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52-2화 : 묘랑(苗琅) 진하연의 각성.(2)
6-4. 묘랑(苗琅) 진하연의 각성.(2)
[ 아시다시피, 하은님의 여행 가방 소재나 그 안의 소소한 장비들은 이미 분석을 끝냈습니다. ]
< …그래 알아. 그러니까 하은이가 새로운 장비를 입수했다는 건, 그 녀석이 요 며칠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DP와 접촉을 했었다는 뜻이겠지. 게다가 날 만나러 오면서 그걸 썼다는 건… >
하은이가 만난 DP 요원이 하은이에게 무슨 얘기를 어디까지 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하은이가 몽몽의 정체까지 알게 되었을 거라고 판단하는 건 이르다. 홍콩에서 싸웠었던, 원판에게 버려진(?) 특수부대 CR(Confidential Raiders)들도 몽몽의 정체를 ‘탐지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말이다. 몽몽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DP내에서도 원판과 란, 두 사람 정도라고 했고… 으음… 하지만 어쨌든 하은이가 그런 장비를 썼다는 건 날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원판과 나의 공조 역시 아직은 원판과 란 밖에 아는 자가 없을 테니 최악의 경우로 하은이가 원판을 위해 날 공격해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고 말이다.
…쳇. 만약 그럴 경우 원판이 겪고 있는 진짜 상황과 나의 입장을 설명해 줘야 할까? 그러나 그럴 경우, 비밀을 알게 된 하은이까지 원판과 같은 운명에 처할 위험이 있지 않을까…? 제기… 모르겠다. 일단 직접 만나보는 게 우선이겠다.
“…얘들아. 나 또 잠시 나갔다 와야겠다.”
며칠만에 친구들에게 돌아왔건만, 나는 채 2시간도 못되어 또다시 친구들을 뒤로하고 가야하게 된 셈이었다. 뭐, 물론 겉으로는 아주 잠깐 동생과 몇 마디 나누러 나가는 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하은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공원’의 입구에 서게 된 것은 병실을 나선 후 15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나와 대동한 은사마군의 걸음이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빠른 편이라고는 해도 그리 먼 거리가 아닌 셈이었다. 그거야 어쨌든… 보자, 보자~ 공원의 구조는 작은 언덕 식으로… 복잡한 계단과 소로(小路)로 구성되어 규모에 비해 사각지대가 많겠군. 북쪽으로는 병원 건물, 동북쪽에 소규모의 아파트 단지하나에… 그 외의 방위에는 4,5층 정도의 고만고만한 상가 건물들…
나는 몽몽의 기능과 나 자신의 감각을 끌어 올려 공원 자체와 주변의 지형 지물까지 대략 파악한 후에야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어딜 가든 누굴 만나는 것이든 주변을 먼저 파악해 두는 건 이제 완전히 습관이 되어 버린 행동일 뿐이었다. 딱히 오늘 하은이의 낌새가 이상하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물론 한 때는 하은이와 전생의 진하연이 겹쳐져서 녀석을 꺼리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역시, 아무리 어쩌니 해도 녀석은 우리 집안의 혈육이며 내 여동생이다. 난 결코 하은이를 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뭘…까? 난 왜 공원 안으로 들어 갈 수록… 아니, 이 공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렇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걸까…?
< 은사마군. >
나는 결국 조금 뒤에서 따라 오는 은사마군을 불렀다.
< 예, 천주. >
< …내가 하은이를 만날 때, 은사마군은 조금 떨어져 있다가 적당히… 상황 봐서, 알아서… 암약해. 임무는 주변의 위험 요소 탐색. >
은사마군은 내가 동생을 만나러 가면서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게 의외였는지 다소 놀라는 것 같았지만, 당연히 군말 없이 명령을 접수했다. 난 계단을 밟아 올라 공원의 중턱쯤에 도착했을 때, 이번엔 몽몽도 불렀다.
< 몽몽. 이쯤이면 공원 전체 스캔이 가능하지 않나? >
[ 그렇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특별한 사항이 없습니다. ]
몽몽은 곧 현재의 내 위치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된 분포도를 보여주었다. 조금 전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던 츄리닝 차림에 약수통을 든 영감님 한 명도 그렇고… 무엇하나 딱히 이상한 구석이 없는, 주택가에 위치한 평화로운 공원의 평범한 정경이었다. 하지만…
< 몽몽. ‘진돗개 하나’ 발령. >
[ …알겠습니다. ]
여기서 ‘진돗개 하나’라는 건, 물론 우리 나라 군대의 경계태세에 사용되는 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우리에게 대입하자면, 몽몽의 기본적인 기능을 제한해서라도 주변 경계에 집중하라는… 최고의 경계태세를 의미한다.
다름 아닌 하은이를 만나는 자리에서 내가 너무 지나친 거 아닌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난 끝내 몽몽과 은사마군에게 내린 명령을 철회하지 않았다. 비록 아주 미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로부터 분명히 느껴지는 이 위기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예상했던 대로 다소 복잡한 구조의 소로를 조금 돌아서 ‘체력 단련장’이란 표지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왔어, 오빠?”
오는 도중에 핸드폰으로 통화해서 이 위치를 가르쳐 주었던 하은이가 몇 가지 운동기구 중 철봉 위에 앉아 있다가 건네는 인사였다.
“…뭐하냐, 그런 곳에서?”
“후후- 그냥 여기가 가장 전망이 좋아서.”
본래 뭘 해도 그림이 나오는 녀석이기는 했지만, 다 큰 처녀애가 철봉 위에 앉아 바람에 긴 머리채를 날리고 있는 모습은 더욱 묘한 매력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인지… 평소라면 한가할 법한 다른 운동기구마다 사내들이 자리를 차지한 채 운동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만 내려와라.”
“음… 잠시만.”
하은이의 상체가 휘익 뒤로 넘어가는가 싶더니, 녀석은 익숙하게 철봉을 한 바퀴 돌고는 체조선수가 무색할 정도의 우아한 포즈로 가볍게 땅바닥에 내려섰다. 주변 사내들의 탄성과 박수를 받으며 내게 다가온 하은이는 대뜸 팔짱을 끼어오며 물었다.
“어때? 괜찮았어? 점수는?”
“…80점.”
“피이- 짜다 짜. 20점은 왜 뺀 거야?”
“다 큰 처자의 품행이 방정치 못했으므로 마이너스 10점.”
“우~ 너무했다. 오빠 대체 몇 세기 사람이야?”
나는 하은이의 항의를 무시하고 천천히 걸음을 떼며 마저 평점했다.
“또, 할 얘기가 뭔지 몰라도 이 오래비를 굳이 이런 곳까지 불러 낸 건방짐 때문에 마이너스 10점.”
“치이- 그게 뭐야? 전부 딴 얘기잖아! 게다가 이 사랑스런 여동생이 불러 줬으면 영광스럽게나 생각할 것이지 말야!”
“영광은 무슨… 암튼, 할 얘기란 게 뭐냐?”
“훗-! 사실은 그 딴 거 없어.”
“뭐?”
“동생이 오빠를 만나는데 일일이 이유가 필요해?”
그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만… 어쩐다…?
내가 계속 느끼고 있는 이 희미한 위기감은… 역시 하은이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아예 이 공원 안이 아닌 다른 곳… 좀 더 먼 어딘가로부터 노려지는 느낌이랄까…?
일반적인 패턴을 생각하자면 부근 건물에 저격병들이 배치된 형태일 것 같기는 한데……
“후후- 난 그냥 여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오빠와 데이트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어.”
하은이는 그렇게 말하며 다짜고짜 내 팔을 끌어당겼다.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생글대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녀석의 말과 엇갈린 질문을 녀석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다.
하은아. 정하은…! 지금 넌 무슨 생각과 무슨 의도로 이렇게 평화로운 공원길을 나와 걷고 싶어하는 거니…?
지금 날 겨냥하고 있는 총구(아마도)는… 네 뜻인 거냐?
아니면 넌 단지 유인의 역할을 맡고만 있는 거냐?
혹은… 넌 아무 것도 모르고 진심으로 웃고 있는데 나 혼자 이렇게 널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는 걸까…? 그런 거냐?
그렇게… 난감하고 착잡한 기분인 나와 달리 하은이의 재잘대는 음성은 너무나 밝았다.
요 며칠 동안 날 기다리며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얘기했고, 소령이 미령이와 더 친해져 버린 얘기, 금동이 얘기,
미국에 있었을 때 자길 쫓아다니는 남자들을 떼어내는 요령, 나의 이모이자 자기 어머니와 지냈던 시절의 일들…
모두가 내가 듣고 싶었던… 정하은이란 소녀의 진솔한 얘기들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그렇…구나, 라고 깨달았다.
“아아- 엄마는… 언제나… 이 땅에 돌아오시고 싶어 했는데……”
문득 그런 얘기가 나왔을 때, 하은이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때보다도 서글픈 표정이 되어 걸음을 멈추었다.
녀석은 비로소 팔짱을 풀고는 내 앞으로 돌아와 마주섰다.
“…유준 오빠.”
“…왜.”
“나… 이젠 여기서 살고 싶어. 엄마와 그토록 그리워했던 이 땅, 이 하늘… 같은 사람들… 그리고 유준 오빠가 있는 곳에서.”
“…하은이가 원하는 게 정말 그런 거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하지만… 화이트 가문은 날 놔주지 않을 거야. 게다가 난… 난 화이트 오빠를 사랑해. 유준 오빠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상관없어. 내 동생 정하은이가 진심으로 원하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내가… 이 정하은의 오빠가 반드시 이루게 해 주지.”
내가 조용하나 힘있게 약속하자마자 녀석의 두 눈에 거짓말처럼 빠르게 투명한 물방울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고마워, 오빠. 정말… 정말 고마워.”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고 고맙다는 되뇌며… 목거리를 풀어 들었다.
목거리에 매달려 햇빛에 반짝이는 저 금속성 페넌트는……
“얼마 전, 오빠가 없을 때 DP의 사람들이 찾아왔어. 오빠들이… 화이트 오빠와 유준 오빠가 생명을 건… 어떤 게임을 시작했다고 했어.
두 사람 중 어느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그리고 누구도 멈출 수 없는 게임을 말이야. 그리고 이걸 주고 갔지.
이게 유준 오빠로부터 날 지켜 줄 거라며…! 하지만 역시 필요 없을 것 같아. 이건 유준 오빠에게 맡기겠어.”
녀석은 목거리의 페넌트, 아마도 몽몽의 스캔회피 장치일 물건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녀석이 내게 이걸 건네주는 의미 때문에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기 시작하는 불길을 억지로, 간신히 참아내야 했다.
“자아- 받아 줘. 그리고 난 이제 곧바로 화이트 오빠에게 갈 거야.
그 무서운 게임이 대체 어떤 것이고 왜 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리…겠다는 거군.”
나는 녀석에게 페넌트를 받아들 생각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놈도 나도… 정하은이가 말려서 게임을, 아니 싸움을 말리겠다는 거지?”
“그래. 안 될까…? 나 따위로는… 안 될…까?”
“…아니, 가능할 거야. 아마도… 정하은이라면… 하은이라면 나도 화이트 크라우드도 말릴 수 있을 거야.”
“훗-! 지금은 그 ‘아마도’라는 말도 기뻐. 그래… 희망이 있는 한, 나 어떻게든 할거야.
내게는 두 사람 모두… 두 오빠 모두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말이야.”
녀석은 과거의 진하연에게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마치 그림동화 속의 천사와도 표정으로 웃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조용히 말해 주었다.
“…착각하지마.”
“…뭐?”
나는 반문하는 녀석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착각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가능하다고 한 건 내 동생 정하은. DP의 프린세스, 그레이스 화이트 크라우드…!
네가… 아니라!”
목거리를 든 녀석의 손이 가늘게 떨며 그 아래의 페넌트가 어지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소리야? 그게 바로 나잖아. 그런 농담하지 마.”
“…진부하지만, 지금부터 딱 10초 주겠다.”
난 계속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조금씩 풀어놓기 시작하며 말했다.
“10초가 지나기 전에 진짜 하은이가 어딨는지 말해. 아니면… 죽는다. 여자라도… 어차피 영혼도 없는 ‘복제’일 테니 말이야.”
“오, 오빠. 갑자기 대체 무슨 말을… 오빠 미쳤어?”
“7초 남았음.”
“자, 장난이지? 그치?”
“…5초!”
“왜, 왜 이래? 화이트 오빠와의 게임이란 게 그렇게 중요해?”
“…2초!”
나의 카운트가 흔들림 없이 진행되자, 녀석은 주춤거리고 뒤로 물러서며 빼액 고함을 질렀다.
“오빠! 제발 정신차려!”
“1초!”
“아아-“
카운트가 끝남과 함께 나는 주저 없이 걸음을 옮기며 정글도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