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50-3화 : 잠시의 평화(?).(3)
6-2. 잠시의 평화(?).(3)
한국을 떠난 지 삼일째 되는 날의 새벽. 지난밤의 왁자했던 분위기가 꿈이었기라도 한 것처럼 차분해진 숲 위로 서서히 아침 햇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하무림인들과 밤새 마신 술에 약간의(?)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햇살 아래 더욱 싱그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대교의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최소한의 피곤 같은 것들까지 씻은 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훗~! 나… 확실히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쓰여지긴 쓰여졌나 보다. 다른 때의 대교도 아니고… 의자에 앉은 채 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싱그러운’ 같은 표현밖에 떠올리지 못하니 말이다. …하긴, 지난밤처럼 자긴 재미도 없었을 상황에서도 애써 밤새 내 옆자리를 지켜준 소녀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거겠지마는… 으으음……!
나야 더더욱 당연히 이 귀엽게 졸고 있는 공주의 입술에 키스하여 잠을 깨우고 싶었지만…! 조금 먼 자리에 있으며 상당히 취해 있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깨어 있는 자룡대주가 있는 상황에서 그런 염장질을 했다가는 식전부터 칼부림 나지 싶어 참아야 했다. 난 대신…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던 물 잔에 손가락을 담갔다 뺀 다음에 대교의 얼굴에 살짝 물방울을 퉁겼다.
“웁! 우… 으음~”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뜬 대교는 여전히 졸음기가 담긴 눈망울을 깜박이며 눈앞의 나를 먼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 후 천천히… 내 뒤로 밤새 전사하여(?) 여기저기 술병을 안고 늘어져 있는 무수한 지하무림인들, 그들 너머로 먼동이 터 오는 모습, 내 옆의 땅바닥에 앉아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금동이 등등… 모든 주변의 정황을 돌아보는 것 같았던 대교의 눈동자는 마지막으로 다시 내게 돌아와서 멈추었다. 대교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아함- 짧은 하품을 한 후에야 잠이 깬다는 듯 배시시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끝났…군요. 괜찮으세요?”
“응. 난 괜찮아. 넌 어때? 아무래도… 좀 추웠지?”
내가 대교의 어깨에서 약간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올려 다독이며 묻자 대교는 자기 옆의 야외용 난로 겸 스탠드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괜찮아요. 다들 이렇게 챙겨 주셨는걸요.”
“그래도… 피곤은 하겠다. 어제 공연도 했었는데… 미안.”
“아뇨. 며칠씩 마라톤 공연을 하던 때에 비하면… 음, 대교는 보기보다 튼튼하답니다.”
대교는 두 팔을 들어 근육 자랑하는 헬스 선수 같은 포즈를 취하며 웃었다.
“으음~ 그런데 저보다 저 분들이 걱정이네요.”
대교가 이어서 말하며 돌아본 건 나와 몽몽, 금동이 연합군의 술 포격에 당해 땅바닥에 다운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확실히… 마군황인 나에게 감히 술로나마 개겨 봤다가 결국 또 처참하게(?) 패한 자들이 꽤 많기는 했고, 이 차가운 겨울 날 차가운 땅바닥에 엎어져 있으면 누구라도 탈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포기하고 결과적으로 비교적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훗~! 다들 튼튼하니까 괜찮을 거야. 뭐… 크흠! 큼! 사실 이 정도에 못 일어날 정도로 약해서야 어디 지하무림의 전사라고 할 수 있겠어?”
난 일부러 ‘이 정도에…’ 부분부터 목소리를 높여 말한 다음, 이어서 더욱 큰 소리로 모두에게 외쳤다.
“자아- 더 해 볼 사람들 있나? 응? 난 아직 생생하다구!”
마무리 기죽이기 겸, 잠든 자들은 기상시킬 생각이었기 때문에 목소리에 내력까지 조금 담았더니 다들 곧바로 눈을 뜨는 건 물론이고, 하나 둘 비척대며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져, 졌습니다. 저희들이.”
“우~ 역시 술로도 안 되는 구나.”
내게 직접 항복을 선언하는 자도 있었고, 혼자 탄식(?)하는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공통점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이었다.
<난 반칙 쓴 거야, 반칙.>
“예?”
나는 대교에게만 솔직히 고백하며 웃었다.
<몽몽의 해독 기능에 금동이의 흑기사… 거기에 나 자신이 주화장창(酒和長蒼)… 훗! 자세한 얘기는 일단 돌아가면서 하자.>
내 말에 대교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그녀를 데리고 공터 조금 아래쪽의 소형 헬기로 향하기 시작했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멀쩡히 수하들을 살피고 있는 구양대주에게 뒷정리를 부탁하는 사이 은사마군도 재빨리 따라붙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까지는 현장 지휘관이 분명한 또 한 명… 자룡대주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우리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밤새 다른 사람들처럼 나와 대작하지는 않았어도 혼자 꾸준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것 같았던 자룡대주가 지금 또 생각났다는 듯 스스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는 뒷모습은 아무래도 너무나 처연해 보였다. 그런 자룡대주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로서는 달리 뭐라 해 줄 수 있는 말도 없고… 난 결국 조용히 그녀를 뒤로하고 헬기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헬기가 출발하여 장가계의 공항으로 향하기 시작한 후에도 나와 대교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분위기도 바꿀 겸, 건너편 자리의 은사마군에게 물었다.
<…천음마군은 어찌 되었지?>
밤새 꾸준했던 자룡대주과는 달리, 짧은 시간에 장렬하게 전사한 사람은 천음마군이었다. 곧 죽어도 마실 땐 마셔야겠다고 설쳐대더니만 결국에는 술자리 중반쯤에서 술잔을 든 채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야 했던 것이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상태로 보아… 당분간은 술을 마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훗~! 아, 아니… ‘위험한 고비’라는 말도 그렇고, 이건 사실 웃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은사마군이 하도 진지하게 ‘당분간 술을 마시지 못할 것 같다’라는 걸 강조하니까 나도 모르게……
<크음, 음. 어쨌든 내 잘못… 도 있겠군. 그의 금주령을 바로 해제한 건 나였으니 말야.>
<…아닙니다.>
응…? 지금 은사마군의 입에서 아니라는 대답이 조금 늦게, 망설이듯 나오지 않았나……?
<무엇보다 그 남자는 이런 식으로 당해 봐야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겁니다.>
기분… 탓일까?
말은 천음마군을 비난하는 듯하지만, 어쩐지 천음마군의 금주령을 해제해 준 나까지 원망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걸…?
으음~ 나 자신이 먼저 ‘내 잘못’ 운운하긴 했지만 막상 이런 반응을 보니 좀 억울하기도 하군. 사실 천음마군은 애도 아닌데… 누가 뭘 해제해 주고 어쩌고를 떠나서, 잘못이야 당연히 스스로 그 지경까지 되도록 퍼마신 당사자한테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은사마군이야말로 천음마군에게 술을 적극적으로 권했던 장본인이면서 말이다. 그렇게 걱정이 될 것 같으면 애초에 자기부터… 자기부터…
어…? 그러고… 보니…
그동안은 대교와의 일 때문에 신경을 못 썼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는 잘 모르겠어도, 최소한 어제 천음마군이 중상을 입은 후부터는 두 사람이 티격태격했던 상황의 대부분이…
…그래. 조금 성급한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말로만 천음마군을 타박했을 뿐 실제로는 누구보다 그를 걱정하는 태도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생각해 보면 천음마군 역시 금주령이 해제되자마자 은사마군에게 먼저 다가가 약을 올리던 폼이, 시비를 건 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작업’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문제는… 어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인사하던 태도나 이후의 행동들을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이 전에 어떤 관계였든, 지금은 아니거나 여하간 은사마군은 그걸 남들 앞에서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으음~ 아무리 나라도 남녀 간의 미묘한 일을 캐묻는 건 할 짓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궁금한 걸 참으면 병이 된다는 옛 선조들의 격언에 따라야 할까?
“<…두 사람, 꽤 친한 모양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남자가 아무에게나 제멋대로 친한 척을 할 뿐입니다.>”
흐음… 일단 우회해서 떠봤더니, 딱부러지게 부인해버리는군.
“<뭐, 어쨌든… 내가 보기에 그는 겨우 이번 일 정도 때문에 다음부터 몸 상태에 따라 술을 삼가 할… 그런 위인은 아닌 것 같은데 말야.>”
나는 진심으로 쓴웃음을 지어 보인 다음, 이어 연기력을 가미해 안색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술 좋아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걸 은사마군도 알고 있겠지?>”
“<더 큰 문제라 하시면…>”
쯧, 지하무림 누구나 아는 걸 모른 체 하기는…
“<어제 싸움은 결과가 좋았고, 승전 축하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봐주긴 했지만… 그래도 전투과정에서 내 명령을 어겼던 건 사실이지. 그 전에도 소군황을 위해서 날 막아선 적도 있었고 말이야.>”
“<아- 그건…>”
“<왜? 그게 있을 법한 일이라는 건가?>”
“<그, 그렇지 않습니다. 천주의 명령을 어긴 것은 분명 중죄입니다.>”
대답은 저렇게 하지만, 이미 용서해주고 지나간 일들을 다시 트집 잡는 건 좀 아니니 않느냐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군.
“<난 역시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의 타고난 반골 기질을 생각하면… 더더욱 웬만한 징계 정도로는 부족할 것 같고 말야.>”
은사마군은 급격히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런 타입의 수하는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단단히 손봐줄 생각이었다’는 내 첫 번째 진심을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천음마군은 역시 어사조에서 제외~>”
오호~ 순간적으로 놀라는 저 표정 봐라.
“<-하기는 좀 아깝고…>”
나는 혼자 생각해 보는 척하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그래도 역시 반항아는 어사조에 어울리지 않으니… 그래, 무공을 폐하고 산하 조직까지 빼앗은 다음 외딴 섬 같은 곳에 혼자 가두어 고생 좀 시켜서 정신을 차리게 하면… 음… 그럴 경우 기간은… 1년…? 2년…?>”
나는 말을 끈 끝에 ‘기간을 결정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냐. 그래도 그 인간은 정신 차리지 못할 것 같아.>”
훗~! 은사마군, 지금 계속 ‘당황했다, 안도했다’를 반복하고 있다. 흐흐… 흐…? …아, 아니지. 내가 왜 이러냐…? 난 원판도 아니고, 원판 대신 비화곡주 노릇하던 시절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수하를 괴롭히는 데 재미를 느끼면 안 되겠지? 그래, 진유준. 이런 컨셉은 마군황 스타일이 아니라구!
나는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겠다 싶어서, 다시 “<으음… 그렇다면…>” 하며 더 생각해 보는 척하다가 불쑥 은사마군에게 의아해하는 시선을 던졌다. 은사마군은 자신이 나의 말장난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여러 가지 표정’을 감추기에 바쁜 것 같았다.
“<뭐야? 왜 그래?>”
“<에, 예? 제, 제가 무슨…>”
“<은사마군 표정이 좀 이상한 거 같아서 묻는 거야.>”
“<아… 전 단지 천주의 의중이 정리되시는 걸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별 다른 생각은…>”
“<그래? 난 또 은사마군이 내 혼잣말 들으면서 놀랐다가 금방 안도했다가, 이런 걸 반복하는 줄 알았네.>”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은사마군은 비로소 자신이 ‘당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솔직히,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은사마군과 천음마군… 둘이 사귀어?>”
“<아, 아닙니다.>”
“<에이- 조금 전까지의 반응만 봐도 뻔한데 뭘 그래. 그리고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 사내 연애를 금지하는 기업주가 아니라구.>”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으로 시치미를 떼는 것 같지는 않은 걸? 그럼… 서로에게 내심 관심이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아직 사이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은사마군이 지하무림의 내부 사정 때문에 지하무림을 떠나 잠적했던 일도 그렇고, 타고난 성격은 어떤지 몰라도 살수로서 조용하고 은밀한 생활에 익숙한 은사마군에게는 천음마군의 눈에 띄기 좋아하는 성향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래도 천음마군의 ‘작업’이 어느 정도 먹혀서 이제는 은사마군도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하긴 한 것 같은데…
흐으음~ 이 몸, 진유준. 한때 친구들 사이에서 사랑의 전도사, 커플 연금술사, 중매술사, ‘진중매’로 불리던 자가 아닌가! 맨날 남들 연결만 시켜주고 나만 솔로인 게 열 받아서 때려치기로 했던 직업(?)이지만… 뭐, 지금은 나도 뽀사시한 커플 부대이니 만큼, 아니 그래서 더욱(!) 이건 추진해야 할 사안이다.
< 그, 뭐… 그건 사실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닌 것 같고…… >
관여하기로 결심하면서 이런 소리하는 나도 참.
< 흠, 본래 하던 얘기나 마저 하지. 어찌되었든, 그는 역시 특별 관리를 좀 해야겠어. >
< 특별 관리라 하시면……? >
다시 진지한 톤으로 말을 꺼냈지만, 은사마군은 간단히 속지 않겠다는 듯 새침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군. 어쨌거나… 사실 이런 명령은 당사자 두 명 다 앞에 놓고 해야 제 맛이라 조금 아쉽군 그래.
< 간단히 말해서… 은사마군, 네가 관리하란 얘기야. >
< …예? >
< 좀더 풀이해서 얘기하자면, 징계 차원에서 천음마군에게 앞으로 얼마간 행동을 통제하는 금제(禁制)를 가하겠다는 거고, 그 금제의 실행자로서 은사마군을 임명하겠다는 거지. >
< 제, 제가 그… 항상 자기 멋 대로인 남자를 어떻게……. >
< 그게 가능하려면… 지하무림 내에서 유일하게 두 사람만 서열을 상하로 나누어야겠지? 물론 예외적 조치이므로, 한시적인 서열이 되겠지만… 뭐, 우선 반 년! 반 년 동안 은사마군을 ‘천음마군 금제 감시 및 통제관’으로 임명하겠어. >
은사마군은 내 뜻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얼마간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점차 정리가 되어 가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제가 그의 유일한 상관이라는 건…… >
< 천음마군은 앞으로 술 한 잔 마시거나 싸움하는 것조차 은사마군 허락 없이는 못한다는 얘기지, 뭐. >
내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이자, 비로소 은사마군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 저어… 그럼 명령하달은… 천음마군에게는 조금 나중에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전달하게 되면… 그 남자, 어쩌면 당장 속이 터져서 다시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
< 훗~! 그건 마음대로 해. 어쨌건 잘 좀 관리해서 착한(?) 남자 하나 만들어 봐. >
< 복명! >
갈수록 기운차게 대답하는 은사마군의 모습 위로, 어제 밤 금주를 명령받았을 때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천음마군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었다.
물론… 천음마군에게는 천년 전에 이어 너무 잔인한(?) 금제를 내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약간 미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천음마군이 지난밤처럼 과음으로 부상이 악화되거나 강적에게 겁도 없이 덤벼들어 죽기라도 할까봐… 그러니까 천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순전히 그를 위한 금제인 것이다. 게다가 내가 본래 다른 커플들 잘되는 꼴을 보는 걸 좋아하는 천사표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조금 있기는 하다.
어… 물론, 어떤 식으로든 그 제 멋대로 남자의 기를 죽여 놓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없는 건 아니지만… 으음… 그리고 또… 솔직히… 또 다른 약간의 불순한 의미도 있지만… 그건 천음마군의 안전을 걱정하는 대의에 비하면…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진짜다. 암! 그러니까… 만약의 경우 은사마군까지 나에게 딴 맘 먹으면 내 입장이 더욱 곤란해지니 이제부터라도 딴 방향으로 유도해 두자…라는 발상은 너무 왕자병스런 오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룡대주처럼 은사마군 역시 지 사부에게 나에 대해 무지 과장된 환상을 세뇌받은 것 같으니 대비를 해둬서 나쁠 건 없을 터이다. 은사마군 같은 경우는 그래도 다행히 ‘진유준 멋쟁이’라는 터무니없는 허위 과장 광고에 세뇌된 정도가 자룡대주보다는 덜한 것 같고, 거기다 천음마군이라는 듬직한 애인 지망생까지 있어 주니……
< 이 것으로 은사마군 만이라도 안심…! 아아~ 부디 더 이상은 나에게 빠지는 미녀들이 없었으면 좋겠어. 이 놈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라서 큰일이야. >
[ …예? 지금 방금 저희에게 말씀하신 거예요? ]
< 훗~! 그래, 요몽. 솔직히 말해서 나도 살다가 다른 이들에게 그런 대사 한 번 해 보고 싶었거든. >
[ 흐응~ 어쨌든, 방금 은사마군에게 뭔가 수작을… 아, 아니, 뭔가 계책을 써서 주인님을 좋아하지 않도록 하셨나 보군요. ]
< 뭐,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일타 삼피를 노리는 명령을 내려 두기는 했다. 쓰리고까지 먹게 될지, 독박이 될지는 차후 문제고… 어쨌든, 몽몽! >
내가 잠시 후 대교에게 멋진 반지(?)를 선물 한 건, 나중은 몰라도 현재는 엄연히 솔로부대인 은사마군 앞에서 염장질을 하기 위함…은 당근 아니고!
< 대교. 이건 몽몽의 하위체야. 네가 어디에 있던 바로 알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여기 이렇게… 이 부분을 누르면 네가 먼저 나를 호출 할 수도 있어. 그리고…… >
반지를 가장한 몽몽의 하위체에 대해서 설명해 줬지만, 이미 몽몽 남매를 본 후라 그런지 기능에 대해서는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반지를 낀 대교의 작은 음성이 헬기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 아아- 정말 예뻐요. 고마워요. ]
반지를 가장한 탐지기 겸 무전기라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몽몽의 디자인 감각이 기특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순수한 선물을 준비해 오지 못한 게 미안해지기도 했다.
< …다음엔 내 손으로 마련한 선물을 줄 수 있을 거야. >
[ 후후- 그런 말은 고맙지만, 이 반지에도 충분히 당신이 저를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
< 그야 당연하지만, 그래도… 음… 생각해 보면, 난 지금까지 네게 내 손으로 직접 마련한 선물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그래. 대부분 비화곡주 시절에 내 것이 아닌 권력으로 차지한 물건이나 무공이었을 뿐이니 말이야. >
[ …그렇게 말하자면, 제 쪽에서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당신께 그런 선물조차 드려 본 적이 없는 거 아닌가요? ]
< 그랬…던가? >
[ …지금의 전, 아니 이번엔 저도 뭔가 답례를 하고 싶어요. ]
< 뭐, 정히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장 이 번 선물의 대가를 요구해도 될까? >
[ 예? 당장…요? ]
< 그래. 나, 사실은… 굉장히 지쳐 있거든. >
나는 그녀의 무릎을 가리킨 다음, 자는 시늉을 해보였다. 공연 후 밤까지 새서 피곤한 대교에게 염치없는 요구를 한 셈이었지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내가 그녀의 부드러운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는 것을 승낙했다.
‘…널 두고 온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편안히 쉬거나 잠들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나는 그런 말을 생략했던 거지만, 대교는 듣지 않아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대답(?)했다.
[ 사실… 당신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너무나 힘들어 보여서 안타까웠어요. 이렇게라도… 잠시…… ]
대교의 목소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끝까지 듣고 싶었지만… 지금은 빠르게 멀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얼마 만인지 모를 마음 속 깊은 곳까지의 안식 속에서 잠이 들기 시작한 나의 팔에 문득, 무언가 작고 따듯한 감촉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아도 그게 금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대교의 무릎을 베고 내 팔은 금동이가 베고… 우리는 그렇게 천년 전에 꾸었던 꿈을 평화롭게 이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