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8-3화 : 무정한 정글도에 꽃잎은 떨어지고.(3)
5-10. 무정한 정글도에 꽃잎은 떨어지고.(3)
샤라라라라~
놈들보다 한 박자 늦게, 그러나 놀랍도록 빠르게 정글도 끝에서 자아내진 곱고 가는 달빛의 실타래가 허공에서 얽히며 달의 여신이 늘어트린 옷자락처럼 펼쳐졌다. 그러나 물론 이 아름다운 월광의 향연은 부드러운 월녀의 옷자락이 아니라 잔혹한 처형의 형틀을 의미했다.
“…도망쳐!”
나는 월광절화결을 펼칠 때면 드는 의무감에 따라 놈들에게도 충고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병기에 대한 신뢰인지 아니면 정말 얼어붙어 붙기라도 한 건지, 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거미줄처럼 치밀하게 모든 바위 사이의 공간에 펼쳐진 채 전진하는 영월금의 한 복판에 무상혈환이 먼저 부딪쳐왔다. 그 접점에서 파츳-! 하는 파열음과 함께 섬광이 뿜어져 나오며 순간적으로 영월금의 빛마저 뒤덮어 버렸다.
설마……!
월광절화결에 대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순간의 기우에 불과했다. 일시의 섬광은 일어났던 만큼이나 빠르게 스러지며 작은 파편 조각들만을 후두둑 내 발 밑에 떨구었을 뿐이었다. 그 반면, 다시 드러난 영월금의 고고한 자태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채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이어 파츳! 팟! 은빛 혈접들도 차례로 말끔한 퍼즐 조각이 되어 내 앞에 뿌려졌다. 그리고 그제야 놈들은 다급하게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그들이 도주를 결정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속에서 파르라니 서글프도록 창백한 월녀의 옷자락이 세 귀신들을 뒤덮었다. 달밤의 붉은 귀신들이 달빛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 놈들이… 바로 론이 말하던 ‘아주 특별한 늑대’였을까?
영월금을 펼쳤던 자리를 떠나 다시 원판을 향해 숲을 헤치고 나아가던 내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그 놈들은 분명 론이나 도홍에게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론이 과연, 장비빨에 의존한 전투밖에 못하던 자들을 ‘아주 특별하다’라고 높이 평가했을까…? 만약 론이 헛소리를 한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진짜 특별한 늑대들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으며 당연히 원판 곁을 지키고 있는 건가?
나는 그런 결론을 내리고, 한층 더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세 귀신들과의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발견했었던 인공의 불빛이 점차 가까워져 올수록 또 다른 귀신같은 놈들이나 예의 특별한 늑대가 나타날 가능성도 커져가고 있었다. 내가 결국 어두운 숲 사이로 인공의 불빛, 커다란 수송용 헬기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확인했을 때였다. 나는 불연 듯 느껴지는 살기 때문에 발걸음을 조금 늦추기 시작했다.
왼쪽… 왼쪽에 두 명, 오른쪽에도 두 명, 그리고 머리 위에 또 한 명… 이 정도인가…? 지면을 스치고 나는 듯이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절제된 살기…! 이들이 과연 진짜 특별한 늑대들…일까?
나는 떠오르는 생각에 즉시 고개를 저었다.
상당히 숙련된 움직임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렇게 간단히 포착된다는 건……
나는 경계심을 유지하는 한편, 다시 발걸음 속도를 본래대로 높였다. 독사처럼 잔득 도사린 채 소리 없이 접근하던 다섯 방향의 살기가 바람처럼 풀잎을 날리며 날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 미묘한 차이에 불과했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시간차에 따라 차례로 정글도를 휘둘렀다. 이번 적의 살기와 공격이 조심스럽게 머금은 여인의 숨결 같은 것이었다면, 나의 정글도가 일으킨 바람은 자잘한 모든 것을 날려 버리는 돌풍…! 일거에 사방의 적들이 베어지고 날려 나뒹굴었다.
“아니… 아니. 이건 아니냐.”
나는 간단히 격퇴된 적들 사이를 걸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월광절화결 한 번 외에는 특별히 쓴 것도 없고, 나름대로 전력을 아끼고 아끼며 온 건데… 그런데… 이게 뭐야?”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몇 명의 신형이 다시 내 앞을 가로막았지만, 놈들 역시 내가 아무렇지 않게 휘두른 정글도에 맥없이 희생되어 쓰러져 갈 뿐이었다. 나는 무기력한 호위자들 너머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너,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원판. 날 대체 뭘로 본 거야? 응?”
원판은 자신의 호위병력과 어둠을 뚫고 나타난 나에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던지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현재의 이 어두운 숲에서 유일한 인공 불빛일 헬기의 조명 장치가 쏟아내고 있는 빛 속으로 물러서고 있는 원판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고 작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원판은 평소와 달리 온통 검은 양복을 걸치고 있는 자신의 몸을 불빛 속에 감추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네, 네 놈! 너 진유준…! 네가 반칙인 거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데이터와 다른 거지?”
나는 놈의 외침에 먼저 핫-하고 어이없는 헛김 소리로 답했다.
“…네 놈이야 말로 대체 뭐냐. 저 막강한 블러디 울프들을 오합지졸로 편성해서 보낸 것도 모자라, 내가 이렇게 쳐들어 올 것조차 예상하지 못한 거냐? 도홍은 왜 이제야 전장에 투입하고… 아니, 도홍 같은 자를 곁에서 떼어내고 남긴 놈들은 또 뭐야?”
원판은 내가 신경질적으로 정글도를 들어 가리키는 내 뒤쪽의 숲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놈에게 계속해서 물었다.
“저 놈들이 특별한 늑대들이냐? 저런 놈들로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응? 대답해봐! 네 놈이 정녕 천년 전 천하의 마인들을 지배하던 극악서생이냐? 철저한 힘의 논리로 무장한 비화곡을 머리로 지배했던 유일한 마인! 가장 약하면서도 가장 무서운…! 그런 평가를 받던 네 놈의 치밀한 두뇌는 어디로 간 거냐? 모든 사람들이 네 손바닥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던 네 놈의 그 재수 없는 미소는 어따 팔아먹은 거냐고!”
치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아니… 모두 본래 하려고 했던 말일뿐이지만, 어째서 이렇게 진짜 감정이 실려 버리는 거냐. 저 따위 놈이 초라해졌다고 해서 내가 화를 낼 이유도 없는데 말이 다.
“…묻겠다. 넌… 누구냐. 정말 내가 아는 그 원판이 맞는 거냐?”
묻다 보니 정말로 이상하다. 이 녀석… 정말 원판이 맞는 건가? 아무리 인격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느낌이 다를 수가 있는 걸까?
“다, 닥…ㅊㅕㅅ! 너 진유준…! 내가 네 놈의 힘을… 무공이라는 이름을 빌렸을 뿐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그 힘을 파악하는데 실수했다고 해서…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네 놈에게 나의 존재를 의심받을 이유는 없어!”
“훗~! 정말이지 초라한 변명이구나, 원판. 아니, 원판의 육체를 가진… 알 수 없는 놈아. 이제 끝내자.”
나는 정글도를 놈에게 겨누며 다가서기 시작했다.
“끝낸…다? 날… 죽이겠다는 건가? 진유준, 네가… 날?”
두려움만이 덮혀 있는 것 같던 원판의 입가에 문득 원판 특유의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오르고 있었다.
“네가 날 죽인다고? 이 몸을! 이 한심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발견한 동족을, 네 놈의 비틀린 심사를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 나 진하운을 네 손으로 죽이겠다고…? 하.. 핫! 아-하하하하하핫~!”
놈은 갑자기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내가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것은… 비록 겉모습뿐이긴 했지만, 원판과 너무나 똑같이 닮은 놈의 쌍둥이 여동생 하은이의 사랑스럽게 웃는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놈은 얼마간을 더 눈물까지 찔끔이며 웃다가는 결국 큭, 쿡… 웃음을 삼키고 다시 날 향해 돌아섰다.
“좋아…! 정말 각오가 된 거라면… 진유준, 너의 칼에 베어진다면… 나도 기꺼이 나의 붉은 피를 너의 칼과 가슴에 뿌려 줄 수 있지.”
원판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더니 소름끼치도록 새하얀 맨 가슴을 드러냈다.
“심장을 단숨에…! 그 정도 친절은 가능하겠지?”
“…그래. 짜증나지만, 마지막 소원 정도는 들어주지.”
놈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는 가운데, 나의 정글도가 단숨에 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어, 어… 지, 진짜… 너, 너어……”
원판은 자신의 가슴을 찌른 정글도가 실감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더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곧 단절적인 호흡만을 간신히 토해내게 되었을 뿐이었다.
“잘 가.”
나는 짧게 인사를 건네며 정글도를 뽑았고, 그 순간 놈의 가슴에서 화아악- 붉은 선혈의 꽃이 피어올랐다. 비틀, 주춤… 내게서 물러난 놈의 몸이 서서히 뒤로 기울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정글도의 표면에 내력을 돌리며 살짝 휘둘러 놈의 피를 털어 냈다. 놈의 몸은 털썩-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고, 놈이 서 있던 허공에는 내 정글도에서 뿌려진 핏방울이 고운 꽃잎처럼 흩날렸다.
쯧…! 저런 자식의 피에 꽃잎 같은 표현을 떠올리다니… 나란 놈은 때로 엉뚱한 곳에서 감상적이 되곤 하는 군.
나는 결국 피식 한 번 웃는 것으로, 악연하나를 어렵게 끊어낸 감상을 지우며 놈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다시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는 나에게 떨리는 여자 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찌르셨군요, 진유준님.”
란…! 천년 전의 비취각주 취음란을 대신해 항상 원판 곁을 지키던 여자, 란이었다. 이제야 헬기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한 손에 권총을 든 채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가 알고 있던 진유준님은 지나치게 다정하여 그것이 약점인 남자…! 그런데 이제는 당신과 그 칼도 무정해진 모양이군요.”
“훗~! 공연한 소리하지마. 이게 당신, 아니 ‘당신들’도 바라던 바가 아니었던가?”
내가 반문하자, 란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눈치채고 계셨나요?”
“처음엔 아니었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웬지 기분이 나빠지더니… 이 곳으로 오면 올수록 그 불쾌감의 원인이 확연해지기 시작하더군. 쳇…! 아무리 나 자신의 의지가 더 컸다고는 해도, 이만큼 누군가에게 유도당했다는 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유준님. 저희들도 미리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청할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답니다. 정말이지… 감사합니다.”
란은 진심으로 감사하는 표정을 보이며 새삼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왔다.
“…엉성하게 편성된 블러디 울프, 가장 강력한 가디언 도홍도 전장을 지원한다는 핑계로 떠나면 남은 건 무늬만 특별한 늑대들, 아니 도홍을 제외한 가디언들이 전부 시원찮은 것부터… 이런 모든 일들이 내가 원판을 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당신과 도홍, 두 사람 이 은밀히 꾸민 공작……!”
그래… 란과 도홍은 원판의 측근답게 자신들의 마스터가 어떤 상태라는 것을 눈치채고 원판의 다중 인격 중 조금 전까지의 문제성 있는 인격만을 제거하기 위해 날 이용했던 거다. 물론 이 모든 건 원판의 본래 인격이 사라지기 전에 두 사람에게 미리 지시해 둔 것일 테고 말이다.
“근데, 론은……”
“아, 론 중령은 저희와 사전에 협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부터 저희들에게 ‘마스터의 이상한 상태’에 대해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만약 눈치를 챘다면 은연중 우리를 도왔을지도 모르지요.”
“눈치…챘나 봅디다. 공연히 자기 부하와 수다를 떨면서 내게 정보를 흘렸던 걸 보면.”
“후후- 하긴, 론 중령은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남자죠.”
란은 웃으며 내게서 몸을 돌려 원판의 시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판을 내려다보기 시작한 그녀는… 마치 원판의 몸이 선혈로 치장되어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지, 살짝 홍조를 띠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멋…져요. 이처럼 피와 잘 어울리는… 선혈 속에서 더욱 피어나는 남자의 몸이… 있을 수 있을까요?”
쳇…! 원판이나 저 여자 란이나, 역시 정이 안 가는 사상을 가진 변태 커플인 것 같군.
“어쨌든 이로서 본래의 마스터께서 돌아오신다면… 진유준님이 이토록 마스터를 생각해 주신 것을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만큼 진유준님을 믿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셨겠지만 말이죠.”
“그딴 건 내가 알 바 아니고! 그보다 나도 내력으로 상대의 심장에 충격을 주어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게 하는 수법을, 더구나 정글도를 통해서 한 건 처음이란 것을 알아두쇼. 다중인격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대로 놈 전부가 죽는다 하더라도 날 원망하지 말란 얘기요.”
내 발뺌(?)에 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나로서는 이런 식의 도움도 최대의 성의를 보인 거요. 그러니 만약… 놈이 깨어났을 때, 이번 인격이 그대로 되살아 난다 해도 이 후로는 내 도움을 받을 생각 말고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오.”
“…그야 당연하죠.”
대답은 잘하는 군. 하지만… 만약 내가 말한 사태가 벌어져 처음의 원판이 아니라 이번 인격이 되살아난다면, 그건 그렇게 간단한 상황이 아닐 것이다. 란과 도홍은 다시 본래의 원판으로 되돌릴 방법을 연구해야 할 테고, 나는, 나는… 음, 그러고 보니 난 고민할 필요가 없는…건가? 난 오히려 이번보다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원판을 없애러 오면 되니까 말이다. 물론 그때는 오늘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없애기 어려운 원판이 되어 있겠지만……
“뭐, 아무려면 어때.”
“예?”
“아니, 그냥…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뜻에서 한 말이오.”
“그런… 가요?”
란은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원판의 몸으로부터 천천히 시선을 거두고, 이번에는 날 지긋이 응시하기 시작했다.
“말씀과는 달리 진유준님은 역시 마스터를……”
“흥! 쓸데없는 오해는 마쇼! 내가 원판을 도울 생각을 한 건, 어디까지나 내가 아끼는 철없는 소녀 둘 때문이오. 난 단지 그 두 녀석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을 뿐이란 말이오.”
나는 투덜거리며 란의 시선을 피했고, 그녀는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후후~ 역시 너무나 다정한 분이군요. 아, 그런 데……”
타앙-! 갑작스런 총성이었다. 총성의 출처는 란이 들고 있던 권총, 그리고 총구가 향한 곳은… 조금 전 내 정글도에 찔렸던 원판의 가슴이었다.
“전 사실… 지금까지 이 남자를 저의 마스터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답니다. 물론, 이 그럴듯한 육체도 말이지요.”
란의 권총이 다시 주저 없이 타앙! 탕! 불을 뿜으며 원판의 몸을 연신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지난 번 원판의 아파트에서 원판의 아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자살 시도까지 하며 날 막아섰을 때의 그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