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3-3화 : 후회하지 않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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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43-3화 : 후회하지 않았다.(3)


5-5. 후회하지 않았다.(3)

소군황이 스스로 정신적인 자살을 해 버린 후, 나는 생각보다 기쁘거나 불쾌한 어느 쪽의 감정도 없이 담담한 기분으로 예의 6676기상관측대를 빠져 나왔다.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 사이 다시 기지 바깥에 모여든 대주들과 마군들이었다. 이번에도 구양대주가 모두를 대표해 인사를 하려 했지만, 나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모두에게 진심이 담긴 인사를 받기는 일러. …안 그런가, 초사마군?”

내가 자신을 돌아보며 묻자 초사마군은 깊은 회한과 갈등에 흔들리는 눈빛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일찍 돌아오시지 그랬습니까. 1년… 아닌 단 반년만 일찍 돌아오셨더라면 제가 그런 어리석은 꿈을 꾸지도 않았을 것을……”

대략 반년쯤 전에 소군황 놈에게 자신과 일파의 내공까지 몰아주며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했다는 거군. 처음 제자로 삼은 건 훨씬 오래 전의 일이겠지만… 음, 그보다 이 노인네. 아직 정신을 덜 차렸군. 어디서 책임 전가야 전가가!

“그래서, 내 잘못이라고?”

내가 냉랭하게 묻자 초사마군은 길고 깊은 한숨을 먼저 몰아 내고 난 후에야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인이 먼저 목숨으로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누구 맘대로 죽고 말고 하겠다는 거지? 마군황이 쥐고 있는 것은 당신들의 사(死) 뿐이 아니라 생(生)도 마찬가지야! 잊었나?”

“그, 그렇다면……”

“마군으로서의 지위는 당연히 박탈! 그러나 아직 죽을 수는 없어. 초사마군의 대를 끊지 않으려면 다음 후계자를 양성해야 할 테니까.”

“…너그러운 처사에 감사드립니다.”

초사마군은 결국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본래 내가 그에게 묻고 싶었던 건 ‘이의가 있느냐, 있다면 아직 남은 세 번째 증명이겠지?’였지만 태도를 보니 따로 물을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이제… 조금 피곤해 지려 하는 군.”

나는 아하아아암~ 길게 하품을 한 번 하고 난 다음 자룡대주를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천주. 천주의 신법이 너무나 빨라 저희들의 준비가 조금 늦고 말았습니다.”

같은 책임 전가(?)라도 조금 다른 급의 전가를 하면서 그녀는 우아하게 손을 들어 사막 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소개를 받고 나타나기라도 하듯 거대한 수송용 헬기가 이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일단 난주 공항까지 모시겠습니다. 떠나셨던 한국의 공항으로 직항하실 수 있는 특별기 편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 특별기는 잠시 유보해 둬. 이 곳에서 아직 가봐야 할 곳이 남아 있으니 말이야.”

나는 새삼 자룡대주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확인한 귀물 상자는 아직 두 개… 남은 하나의 귀물 또한 확인해 봐야겠지?”

“아…! 그럼 역시 그 귀물의 정체와 위치 또한 알아내셨군요.”

나는 물론 신불산에서부터 두 번째 상자의 힌트로 천우신과 전대의 지하무림인들이 남긴 세 번째의 상자의 정체를 알아냈었다. 소군황 놈 때문에 귀물에 대한 신뢰도 자체가 희박해진 분위기에서 결국 그냥 힘으로 제압해 버린 상황이라 굳이 끝까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 아무리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선대의 유산을 잊는다는 건 도리가 아니지.”

그런 정석적인 의미도 의미지만, 솔직히 두 번째 상자까지는 거의 천우신과 나의 사적인 인연만이 강조되었던 거고 세 번째 상자에 이르러서야 전대 지하무림인들이 남긴 뭔가가 있다는 건데 여기서 멈추면 그들이 무지하게 섭섭해 할 것 같았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그 귀물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중국 옛말에… ‘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라는 말이 있다지?”

사막의 6676기상관측대를 떠난 후 대략 세 시간이 지났을 때, 내가 탄 비행기는 호남성(湖南省) 서북부의 장가계(張家界)의 상공에 접어들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장가계의 풍경은 아직 초입일 뿐이라는데도… 내가 몽몽 지식인(?)의 도움을 받아 인용했던 인생불도장가계(人生不到張家界), 백세기능칭로옹(百歲豈能稱老翁)이란 말이 중국인 특유의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전에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잠깐 보고 온 적이 있지만 그곳과 또 다른 웅대함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몇 배나 더 아름답고 풍성하며 기기묘묘한 자연환경까지 갖춘 지역인 것 같다고 할까……

어쨌든… 최고 1334M 높이의 봉우리가 있다는 무릉원(武陵源)을 포함하여 크게 세 군데의 풍경구로 나누어졌다는데… 그 중 한 곳의 현재 명칭이 삼림공원(森林公圓)이라는 점이 내게는 유독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이라면 우리 나라도 만만치 않으니 별로 부럽지 않은데, 264㎢에 달하는 풍경구를 ‘공원’이라고 부르는 스케일은 조금 부럽기도 한 것이다.

으음… 몽몽이 일부 유출한 미래 정보에 따르면, 아직 먼 나중의 얘기이기는 하지만… 미래의 통일한국은 지금의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영토와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니 굳이 부러워할 필요는 없으려나…? 뭐, 사실… 그런 사소한(?) 일보다 지금의 내가 느끼고 있는 씁쓸한 감흥의 진짜 이유는 따로 있기도 하지만……

[ …주인님! ]

< 왜, 요몽. >

[ 여기에 혼자 오시게 되어서… 기분이 어떠세요? ]

< 뭐? 무슨… 말이냐? >

[ 후후~ 모른 체 하시기는… 전 기억하고 있다구요. 이곳이 대교님이 주인님께 꼭 한 번 와보고 싶다고 했던 장소라는 걸요! ]

쳇…! 요 녀석, 그 딴 건 잘도 기억하고 있네.
…그래. 그랬다. 내가 아직 비화곡주의 신분이었을 무렵, 나는 어느 날 대교에게 물었었다.

“네가 만약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신분이 된다면… 어느 곳을 가장 먼저 가보고 싶으냐?”

물론, 데이트 신청을 겸한 사전조사 격의 질문이었었다.

“곡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곳이 설사 좁고 어두운 골방 안이라 하더라도 천하의 명산대곡을 거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건 비화곡 수령님 만세 차원…이면서도 정말 진심이라 살짝 무섭기까지(?) 한 멘트였고.

“…그래도 굳이 제게 안목을 넓힐 기회를 주신다면… 저의 아비가 젊은 시절 감탄하여 심각하게 정착을 고민한 때가 있었다는… 그토록 아름다워 누구라도 떠나기를 주저한다는 비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이라면 곡주께 감히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곳이 바로 여기였었지, 이 장가계란 동네!
후… 그랬던 이곳에 난 끝내 대교를 데려와 주지 못했었다. 거리로만 치면 당시의 비화곡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이었는데 이런저런 일들에 치여……

< …몽몽. 지금 대교는 어디에 있지? 아직 한국인가? >

[ 대교님의 한국 공연과 CF 일정은 이틀 전에 이미 끝났습니다. 현재 홍콩으로 돌아가 잠시 활동을 접고 자택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내가 며칠 동안 정신없는 사이 벌써 귀국해 버렸군. 그런데……

< 그렇게… ‘알려져 있다’고? >

[ 예. 공식적으로는 잠시 대외활동을 중지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DP가 주최하는 자선 파티 등에는 참석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 D…P! 그럼 원판도 지금 홍콩에 있다는 거야? >

즉시 체온이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급격한 불안함도 그리 길게 유지되지는 않았다.

[ DP의 방화벽은 저희들로서도 상시 해킹은 어려우므로 코드명 원판이 자신의 위치를 숨기고자 한다면 최소한 20시간 정도의 공백은 어쩔 수 없습니다. 또한 저로서도 아직 DP의 기술력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말씀드린 시간도 오차의 범위가 매우 크다는 점을 인지해 두시길 권고합니다. ]

쳇…! 몽몽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DP의 기술력도 그렇지만, 지금 당장 문제는……

< 그렇…다면 현재 원판의 행방을 정확히 모른다는 얘기냐? >

[ 그렇습니다. 미국의 본사에서 주인님께 메시지를 송신한 시점으로부터 17시간 29분 정도가 지났으며 그 후의 행적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

< 설마… 아니, 아니. 설마고 뭐고 현재 그 놈이 대교와 접촉하고 있을 가능성은? >

[ 대교님의 일정에 그가 직접 관여하거나 접촉한 징후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

< …그래? 당연한 거지만, 그럴 징후가 보이면 즉시 알려 줘. 음… 그리고 지금 녀석이 17시간쯤 전에 내게 메시지를 보냈었다고 했지? >

[ 그렇습니다. 주인님의 명령대로 수신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만, 보내 온 메일을 백업해 놓기는 했습니다. ]

< 훗…! 그럴 줄 알았다. 어디 한 번 보자. >

[ 알겠습니다. 원판은 그 사이 총 다섯 통의 메시지를 보내 왔습니다. ]

흐음… 수신거부라고 뜨는데도 굳이 계속 보냈었단 말인가?

어이~ 수신거부라니!
너무 하잖은가!
장난일 뿐이었다 구. 장난!(-_★)

알았어 알았다구!
앞으로는 이모티 콘도 쓰지 않고 특 히 하트를 붙이 지 않겠어.

호오~ 그러셔? 어디… 정말 뒤의 메시지들에는 이모티콘이 보이지 않는군. 그런다고 내가 이놈을 싫어하는 근본적인 이유까지 사라질 리는 없지만……

진짜 이럴 텐가? 유머 감각이 그리 준수하지 못해서 날 언제 극복하고

또 유머 감각 타령… 어쨌든 이후로는 이어지는 계속 뒤로 메시지군.

도망을, 아니지… 와 줄 수 있을까? 난 기다리기가 지루해서 이제 방금 당신에게

위기를 초래할… 험한 일을 결정!

내가 접근하는 걸 기다리기 지루해서 나에게 위기를 초래할 험한 일을 하겠다…고?
놈의 메시지를 모두 읽은 다음,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전에는 그렇게도 성질을 건드리던 놈의 메시지에도 지금은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놈이 어린애처럼 유치한 도발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할까…? 이번 메시지들만 그렇다기보다는, 전부터 이런 수준이었는데 내가 느끼지 못했을 뿐인 듯 싶고… 그건 당연히 그동안 나 자신이 그만큼 정신적으로 버벅대고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 …몽몽. 이제 수신 금지 풀어도 돼. >

[ 알겠습니다. ]

[ 아이~ 더는 못 참겠네! ]

응? 요몽 녀석이 왜 갑자기 인상을 구긴 채 모습을 드러내는 거지?

[ 주인님! 다른 건요… 그러니까, 주인님이 갑자기 지하무림 사람들을 단호한 태도로 다루는 건 이해하겠어요. 그건 예전의 경험이 있으니 그렇다고 하지만… 그치만 지금 보니 주인님은 원판 씨의 도발에도 너무나 태연하세요. 대체… 대체 주인님께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인간이란 어떤 일로 자신감을 되찾으면 다른 모든 일에도 그렇게 강해지는 건가요? ]

< …요몽. >

[ 예. ]

< 너, 그동안 뭐 했냐? >

[ 예? ]

내가 오히려 반문하자 녀석은 어리둥절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 신불산에서 내가 너에게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한 이후… 넌 최근까지 계속 조용했었잖아. 그동안 뭐 하고 있었냐고. >

[ 어… 그냥 책 좀 보고 있었는데… 근데 그건 왜요? ]

< 훗~! 네가 책을 읽고 있었다고…? 기분 전환이었던 거냐? >

[ 그게… 그냥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뭔가 좀 더 알고 싶어서…… ]

< 인간에 대해 알고 싶다…라, 지금의 내가 그렇게 이상해 보이냐? >

[ 아뇨. 전 다만… 왠지 주인님이 좀…… ]

< …걱정하지 마라. 전차 군단과 싸우기 전에도 말했었지만, 난 지금 지극히 정상이야. >

[ 그건… 저도 알아요. 왠지 나쁘게 변하셨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거든요. 어제 친구분들을 상하게 한 자들을 때리실 때보다… 더 위험해진 것 같으면서도 왠지 안심이 되기도 하고… 으응~ 모르겠어요. 변하신 건지 아닌 건지. ]

< 후후~ 굳이 말하자면, 마군황에 오를 시절… 아니 그보다도 근본적인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있는 것뿐이야. 그게 나쁜 나인지 좋은 나인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

[ 그래도… 저도 그동안 주인님의 행동 패턴 같은 걸 많이 보고… 소위 감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밤… 그러니까 천우신님의 술을 마시고 나신 후부터는 뭔가 좀 이상해서… 혹시 그 술 때문에 잘못되신 건 아닌가 해서…… ]

나참…! 이 녀석, 엉뚱한 쪽에서부터 해석을 하려고 들었었군.

< 임마, 술은 천 년이 지나도 그냥 술일 뿐이야. 그리고 내가 뭐가 그리 이상하다는 거냐? 어디 구체적으로 한 번 말해 봐라. >

[ 그게… 그걸 모르겠다는 게 더 이상하다는 거예요. 어디까지 어제의 주인님이고 어디까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된다구요. ]

< 구분이… 안 되는 게 정상인 거야. 둘 다 나이니까 말야. 난 단지… 그동안 내 마음속 어디선가 거부하고 있던 것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뿐이야. >

[ 주인님의 마음이 거부하고 있던 것들이… 뭔데요? ]

< …천 년 전에 두고 왔던 모든 것들…이라고 할까? 그곳에서의 생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모든 인연들과 그로 인해 형성된 무림에서의 나……! >

[ 에고~ 역시 모르겠어요. 말씀 자체는 알 것도 같지만,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다고요. 이젠 인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주인님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어요. ]

< 하핫~! 야, 임마. 그렇게 쉬우면 인간들이 자신에 대해 평생 고민하고 살 것 같으냐? >

[ 우웅… 뭐가 그리 어려워요. 재미없는 책까지 열심히 읽어 본 보람도 없이…… ]

< 쯧쯧- 뭔 책들을 봤길래? >

요몽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뒤쪽으로 뻗으며 뭔가 소개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녀석의 등 뒤 허공에 홀로그램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도서관(?)의 영상이 떠올랐다.

< 뭐, 뭐야? 네가 그 책들을 다 봤다고? >

[ 아뇨. 아직까지 5%로도 채 입력하지 못했는 걸요. 그 것도 대부분 처음에 몽몽 오빠가 입력해 준 거고… 인간들처럼 일일이 읽은 건 몇 권 안 돼요. 음… 어제부터 읽은 책은 이거, 이거, 이거…예요. ]

요몽이 책장에서 뽑아 내미는 책들을 보니……

작가 유기산 – ‘무림정화재단’.
작가 유기성 – ‘시갈의 감촉’.
작가 윤기선 – ‘극빈서생’.

< 어째… 작가들 이름이…… >

[ 어, 그건 가나다순으로 뽑아서 그래요. 비슷한 이름들이 많더라구요. 유기산과 유기성 중간에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책은 전부 저질이라고 몽몽 오빠가 열람금지 시켰어요. ]

< …그냐? 어쨌든 책 제목들이 전부 뭔가 거시기하다. 시갈의 감촉은 대체 뭐야? >

[ 음~ 그건 시갈이란 이름의 다른 소설가를 등장시켜서 꾸민 호러 액션 로맨스 소설이에요. 흡혈귀하고 늑대인간에 별의별 요괴와 특수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다 나와서 서로 박 터지게 싸우는데… 별로 재미는 없었어요. ]

< …극빈서생은? >

[ 제목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서생의 일상을 그린… 표지에는 굉장히 독특하고 새로운 무협 환타지라고 나오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주인공이 환상적으로 궁상맞다는 거 말고는요. ]

< …나야말로 잘 모르겠다. 대체 그런 책들 어디에 날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구석이 있다는 거냐? 그거 설마… 몽몽이 추천해준 거냐? >

[ 아뇨. 몽몽 오빠는 그냥 다양하게 읽으라고만 했는데, 전에 유기산이란 사람은 주인님도 아신다고 들었던 것 같아서 선택한 건데…… ]

< 그러고 보니 전에… 대교와 패도선배의 동굴에서 지낼 때, 몽몽이 그 사람 모드로 패도선배의 이야기를 무협지처럼 꾸며서 보여준 적이 있었네. 나도 별로 재미가 없었던 것 같은… 음, 암튼 내가 보기에는 책 선택이 전부 그리 좋지 못했어. 뭐, 인간에 대한 공부 자체는 나쁘지 않은 거 같으니 앞으로는 좀 더 수준 높은 책들을 잘 골라서 읽어보도록 해. 음… 몽몽, 너도 요몽에게 저런 악서 말고 양서들을 잘 골라서 추천해 주고 말야. >

[ 알겠습니다, 주인님. ]

아무래도 이 녀석에게는 지난밤을 기점으로 한 내 변화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얘기를 해주는 것이 좋겠다. 나 자신도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도 될 테고… 음… 하지만 그건 얘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따로 날을 잡아야 할 것 같다.

‘인간 진유준의 내면세계 고찰 및 어느 날 천년 묵은 술 마시고 훼까닥 해버린 원인 분석’… 음, 제목부터가 중후한(?) 학술 세미나 분위기가 나는 군. …암튼.

“자룡대주, 아직 멀었나?”

“아- 그렇지 않습니다. 곧 천주께서 지시하신 지점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래…? 그럼 준비를 해야겠군.”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다가 문득 자룡대주와 명부화 은사마군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다… 따라올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천주!”

명부화의 터프한 운전 솜씨로 보아, 그녀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지만 자룡대주는 약간 신경이 쓰였는데… 음, 설마 못하는 걸 할 줄 안다고 나서지는 않았겠지…? 게다가…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날 따라 할 필요는 없어. 다들 자기 능력껏 오라고 해.”

“배려는 감사하지만, 이 정도를 따르지 못한 데서야 어떻게 천주의 자랑스런 지하무림인 임을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으음~ 너무 확고하게 나오니까 더 뭐라 하기도 좀 그렇군.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금동이를 안고 문가로 향했다. 그리고 몽몽이 신호를 보내주는 순간 문을 열고 하늘로 몸을 날렸다.

얼마 후.
나는 지상에서 익숙한 손길로 낙하산 줄을 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타고 왔던 비행기가 선회하여 돌아가고 있는 뒤쪽으로, 다른 몇 대의 수송용 헬기가 따르며 허공으로 연이어 사람들을 방출하고 있었다. 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일제히 회색의 낙하산을 펼치고 하강하기 시작하는 모습은 얼핏 전쟁터의 하늘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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