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52-1화 : 묘랑(苗琅) 진하연의 각성.(1)
6-4. 묘랑(苗琅) 진하연의 각성.(1)
나는 성원이와 준엽이에게도 일단 대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아는 정도의 수준만, 즉 몽몽과 시간 여행에 관련된 사항 등등은 빼고 얘기해 주었다. 원판을 구속하고 있는 조직이라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만약의 경우에는 중요한 비밀을 모르고 있는 게 친구들의 안전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래도 어지간히 이런저런 사연을 다 밝히다 보니, 얘기가 끝난 건 한 시간 남짓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 후였다. 나는 얘기가 진행되는 사이에 창가의 탁자 위로 자리를 옮겨서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침대에 앉아 있는 녀석들을 내려다보며 마무리 멘트를 했다.
< …그래서 난 어제 비로소 마군황이란 지위를 완전히 되찾고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뭐어~ 대충 그렇게 된 건데… 더 궁금한 점 있으면 물어봐. >
“궁금…한 점?”
“궁금…한 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녀석들은 거의 똑같이 반문했다. 그러더니 두 녀석은 저희들끼리 마주 보며 눈만 꿈벅꿈벅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난 별로… 성원이 넌, 뭐 있냐?”
“어… 나도 뭐… 지금은 별로……”
두 녀석은 마치 무슨 개그 콤비처럼 거의 동시에 천장을 올려다보며 뒷머리를 극적이며 뭔가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또 거의 동시에 천천히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뿐, 녀석들은 계속 멍하니 날 바라보면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 뭐야! 애써 한 시간 동안이나 이 진유준 선생의 장편 무협심령SF다큐멘터리인생역정을 들려주었건만, 그 맥빠진 반응은 뭐야? >
내가 한 소리 하자, 그제야 녀석들은 또 동시에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번갈아 가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맥…안 빠지게 됐냐, 우리가, 지금?”
“임마. 얘기가 뭐, 어지간해야지, 이거.”
< 그야 뭐…… >
“아까 유준이 네가 칼을 날린… 그 이기 뭐라는 수법만 봐도 네가 웬일인지 무공의 고수가 되었다는 건 알겠어.”
“그래.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무협지 식으로 네가 어디서 산에서 기연을 얻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차라리 믿기 쉬웠을 거야. 하지만……”
“전생에서 익힌 무공에 대한 기억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서 그렇게 된 거라는 건 좀 그렇다.”
“또, 홍콩 가수 주가혜와 네가… 그래, 사람이 살다 보면 운 좋게 그런 행운을 얻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주가혜도 전생에서부터 애인이었다는 얘기는 좀 너무하지 않냐?”
으음… 이 녀석들은 아무래도 그 사이 콤비 신공을 더욱 갈고 닦았나보다.
“게다가 세계적인 기업 DP의 후계자가 평범한… 아니, 유준이 넌 이미 평범하지 않은 것 같지만, 하여간 어떻게 너를 알게 되어 적이 될 수도 있는 일이겠지. 하지만……”
“그래. 그 인간도 알고 보니 전생에서부터 너와……”
< 야, 야! 그만! >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계속 이어지려는 녀석들의 콤비 신공을 멈추게 했다.
< 그러니까, 결국 너희들은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냐? >
“…아니, 뭐… 네 말을… 못 믿는다기보다……”
준엽이가 조금 쭈빗대자, 다시 성원이가 바톤 터치를 했다.
“에효~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 진유준. 너라면… 어느 날 갑자기 평범했던 우리가 사실은 천년 전의 음악가였는데 현대의 인물들로 환생한 거고, 어느 날 문득 기억을 되찾아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같은 인물들로 변신했다고 치자. 그리고 며칠 만에 유준이 너 몰래 유럽 록음악계를 통일하는데 성공했다…라는 얘기를 듣게 되면 기분이 어떨 거 같으냐?”
“게다가 우리가 그런 사연을 지금 너에게 입이 아니라 기타로 목소리를 만들어서 고백하고 있는 거라면……?”
으음. 역시 녀석들다운 비유로군.
< …니들이 뭔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대충 알겠다. 하긴…! 나 자신도…… >
나는 나도 모르게 새삼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난 다음에야 말을 이었다.
< 내가 겪은 모든 일들… 그리고 지금도 진행되는 일들이… 길고 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해. 후후- 생각할수록 졸라 웃긴 일이기도 하지. 나, 진유준이… 너희들과 교실 뒤에서 빗자루로 칼싸움이나 하던 내가 어쩌다가… 거 참! >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성원이 녀석이 손을 들어 날 가리키며 준엽이에게 말했다.
“씨바- 진짠가 봐! 유준이 저 자식, 우리가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핫-! 이거 진짜 돌아버리겠네!”
“그래… 저런 식으로 농담하는 놈이 아니지. 어… 그렇지만… 젠장!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두 녀석은… 아무래도 이제야 내 얘기들을 모두 ‘사실’로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약간의 패닉 상태…라고 할까? ‘진짠 가봐, 씨바! 그럼 우린 어쩌지?’로 압축될 수 있는 심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야- 근데, 그러면……”
문득 다시 내게 입을 연 건 준엽이었다.
“그 화이트 크락인지 원판인지 뭔지가… 그게 천년 전 최고의 마왕 같은 놈이었다면… 그럼 너 이제 조된 거네?”
< 훗~! 대충 그렇지 뭐. >
“쳇! 뭐가 문제냐? 우리 진유준이도 원래 사악한 거라면 한 사악하잖아!”
“음, 음. 그건 그래!”
< 니들… 그거, 칭찬이냐? >
“칭찬이나 마나, 우리가 뭐……”
“틀린 말했냐?”
< …아니. 졸라 땡쓰다. >
“젠장! 어쨌든 이제 모두 알았으니까, 그 전음인지 뭔지 좀 그만해라. 머리 속이 울리는 게 멀미 날 거 같다.”
“…그래, 알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의 얘기를 모두 전음으로 한 건 내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뿐이 아니었어. 어쩌면 이미 숨길 필요도 없는지 모르지만… 적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알게 될 때까지는 가급적 모든 부분에서 조심하고 싶었거든.”
“…도청?”
“그래. 사실 난 항상 도청 장치 같은 걸 찾아내는 탐지기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이 병실은 안전할 것도 같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 너희들은 DP를 어떤 기업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놈들은… 작게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밀 도청기계에서부터 크게는 항공모함이나 인공위성까지… 아니, 웬만한 국가 규모의 군대도 동원할 수 있는… 말 그대로 하나의 국가, 그것도 강대국 수준의 국가라고 봐도 무방할 거야.”
성원이는 물론이고 준엽이의 표정에서도 조금 남아있던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만약을 위해서… 난 너희들에게 전음으로 들려준 얘기에도 진짜 중요한 사항은 뺐어. 적이 그걸 알아내기 위해 너희들을 노릴 수도 있으니까 말야. 그러니 섭섭하더라도 지금은 참아 줘.”
당연히… 내가 지금 하는 소리들은 원판이 아니라 그 위의 조직들에게 보내고 있는 메시지였다. 만약 정말 듣고 있다면 말이다.
“…젠장! 갑자기 졸라 무서워지려고 하네.”
“글세 말이다, 성원아. 에이- 갑자기 거물급 친구가 생기는 바람에 우리까지 후달리는 신세가 되네 그려.”
“…여러모로 미안하다. 앞으로 가급적 너희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께.”
“가급적…이냐?”
“…그래. 준엽이 너도 알잖아, 내 성격.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절대로’라는 말 쓰지 않는 거.”
“잘났다.”
“…미안하다. 제군들. 그냥 이해해라. 나 원래 뻔뻔하잖아.”
“쌔애끼! 하여간!”
성원이는 별안간 뒤로 몸을 기울이더니 침대에 벌렁 누워 버렸다. 그대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딴 생각에 빠져버리는 것 같은 성원이나, 공연히 자신의 붕대 감은 팔을 매만지며 쓴웃음을 짓고 있는 준엽이의 기분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후 준엽이가 어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녀석의 말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유준아.”
“아무 말 하지마, 준엽아.”
“저기, 그래도……”
“됐어. 이건 내 싸움이야. 흔한 말이지만, 너희들의 마음만 받아 줄 수 있……”
“아니! 그게 아니라!”
“응?”
“주가혜… 사인 좀 받아다 줘.”
…이런 제기!
“그, 그래! 네 애인이라고 해서 말하기 뭣했는데, 내 거도 좀 받아 줘. 우린 사실 주가혜 왕팬이야!”
으… 성원이 저 놈까지!
“맞아! 웬간한 놈이 주가혜 애인을 자처했으면 죽여버렸겠지만, 너니까 우리가 참아 줄게!”
“그래, 그래! 그러니까 싸인… 아, 게다가 나중에 같이 만나면 되는 구나! 흐흐~”
“후후후~! 팬클럽의 다른 회원들이 알면 부러워서 뒈지려고 하겠지?”
으으… 네 놈들이 막판에 뒤통수를 치는 거냐?
“야! 니들!”
“걱정하지마, 유준아.”
“뭐?”
“나 강성원.”
“나, 이준엽…! 우린 우리 주제를 안다. 우리 따위가 끼어들 수 없는 수준의 싸움이란 거… 말야.”
“야, 너희들……”
“됐어, 새꺄! 출세했다고 앞으로 생까지만 마라.”
“그래, 만약 그 딴 식으로 나오면 대한민국 모범서민 진유준이 아니지.”
“하하하- 어쨌든 기분 더럽게 묘하다. 뭣보다 우리 이제 주가혜를 제수씨라고 부르게 됐잖아?”
“흐하핫- 정말 그러네?”
빌어먹을… 놈들.
녀석들은 짐짓 지들끼리 다음 번 팬클럽 정모에 대해 떠들며 낄낄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게는 녀석들의 그런 과장된 웃음과 몸짓에서 왠지 서글픔이랄까, 자괴감이랄까… 그런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 …좋은 친구 분들이군요. ]
< 그래, 몽몽. 난… 아무래도 친구 복이 많은 놈인가봐. >
천우신도 그렇고… 저 녀석들도 그렇고… 원판…은 빼고!
[ …그런데, 주인님. 조금 전 문밖으로 하은님이 오셨었습니다. ]
< 어, 그래? >
[ 예. 은사마군의 저지를 받고 곧 돌아가셨습니다. ]
응…? 오빠인 나의 수하가 막아선다고 얌전히 돌아가? 녀석이 그런 녀석답지 않은 행동을?
< 은사마군! >
< 예, 천주! >
< 내 동생 하은이가 왔다갔지? >
< 아, 예. 그렇습니다. 천주께서 나오시면…… >
…병원 부근의 공원…? 할 말이 있으니 그런 곳으로 와달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고? 음… 그 녀석은 대체 무슨 일이지?
[ 그리고 주인님. 조금 전, 저는 하은님의 접근 자체를 모르고 있다가 은사마군과의 육성 대화 때문에 알게 되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
< 뭐? >
[ 이는 기본적으로 하은님이 현재 저의 스캔 회피 기능을 가진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뭐…야, 이거. 지금 하은이가 어떻게 그런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