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5-2화 : 골든 차일드의 가치.(2)
“전 G.M의 챈이라 합니다, 진선생.”
호전적인 눈빛에 비하면 비교적 정중한 태도의 인사로 시작한다. 하지만… 내 다년간의 실전 경험(비록 반 이상이 가상현실이었다고는 해도)에 의하면, 저 챈이란 남자가 지금 나와의 사이에 두고 있는 거리나 다른 두 명의 위치가 말해주는 건 ‘여차하면 협공’이었다. 아까 짐짓 총을 들고 위협했던 미령이의 경우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적이고 섬뜩한 압박이다.
“저희는 소위 ‘정보’를 전문으로 하는 자들입니다만… 아직 선생의 진면목은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스스로를 밝혀 체면을 세워 주시는 건 어떨지……”
그야— 나도 적당한 선까지는 밝히고 싶다. 문제는 어느 선까지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건가, 인데… 이런 분위기에서 1000년 전 얘기를 해봐야 ‘장난하슈?’ 소리 들으며 총칼 맞는 수가 있겠고……
“당신도 지금 말했듯, 난 골든 차일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야.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오히려 설명하기가 곤란한데……”
쳇…! 금동이의 비밀까지 아는 척한 건 너무 섣부른 짓이었나? 막상 적당히 꾸며대려니까 꽤나 막연하네.
“…그거죠? 내가 빠트렸다는 게 그거죠?”
응? 뜬금없이 또 뭐냐, 소령아?
“언니!”
미령이가 다시 막아섰지만, 이번에는 소령이도 얌전히 입을 다물 기세가 아니었다.
“당신과 금동이는 전부터 서로를 알아! 그게 언제 어떻게인지… 그걸 빠트렸다는 거지?”
저 녀석 소령이는 그 사이 자기 노트북의 데이터를 다시 보고는 외우고 있던 ‘내 신상 명세’를 확인해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뭔가 빠트렸다는 내 말이 그렇게 분했나…? 녀석도 참.
“뭐… 그런 거로 해두자.”
“OK! 금방 찾아줄 거야!”
금방 찾아준다 어쩐다 하는 건 컴퓨터로 정보를 찾아내는 일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인 것 같지만……
“그건 네가 찾는다고 찾아질 만한 게 아니……”
말하다 보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곳에 올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저 소미령 자매 등장의 임팩트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사실 그것도 좀 위태로운 설정이긴 한데… 으음~ 에라 모르겠다!
“실은 우·리·도 너희들 못지않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결·사·거든. 네가 네트워크 상에서 나의 숨겨진 정보를 찾아내지 못하는 건 그리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소령이는 물론이고 모든 이들이 예상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놀라고 동요하는 것 같았다.
“너희들 Gold Monkeys…라면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해. 그런 조직에 속한 몸이 자신의 정체를 함부로 밝힐 수 없다는 정도는 말야.”
내친김에 녀석들의 닉네임(?)까지 언급하자 동요는 더욱 커져서 가장 잘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남자 챈마저 극도로 긴장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그와 나 사이의 허공에 요정 몽이 예의 호릉~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 흐응~ 대교님 보호체제는 확실히 구축 중이기라도 하지만, 주인님이 인터넷 찌질이를 협박하느라 즉흥적으로 언급한 ‘특수 조직’… 그러니까, ‘인터넷 속의 특별한 세력’은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요. ]
< 발상과 진행은 어떻든, 결국 진짜 만들기로 한 거잖아. 그냥… 홍보나 광고 먼저 때리는 거라고 치자. >
[ 또 그렇게 얼렁뚱땅… 뉴스에서 본 유령 회사 설립으로 사기 친다는 게 이런 건가요? ]
< 어허~ 그냥 조금 앞선 광고라니까, 광고! >
< 어쨌든… 그럼 그 비밀결사 조직에서 전 뭔가요? 그냥 말단 미요정 요원? 아니면…… >
< …니 맘대로 하세요. 조직원이라고 해봐야 달랑 우리 세 명이니(혹은 2와 2/1?) 어차피 나도 보스와 말단 땅개를 겸임해야 하는 판국인데 뭐. >
[ 후후~ 그럼 전 ‘대교님 보호협회 산하 인터넷 감시 및 쫄따구 양성 특별 부서의 미소녀요정부장’ 할래요. ]
< 아, 글쎄 니 맘대로 하라니까? >
요정 몽 녀석, 갈수록 내 썰렁한 네이밍 센스만 배우는 것 같아 큰일이다. 근데… 내가 이렇게 요정 몽과 소리 없이 노닥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실내의 Gold Monkeys들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군. 역시 정보 조직이라서 그런가? ‘비밀스러움’에서 진 게 상당한 충격인 듯… 음, 표정으로 봐서는 어째 소령이 녀석만 기가 죽지 않은 상태인 듯 싶은 걸?
“그런 게 어딨어! 난 당신 알아! 반드시 찾아낼 거야!”
그렇게 소리 친 소령이는 갑자기 노트북 옆의 검은 가방을 뒤적이더니 디스켓이며 작은 CD 몇 장, 그리고 뭔가 잡다한 기계장치 같은 걸 꺼내기 시작했다.
[ 1차 확인된 바로는, 현 시대 상위 1%에 속하는 기술력이 집약된 해킹 소프트와 개조된 규격 외 네트워크 장비들입니다. 소령님으로 추정되는 소녀는 상당한 수준의 해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
호오~ 항상 전체 분위기에서 한 발 쳐지곤 했던 소령이가 현 시대에서는 가장 첨단을 달리는 건가?
녀석이 일단 발동이 걸린 모습을 보이자 미령이도 슬며시 인정하는 분위기고, 심각하기만 했던 챈의 표정도 어느 새 살짝 풀린 상태라는 건, 그만큼 녀석의 해킹 실력을 믿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 봤자 내 숨겨진 정보란 게 전부 몽몽 선생 속에만 있으니 소령이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소용없는 일인데… 그걸 모르고 저렇게 열 올리는 모습을 보니 조금 미안해지는군.
“어쨌든… 우린 우리대로 진행을 계속하자구.”
나는 모두의(소령이 제외) 시선을 내게 모은 후 말을 이었다.
“우리 조직에 관한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다른 건 특별히 숨길 마음도 없어. 그러니 뭐든 물어봐도 좋아.”
내 말에 다시 장발 남자 챈이 입을 열었다.
“…진선생의 조직은 아무래도 놀라운 정보망을 갖추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의 여동생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겁니까?”
“하은이에 대한 건… 우리 목적과 별 관계없는 얘기였으니까.”
“목적……?”
“사실 우리 조직은 단 한 가지의 목적 때문에 최근에 만들어진 거야. 오늘 금동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하은이는 물론이고 너희들 G.M에 대해서도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어.”
“…오늘 골든 차일드를 만난 이후에 조사한 정도로 저희 G.M을 알아냈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최근 급조된 조직이?”
“뭐, 급조된 건 맞는데, 우리에게도 저 애 못지않게 무지 귀엽고도 뛰어난 인재가 있거든.”
소령이를 가리키며 하는 내 칭찬에 우리 측 인재, 아니 기재인 요정 몽이 흐뭇한 표정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진선생은 골든 차일드에 대해서 그레이스 정보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정작 저희 G.M과 골든 차일드의 관계는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흐음~ 이 친구, 겉보기처럼 예리하게 요점을 잘 파악하는 걸? 덕분에 나도 얘기하기가 편해지는군.
“그래. 소령이도 말했듯, 난 금동이를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건 G.M과는 별개로…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친했었다는 얘기야. 금동이가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녀석이 나와 헤어져 있는 동안 G.M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는 알 수가 없지.”
“그렇다면… 오늘 진선생이 저희를 방문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길고 긴 터널(?)을 지나 이제야 핵심 포인트 질문이 나왔군. 오늘 나의 G.M 방문 목적이라면…
처음엔 ‘금동이 쟁탈전 종식’이었는데 곧 ‘천이단과 천우신 확인’으로 바뀌었고, 그러다가 소령, 미령 자매의 등장에 쇼크 먹고 잠시 혼란을 겪다가 지금은… 에……
“금동이가 G.M에 왜 그렇게 필요한지를 알고 싶어. 납득이 되는 이유라면… 금동이가 돌아오도록 도움이 돼줄 수도 있고.”
일단 당장 급한 건 결국 금동이 문제다. 곁다리로(?) 다른 얘기도 해주면 더 고맙겠지만 말이다.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저희가 굳이 진선생을 납득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응? 갑자기 삐딱하게 나오네? 지금 저 친구 입가에 피어오르는 저거, 비웃음… 맞지?
“이제야 상황이 조금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물론 진선생은 골든 차일드를 그레이스 정보보다 훨씬 많이 알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결국 진선생도 그녀처럼 골든 차일드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틀립니까?”
“이봐, 아주 틀린 말은 아닌지 몰라도 뭔가 좀……”
“골든 차일드는 본래 변덕쟁이, 잠시 집을 떠나 친구를 사귀는 일도 많았지요. 하지만… 이번처럼 친구들이 주인행세까지 하는 경우는 처음입니다만……”
윽! 이런 강력한 반격이 나올 줄이야.
“이봐, 난 주인행세를 하려는 게 아니라……”
“골든 차일드를 존중하는 마음과 도움이 돼주시겠다는 뜻은 모두를 대표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희들도 외부인의 지나친 간섭은 달갑지 않습니다.”
“그, 그건……”
제기, 간만에 이런 타입 만나니까 좀 당황스럽네.
물론… 100년 넘게 금동이와 지내 왔다는 G.M들이 하은이를 뻔뻔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는… 하은이와 달리 금동옹의 진짜 원조 친구이자 가족이었는데도 그걸 증명할 수 없는 처지라 같은 취급을 당하게 된 나는… 정말이지 억울해 버릴 수밖에 없다.
“DP의 공주님과 정체불명의 비밀결사… 충분히 껄끄러운 상대입니다만, 더 이상 자존심을 죽이고 부탁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레이스 정과 마찬가지로 진선생도 내일 정오까지를 저희들 인내심의 한계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는 정말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되찾겠다는 뜻?”
“마음대로 해석하십시오.”
“거참, 갑갑하네. 이런 결론 내려고 온 게 아닌데……”
사실 금동이 문제는 상대가 저 소령, 미령 남매이니 다소의 억울함은 참고 인정해 줄 수도 있다. 그건 그런데… 그간 얽힌 사연 한 번 듣기가 뭐 이리 빡센 건지 모르겠다.
그냥 얌전히
‘우린 과거의 천이단이 맞으며 골든 차일드는 현재 G.M 내에서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고, 당장 G.M 내에서는 물론이고 전 세계를 뒤져 환생자 명단을 뽑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속 시원히 나와 주면 어디 덧나나? 보너스로
‘타임씨의 음흉한 속셈은 바로 이것!’, ‘타임씨 음모 스페셜!’
그런 보고까지 해주면… 쯧! 정말 부질없는 바램과 망상이로군.
에효~ 직접 와서 부딪쳐 보면 뭔가 더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어째 혼란만 가중된 기분이…
음… 가만있자…? 부딪친다…? 그러고 보니 난 오늘 아직 제대로 부딪쳐 본 적이 없잖아? 잔머리 굴려가며 말씨름만 했을 뿐……
“역시, 한판 뜨는 게 더 낫겠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글도는 집에서부터 천으로 말아서 외장을 가리고 있었지만 천의 한 쪽 끝을 잡아당기니 간단히 천이 벗겨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발뒤꿈치로 정글도 끝을 툭 차올리자, 어깨를 중심으로 휘릭 회전한 정글도의 손잡이가 자동으로(?) 내 손아귀로 들어왔다.
“당신… 결국!”
그 사이 미령이는 내게 총구를 겨누며 소령이 쪽으로 물러났고, 챈의 뒤에 서 있던 두 남자가 스윽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챈은 조용히 손을 들어 수하들을 진정시켰다.
“이런 타입이 아닌 것으로 보았는데… 제 착각이었나요?”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바로 칼을 뽑는 건 확실히 내 스타일이 아니야. 하지만… 난 지금 나름대로 너희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친절을 베풀려는 거야.”
“이것이… 진선생식 호의의 표현?”
“이봐, 너무 비꼬지 마. 기왕에 무력까지 사용할 생각이면… 상대의 전투력을 미리 알아두는 것도 좋지 않겠어?”
실은 그거보다, 싸우면서 이 친구들 무술이 천이단 계열인가 보고 싶은 거지만……
“그리고 사실 저기 두 꼬마 아가씨들 때문에 참고 있었을 뿐, 당신도 날 곱게 보내고 싶지 않은 눈치였는데… 내 착각이었나?”
“훗~! 들켰군요. 최근엔 살기를 감추는 데 익숙해졌다고 자신했건만……”
“나가지. 여긴 우리 동네라 적당한 장소를 알고 있어.”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매우 신사적이고 예의 바르게 쌈박질을 결정한 우리는 사이좋게 방을 나가…려고 했다.
“으아아아~ 미치겠네!”
…깜딱 놀랬잖냐, 소령아. 왜 갑자기 소리는 지르고 난리냐, 분위기 깨지게스리……
“없어! 없다구! 당신 정말 이상해! 왜 어디에도 없는 거예요?”
소령이 녀석은 노트북에서 손과 시선을 떼더니 뒤로 벌렁 누워 버리더니 CIA니 모사드니 세계 각국의 막강한 첩보기관 이름을 연이어 대면서 그 뒤에
‘~에도 없어!’를 외치고 있었다.
무서운 기집애, 몽몽도 아닌 것이 그런 곳에 멋대로 접속해서 뒤지고 다녔단 말야?
“언니, 지금은……”
“이상해! 이상하다고! 난 저 사람 알아! 근데 생각이 안 나!”
응? 저 애가 날 안다고? 가만? 그러고 보니 아까도 얼핏 날 안다고 했었지? 그땐 무심코 흘려들었는데… 이거 혹시……
“정말이야, 언니?”
“응! 분명히 어디선가 봤어. 그런데… 그런데……”
소령이는 문득 뭔가 생각이 났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고, 다시 정신없이 어딘가로 접속하는 것 같았다.
얼마 동안을
‘없어!’, ‘여기도 없어!’
를 반복해서 외치던 녀석은 어느 순간
‘빙고~!’
라는 소리와 함께 활짝 웃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령이에게 다가갔고 소령이는 자랑스럽게 노트북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주었다.
화면 속의 험상궂은(?) 인물은 분명 이 몸 진유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