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53-1화 : Dr. J의 딸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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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53-1화 : Dr. J의 딸들.(1)


6-5. Dr. J의 딸들.(1)

나는 단숨에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심야의 총알 택시처럼 공원 출입구까지 통과했지만 급한 마음에 지나친 힘으로 달려간 탄성때문에 몸을 낮추며 한 쪽 발을 뻗어 끼익- 브레이크를(?) 잡아야 했다. 겨우 방향을 틀어 다시 달려가기 시작한 내 시선 속으로 공원 부근의 한적한 공터에서 대치 중인 카디와 하은이가 들어왔다. 말이 대치지, 카디의 오토바이는 이미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 옆에 선 카디를 몇 대의 자동차와 거기에서 나온 검은 양복 사내들이 포위한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는 카디의 정면으로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하은아!”

소리쳐 불렀지만, 녀석은 내 쪽으로 고개조차 돌려보지 않았다. 녀석의 팔이 천천히 들어 올려지고 있었으며 그 손에 권총이 들려있었다.

“정하은! 그만둬!”

빌어먹을! 이대로는 늦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정글도를 던졌고, 처음으로 내 정글도는 적이 아닌 동생 하은이를 향해 날았다. 물론 목표는 하은이가 아니라 녀석의 권총이었으며 정글도는 무섭게 회전하며 정확히 총신만을…… 아, 피했다? 아니, 오히려 잘 됐다. 하은이가 뭔가 날아오는 걸 느끼고 반사적으로 팔을 거두어들이는 것 역시 내가 노린 바…… 타앙-! 어…?

곧바로 이어진 총성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은이는 놀라서 팔을 거둔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사격을 방해하는 요소를 피한 후 본래의 행동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자유는 스스로의 힘으로 얻겠다고 외치며 달려갔던 기운찬 소녀가 허무하게 쓰러지고 있었다.

“카디~!”

빌어먹을! 겨우 카디의 앞에 도착했지만, 이미 땅바닥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그녀의 가슴은 파들파들 떨며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선회하여 돌아오는 정글도를 다시 받아드는… 너무나 익숙한 동작조차 힘이 들었다. 막지… 못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몽몽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잠깐이지만 여동생이었던 소녀의 죽음과 전에도 앞으로도 여동생인 녀석의 살인을 끝내 막지 못한 것이다.

“정…하…은!”

하은이는 낮게 부르는 내 목소리가 이제야 들린다는 듯 무심히 돌아보았다.

“왜… 쐈지?”

“오빠야말로 왜 방해하려 했지? 그녀… 아니 ‘그 것’은 날 닮은 인형에 불과해.”

“인형…? 인형이 숨을 쉬고, 말을 하고, 생각을 하냐? 인형이 웃고, 자유를… 자유를 그리워 하냐?”

“…오빠. 그래도 인형은 인형이야. 결코 내가 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빌어먹을!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거냐. 오늘 처음 만나서 불과 두 시간도 못되는 시간을 보냈을 뿐인 소녀의 죽음에 난 왜 이렇게……

“그러니까… 오히려 상관없었잖아. 네가 될 수 없으니까… 네가 될 생각도 없는 아이니까!”

“살려…줬어야 했다고?”

“…적어도 네가 해치진 말았어야지.”

“아니… 그게 아니야, 오빠.”

하은이는 천천히 고개를 젓더니 천천히 걸음을 떼어나와 카디 쪽으로 다가섰다. 하은이는 자신의 손으로 살해한 카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아주 미미한 미소를 피어 올렸다.

“이 아이는… 처음으로 만난 내가… 그럼에도 내가 자신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걸 허락해 줬다고 해서… 그래서 방심한 거야. 아직… 너무 미숙해.”

“하은이 너……”

“오빠. 알지…? 이 세상은 험하고 흉악해. 내가 이 아이에게… 날 닮은 내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이거야. 이 아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얻을 수 없었을… 영원한 자유.”

“너… 너 지금 무슨 괴변을 늘어놓는 거냐?”

“후후- 역시 오빠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뭐… 뭐냐, 이 녀석! 하은이 이 녀석은 카디를 기분 나쁜 복제로 여기고 없앤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닮은 동생 정도로 인정하고… 그래서 오히려 죽여서 자유롭게 해줬다는 건가? 그건… 하은이 저 녀석 자신이 그만큼 자유롭지 못한 고통 속에서 지내왔다는… 그런 얘기?

“애써 날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돼, 오빠. 난 그런 사람이 없는 시간에 더 익숙해.”

서글픈, 너무나 서글픈 소리를 하며 녀석은 나와 카디로부터 물러서며 몸을 돌렸다. 그 동안 녀석이 간간이 보였던… 너무나 깊고 어두운 슬픔의 정체를…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하, 하지만…! 제기!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 …주인님! 주인님! ]

“응?”

[ 주인님! 못 들으셨습니까? ]

“…뭐?”

[ 역시 제 보고를 못 들으셨군요. 최근 들어서 드물게 흥분하셔서 그럴 것이라 추정은 했지만…… ]

…엥? 뭐, 뭐야? 그, 그럼… 으~ 내가 무슨 붕어도 아니건만, 오늘 무슨 낚시 걸리는 날이냐? 게다가 똑같은 녀석들에게 연이어…… 나는 몽몽의 보고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비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꾹꾹 밟아 눌러 감추어야 했다.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양복 사내들… DP의 요원들 중에서 하은이 뒤에 서 있던 사내가 나와 카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수하겠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낮고 무거운 음성이었다. 도홍이나 론 정도의 수준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결코 만만치 않은 기운이 풍기는 사내였고, 그가 오늘 하은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요원들의 보스인 듯했다.

“회수…? 협조?”

“정식명칭 ‘그레이스 C01호’, 속명 ‘카디아나 정’… 그녀의 사체 회수입니다.”

“…싫다면?”

“그녀는 저희 회사 연구소의 ‘제품’입니다. 당연히……”

“싫!다!면…! 그럼 어쩔 거냐고 물었다.”

“허어~”

사내는 어이없다는 소리를 내며 알게 모르게 반 발짝 정도를 뒤로 물러섰다.

“당신의 터무니없는 전투력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제멋대로……”

사내의 말은 그쯤에서 문득 멈추고 말았다. 등뒤의 서늘한 인기척을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사내는 자신이 의식도 못하는 사이 등뒤를 빼앗긴 것은 물론이 고 목 줄기에 차가운 칼날이 놓여져 있는 상황을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명부화…! 우리 지하무림 최고의 살수(殺手)이지.”

내 소개에 이어 은사마군 자신도 사내의 귓가에 입술을 내고 낮고 음산하게 속삭였다.

“조심해요. 천주께 무례하면 죽습니다.”

사내는 흠칫 몸을 떠는 것 같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자존심 사이에서 아직은 자존심이 앞서는 것 같았다.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내게 물었다.

“어쩌…려는 겁니까. 당신에게는 카디아나의 사체가 필요한 이유가 없잖습니까.”

“이유…? 내 동생의 무덤을 내가 만들어 주려 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당신 동생…? 핫! 당신 설마 그 제품을 정말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거요?”

“…만약 카디가 하은이의 대신이나… 적어도 자매로서 너의 위에 서게 되었다면…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후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 공주님의 영혼이 그대로 옮겨간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못한 생체인형따위를 인정할 수는 없……”

“닥치고! …그냥 가.”

“…공주님!”

사내는 하은이를 부르며 고개를 돌려보고는 이내 더욱 표정이 굳어졌다. 하은이만 쓴웃음을 지으며 혼자 서 있을 뿐, 어느 사이 그의 부하들 모두가 각각 또 다른 적에게(당근 내 수하들) 제압되어 그와 똑같은 처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네. 그냥 돌아 갈 테니 모두 놔줘, 오빠.”

“공주님!”

“가만있어, 빅터. 이렇게까지 당하고도 인정하지 않는 게 더 흉해.”

하은이는 딱 잘라 사내, 빅터의 반발을 무시한 다음 다시 날 보았다.

“오빠.”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사마군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제야 지하무림의 살수들 손에서 풀려난 DP요원들은 분하기도 하고 여전히 두렵기도 한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목을 매만져 보고 있었다. 다만 빅터라는 사내만은 더 분노에 사로잡힌 듯, 이제 내가 아니라 은사마군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오늘 같지는 않을 거야, 아가씨.”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도 당신은 저의 얼굴을 보지 못할 거예요.”

은사마군의 조용한 대꾸에 빅터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하은이가 다시 짧게 재촉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얌전히 물러났다. 하은이는 그 빅터가 열어주는 차 문 앞에서 간단히 인사했다.

“…갈게, 오빠.”

“…가라. 곧 따라가마.”

“그러지마. 그럴 필요 없어.”

“내가 필요 있다. 널 이대로 보냈다고 하면… 나, 어머니께 맞아 죽는다.”

어머니를 언급하자 처음으로 하은이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떠올랐다.

“…큰 이모께는 죄송하다고 전해 줘. 이젠… 다시 뵐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 딴 거, 네가 직접 말해. 나중…에라도.”

“…갈게.”

“가라.”

카디의 말과 달리 하은이는 어쩌면 오래 전부터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최소한 감은 잡고 있었는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 금동이와 함께 가출했던 것처럼 투정부리 듯이라도 반발하고 있었던 건지도……

[ 주인님. ]

< 알아, 몽몽. 아무리… 치명상이 아니라도 치료는 빠를수록 좋겠지. >

나는 하은이가 탄 차가 다른 차들과 함께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카디의 시신(?)을 안아들었다.

< 은사마군. 지금부터 내가 지시하는 일을 은밀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준비해 줘. >

< 하명하십시오. >

그러고 보니 내 앞에서는 조금 버벅대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던 은사마군이 오늘 드물게 무서운 포스를 선보였던 것 같군. 사실 그게 당연한 거지만 말이 다. 어쨌든, 나는 은사마군에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는 병원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 잘 들어 카디. 모두 떠났다고는 해도, 혹시 모르니까 눈뜨지 말고… ‘예스’는 한 번, ‘노’는 두 번… 신호를 보내. 알겠지? >

내 전음이 끝나자 카디의 몸 위에 놓여져 있는 그녀의 손 중에 검기 손가락 하나가 움찔, 한 번 움직였다.

< 좋아…! 하은이가 쏜 총알은… 다행히 네 심장에 닿기 전에 멈췄어. 아마도 하은이가 미리 자기 총의 총알에서 화약의 양을 줄여두었던가 그런 모양인데… 그거, 니들끼리 사전에 약속된 거였니? >

카디의 손가락이 움찔, 움찔, 두 번 움직였다. 하아- 이 녀석들, 사전 모의도 없이 잘도 이런 상황을 연출했군. 아무리 화약의 양을 조절했다고는 해도, 어떻게 될지도 모를 실제 상황에서 주저 없이 쏜 녀석이나… 총을 맞고 나서 곧바로 그걸 알아채고 천연덕스럽게 ‘죽은 척’을 한 녀석이나……

< 너, 죽은 척 훈련… 그러니까 일정시간 호흡을 멈추는 훈련을 따로 했었니? >

한 번 움찔. 예스.

< 본래 교육 과정에 있었던 거냐? >

두 번 움찔. 노.

< 그럼 탈출을 위해 너 혼자 특훈을 한 거야? 혹시라도 필요할까봐? >

한 번 움찔. 예스.

으음… 하긴, 거대 조직에게 쫓기게 되는 상황에서 ‘죽은 척’은 기본 코스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니……

< 아무래도 하은인 네가 그런 훈련까지 했을 거라고 예상했나 보다. >

한 번 움찔. 예스. 방금 그건 물어본 게 아니었는 데……

< …암튼. 내가 이렇게 나올 것도 예상해서… 내가 근처에 있을 때 일을 벌였을 테고… 하여간 그 녀석 참…… >

이번에도 물어본 것이 아니었는데도 카디의 손가락은 움직였다. 먼저 살며시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더니 곧 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것이었다.

< 그래, 그래… 니들 잘 났다. >

나는 약간 투덜거리듯 마지막 전음을 보낸 후 말없이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적의 감시를 계속 의식한다는 건 확실히 피곤한 일이지만… 그보다 지금은 무엇보다 빨리 이런저런 일을 처리한 다음 하은이의 뒤를 쫓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 나를 초조하게 하고 있었다.

자신의 복제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충격을 극복한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자유까지 챙겨주는 여유(?)를 보인 하은이지만… 그럼에도 난 어쩐지 녀석의 마지막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 동생이 그런 표정으로 떠나는 것을 두고 볼 오빠는 세상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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