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5-2화 : 5-7. 흥겨운 전투.(2)
5-7. 흥겨운 전투.(2)
명색이 마군황인 나와 빅 고램 론, 현 시대 최강의 특수 부대일지도 모를 블러디 울프 부대까지 비명(?) 하나로 평정해 버리고 시작된 대교의 무대는… 너무나 기운차고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관중들은 그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돌진하고 적을 쳐야 하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녀의 노래를 복창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아붓고 있었다. 아마도… 나뿐일 것이다. 이런 대교와 관중의 모습에 무림 시절의 대교가 비연대(飛燕隊)를 이끌고 강호를 종횡할 때를 겹쳐 보고 있는 사람은……!
무림 시절의 대교는 비화곡 역대 최강의 여고수였다는 마봉후(魔鳳后)의 진전을 이어받은 것은 물론, 패도광협의 생사금마도결을 기반으로 한 검법에 청명신니(淸明神尼)의 공공보법까지 익힌 희대의 여고수로서 마중제일녀(魔仲第一女)라고까지 불렸었다.
그랬던 대교가 이 시대에서는 삼합회의 마녀 따위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만큼 약한 소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기도 했는데… 이 시대의 대교도 어떤 면에서는 이미 과거의 지위를 회복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무림 시절처럼 나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음에도 스스로의 재능으로… 흐음… 기특하기도 하고… 왠지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나는 시간이 갈수록 다른 관중들과 달리 순수하게 대교의 노래에 빠져들지 못하고 다소 복잡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얘들아. 난… 아무래도 속이 좁은 놈이었나 보다. 대교에게 향한 수많은 관중의 관심이 기쁘기에 앞서… 왠지 불쾌해지기도 하니 말이야.>
[ 어-? 전에는 주인님. 대교님이 이 시대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행복해 보이는 게… 그런 모습이 좋고 다행이라고 하셨잖아요. ]
<…그랬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또 별개의 문제지. 난 본래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놈인가 봐. 갈수록… 아까워…! 잰 내 거야! 나만 대교의 노래를 듣고 내 눈앞에만 춤추게 하고 싶어! …라고 생각하게 된단 말야.>
[ 으음- 스토커가 따로 없네요. ]
< 훗~! 그런가? >
[ 아니면 벌써 의처증? ]
< 야, 야! 너무 앞서가지 마! >
[ 헤헤~ 죄송! ]
고양이처럼 살짝 혀끝을 빼물던 요몽은, 문득 다시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어… 뭔가, 분위기가 바뀌는 거 같은데요? ]
요몽 말대로였다. 내가 잠시 샛길로 빠진 사이, 무대는 조명부터가 그 전까지의 활기에 찬 분위기와 달리 차분하게 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공연과는 반대로 처음부터 저런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대 뒤에서 나온 여자 한 명이 대교에게 중국 전통 악기인 이호(二胡)를 건네주었고, 대교는 그걸 안아들고 무대 중앙에 앉았다.
“아… 여러분들도 이상은(李商隱. 812?~858, 중국 만당의 시인.)님의 시는 다들 알고 계실 거예요. 부끄럽지만 제가 만들어 본 곡을 연주하며 그분의 시를 들려 드리고 싶어요. 서툴다고 욕하지 말아 주세요.”
뭐……?
지금까지의 열광적인 공연에도 집중하지 못했던 나를 꾸짖기라도 하듯, 대교의 손이 조용히 움직이며 귀에 익은 곡조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사, 아니 시 역시 그때의 그 시였다.
…여덟 살 때
거울에 얼굴을 몰래 비춰보고
눈썹을 길게 그려보곤 했지요.
열 살 때
들 밖으로 봄나들이하는 게 좋았어요.
연꽃 수놓은 치마를 입고…
최근 몽몽이 재생해 주었던,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대교는… 역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자신을……!
“아아~ 역시 부끄러워요. 실은… 다른 분들 앞에서 연주하는 게 처음이거든요. 늘 혼자 있을 때만 연주하곤 했는데… 으음~ 이상하죠? 오늘은 왠지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졌으니 말예요.”
누군…가? 그건 역시……
“오늘은 어쩐지 매우 특별한 날인 것 같아요. 제가 늘 와보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오지 못했던… 이 아름답고 그리운 고장에 어떤 분의 도움으로 올 수 있게 된 날이기도 하고……”
뭐…? 원…판?
“음- 이제 그분과 장가계의 주민들인 여러분을 위해서 또 한 곡을 들려 드릴까 해요.”
갑자기 가슴속이 서늘하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다시 대교의 이호 소리가 시작되고 장가계의 풍경에 감탄하고 칭송하는 대교의 목소리도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내 귓속으로 확실하고 아프게 파고든 것은 노래 후반의 구절뿐이었다.
…조급한 소녀가 먼저 다녀가는 것을 용서하시길… 소녀가 바라건대… 이 다음 번에는 님의 손에 이끌려 올 수 있기를……
아아아~ 이런 엿 같은! 어째서냐! 어째서 대교가 나와의 약속을 노래하며 그 노래를 원판에게 바치게 된 거지? 원판… 너 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렵게 되어버린 나의 등 뒤에서 론이 혼자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이 마스터…! 저 소녀를 수중에 넣으려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도…! 난 그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구, 마스터!”
원판이 대교를… 뭘 어째?
<…몽몽. 아직… 못 찾았냐, 원판?>
[ 주인님. 진정하십시오. ]
< 어딨냐구, 그놈. >
[ …아직 추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DP 본사에 없는 것은 확인되었으며 홍콩과 이곳 장가계, 둘 중 한 곳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 그으래? >
[ 진정하십시오, 주인님. 스스로의 맹세, 가디언으로서의 본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 …알아, 몽몽. 그건 알고, 잊지 않고, 그리고… 젠장! 그래… 다른 것도 난 기억하고 있지…! 대교가 처음 좋아했던 게 누구였는지… 저 녀석이 계속 나와 누구를 헷갈려 하고 있는지… 말야. >
나는 하아아~ 길게 숨을 토해 내고 쓰디쓰게 웃었다.
< 알아. 이미 알고 있었다구, 몽몽. 지금의 대교에게 원판은 엄청난 재력과 권력, 눈부신 외모의 완벽한 남자로 비추어지고 있겠지. 비화곡의 시비로서 비화곡주를 바라볼 때와 같이… 꿈속의 왕자님이 바로 원판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 대교가 기억을 완전히 되찾지 못하는 한 과거와 똑같은 상황… 아니, 심지어 기억을 되찾게 된다 해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말야. >
나는 잠시의 혼란과 갈등을 척척 접어 넣으며 씨익- 웃었다.
< 누가 대교의 첫사랑인지 따위, 알게 뭐냐. 지금 또 어떤 잘난 놈이 대시하고 있는지 또한 알게 뭐냐. 난 어차피 후발주자, 그리고 본래 왕자 같은 거와는 인연이 먼 놈이지! 따라서…… >
[ 주인님……? ]
나는 다시 정글도를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 위의 대교가 언제부터인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실은 제가 오늘 정말 감사드리고 싶은 분이 또 계신데… 음… 그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쯧…! 이제야 내 차례인가? 하지만 이미 늦었다구, 대교. 난 내 방식대로, 왕자가 아닌 놈답게 나갈 거라구.
< 애써 기다려 줬는데… 미안하다, 론. >
“뭐?”
내 전음에 흠칫 긴장한 론이 반사적으로 무기를 쥐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나는 론을 기습하는 게 아니라 무대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분은 어쩌면……”
느닷없이 달려드는 나 때문에 당황한 대교가 하던 말을 맺지 못하고 그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떴다.
“무, 무슨 짓을……”
“납치!”
“예? 어맛! 꺅!”
대교가 더 놀라서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나는 왼팔로 대교를 냉큼(?) 감아쥐고 순식간에 무대 끝까지 달려갔다. 거기서 일단 끼익- 브레이크를 밟고 서서 돌아보니, 아직 관중들 누구도 이 돌발 사태에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대교가 쥐고 있던 마이크를 들고 모두를 향해 외쳤다.
“예로부터, 공주님을 납치하여 사랑을 강요하는 건 악당의 의무! 하지만 모두들 알지? 요즘은 악당이 성공하는 게 대세!”
나는 납치 선언을 마침과 동시에 마이크를 던지고 무대 밖으로 튀기 시작했다.
“진-유-준!”
뒤쪽에서 야생의 곰이 포효하는 듯한 론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고, 곧이어 우두두-(?)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주, 주인님! 론과 블러디 울프가… 아니, 전부! 관중들 전부 쫓아 와요! ]
요몽은 다급하게 외쳤지만, 나는 아랑곳없이 경공에 가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뭐, 뭐, 뭐예욧! 이게 무슨 짓이냐고요! 놔줘요!”
납치 당한 공주님께서 그렇게 외친다고… 그만둘 악당은 없다.
< 조금만 참으시게, 공주! 악당이 악당다운 소굴로 돌아가면 이 결박도 풀어질 테니! >
나는 그렇게 전음을 보내며, 공공보법으로 가로막는 공연장 경비원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 경비원들도… 추적 대에 합류했어요. 하긴… 한 손에 정글도를 들고 다른 한 팔로 공주를 옆구리에 감아 들고 달아나는 지금의 주인님은 누가 봐도 전형적인 악당이겠네요. ]
요몽의 중계가 아니더라도, 엄청난 군중의 고함 소리와 기세만으로도 내 등 뒤의 상황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 은사마군! >
< 예, 천주! 여깁니다! >
공연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건물의 모퉁이에서 은사마군이 모는 짚차가 튀어나왔고, 나는 재빨리 그 뒷좌석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