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6-3화 : 원판에 대한 진유준의 애증(愛憎)?(3)
자룡대주와 어사조가 석실을 나간 후, 나는 비로소 그동안 왕따 당하던 대교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심하고 예의 없는 악당 진유준은 기껏 납치해 놓고는 계속 지 볼일만 보고 있었건만, 너무나 협조적인 공주님께서는 지금도 조용히 금동이만 데리고 석실 안을 거닐고 있었다.
“…대교.”
미안하지만 곧 나도 적과 싸우러 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려고 부른 것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도 듣지 못한 듯 천천히 지하무림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석실의 벽을 돌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야광 주의 다채로우면서도 깊은 불빛에 쌓여 있는 그녀의 자태는 처음 비화곡 성지에 데려갔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때의 그녀에게는 갓난아기처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떨면서도 애써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애처로움만이 가득했었는데… 지금의 대교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마치 이사간 집의 지하실에 처음으로 들어와 본 어린아이처럼 낯설어하면서도 탐험의 기쁨을 즐기는 모습이라고 할까…? 아니, 어찌 보면 이미 익숙해진 다락방을 오랜만에 들여다보는 여유와 설렘 같은 걸 느끼고 있는 표정인 듯싶기도 하다.
…최소한, 지금까지의 일들과 현재의 상황에 두려워한다거나 불쾌해 하지는 않는 것 같군. 장가계라는 고장에 대한 기억이 없으면서도 와보고 싶어 했던 것처럼 이 석실도 어딘가 낯익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걸까…? 아니면 혹시 그 이상의 기억을 이미 되찾았다거나……
“…진유준씨?”
“응? 어, 나 여기 있어.”
쯧, 날 바라보고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불러서 조금 놀랐다. 어쨌든 날 부르는 말투로 보아 기억을 되찾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으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서둘거나 초조해하지 말자, 진유준. 대교는 나보다 천 배나 많은 기다림을 견뎌내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런 자리에서 말하게 될지는 몰랐지만, 소교를 구해 주신 거 정말 감사해요.”
아… 그 얘긴가? 납치되면서도 날 믿어 준다고 했던 것도 그 일 때문이었던 건가……?
“만났…었니, 소교와?”
“아뇨. 아직…! 하지만 전화 통화는 할 수 있었어요. 대체 몇 년 만인지 몰라요. 소교… 그 아이의 사랑스런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비로소 날 돌아보는 대교의 입가에 아쉬움과 기쁨이 공존하는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전 정말 놀랐어요. 처음 소교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한 번, 그리고 그 아이를 구해 준 남자가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또 한 번…! 후후~! 소교는 내가 당신을 보내 준 거라고… 그렇게 알고 있더군요.”
“그런 거… 맞아. 넌 항상 그 아이를 걱정하고… 내게도 늘 그 아이를 부탁하곤 했었으니까.”
“…천년 전의 소녀… 제가, 말이죠?”
대교는 문득 그렇게 반문했고, 나는 불현듯 다시 기대감을 가지고 대교의 걸음이 석실의 중앙으로 옮겨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교가 걸음을 멈춘 건, 역시 천년 전의 그녀가 동판 편지를 남겼던 석순 앞이었다. 대교는 그 석순 위를 내려다보다가 동판이 자리 잡고 있던 부분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여긴… 마치 뭔가가 감추어져 있었던 자리처럼 보이네요.”
“…그래. 실제로 그랬던 자리지.”
나는 슬며시 호주머니에서 대교의 동판 편지를 꺼내 들며 대교에게 다가섰다. 대교는 내가 정글도로 잘라냈던 석순의 파편을 보며 말을 이었다.
“석순이 자라는 속도는 1년에 고작 1밀리 정도밖에 안 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몇 백 년, 어쩌면……”
“천년 전이야. 내가 당시의 널 두고 온…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나는 대교에게 그녀 자신의 동판 편지를 내밀었고, 그것을 받아든 대교는 잠시 말없이 그 위에 새겨진 편지를 읽었다.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 그녀의 눈동자는… 그러나 그뿐. 뭔가 결정적인 걸 기억해 내는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틀림없는 제 필체…! 그리고 오늘 공연 외의 장소에서는 공개해 본 적이 없는… 언제나 혼자 남몰래 읊조리던 이 글귀……”
대교는 그동안 참고 있던 것을 토해내듯 하아아아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 동판과 이 동굴. 그리고 지금까지 당신이 보여 준 모든 것들…! 저 하나를 놀리고 현혹하기 위해서 꾸민 일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네요. 처음부터 당신의 눈동자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 같지 않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런데 정말… 정말 전 당신이 찾는 그 소녀가… 맞는가 봐요.”
“대교……!”
“그런데… 어쩌죠?”
뭐, 뭘 어째? 젠장. 왜 그런 표정… 어째서 아직도 이 시대에서 처음 재회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렇게 낯선 사람을 대하는 표정일 뿐인 거냐?
“죄송해요. 저로서는 결국 주변 사람들로부터 ‘넌 어렸을 때 이랬다’라는 얘기를 듣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저 자신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알겠으면서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 그런 얘기 말예요.”
“그, 그럴 거야.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야. 너무 긴 세월이었으니까 말야.”
나는 미리 앞서가지 말자고 다짐을 거듭하면서 간신히 웃어 보일 수가 있었다.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돼. 아니… 앞으로도 과거를 기억해 내지 못해도 상관없어.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은 지금부터 다시 시작될 거니까… 결국 예전과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지금 그 말씀……”
대교는 자신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복잡한 무언가를 걷어내는 미소를 살며시 피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를 다시 유혹하시겠다는 뜻인가요?”
“…훗! 그래, 임마!”
“쉽지… 않을걸요.”
“하는 수 없지. 우리 한국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이 있지. 열 번, 천 번, 만 번이라도 대시하겠어.”
“호홋~ 스토커가 따로 없겠네요.”
말로는 스토커 운운하지만… 표정은 어쩐지 재회한 이후 가장 밝고 자연스럽다. 그래… 지금은… 이 가엾은 나의 천사가 그 오랜 세월 동안 겪어 온 마음고생을 생각해서라도 지금은 내가 더 많이 걱정하고, 더 많이 기다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거야.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아… 참. 대교 너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 아니 사람에 가까운 녀석들이라고 해야 할까? 자, 이제 나와봐 몽몽, 요몽.”
내가 몽몽을 들어 올려 보이며 말하자 즉시 은발 소년 모드의 몽몽이 대교 앞의 허공에 떠올랐다. 대교는 처음 소림사 인근에서 몽몽을 소개받았을 때처럼 놀라 작게 비명소리까지 냈다.
“뭐, 뭐죠? 이, 이건… 홀로그램?”
흐음… 그래도 기계 문명을 어느 정도 접해 본 현 시대의 대교답게 전처럼 요괴 운운하며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 같군.
[…오랜만입니다, 대교님.]
마이크로 미소년 몽몽의 정중한 인사에 대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현 시대에서도 계속 주인님의 곁에서 대교님을 지켜보았습니다만,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이, 이건 설마……”
“후후- 시간 여행 얘기는 이미 들었으면서 뭘 그래 놀래. 타임머신이 제작될 정도의 미래에서 온 인공지능이야. 사실상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생각하고 감정까지 가진 녀석이지.”
“아……!”
새삼 감탄한 대교는 이제야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몽몽에게 하이- 인사를 해 보였다. 그런데……
“야, 몽몽. 어째서 너 혼자냐? 요몽은 아직도 삐쳐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대교님께 인사드리러 나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아무래도 전처럼 제재 수위를 높여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아니, 아니다. 녀석에게 내 말을 전해. 내가 원판 녀석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말야.”
[옛? 정말요?]
윽! 이 녀석…! 몽몽을 통하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오다니, 그 사이 은둔 모드를 풀고 있었던 건가?
[정말이죠? 그쵸? 약속하신 거죠?]
“…그래, 임마. 하지만 설마…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까지 그러는 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그럼요! 헤헤~ 주인님 최고!]
대교는 이제야 본래의 정신없는 모습으로 허공에 빛의 방울을 뿌리며 날고 있는 요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아이도 같은 건가요?”
“응. 오냐 오냐하고 키웠더니 이제는 주인님도 몰라보는 천방지축 사춘기 요정이지.”
[에…? 지금 제 흉 보셨죠?]
포로롱- 나와 대교 사이의 허공으로 내려 온 요몽은 제딴에는 그래도 미안했는지, 배시시 쪼개며 대교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죄송해요. 저도 대교님께 인사드리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닌데… 주인님이 너무 냉정하셔서 잠시… 음, 어쨌든 다시 뵙게 되어 정말 반갑고 기뻐요!]
대교는 요몽이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날아와 뺨에 키스를 하자, 흠칫 놀라면서도 웃었다.
“나, 나도 반가워. 이름이……”
[요몽이에요, 요몽! 주인님이 지어 주셨는데… 촌스럽죠?]
“아, 아냐. 예뻐, 이름도 너도… 너무나 예쁘고 귀여워.”
[와아- 감사해요! 전과 똑같이 말씀해 주시는 군요!]
여전히 호들갑스러운 요몽과 그 뒤에서 점잖은 빼고 있는 몽몽. 대교는 이 인공지능 남매가 너무나 신기하고 귀여운지 나와의 재회 때보다도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다.
<몽몽. 기본 탐색과 본체와의 통신이 가능할 정도의 하위체를 만들어.>
[알겠습니다. 대교님에게 어울릴 장신구 형태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하위체는… 내가 가지고 갈 거야. 넌 대교에게 남아서 만약의 경우에는 대교를 보호해 줘.>
[ 아, 그건…… ]
< 이젠 내가 정식 사용자. 그러니 임시 사용자 설정 권한은 내게 있다고 했잖아. 그냥… 따라 줘. >
[ …알겠습니다. ]
나는 결국 작은 하위체를 분리해 낸 몽몽을 대교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대교…! 실은 지금 내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아. 곧 여기에 얼마간 널 혼자 남겨두고 나가 봐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 동안 이 녀석들과 함께 있어 줬으면 좋겠어. 이 녀석들에게 이런저런 얘기도 좀 듣고 말야.”
“아… 그럴게요. 그런데 공연장에서부터 우릴 쫓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죠? 역시 여옥이 보낸 자들인가요?”
이런, 이제 보니 그렇게 생각하고 이제까지 적에 대해서 굳이 묻지 않고 있었구나?
“그게… 마녀는 아니야. 하지만 그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무서운 놈이지.”
쳇…!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나와 대교 사이에는 오랜 세월의 벽과 함께 원판이란 장벽이 하나 더 있었다.
“사실은… 오늘 놈들을 보내서 너의 공연장을 습격하도록 한 건 DP…! DP의 마스터 화이트 크라우드야.”
“…예? 그럴… 리가! 그 분이 왜 그런 짓을 한다는 거죠?”
그 놈에게 대교가 그 분, 그 분 하니까 새삼 기분 더럽군. 요몽에게 괜한 약속을 했나……?
“…자세한 건 몽몽에게 들어. 하지만 일단 알아야 할 것은 그 자는 네가 아는 이 시대의 기업가나 평범한 남자가 결코 아니라는 거야.”
“이… 시대의? 그렇다면……”
역시 영특한 대교. 내 말의 핵심을 딱 집어내는군.
“그래, 맞아. 화이트 크라우드… 내가 ‘원판’이라고 부르는 그 놈은 나처럼 천년 전의 강호에서 날아온 자야. 나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이 시대에 와서 현재의 지위를 이룩한… 확실히 대단한 놈이긴 하지만… 문제는 그 자의 성향! 원판은 과거에도 지금의 삼합회와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단체를 이끌던 자로서 천하의 마인들이 모두 두려워하던 악마 같은 남자… 일명 ‘극악서생’이라 불리던 남자야.”
내 말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대교의 저 표정……!
“그 놈이 그 동안 네게 접근해서 잘해 준 건 사실 나 때문이야. 놈은 날 노리고 있는 건데… 내가 널 좋아하니까 너까지 인질로서 확보해 둔 거란 말야.”
더더욱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제기! 역시 대교는 놈을……
“그 분이 당신을 노리고 있었던 거라고요? 그럼 두 분은 설마… 그런… 취향?”
…엥? 뭐야? 내 얘기가 그렇게도 해석이 되나?
“아, 아냐! 뭔 소리야! 놈이 날 노린다고 한 건 어디까지나 내 능력……”
…이 맞나? 놈이 굳이 자신의 세력에 나의 전투력을 더해야 할 필요가 과연 있으려나? 놈은 그냥 외로워서 날 상대로 게임을… 으~ 그건 어째 설명이 더 복잡해질 것 같은데…? 이런 제기~!
“하, 하여간! 그런 거 아냐!”
[ 그렇습니다, 대교님! 기록상, 원판에게 동성취향의 연애관이 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
[ 맞아요! 게다가 주인님은 일편단심 대교님인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
고, 고맙다, 몽몽 남매.
몽몽 남매의 해명까지 더해지자 비로소 대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기분 탓일까? 날 바라보는 대교의 시선에 ‘의심’의 기운이 말끔히 가시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 빌어먹을 원판 놈…! 요몽과의 약속이고 나발이고 내 기어이 네 놈을 쳐죽여 버리리라!
“그럼… 조금 전에 당신이 요몽에게 한 말은 뭐죠? 당신이 그 분을 돕겠다고 한 건 대체……”
“그건! 대교… 그건… 말이지.”
젠장! 이 것도 또 설명하기 난해하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교에게 ‘그 놈이 비록 변태 살인마지만 난 그래도 쬐금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어서’라는 소리 같은 건 절대로 할 수가 없잖은가! 뭐, 뭐라고 얘기하지……?
“그건… 어… 원판은 분명 위험한 살인마…이고, 결코 돕고 싶지는 않은 데……”
[ 그야 주인님께선…… ]
< 닥쳐! 요몽! >
난 다급하게 전음을 날려 요몽의 말을 막고 다소 어색한 표정일지 몰라도 일단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게… 생각해 보면 내가 전에 놈에게 신세진 일이 하나 있긴 있었거든.”
[ …어? 주인님께서 원판씨에게 신세진 일이 있다구요? ]
“어… 그래. 그게 바로 내가 선택적으로나마 놈을 도울 수 있는 길까지 생각해 보게 된 이유야.”
나는 말하면서 새삼 찬찬히 눈앞의 대교를 보았다. 야광주의 불빛이 반사되는 투명한 피부가 너무나 곱고 깨끗해 보이는 그녀, 대교는… 음… 실제로도 예나 지금이나 무지 깨!끗!하!다!
“청결……!”
[ 예? ]
“예?”
요몽과 대교가 동시에 의문을 표하며 대체 뭔 소린가 하는 표정이 되었지만… 달리 더 할 말도 없고, 이미 꺼낸 말이니… 에라 모르겠다.
“대교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다들 알다시피, 중국인들이 좀 지저분하냐. 그건 국민성 문제라기보다, 예로부터 중국이 우리 한국의 금수강산에 비해 깨끗한 물이 너무나 귀해서였겠지만…! 암튼, 일부의 중국인들은 지금도 그렇다고 들었어. 그런데 천년 전에는 전체적으로 더 장난 아니었지. 대표적으로 혈랑대 막사에 가면 뭔가 썩는 냄새 때문에 코를 막아도 견디기가 어려웠었지만 그래도 비화곡은 전반적으로 양반이었지. 하도 안 씻어서 몸 냄새가 진동하는 건 처음 만났을 때의 천우신… 아, 그런 친구가 있어. 하여간, 명문 귀족 가문의 도련님이었던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으며, 내가 중원을 다니며 만난 거의 모든 인간들은 그보다 더 지저분하고 머리엔 개기름이 좔좔 흘렀지! 훗~! 생각해 보면 참 기가 막혔다. 무슨 인간들이 고양이도 아니고 가끔 물 조금 묻힌 빗으로 머리 빗는 걸로 머리 감기(?)를 끝내는 건지… 원!”
내친 김에 그때의 기분을 마구 쏟아내자, 대교는 샐쭉해진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확실히 저희 중국인의 치부 중의 하나예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지고 있어요.”
[ 어, 그러고 보니 그랬었네요. 하지만… 대교님들은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잖아요. ]
두 소녀가 한 편이 되어 따지고 드는 군.
“…그래. 그게 바로 내가 인정하는 원판의 유일한 업적이며 놈에게 감사하는 부분 아니냐.”
…그랬다. 원판은 자신의 병약한 몸 때문에 ‘청결’을 일찌감치 중요시 여겼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머무는 창천각의 시비들을 모두 깨끗이 씻게 한 것은 물론이고 자주 들르는 비취각에서도 체취가 심한 여자들은 옆에 오지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차츰 비취각주 취음란을 중심으로 비취각의 모든 미녀들이 원판의 취향에 맞추어 매일 씻고 깔끔을 떨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다들 똑같이 지저분할 때는 잘 모르지만 일단 자신이 깨끗해지면 다른 사람들의 체취가 느껴지기 마련이다. 비취각의 미녀들이 냄새나는 남자들을 싫어하고 멀리하자 당연히 남자 간부들까지 목욕에 관심을 보이게 되고… 젊고 잘생긴 신세대 킹카 간부들이 깨끗한 여자를 선호하는 것이 당연시되면서 비취각 이외의 여자들까지도 열심히 씻기 시작했다던가…? 그리고 그런 연쇄 작용의 결과…! 비화곡은 요즘 한국의 웰빙 바람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청신지미 운동에 휩싸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원판의 청신지미 운동에 대해 설명했고, 비로소 요몽과 대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우웅~ 저도 생각났어요. 그래서 강호의 다른 문파들… 특히 명문정파들에서는 비화곡을 위청곡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죠? ]
“그래. 그리고 원판은 그에 대해 공식적으로… ‘겉 희고 속 검어 미안하다. 너희들은 겉과 속이 똑같이 검은 진묵자이니 자랑스럽겠구나’라고 대답했다지, 아마.”
윽…! 이 얘긴 괜히 했다. 놈이 멋있게 보일지 모르는 부분인데… 실수! 실수!
[ 헤에- 맞아요. 그러고 보니 원판씨가 비화곡 주민들을 깨끗하게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주인님도 비화곡에 적응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리셨겠네요. 더구나 대교님과 자매들이 첫 만남에서 전부 지독한 냄새를 풍겼더라면…… ]
“설사 그랬어도 대교는 이뻤을… 음, 흠! 암튼! 그렇게 원판 놈의 덕을 본 바도 있으니까……”
[ 게다가 만약 주인님께서 대교님을 안았는데 때가 칼국수처럼 죽죽 밀려 나왔다거나 그랬으면… 우와~ 생각해 보니 정말 깬다. ]
“야! 야!”
[ 어? 아… 죄송! ]
에이 쒸- 요몽 이 자식! 내 말은 끝까지 안 듣고 지 멋대로 그런 끔찍하고 불경한 망상이나 하다니…… 대교는 자기가 실제로 그런 칼국수를 빗은 적도 없으면서 얼굴을 붉히고 있었고 나도 공연히 민망했다. 그러나 요몽은 우리 반응에 아랑곳없이 내게 다가오며 못을 박았다.
[ 어쨌든, 정말 그렇게 큰 신세를 졌으니 이번에는 꼭 갚아야겠네요? 그쵸? ]
“…그래. 하지만 사실 그게 뭐 그리 큰 신세냐. 나나 되니까… 그 정도 일로도 만약의 경우 기회가 된다면 조금 도와줄 수도 있는… 이 정도 생각까지 해주는 거지. 안 그래?”
[ 헤에~ 그건 그래요. ]
쯧…! 요몽 녀석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지만 역시 핑계가 너무 약하고 유치했던 것 같지…? 어디, 대교는… 대교의 반응은 과연……
“그랬…군요. 알겠어요.”
에? 정말? 정말 이 정도로 납득해 주는 거야? 그럼 고맙…지만, 그래도 일단 본인의 입을 통해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겠지?
“…대교. 넌 화이트 크라우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나는 갑자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대교는 잠시 망설인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전 잘… 다만 그 분은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럼 내가 공연히 놈을 모함한다고 생각하니?”
“…아뇨.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으으~ 그 놈의 다만, 다만… 뭐?
“그 분 역시 그럴 분이 아니라는 생각도 간단히 지울 수는 없어요. 두 분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해는 무슨 오뉴월 댓바람에 얼어 죽을!
“모든 사실을 보고 듣고 나면 오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어쨌든…! 나는 이제 곧 놈이 보낸 놈들과 싸우러 나갈 거고, 만약 놈과도 마주치게 된다면… 그럴 경우 지금까지 한 말과 달리… 놈을 내 손으로 없애 버리게 될지도 몰라.”
[ 어? 주인님! ]
< 넌 닥치고 있으랬지, 요몽! >
“난… 아무래도 놈에게는 나쁜 감정이 더 압도적으로 많거든. 놈을 죽여서 너에게 원망을 듣게 되더라도……”
“왜요?”
“…뭐?”
“두 분의 일인데 제가 왜 누굴 원망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에…?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문하니까 오히려 당황스럽네?
“전… 누구든 죽는 걸 바라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이 살인을 하는 것도 싫고요. 하지만… 두 남자 사이에 결코 쉽게 풀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풀거나 끊어내기 위해 결정한 일이라면… 그건 제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대교는 문득, 자연스럽지 못하고 애써 만드는 기색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밝게 웃는 얼굴을 내게 보이며 말했다.
“다녀오세요. 전 여기서 무사히 돌아오시길 빌고 있을게요.”
“너, 설마 기억이……”
“예?”
“아, 아니야. 그래… 알겠어. 다녀올게.”
나는 나도 모르게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정글도를 어깨에 걸쳤다.
내 판단이… 내 생각이 옳았다! 기억을 되찾았든 아니든, 누군가 방해를 하건 말건… 대교는 대교다. 그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대교다!
[ 주인님! ]
본체의 몽몽이 대교가 듣지 못하게 하위체를 통해 물었다.
[ 대교님께 전할 과거 정보의 제한선을 지정해 주십시오. ]
< 제한선 같은 거 없어. >
[ 대교님이 주인님과 만나기 전… 원판과의 앞선 인연에 대해서도 말입니까? ]
< …그래. 그딴 거 숨기고 싶지 않아. >
[ 알겠습니다. ]
나는 결국 대교와 몽몽마저 뒤로하고 석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몽몽도 없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적과 싸우러 가는 길이었지만, 내 발걸음은 신기할 정도로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