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4-1화 : 원판의 위기?!.(1)
5-6. 원판의 위기?! (1)
나와 지하무림은 한 달 동안 서로에게 칼을 겨루며 보냈던 사투의 시간, 그 후로도 비화곡과의 결전을 위한 여정이 더해졌을 뿐… 전부 합쳐봐야 석 달이 채 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짧은 인연이었었다. 그런데도… 당신들, 그래… 준건가…? 이 무심한 자를… 나란 놈과의 짧은 인연을 그렇게 생각해 주었다는 건가……?
나는 입술을 깨물며 오래도록 천년 전의 지하무림인들이 남긴 그들의 이름 앞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자령대주가 조심스럽게 불러왔다.
“천주……!”
내가 비로소 석벽에서 눈을 떼고 돌아보니 자룡대주는 역시 자신의 선조, 당시의 ‘자룡대주 초상희’라 새겨진 석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뿐이 아니었다. 다른 모든 대주와 마군들도 각자 자신의 선조 이름을 찾아내어 그 앞에 서 있었다. 그건 ‘초사마군 세유황’이라 새겨진 석벽 앞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초사마군과 그 일파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건… 이번만은 초사마군이 누구보다 먼저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초사마군은 내가 보고 있던 글귀를 잠시 응시하는가 싶더니 불연듯 나와 모든 마군들 사이에 섰다.
“초사마군 세유황과 모든 마군들의 후예로서… 저와 당대의 마군들은 천주께 감히 처음이자 마지막 요구를 할까 합니다!”
내게 ‘요구한다’고 하는 그의 음성은 지극히 당당하고 엄숙했으며, 이번만은 구양대주와 자룡대주, 은사마군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천주께서는… 저희들에게도 나중 이 석벽에 같은 말을… 자신의 손으로 ‘후회하지 않았다’고 새기게 해 주십시오!”
강요…? 나에게……? 하지만 나는 모두의 강요에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러겠어. 나 역시… 나중 이곳에 같은 글자를 새길 수 있도록!”
나의 대답과 함께 초사마군이 먼저, 그리고 그다음은 순서나 그런 것 없이 모두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이 순간 이후! 과거에도 그러했듯…! 모든 지하무림인들의 생명과 운명… 모든 것이 천주… 2대 마군황의 것입니다. 부디… 뜻대로 하소서!”
초사마군과 모두의 뜨거운 음성이 지하무림의 드넓은 석실 가득히 차 오르고 있었다.
지하무림의 석실… 비화곡의 성지처럼 이곳도 지하무림의 성지라 부른다면… 그건 조금 유치하려나……? 어쨌든 나는 모든 대주와 마군들을 먼저 내보낸 후 혼자 얼마간을 더 석실에 남아 있었다. 소군황 구영웅을 제압한 이후로도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던 마군황 복귀였다. 이곳에서 빠짐없이 모든 자들의 진심을 받고서야 비로소 느껴지기 시작한 성취감과 그에 따른 책임감을 잠시 더 음미하고 싶었던 것이다.
< …몽몽. 이곳까지 다른 사람들이 찾아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
[ 현재까지 진행된 탐사와 개발 속도만을 계산한다면 앞으로 최소 100년의 세월이 더 걸릴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일단 발견되었으므로 어떤 변수가 있을지는 계산이 어렵습니다. ]
< 그렇…겠지? 사람 일이란 게… 아무리 모두가 입조심을 한다 해도 새어나가기 마련일 테니, 결국 이곳을 계속 이대로 보존하려면… 나도 비화곡처럼 입구에는 흑쌍살(黑雙殺), 중간쯤에 아수라 백작 음양쌍마(陰陽雙魔) 같은 자들을 양성해서 지키게 하는 수밖에 없으려나? >
[ 어… 그러고 보니 여긴 기본적으로 비화곡의 성지와 비슷한 분위기라는 생각도 드네요. 중간에 연못이 없다는 것 빼고는 말예요. ]
< 그치? 그치, 요몽! 물론 다른 비밀 서고나 창고들도 없지만 그건 새로 만들면 되는 거고… 기본적으로 분위기가 참 비슷해. >
[ 솔직히 말해서, 이만한 동굴에 야광주를 잔뜩 박아 놓으면 다 비슷할 것도 같지만…요. ]
< 짜쉭, 분위기 좋은데 초치지 마라. 물론 나도 이곳을 꼭 비화곡스럽게 바꿀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지하무림의 명소(?)로서 최대한 오래 유지되도록 할 거야. 원판 놈도 어딘가 현 시대의 비화곡을 만들어 놨겠지만 여기처럼 멋진 곳은 못될 걸? >
[ 흐응~ 안 그러신 척 하면서도 역시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신다니까? ]
< …쳇! 그러면 또 어떠냐. 막말로 내가 그 재수탱이보다 못한 것도 없잖아. 외모 쬐금 딸리고 머리 회전 RPM 쬐금 떨어지고… 뭐, 그런 사소한 거밖에 없잖아. >
[ 어- 제 생각도 그래요. ]
< …니가 동의하는 앞이냐 뒤냐? >
[ 헤헤~ ‘못한 것도 없잖아’까지만요. ]
< 흐으음… 어쨌든, 앞으로 여길 어떻게 보존하느냐가 문제인데… 아수라 백작 같은 자들을 만드는 건 곤란하고… 일단은 중국 정부에 압력을 좀 넣어서 출입을 막는 것이 좋으려나? 하지만 그건 오히려 주목받게 될 위험이 있으니…… >
[ 주인님. ]
< 어, 그래. 몽몽. 뭐 좋은 방법 있니? >
[ …우선은 이 시대의 반영구적인 동력을 확보하여 침입자의 접근을 막거나 최소한 탐지하여 외부로 알려 줄 수 있는 장비를 이용하시는 방법을 권고합니다. ]
< 역시 시대에 맞게 그런 아이템을 이용하는 게 좋겠지? >
[ 그런데 그보다… 주인님은 지금 스스로 석실의 일부를 훼손하셔야 합니다. ]
< 뭐? >
[ 스캔 결과, 이 석실의 중앙부에 위치한 석순에 작은 동판이 숨겨져 있음이 발견되었습니다. ]
< 어…? 정말이야? 그럼…… >
나는 몽몽의 반가운 보고에 즉시 석실의 중앙으로 향했다. 굳이 비화곡 성지와 비교하자면 나와 대교가 종종 빠졌었던 연못이 있어야 할 위치에 다른 것보다 유독 두꺼운 석순 하나가 솟아 있었다. 그 위가 비교적 평평한 건… 몽몽 말대로 천년 전에 누군가 적당한 면적이 나오게 잘라낸 다음 같은 크기의 동판을 얹혀 놓았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 위로는 10CM 정도밖에 석순이 자라지 않아서 그걸 걷어내면……
[ 동판에 새겨진 미리 내용을 알려 드릴까요? ]
< 됐다. >
난 웃으며 짧게 대꾸하고는, 정글도로 단숨에 위쪽 9CM를 잘라냈다. 그리고 손에 내력을 모아 조심스럽게 석순만을 깨고 걷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간단히 빼낸 건 잘해야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의 작은 동판이었다. 난 그걸 왼손에 들고 오른 팔의 옷깃으로 남은 돌 부스러기를 닦아내며 야광주 불빛에 비춰 보았다. 그리고 난…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그건 내가 예상하고 있던 천우신의 편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교?”
믿기 어려웠지만, 너무나 낯익은 그 필체는 분명히 대교의 것이었다. 일순간에 인간 석순이 되어 버린 나는 눈동자만을 간신히 움직여 그녀… 천년 전의 대교가 남긴 짧은 편지를 읽었다.
조급한 소녀가 먼저 다녀가는 것을 용서하시길… 소녀가 바라건데… 이 다음 번에는… 님의 손에 이끌려 올 수 있기를……
먼저… 다녀가는 것을… 용서…하라고…? 그리고 이 다음에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동판을 떨어트릴 것만 같아 애써 간신히 다시 잡아야 했다.
[ 주인님……? ]
< 몽, 몽몽… 역시 잊지 않았었나 봐. 솔직히… 기억하지 않기를 바랬는데… 내가… 지키지 못했던 약속 같은 건…… >
지키지 못했던 약속…? 그게 이 것뿐일까…? 난… 언제나 그녀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다고 큰소리만 쳤을 뿐, 항상 그녀의 작은 소망들조차 제대로 이루어주지 못했던 건 아닐까?
나는 조용히 바닥에 앉아 천년 전의 대교가 내게 하는 추궁 아닌 추궁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했다. 어쩌면… 이곳을 찾아낸 건 천우신이 아니라 대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혼자 떠나 버린 무능하고 못된… 나란 놈과의 약속을 잊지 못해 혼자라도 장가계에 왔다가……
< 몽몽. 현재의 대교는… 이곳, 장가계에 와 본 적이 있을까? >
[ 주인님과 재회하기 전의 행적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가장 최근에 있었던 매스컴과의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본토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장소를 물었으며, 그때 대교님은 ‘나중 언제든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장소.’라고 답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그랬…군. 대교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거야.
< 몽몽. 대교가 어딨는지 당장 파악해 봐. >
[ 알겠습니다. 홍콩으로 복귀하신 후로는 주로 DP가 관련되었기에 행적 파악이 어렵지만, 곧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
DP… 그리고 원판! 역시 계속 그 놈이 문제다!
난 지금까지 놈과의 일이 해결되기 전에는 대교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놈이 대교를 인질로 삼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킨다 해도 내가 그녀 곁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싸움에 말려들 위험이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래… 원치도 않은데 따라온 과거의 망령에게 휘둘려 정작 가장 데려오고 싶었던 대교를 멀리할 수는 없지. 원판 놈이 어떻게 나오건 나는 대교에게 간다.
< 명부화! 안으로 들어와! >
유일하게 석실 출입구의 바로 옆에서 대기 중이던 명부화가 재빨리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 동굴 밖에 지금 누가 남아있지? >
< 구양대주와 자룡대주, 두 사람뿐입니다. >
< …그들에게 내 명령을 전달해. 두 사람… 아니, 보천구룡대 전원은 비밀리에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호위에 들어간다. 특히 현재 홍콩에 있는… 여가수 주가혜의 호위에 만전을 기할 것! 또한… 홍콩행 특별기를 준비하고, 이를 모두 시행한 다음 두 사람은 내게 오라고 해. >
< 복명. >
짧게 대답한 명부화가 다시 달려나간 후, 나는 결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대교의 동판 편지를 윗도리 호주머니에 넣었다.
[ 와우- 이제야 부탁이 아닌… 첫 명령을 내리셨네요? ]
< 음…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요몽. >
[ 그나저나… 오늘은 주인님께 정말 뜻깊은 메시지가 많은 날이네요. ]
뭐……?
[ 지하무림 사람들도 그렇지만, 여기에 설마 대교님까지…… ]
< 요몽! 너 지금 뭐라고 했지? >
내가 별안간 힘을 주어 묻자, 요몽은 공연히 찔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어… 전 별말 안 했는데요? 그냥… 주인님께 뜻깊은 메시지가 많은 날이었다고 만…… ]
그래… 그거다. 갑자기 내 머리 속에 뭔가를 번득 떠오르게 한 건… ‘메시지’라는 단어였다.
< …몽몽! 아까 봤던… 원판의 ‘문자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보여 줘. >
[ 알겠습니다. ]
몽몽은 곧 ‘어이~ 수신거부라니!’라는 글로 시작되는 원판의 메시지를 차례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내가 원판에 대해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 그건 정말이지 어이없을 정도로 쉬운 곳에 남아 있었다.
< 앞의 메시지 두 개는 내가 아직 신불산에 있을 때 온 거고… 나머지 세 개는 나중 10시간 넘게 지난 후에 연속으로 온 거 맞지? >
[ 그렇습니다. ]
난 그 세 개의 연속된 메시지를, ‘앞 글자’만을 따서 읽어보았다.
진짜 이럴텐가?
유머감각이 그리
준수하지 못해서
날 언제 극복하고
도망을, 아니지..
와 줄 수 있을까?
난 기다리기가
지루해서 이제 방
금 당신에게
위기를 초래할…
험한 일을 결정!
‘진유준날도와난지금위험’… ‘진유준, 날 도와… 난 지금 위험’……?
맙소사…! 뭔가… 뭔가 문장에서 녀석답지 않은 구석이 느껴진다고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설마 이런 내용이 숨어 있을 줄은… 대체 뭐지…? 대체 원판은 무슨 의도로 내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던 거지? 이 것도 장난에 불과한 건가…? 하지만 어떤 장난…? 현재 놈과 나에게 놓여진 상황과 입장에서 이런 메시지로 성립될 장난이 있을 수가 있나……?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일단 이게 장난이 아니라 정말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라는 가정 하에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원판 놈에게… 놈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적이 있었다는 건가…? 원판 놈도 신이 아닌 이상 그런 적이 있을 수도 있는 거겠지만… 대체 어떤 자가… 아니, 아니… 하나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어떤 조직 쪽일 가능성이 더 높으려나? 원판 놈도 처음 우리 시대에 왔을 때는 몸을 의탁할 조직이 필요했을 테고… 그 조직의 장악이 아직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던가… 으음… 만약 그렇다면 그 조직은 혹시… 측근인 ‘란’을 빼내 올 때 충돌했었을 미국의 CIA…? 아니면… 아니면… …쳇! 어떤 가정이든 뭔가 실감이 안 난다. 내게는 원판의 극악서생으로서의 이미지가 너무 깊이 자리잡고 있는 건가…? 놈이 다른 어떤 자들에게 밀린다는 발상 자체가 어색해서 인지 좀처럼 생각이 진행되지가 않는 것이다.
[ 어…? 어라? 어라라랏? ]
뒤늦게 원판의 문자 메시지에 숨겨진 진짜(?) 메시지를 알아챈 요몽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 이건, 원판씨가 주인님께 도움을 청한 거잖아요? 세상에! 세상에! ]
< 원판씨……? >
[ 아, 예. 달리 부를 말도 마땅치 않고… 하여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
< …난들 어떻게 알겠냐. 이 것도 그냥 놈의 장난일 수도 있고… 음… 하지만 일단 놈과 대적할 만한 조직이 있는지 한 번 알아봐 줘. >
[ 알겠습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극히 한정적이므로 곧 파악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
극히 한정적…이기는 해도 있기는 하다 이거지? 하긴…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우리 지하무림도 그렇고… 현 시대에 무림시절의 비화곡 못지 않게 강력한 조직이 또 있다고 해도 이상한 게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런 조직을 이끄는, 원판을 능가하는 천재 마인의 존재 가능성도… 으으음… 아니지, 아냐. 그런 가능성들은 일단 제쳐두자. 쯧…! 아무래도 내가 뜻밖의 사실에 너무 동요했나보다. 냉정하게… 차분하게 다시 분석을 해 보자면……
< 몽몽. 너도 이 메시지에 숨겨진 뜻을 모르고 있었냐? >
[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
< 아니, 죄송한 문제가 아니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야. 이런 간단한 말장난에 불과한 트릭을 이제야 깨달은 건, 원판 놈에 대한 선입견… 원판 정도의 천재가 설마 이렇게 단순한 속임수에 중요한 메시지를 담았을까…라는 인식 때문일 거야. 놈이 그런 허허실실을 노린 거라면… 그리고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누가 엿볼 수 있다는 가정을 한 자체만으로도… 놈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놈을 아주 잘 아는 내부 인물이거나 그에 준할 정도로 가까운 인물이라는 거 아닐까? >
[ …높은 가능성의 추리입니다. ]
< 물론… 그럴 경우에는 또 거기서 추리가 막히기는 해. 차라리 외부의 적이라면 몰라도, 원판은 자신의 조직 내에 그런 세력이 존재하게 할 정도로 어설픈 놈이 아닐 테고… 그렇…다면…… >
차츰 내 머리 속에서 놈의 메시지에 담긴 의미와, 그에 따라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조합의 아귀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결론은 물론 ‘메시지가 장난이 아니라 진짜’일 경우를 상정한 거고… 내 생각이 맞는 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어쨌든, 확인을 해 둬야 할 일이었다.
나는 몽드폰을 들어 직접 놈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만약 전화를 받지 않으면 나 역시 떠보는 문자 메시지를 남길 생각이었지만, 이번에는 전화벨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누군가 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어, 미스 란이로군. 나 진유준인데… 원판 하운이, 그 놈 좀 바꿔 줘요.”
“…알겠습니다.”
내가 자기 마스터를 아무렇게나 불러도 전과 달리 발끈하지 않고 그냥 바꿔 준다고……?
“아아~ 그래. 진유준인가?”
“…그래. 넌 누구냐? 원판 바꿔.”
“뭐? …훗! 이게 무슨 장난이지? 설마 벌써 내 목소리를 잊기라도 한 건가?”
“…안 바꿔 줄 거면, 됐다.”
나는 전화를 끊고 잠시 기다려 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이 먼저 전화를 걸어 왔다. 내가 슬쩍 받아주자 분노가 깔린 저음이 들려왔다.
“…무슨 짓이지, 진유준?”
“누군지 몰라도, 난 전에 나와 만났던 원판과 통화하고 싶은 거야.”
“……”
잠시 침묵이 흐른다 싶더니, 곧 수화기 너머로 놈의 키득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진유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이 빠른 자로군. 그래… 맞아. 난 네가 만났던 그 원판이 아니야. 물론… 이 DP의 마스터인 화이트 크라우드인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야.”
쳇…! 역시… 우려했던 대로 또 다른 원판, 다른 인격의 원판 놈인 건가?
“벌써 알았다니 말인데… 난 당신이 아는 그 녀석과는 달라. 난 그렇게 느긋한 성격이 못되니, 각오해 두는 편이 좋을 거야.”
“그으래? 좋아, 그럼 하나만 묻자. 날 만났던 원판은……”
“그 녀석은… 그 바보는 이제 없어. 내가 원판이며 DP의 마스터, 이 시대 비화곡의 곡주이지.”
“…그거, 아쉽게 됐군. 놈은 그래도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었는데… 넌 어쩐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큭, 아직 직접 만나기도 전인데 너무 하는 군, 그래. 하지만… 실망하는 건 이르지. 곧… 열렬히 귀여워해 줄께, 2대 마군황 나으리.”
다시, 큭-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시니컬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자못 재미있다는 듯 끝도 없이 이어지는 놈의 웃음소리가 듣기 싫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 에~? 뭐예요! 어떻게 된 거죠? 원판씨가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예? ]
< 다중인격…! 비화곡 시절부터 놈은 자주 ‘다른 사람처럼 변한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잖아. >
[ 예? 정말요? 그럼 전의 원판씨는요? 정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예요? ]
< 요몽. 미안하지만, 넌 잠시 조용히 해주라. 정신없다. >
[ 엑! 너무 해욧! ]
< 몽몽. 넌 어떻게 생각하냐? >
[ …원판의 과거 행적을 분석했을 때, 원판이 다중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가능성을 도출하는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지금의 인격이 그 전의 인격에 부정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비화곡에 전해져 온 그의 이상한 언행에 대한 기록과 구전에는 그러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
< 그랬…던가? 그렇다면…… >
[ 이번 인격은 전과 다른 새로운 사례로서, 새로운 시대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원인이나 과정은 어쨌든 확실히 새로운 원판이라는 결론이다. 내가 나 자신을 주체못해서 먼저 광분하고는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나에게 상당히 호의적이고 여유가 있던 원판은 사라지고… 나와의 신사적인 게임이며 약속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정말 위험한 원판이 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