려 하질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금동이 심정도 이해가 되긴 했다. 금동이는 털갈이도 거의 안 하는 것 같다고 했으니… 비록 2.7미리라고 해도, 그건 어쩌면 천년 동안이나 고수해 온 녀석의 자존심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 약 5분 후 서안의 함양 국제 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
몽몽의 안내방송에 나는 천천히 짐을 챙겼고 금동이도 슬며시 출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군황은… 날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모으면 나와의 전쟁에서도 어떻게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이 아직 하나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천년 동안 대체 언제 어떤 전쟁터까지 섭렵한 건지 알 수가 없는 역전의 용사 금동 옹께서 참전을 선언했다는 사실이었다.
몽몽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놈들을 따라 도착한 중국의 서안이란 지방은… 산시성의 성도로서 관중 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으며 그 유명한 실크로드의 기점이라고 했다. 서안이라고 해서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옛 이름은 장안…! 주나라 때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 정도의 세월을 중국의 국도였던 도시인 것이다.
그런 역사적인 도시에서… 소군황 일파는 공항에 대기 시켜 놓았던 헬기를 타고 재빨리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어디론가’라고는 하지만, 난 이미 천리추종몽의 도청에 의해 놈들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었기에 굳이 무리해서 바짝 따라붙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출국대로 나갔다 들어올 것도 없이 곧바로 난주행 비행기로 갈아타 밀항을 계속했다.
우리 나라를 매년 괴롭히는 황사현상의 진원지인 고비 사막의 초입쯤 되는 곳이 바로 난주였다. 그리고 난주의 중천 공항에서는 나 역시 차 한 대가 날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중국 자체가 홈그라운드인 놈들만은 못할지 몰라도, 내게는 전산망이 깔린 곳이라면 전 세계가 홈그라운드인 몽몽 남매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몽몽은 암거래 상과 거래할 때 차와 함께 운전자도 확보했다고 했는데… 뜻밖인 것은 그 안내 및 운전자가 매우 젊은 여자라는 점이었다. 현재의 지역도 지역이지만, 얼굴부터가 언뜻 나와 같은 한국인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인 것으로 보아 몽고족일 것 같았고… 길고 윤기 있는 생머리에 새카맣게 그을린 피부가 매력적인 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당신이 그 역겨운 고비 저택(Gobi Des House)에 데려가 달라는 정신나간 남자인가요?”
도발적인 인사와 함께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그녀의 눈빛이 왠지 심상치가 않았다. 몽몽이 그녀와 차안을 스캔하고 차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나 그녀 자신에게는 특별한 구석이 있음을 보고했다.
이것… 봐라? 여자 길 안내 겸 대리 운전자가 내력을 감추고 있는 고수 급이라… 이건 또 무슨 의미이지?
나는 본래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가리지 않고 먼저 청해 오는 악수를 거부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서 말없이 그녀를 지나쳐 금동이와 가방을 차 안에 내려놓았다.
“뭐예요. 정신나간 남자라고 해서 화내는 건가요? 설마… 당신도 그 저택 사람? 아, 아니지. 거기 사람이면 이런 식으로 갈 리가 없는데?”
나는 다소 정신없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말을 토해내는 그녀를 무시하고 말없이 뒷좌석에 올랐다.
“이런, 이런! 고비 저택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먼데 이런 사막 같은 남자가 걸렸담?”
그녀는 투덜대며 운전석에 앉았지만, 나는 계속 무시한 채 결가부좌를 틀며 눈을 감아 버렸다. 운전자의 겉으로 드러난 성향처럼 성급하게 출발하여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는 차 안에서 나는 잠시 이 수다쟁이 여자 고수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소군황 놈이 내가 올 길목을 예측하고 보낸 자객…? 아니면 미령이나 첸이 호기심으로 보낸 G.M.의 요원? 혹은 원판이 보냈거나 지가 알아서 온 CR……?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고, 나는 바로 생각을 접었다. 대규모 전투를 앞 둔 시점에서 이런 일에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만약의 경우 자객이라면 기습하는 순간 해치워 버리면 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약간의 우려는 있었지만, 그녀는 가끔 백미러로 날 흘끗거리기만 했을 뿐 코스를 이탈하거나 여하간의 수상한 행동 없이 충실하게 운전을 할 뿐이었고, 나는 비행기 안에서처럼 차의 뒷좌석에서 운기조식을 계속하며 갈 수가 있었다. 수수께끼의 대리 운전자도 그렇고, 소군황 놈에 비해 꽤나 돌아가는 지루한 길이었지만… 조금씩 결전의 때가 가까워지면서 나의 전투 감각은 점차 잘 갈린 칼의 날처럼 차갑게 세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소군황이 천음마군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유예 시간이 끝나갈 무렵!
약속을 정했을 시점에서부터 24시간이 지났지만 한국과 이곳의 시차 때문에 이곳 시계로는 어제보다 1시간 빠른 새벽에… 나는 드디어 소군황 일파가 기다리고 있는 예의 ‘Gobi Des House’ 부근에 도착했다. 내가 조금 전 지나온 소규모의 암석지대는 이제 끝나고, 저 크고 화려한 3층 저택까지 2km 정도의 거리는 황량한 들판만이 가로막고 있었다. 본래는 다른 무슨 좋은 이름이었다고 하는데, 난주와 사막의 주민들은 고비사막에서 이름을 따 ‘풀이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의 저택’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저택의 주인은 이미 퇴역한 군인이건만 아직도 막강한 군벌의 일원으로서 이 지역을 지배하는 무법자나 다름없는 자라고도 했다.
저택에 대한 그런 얘기들을, 내가 대꾸를 하거나 말거나 떠들었던 안내인 여자는 내가 내린 후에도 계속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겨울 사막지대의 기온이나 여자인 자신의 시선조차 아랑곳없이 옷을 벗고 전투복으로 갈아입는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가 가방에서 활을 꺼내 제 모습으로 바꾸는 등 전투 준비를 하기 시작했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당신 설마… 지금 저 고비 저택에 침입하려는 거예요?”
“…침투가 아니라 진격.”
“어머, 드디어 대답을… 아, 아니 그거보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죠? 진격? 핫~! 그런 칼 한 자루와 원시적인 활… 원숭이 한 마리를 동료로 삼고…? 미…쳤군요.”
“…지금까지는 몰랐던 거로 치자. 하지만 더 이상 말을 함부로 하면 용서하지 않겠어.”
“아, 예?”
나는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고 성큼 여자에게 다가섰다. 여자는 지금까지처럼 당당함과 평온을 가장하려 애썼지만 결국 차갑게 응시하는 내 시선을 직시하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내가 듣기로… 오래전부터 행방이 묘연한 일백마군 중에는 몽고족 출신이 있지. 지하무림을 떠난 것도 다른 이유보다 한족이 아니라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고도 하더군.”
“트, 틀렸어요.”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격지심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차별이 있었어요.”
적의가 없으며 안면도 없는 지하무림인이라면…이라는 다소 막연했던 조건의 추측이 맞은 셈이다.
“그것도 아주 비열한 방식으로……”
한이 배어있는 말끝을 흐리며 여자는 다시 시선을 들었다. 입술을 깨물며 방자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이 여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없을 거야.”
“예?”
“앞으로는 그딴 거 없어질 거라고. …마군황 아래 모든 지하무림인은 동등. 예전처럼 말이야.”
“그, 그건……”
“그러니까 돌아와.”
나는 고비 저택을 턱짓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우선, 저 짜증나는 저택에 틀어박힌 놈을 끄집어낸 다음… 너처럼 숨어있는 자들도 모조리 찾아낼 거야. 열외 없음! 그러기 전에 알아서 돌아와! 알겠나?”
“예, 옛!”
“좋아. 어차피 이번 일을 직접 보고 싶어서 태운 거니 여기서 대기해.”
“…명에 따르겠습니다.”
나는 바로 조금 전까지의 모습은 간데없이 얌전히 고개를 숙이는 여자로부터 돌아섰다.
“저, 전 은사마군의 이름을 이어받은 자로서… 흑주! 제 본명은 흑주라고 합니다!”
뭐? 몽몽의 보고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나 자신의 느낌으로도 흑주를 몰라봤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그녀에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자칭 흑주는 지금의 내 시선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저… 저도 압니다. 제 이름이… 전설의 ‘귀거평 결전’ 때 천주를 도와 비화곡에 대항했던 위대한 여살수… 천인군도의 도주와 같다는 것을 말입니다. 제 사부가 그분을 닮으라고 같은 이름을……”
“틀려!”
“예, 그야 물론……”
“흑주는 너처럼 말이 많지 않아.”
“예? 아… 저도 실은 평소 그렇게 말이 많은 편이 아니……”
“됐다. 따로 기억할 필요도 없어서 좋군. …가마.”
나는 짝퉁 흑주의 등장에 화가 난 것처럼 짤막하게 말하며 다시 돌아섰다.
그러나… 정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흑주와 같은 이름을 가진 녀석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싸아아-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고, 그런 내 표정을 흑주가 아닌 녀석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아아아~ 그래! 무림이란 곳은 대교와 천우신 말고도 보고 싶고 그리운 녀석들이 너무나 많은 동네였다. 난… 어쩌면 지금의 이런 아픔을 맛보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까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 시절의 나 자체를 거부해 왔던 거다. 겉으로는 대교를 위해서 더 강해져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붙였지만, 매사에 망설이고 갈등하는데 더 많은 기력을 소모했다. 처음엔 기쁘기만 했던 지하무림과의 재회도, 마군황이란 이름도 시간이 갈수록 끝까지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천우신이 전해 준 술을 마시며 내 깊은 심연의 비겁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진심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분명히 그들과 함께 했으며, 그 때를 그리워하는 것이 당연한 자! 나는 두고 온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청승맞게 눈물지어도 당연한 자! 아니 그 것이 나의 의무! 나는 나의 의지로 마군황이 된 자! 과거에도 지금도 나는 나! 나는 지하무림의 지배자 마군황 진유준!
나는 씨익- 웃으며 소군황에게 연락했다.
< 아아~ 시간 다 됐다. 알지? >
“흥! 나도 기다리고 있었……”
< 닥치고, 각오나 해. >
나는 놈을 향한 황색 들판을 힘차게 디디며 웃었다.
< 아- 그런데 말야, 너 참 운도 없다. 난 지금… 가슴이 아파도 웃을 수 있거든. >
“대체 무슨 소릴……”
< 하하하! 넌 몰라도 돼! 기쁜 마음으로 죽이러 가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