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9-3화 : 그녀들의 사랑 방식.(3)
아, 은사마군을 잊고 있었구나. 그녀라면 내가 따로 시키지 않아도 대교를 데리러 가는 게 당연했는데 그 생각을 못했다.
[ 전반적인 신체의 반응과 뇌파의 패턴으로 보아 대교님의 현재 심리 상태는… ‘혼란’입니다. ]
혼란…? 그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 그래서 이렇게 어수선한 분위기는 좀 그런데… 으으음~ 모르겠다. 대교가 뭐 어린애도 아닌데 너무 시시콜콜 걱정하는 것도… 어, 근데… 그러고 보니 대교는 아직 어린 게 맞잖아? 에고,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안 맞아 죽으려면 대체 몇 년을 기다렸다가 소개해야 하는 거지…? 으~ 안돼! 난 더 못 기다려. 그, 그냥… 나이를 올려 버려? 흔한 패턴이지만 출생 신고를 너무 늦게 했다고 하면… 에… 근데 과연 대교가 그런 걸 허락해 줄까? 물론 그보다 대교가 내 프로포즈를 받아들여 주는 게 우선이지만… 긍께… 어쨌거나 그럴 경우… 으으으으음~
“천주……?”
“응? 어, 왜. 자룡대주.”
“은사마군이… 주가혜님을 모시고 옵니다.”
“어, 그렇군.”
나는 고민 아닌 고민을 잠시 미루고 막 동굴에서 나오고 있는 대교를 보았다. 대교가 출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조금 놀란 얼굴이 된 건 당연히 이 야밤의 난리굿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몽몽과 은사마군에게 상황을 미리 들어서인지 크게 당황하지는 않고 날 찾는 기색이었다. 나는 당연히 맞이하러 대교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나보다 한 발 먼저 그녀에게 다가서는 자가 한 명 있었다.
“아- 이제야 나오셨군요! 전 어사조의 천음마군이라 합니다!”
대뜸 포권하며 인사하는 천음마군의 태도와 우렁찬 음성 때문에 대교도 비로소 난감한 표정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음마군은 그런 대교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더욱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자아- 모두 주목! 이미 아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이 분이 바로 오늘 천주께서 업어 온 가련한 공주님이다! 하하핫~! 천주께선 정말 욕심도 많으시지,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홍콩의 공주님을 독차지 하시… 윽!”
…잘했다, 은사마군! 은사마군은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천음마군의 옆구리를 찍어 호들갑스런 소개를 막아 주었다. 이미 저 수많은 인간들의 시선이 대교에게 집중되어 버린 후이긴 하지만 말이다.
“…미안해. 어쩌다 보니 이렇게 어수선한 자리로 나오게 하고 말았네.”
나는 다가서며 사과했지만, 이미 대교는 약간 샐쭉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뭐…죠? 제 허락도 받지 않고 절 당신 여자라고 소개한 건가요?”
“어… 그것도 어쩌다 보니… 가, 아니고! 그 뭐, 나쁠 거 없잖아. 어차피 그렇게 될 텐데 말야.”
어설프게 변명하느니 그냥 밀고 나가자 싶어 히죽 웃어 보이기까지 했지만, 대교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조용히 내게 몽몽을 내밀었다.
“잘… 봤어요.”
“그, 그래?”
나는 몽몽을 받아 하위체가 있는 건빵 주머니에 넣으며 다시 대교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여전히 냉랭한 표정일 뿐이었다.
“왜… 그래? 화… 난 거야? 내가 멋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해 둬서? 아니면… 옛날 일 중에서 뭔가……”
“진, 유, 준, 씨! 세상에 어느 여자가… 자신이 노예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선택권도 없는 사랑을 했었다는 걸 알고 기분이 좋을 것 같아요?”
“…뭐?”
“전… 지금의 전 달라요. 그걸 알아두시기 바래요.”
제, 젠장! 이렇게 당당한 대교야말로 나도 원하던 바다. 하지만… 그렇지만, 대교 너… 너 정말 그때의 상황을 그렇게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거냐? 나는 대교에게 뭐라 따지지 못한 건, 내가 예전부터 원하던 대교의 모습에 대한 반가움과 대교가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섭섭함과 안타까움이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어- 일단, 자리에 가셔서 말씀 나누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만……”
“그, 그래. 고마워, 자룡대주.”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 준 자룡대주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녀의 안내에 따라 내 자리로 향했다. 대교도 얌전히 따라와 내 옆자리에 앉았지만 야무지게 정색을 한 표정이나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서 과거의… 아니, 오늘 석실을 나서는 나에게 ‘무사귀환을 빈다’고 말하던 때보다도 거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천주와 재회한 지하무림의 첫 승전을 위하여!”
암울…까지는 아니더라도 갑자기 기분이 다운되어 버린 나를 대신해 구양대주가 건배를 외쳤고, 한밤중의 산속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건배를 외치며 술잔을 비우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어 왁자지껄한 파티가 시작되어 다들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자룡대주가 따라주는 술을 연속으로 원샷해 버렸다. 대교는… 그런 나를 무시한 채 조용히 자신 앞의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 넌 과일 주스 같은 음료수로 바꿔 줄까? 자룡대……”
“아뇨. 저도 술 마실 줄 알아요.”
“그, 그래?”
대화는 그뿐, 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 분위기 속으로 끼어든 것은 이번에도 자룡대주였다. 자룡대주는 자신의 잔을 들고 대교 앞으로 자리를 바꾸더니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 아무래도 여자는 여자끼리 마시는 게 더 편하겠죠? 전 천주 직속 보천구룡대의 한 명인 자룡대주라고 합니다. 또한, 천주의 첫 번째 제자…이기도 하죠.”
응…? 뭐야? 자룡대주의 표정이나 눈빛이 어째 좀……
“제자…라고요?”
“예. 말하자면… 주가혜님 다음으로 천주와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여·자·죠.”
윽, 이 여자 뭐야? 벌써 취하기라도 한 거야? 왜 ‘가까운 사이’라는 말과 ‘여자’라는 말을 강조하는 건데?
< 자룡…… >
전음으로 자룡대주를 말리려다가 멈춘 것은, 대교가 너무나 태연한 얼굴, 아니 어느 사이 살며시 미소까지 띄운 채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분이란 건 알겠어요. 하지만 첫 번째 제자라…! 그건 잘 못 생각하고 계신 거 같아요.”
“예? 그럼……”
“제가 첫 번째 제자…일 거예요. 그렇죠?”
대교가 물은 건 당연히 나였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대교에게 직접 무공을 가르친 건 아니었지만… 사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사실이기도 했다.
“후후~ 전 머리가 나빠서 배운 걸 다 까먹어 버렸지만 말예요.”
대교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잔을 내밀었고, 자룡대주도 지지 않고 마주 잔을 내밀어 부딪쳐왔다. 두 여자의 원샷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옆의 내가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지만… 정작 대교는 지극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주가혜님… 아니, 전생의 이름으로 불러드리는 것이 더 좋을까요?”
“…그냥 편한 대로 부르세요. 그리고 한 가지, 대교는 전생의 이름과 아명이 같답니다.”
“아, 역시… 대교님은 천주와 너무나 깊은 인연으로 이어진 모양이네요. 다른 인연은…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일 정도네요.”
“아뇨. 그렇지도 않아요.”
“예?”
놀란 건 자룡대주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시던 술이 목에 걸려 간신히 삼키느라 눈물까지 찔끔하며 대교를 돌아보았다.
“전… 기억하지 못하는 걸요. 진유준씨와 지낸 일 같은 거… 전부.”
또박또박 말하는 대교의 목소리 하나 하나가 송곳처럼 내게 날아와 박혔고, 나는 그 상처에 약을 바르듯 몇 잔의 술을 더 자작으로 들이켜야 했다.
“그, 그럼 왜 오늘 이 자리에……”
“아시다시피, 전 납치당했잖아요. 그러니… 돌려보내 줄 때까지 얌전히 따를 밖에요.”
“정말… 그런 생각을 하며… 천주의 옆에 앉아 계신 겁니까?”
자룡대주의 목소리가 떨리는 건 분노 때문일까…? 아니면 기쁨 때문일까…? 어쨌든 대교는 자룡대주의 무섭게 노려보는 시선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안 되나요?”
대교의 짧은 반문에 자룡대주는 머뭇거릴 뿐 쉽게 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룡대주.”
“예, 천주.”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 좀 비켜 줄래?”
“…복명!”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룡대주의 얼굴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나에 대한 연민의 표정이었다. 그녀에게 지금의 나는 ‘간단히 실연당한’ 남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교…! 너 정말… 아까 한 말… 그대로냐? 정말 천년 전의 너와 내 관계를 그렇게밖에……”
“그렇게밖에, 라니요? 역시 당신은 또 제가 당신을 노예처럼 따르기를 바라는 건가요?”
“그런 말이 아니야! 너… 너 정말……”
“제 표현이 기분 나쁘실 거라는 거 알아요. 그래도 확실히 해 두고 싶었어요. 당신은… 저를 천년 전의 그녀라고 생각해서 좋아하는 것뿐, 지금의 절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 그건……”
“기분 나빠요, 그런 거.”
제, 제기랄! 과거를 알려 준 게 오히려 역효과였단 말인가? 만약 스스로 기억을 찾았다 해도 이랬을까…? 이렇게까지 과거의 자신을 부정했을까……?
“묻겠어요. 제가 천년 전의 그녀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해도 당신은 저를 좋아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어떻게든 과거로 돌아가 진짜 당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는 게 더 옳은 일 아닐까요?”
대교는 확신에 찬 어조로 물으며 내 눈동자, 아니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며 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다시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대교… 네 질문은 처음부터 틀렸어. 넌 그 때의 너와 다르지 않아. 설사 성격이 변하고 생각이 바뀌었을지 몰라도… 너는 너야. 난 말야… 그 때의 너라서, 그 때의 네가 보인 겉모습 때문만으로 널 택한 게 아니야.”
“아, 아뇨. 사람은 자라 온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될 수가 있어요. 게다가 만약… 제가 과거와 전혀 다른 용모가 되어 있었다면 어땠을 거 같아요?”
“그것도 의미 없는 소리. 난 그래도 널 알아볼 수 있었을 거야. 어차피…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고 말야.”
“앞으로도… 라고요?”
“그래. 앞으로… 끝없는 미래의 시간 동안 난 몇 번을 죽어도 또 환생해서 널 찾아낼 거야. 알겠니? 넌 지독한 남자에게 걸린 거야.”
난 스스로를 지독한 남자라고 표현하며 웃었다. 그러나 대교는 조금도 웃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께서는… 무모한 장담 같은 걸 하는 남자를 믿지 말라고 하셨어요.”
“무모한 장담이 아냐. 다음 번… 또 천년 후에라도 다시 만나게 되면 믿을 수 있을 거야.”
대교는 그래도 다시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 해도, 전 또 모든 것을 잊고… 지금처럼 당신을… 사·랑·하·지·않·고… 그럴 텐데도요?”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차가운 비수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얼어붙은 칼날에 베이는 아픔 같은 건 아랑곳없이 환하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상관없어. 네가 먼저 사랑한 건 한 번이면 족해. 앞으로는 내가 먼저 널 사랑하고 그래서 고통받더라도 상관없어. 널 만나지 못하는 아픔에 비하면, 네가 나 때문에 겪은 아픔에 비하면 그 딴 거……”
“무, 무슨 남자가 그래요?”
대교는 갑자기 뾰족한 음성으로 외치기 시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바보 같죠? 당신이 화를 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전부 잊었냐고! 왜 아무렇지도 않게 이러냐고!”
대교는 내게 다가서서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외쳤다.
“왜 변해 버렸냐고! 왜 화내지 않죠? 왜! 왜!”
나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에게 물어야 했다.
“왜… 우는 거니, 넌.”
내 말에 대교는 비로소 외침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렇게 사랑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어떻게… 어떻게 저란 애는… 그런 기억을 잊을 수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대교의 두 눈에 투명한 눈물이 계속해서 솟구치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대교가 과거의 일을 나쁘게 표현한 것이나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모두가 거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교가 화를 내고 있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그녀 자신…! 대교는 아직도 기억을 되찾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내게 추궁 당하고 욕을 먹기를 바랐던 것이다.
“미안…해요. 잊어서… 당신을 잊어서… 정말 미안해요.”
간신히 다시 입을 열고도 잊어서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대교의 눈물 방울이 내 얼굴 위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겨울비치고는… 너무나 따뜻한 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