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56화 : 그랜드캐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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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56화 : 그랜드캐년 전투.


6-8. 그랜드캐년 전투.

협곡에서의 전투가 시작 된 후 20분 정도가 지났을 때, 나는… 달리고 있었다. 그 것도 숨가쁘게! 절벽 위를 쏜살 같이 달리는 나보다 체인 건의 총탄이 더욱 빠르게 따라 붙으며 바위를 부수고 헤집고 있었다. 파괴 대상이 바위에서 내 몸으로 바뀌려는 순간, 나는 곧바로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려 피한 후 계속해서 내달렸다. 가파른 경사면을 떨어지는 건지 달리는 건지 모를 속도로 달려 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절벽을 박차고 반대편 절벽으로 날았다.

짧다…! 십 여 미터 정도?

왼 쪽을 뻗어 천잠사를 날려 그 끝의 암기를 반대편 절벽에 박아 넣고 잡아 당겼다. 부족했던 거리를 그것으로 보충하여 절벽에 매달린 나를 찾아 적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절벽 위를 더듬어 오기 시작했다. 그 서치라이트를 향해 삼시전결을 날린 다음, 벽호공(壁虎功)으로 재빨리 절벽 위를 기어올랐다.

크카카가칵칵~!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쾌하고 강렬한 체인 건의 소음과 함께 내 발 밑의 바위가 과자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 높이를 확보한 시점에서 다시 몸을 날려 놈을 향해 뛰어 내렸다. 내가 설마 헬기 위로 뛰어 내릴 지는 적도 예상조차 못한 것 같았다. 헬기 위에는 당연히 거대한 프로펠러가 돌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프로펠러의 중심, 날개의 축을 차고 헬기의 뒤편으로 뛰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을 스쳐 가는 온 꼬리날개에 정글도로 일격을…! 그리고 그대로 협곡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키-이-잉!

약점인 꼬리날개가 부서져 불안정한 굉음과 함께 회전하기 시작한 적 헬기의 최후를 끝까지 지켜볼 여유는 없었다.

[ 주인님! ]

몽몽의 다급한 알림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던진 천잠사의 끝이 어딘가의 바위에 제대로 꽂혀진 모양이었다. 나는 다행히 추락을 멈추고 절벽에 매달린 채 잠시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문득 섬뜩한 기분 때문에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 내가 꼬리날개를 부순 헬기가 정신없이 허공을 맴돌며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재빨리 바위에 몸을 밀착시키는 순간 헬기의 프로펠러가 등뒤로 소름끼치는 바람을 일으키며 스쳐갔다. 곧이어 내 발 밑의 절벽에 한 쪽 몸체를 부딪친 헬기가 굉음과 함께 폭발하더니 협곡 밑바닥으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불꽃에 휩싸인 헬기가 떨어지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다. 조금 전까지 100미터 정도는 떨어진 것 같은데… 아직도 바닥까지 2, 300미터는 되는 건가…? 과연 거대한 협곡의 대명사답군 그래.

나는 다시 천천히 절벽 위로 기어올라가다가 천잠사 끝의 암기가 박힌 바위에 도착해서는 틈을 찾아 잠시 기대어 섰다.

후우우~ 기세 좋게 도그 파이팅을 시작한 건 좋은데… 역시 전투 헬기를 상대로는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이 안 되는 걸? 심지어 조금 전처럼 이미 잡은 놈이 떨어져 내리는 것까지 조심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말이야.

사실… 전투 재개 후 첫 번째 헬기와의 근접전은 생각보다 쉬웠었다. 내가 헬기에서 뛰어 내려 절벽 위에서 매복하고 있다는 걸 몰랐던 적의 헬기 한대가 별다른 경계도 없이 절벽 사이를 날아서 지나가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즉시 와이어를 던져 프로펠러에 감아 버렸고, 당연히 간단히 격추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도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두 번째 헬기도 나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리석게도 속도를 줄여 절벽 주변을 돌며 자기 동료의 추락 원인을 알아내려고 했었던 것이다. 당연히 나의 기습 공격에 역시 꼬리날개를 당해서 추락……!

…그런데 세 번째 헬기가 문제였지. 날 발견한 건 물론이고 헬기 조종 실력도 대단해서 조금 전까지 내게 틈을 주지 않으면서도 계속 몰아 붙여 왔으니… 으음, 어쨌든 예상대로 약점이 꼬리날개인 점은 아파치 헬기도 마찬가지였군. 월광절화결보다 내공 소모가 적은 초식으로 정확하게 약점을 적중시키는 식으로 싸웠더니 내력 안배도 그럭저럭 되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헬기에 매달려 오던 때부터 계속 제대로 쉬지를 못했더니 좀……

[ …주인님. 휴식을 취하시는 건 좋지만, 아직 장소가 좋지 못합니다. 조금 전 파괴된 헬기의 폭발음과 불꽃때문에 적이 몰려들 수 있는 지점에 해당합니다. ]

< 알아, 몽몽.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여기서 쉬려는 거야. 어차피 내 쪽에서 뛰어 다니며 헬기를 추적하는 건 곤란하고, 유인해서 해치워야 하니까 겸사겸사… 말이야. >

[ 하지만 주인님. ]

< 어, 요몽이냐? 간만이네. >

[ 네. 후후~ 그 동안 제 동생 패티의 교육을 제가 맡고 있어서 등장이 뜸했었지 뭐예요! ]

< 으음… 그 아이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 교육시킨 것까지는 그렇다 치겠는데, 하필 네가… 아, 암튼 수고했다. >

[ 엑~! ‘하필 네가’라니, 너무 하세요! 전 정말 최선을 다해서 멋진 아이로 키우고 있는 중이라구요! ]

< 어- 내가 너무 솔직했나? >

[ 우으~ 기억해 둘 거예요. 이젠 패티에게 주인님 험담도 할거고요! ]

< 알았다, 알았어. 미안해. 진짜 사과할 테니 좀 봐주고… 음, 근데 너 다른 뭔가 할 말이 있어서 나온 거 아니었냐? >

[ 아참참! 벌써 이 쪽으로 기수를 돌린 적들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한 거였어요. ]

< 쳇! 그러냐? 와도 조금 천천히 와 줄 것이지…… >

[ 어… 게다가 도청 된 무선 내용으로는 미사일 공격을 하려는 거 같아요. 이쪽으로 방향을 잡은 아파치 헬기 6대가 동시에 남은 헬파이어나 토우 미사일 같은 걸 모두 퍼붓는다고…… ]

쯧…! 그래서 이 지역을 초토화시키겠다고…? 내가 헬기에서 내려 ‘땅’에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선택한 전법이겠지만… 6대에서 쏘는 미사일로는 이 부근의 협곡 내 외부를 전부 커버할 수는 없지 않나? 흐음~ 그렇다면 다소(?) 위험해도 과감하게 받아 줘서 완전히 기를 죽여 버려……?

[ 침투시킨 버그는 아직 활동 중이며, 패티가 대기 중인 위성도 가용 괘도에 있습니다. 다시 적기의 사격 시스템을 마비시키겠습니다. ]

마지막 보고 및 통고는 몽몽이었다.

< 잠깐! 막지마, 몽몽. 직격을 피할 수 있는 지점이나 체크해 줘. >

[ 너무 위험한 결정입니다. ]

그렇다는 건 몽몽이 적기의 시스템 마비라는 걸 ‘권고’가 아니라 ‘결정 후 통고’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 현 지점에서도 직격은 당하지 않습니다. 적들은 절벽 위쪽을 포격하여 무너트릴 계획입니다. ]

아차…! 그랬구나! 위쪽만 공격해서 무너트려도 아래쪽이 생매장되는 건 당연한 건데……

[ 명령 번복을 권고… 아, 늦었습니다. 포격 개시! 1차 스캔된 회피 권고 지점은…… ]

내가 너무 섣부른 결정을 했다는 후회도 들었지만 이미 너무 늦었기에, 나는 즉시 몽몽이 알려주는 지점을 향해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몽몽이 말한 것처럼 거대한 바위가 돌출 지점에서 정글도를 바위에 박아 브레이크를 잡은 후 언뜻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 위의 양쪽 절벽에서 무수한 빛의 줄기가 넘어오고 있었다. 그 것들은 무서운 기세로 날아 든 반대편 절벽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히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폭염이 솟구치는 광경이 이어졌다.

이, 일단 몽몽이 알려 준 바위 아래로 몸을 피하긴 했는데… 바위 위로 자잘한(?) 파편들이 소나기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섬뜩하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협곡 전체를 울리며 점점 커져오는 이 파동…! 파괴 된 암석 절벽이 무너져 내리는 기세가 눈사태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는 걸 보지 않고도 느껴지고 있다.

[ 포격의 여파가 계산보다 20% 이상 강함! 현 지점까지 연속 붕괴 가능성 58%로 상승! 장소 이동 및 낙석 회피의 필요성 증가 중! ]

이런 제기…! 결국 이 피신 장소까지 무너져서 떨어지는 돌, 아니 바위들을 요리조리 피하는 살벌한 게임을 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 위험 징후 감지! ]

윽! 기어이! 몽몽의 경고 후에도 곧바로 피신 장소가 무너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전신으로 느끼고 있는 감각으로도 이 장소는 이미 더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디로? 어떻게 피하지? 난 아직 산사태 피하기 훈련 같은 건 해 본 적이… 으~! 이 판국에 알게 뭐냐!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판단에 따라 스스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자신이 있고 어쩌고 간에 무조건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모든 정신과 감각을 동원해서 떨어져 내리는 암석들의 움직임을 잡아내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과속으로 달리는 차를 타고 가면서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차들에 둘러 쌓인 셈이라고 할까…? 그리고 당연히 나보다 과속을, 나보다 빨리 떨어지며 덮쳐오는 암석들도 있다. 나는 나와 비슷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바위 하나에 발을 대고 몇으로 몸을 이동시켜서 그 칼날 같은 암석 조각을 피해 낸 후, 다시 다른 바위를 밟았다(?!). 이어 그 바위를 아래로 밀어내며 조금 위쪽의 바위로 도약하여 그 것을 디디고 연속해서 다음 바위로 뛰었다. 하늘을 향한 징검다리를 건너는 듯한 형국이었다.

그, 그런데… 속도의 차이 때문에 끊임없이 엄습해오는 암석들을 피하며 역으로 뛰어 올라가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닌…게 당연한 걸 텐데…! 그런데 왜 이렇게 쉬운 거지? 뭐야, 나 이래도 되는 거야?

나는 시간이 갈수록 ‘공중 징검다리 건너기'(?)가 너무나 수월하게 느껴져서 오히려 방심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가장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바위까지 무사히 뛰어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 시점에서 난 내가 이미 협곡 아래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이라는 걸 깨닫고 바위를 박차고 마지막 도약을 했 다. 함께 떨어지던 바위들 덕분에 상쇄되어 가던 낙하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한 순간, 나는… 허공에 멈추어 서있었다. 기묘하면서도 너무나 멋진 감각이 온몸을 감싸왔다. 능공…허도(凌空虛道)…! 그 경지를 이루게 되면 혹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비로소 스윽 하강하여 협곡 바닥, 아니 그 곳을 덮친 암석 더미 중의 한 곳에 가볍게 착지했다.

[ 와아앗! 굉장해요, 주인님! ]

< …하, 핫! 나, 나도 놀랐다. 내가 이런 상황을 상처 하나 없이 넘겼다는 것도 그렇지만… 설마 이렇게 쉽게 해 낼 수 있을 줄은…… >

[ …저도 놀랐습니다, 주인님.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설마 사전 훈련도 없이 무사히 실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

< 사전 훈련…이라!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번 고공낙하로 맨땅이나 맨바다에 다이빙하는 등… 하여간 그런 경험들 때문인 것도 같아. 공중에서 낙하하며 움직이는 게 그리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었으니까 말이야. >

삼시전결의 업그레이드와 달리 이번 경우에는 구체적으로 뭐가 달라진 건지 규정하기는 좀 그랬다. 그러나 내가 처음 몸을 날렸던 200미터 이상의 절벽 위를 올려다보면 새삼 뿌듯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런… 잠시 좋은 기분을 즐길 틈도 없는 건가…? 저 자식들…!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러 오는 거겠지?

고약한 현대 병기의 집중포화로 인해 형태자체가 흉하게 변해 버린 양 쪽 절벽 너머에서 각각 3대의 아파치 헬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은 곧 두 대씩 세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 절벽 위와 중간, 바닥을 맡아 수색대형을 짜고 있었다. 나는 바닥 쪽을 맡은 두 대의 헬기에서 쏟아내고 있는 서치라이트 불빛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으음…! 본래 하던 방식대로라면 몸을 숨기고 있다가 기습을 하는 게 당연한데, 지금 기분이 쓸데없이 업 되어 버려서 그러고 싶지가 않다는 게 문제로군. 게다가 놈들은 이미 남은 화력을 거의 다 써버린 상태라 별로 긴장감도 들지 않고… 어디~ 그렇다면, 이번에는 놈들의 ‘운’을 한 번 보기로 할까?

나는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고 남은 내력을 거의 다 끌어올리며 공격을 준비했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나는 현천기공을 이용해 체온을 주변의 온도까지 내릴 수가 있으며 다른 레이더 방식은 몽몽이 커버해 준다. 놈들도 이제 내가 레이더로 잡기 어렵다 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는지 서치라이트로 협곡 바닥의 암석 더미 위를 꼼꼼하게 더듬어 비춰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나의 바로 부근 바위까지 도달했다. 놈들의 ‘오늘의 운세’는… ‘흉(凶)’이었던 것 같군. 안 됐어, 제군들.

그랬다. 놈들의 서치라이트는 아슬아슬하게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잘 봤으면 불빛 주변의 날 발견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수색시간이 길어지며 주의력이 떨어졌던 건지 놈들은 겁도 없이 계속 내게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약간씩 항로가 변하고 있기는 해도… 여섯 대의 위치가 순간 순간 상하로 일직선이 되는… 그러니까 11자 형태가 되고 있군. 그렇다면……!

나는 놈들이 바로 내 눈앞까지 도착했을 때, 정글도를 들어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가 위쪽으로 그어 올리며 월광절화결의 참화지수(斬花之首)를 펼쳤다. 하늘의 달과 나의 정글도를 연결하기라도 하듯 그려진 두 줄기 푸른 실선이 협곡의 어둠을 가르기 시작했을 때도 놈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놀라 피하려 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참화지수의 푸른빛이 놈들의 기체를 가르고 있었다.

나의 참화지수는 분명히 느리지만, 네놈들은 이미 너무 가까이 왔단 말야! 이대로… 아, 아닌가? 다섯 대의 헬기가 불꽃과 함께 갈라지며 내 머리 위를 지나쳐 날아가다 일제히 폭발해 버렸지만, 제일 위쪽 상공에 있던 헬기는 가까스로 참화지수를 피한 후 허둥지둥 고도를 높이고 있었다. 이런, 이런… 역시 아직도 월광절화결의 약점은 저 노무 느릿한 속도로군. 차츰 스피드를 높이는 요령이 잡히는 것도 같은데… 워낙 내력 소모가 커서 연습도 자주 할 수가 없으니, 원. 나는 약간의 쓴웃음을 지으며 달아나고 있는 여섯 번째 헬기를 올려다보았다.

[ 이건… 아니야! 작전 자체가 잘못되었어! ]

응? 몽몽이 저 헬기의 무선 통신을 실시간으로 들려주는 건가? 대장인 매카인가 뭔가 하는 자의 음성인 것 같은데?

[ 저런 거라는 걸 알려줬어야지! ]

윽! 나보고 ‘저런 거’…? 아무리 내력이 바닥을 치고 있어도 저 자식은 어떻게든 쫓아가서 확… 어? 뭐야? 내가 쫓아가서 어떻게 할 것도 없이… 매카시의 헬기는 절벽 위까지 떠오른 직후 불꽃에 휩싸여 버리고 있었다.

[ 은사마군입니다. 그녀가 절벽 위에서 스팅어 미사일로 요격한 것입니다. ]

흐응~ 그랬군. 은사마군과 은사도객들은 아무래도 내 움직임을 따라 잡을 수가 없어 따로 움직이라고 해 두었었는데… 늦게나마 여기까지 쫓아왔던 것이다.

[ 터너를 비롯한 용병단으로부터 전투 종료를 알리는 무선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적기는 모두 격추했다고 합니다. ]

하핫! 그 인간들 정말 큰 소리 칠만 한 걸? 내가 잡은 적기를 빼고도 거의 10대 1에 가까운 싸움이었을 텐데 그걸 전부 깼단 말이지? 나는 ‘터너와 그 일당들(?)’의 전과에 감탄하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전투가 끝난 후에도 느긋한 마음으로 수하들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날 웃을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운기조식을 시작한 후 30분 정도가 지났을 때,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모한 내력을 회복시키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속속 집결하고 있는 전우들을 앉아서 맞이하는 건 너무 미안한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도착하여 내 앞에 착륙한 4호기에서 내리는 페트라의 얼굴이 전에 없이 밝았다. 이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 주위로 착륙하는 1호기, 2호기, 3호기, 5호기 모두 4호기 못지 않게 용케도 날아서 돌아왔다 싶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수하들의 표정은 지극히 밝고 당당했다.

“승전을 보고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천주.”

대표로 승전보고를 하는 페트라와 다른 수하들 모두를 다시 만난 것이 기쁘고, 또한 이들이 자랑스러웠다. 물론 헬기 조종과 주포 사격은 터너들이 했지만 그 현란한 움직임의 헬기 속에서도 문을 열고 적을 향해 정확한 공격을 가한 건 바로 이들인 것이다. 게다가 나 같은 짓 정도는 아니었어도, 전황마군과 은사마군 등도 헬기에서 내려 맨 몸으로 협곡을 누비며 게릴라전을 펼쳤던 모양이고 말이다.

“…저희 어사조와 용병단을 포함하여 경상자 4명, 중상자 2명이며 사망자는 없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피해 내용은 이미 몽몽을 통해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중상자의 신원까지는 몰랐다. 나는 4호기에 실린 채 누워있는 중상자의 여자처럼 갸름하고 희멀건 한 얼굴을 확인한 다음에 다소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천의마군(賤醫魔君)?”

“그렇습니다. 공교롭게도 중상을 입은 자들은 모두 ‘의료진’이었습니다.”

에? 그러고 보니 의식을 잃고 천의마군의 옆에 사이좋게 누워있는 중상자도 그의 제자였네?

“그, 그럼 이 심한 상처를 누가 치료해 준 건데? 다른 의료진인 천의마군의 수하들은 다른 헬기에 나눠 탔었잖아.”

“천의마군 자신이었습니다. 그렇게 요동치는 헬기 안에서 먼저 부상을 당한 제자를,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상처까지 스스로 수술해 버리는 모습은 가히 묘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만……”

페트라는 보고의 포인트를 잡기가 난감한 모양이었고, 나 역시 천의마군의 솜씨를 칭찬해 줘야 할지 아니면 의료진이 무책임하게 먼저 다쳐서 이 꼴이 되어 있는 걸 탓해야 할지가 헷갈렸다. 어찌되었든 확실한 건… 나는 역시 의료진까지도 꽤나 평범치 않은 수하들을 거느린 자라는 사실인 듯 싶었다.

“어쨌든, 중경상자 대부분이 저희 쪽이고 용병들 중에서는 한 명만이 약간의……”

페트라가 보고 도중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긴 것은 터너가 조금 늦게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내게 다가오고 있는 터너의 표정은 나의 수하들과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뭐요, 터너. 원하는 대로 실컷 즐기지 못한 전투였던 건가?”

“아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터너는 새삼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스윽 주변의 정황, 내가 격추한 적 헬기들의 잔해가 협곡 여기저기에 처박혀서 아직도 채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있는 모습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걸 보고서야 어디, 우리 전공을 자랑할 마음이 들겠습니까, 보스.”

“훗! 그런가? 하지만 난 논외로 치고… 보통의 현실에서는 당신도 충분히, 아니 넘칠 만큼 대단했어.”

사실 나는 나대로 싸우느라 헬기들의 공중전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전 이들이 도착하는 모습 위로 몽몽이 위성으로 촬영한 장면들을 보여주었고, 그건 정말이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의 멋진 공중전이었다.

“게다가 당신 부하들도 당신 못지 않게 최고인 것 같고 말야.”

칭찬하며 돌아보니, 대장인 터너가 무색할 정도로 놀라운 실력을 보여 줬던 그들은 가장 멀찍이 착륙해 있는 헬기 부근에 모여 앉아… 또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슬쩍 귀를 기울여 보니, 주제가 바로 나 진유준이었다.

“…진짜야! 진짜 절벽 위를 뛰어다니면서 칼로 아파치를 잡더라니까?”

동료들에게 침을 튀기며 목격담을 떠버리고 있는 남자는 4호기의 조종사 컨트였다. 4호기는 이 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기체가 손상 당해서 가장 짧은 시간의 전투만을 치르고 먼저 짱 박힐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그 후 정찰 임무를 수행하며 아군을 보조하다가 나의 전투까지 목격했던 모양이었다.

“…몰라! 그 사람 칼에서 뭔가 나오는 것 같았는데 그게… 어, 뭐? 아파치 쪽? 그 쪽도 물론 반격을 안 할
리가 있나. 그런데 다 피하더라구. 난 처음 봤어 사람이 자기 발로 나르는 거! 그리고 또……”

사실 누구라도 믿을 수 없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저들 중에서 컨트의 목격담을 완전히 부정하며 비웃는
자는 없는 거 같았다. 게다가 이 비현실적인 전투의 증인(?)은 또 나오고 있었다.

“난 컨트가 말하는 걸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쩐지 믿겨 져. 그 남자가 이 녀석의 주인이라는 것
만으로도 말이야.”

5호기의 조종사 ‘러브’는 자기 옆에 앉아 건빵을 오물거리고있는 작은 동료 금동이를 힐끗 내려다보고는
다시 그 너머의 다른 동료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에게 부조종석을 빼앗겼던 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원숭이 정말 엄청났어. 원숭이가 헬기 사
격을 통제하는 것 자체도 놀라운데… 쏠 때마다 최소한의 사격으로 명중 시켜 버리지 뭐야! 내가 이번에
터너 대장 못지 않은 수의 적기를 격추시켰던 건 이녀석 덕분이었던 거야. 난 아무래도 이 녀석이 달톤
아저씨가 말한 금빛 원숭이가 맞다고 생각해. 그… 골든 불릿(Golden Bullet)!”

골든 불릿…? 금빛 탄환…? 그게 그 당시 금동이의 별명이었나 보군. 그리고 금동이 녀석, 전투가 끝난 후
에도 내게 돌아오지 않고 저들과 잘도 어울리고 있는 걸 보니 그 당시의 용병들도 이 터너 소대와 비슷한
분위기였던 모양이지? 어찌 되었든……

“분위기 좋은 것 같군. 다들 생명을 건 전투 후의 사람들 같지가 않아 보여.”

“그렇죠…? 게다가 돌아갈 집을 잃은 자들 답지도않고 말입니다.”

아, 아차…! 그걸 잊고 있었구나!
난 이들의 본부이자 돌아갈 집이 나의 적들에게 당한 일이 새삼 미안하고, 그런 일을 당한 이들 앞에서 나의 수하들이 무사하다는 것과 승전만을 기뻐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자니까, 터너는 이미 내 표정을 읽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보스가 죄책감을 가져야 할일은 아닙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었든, 적에게 점령 점
령당했다는 건 용병부대 자신의 책임이죠.”

“책임…도 책임이지만, 난 무엇보다 내가 그런 당신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는 게……”

“후후~ 웃는 거야 뭐, 당사자인 우리도 이렇게 웃을 수 있잖습니까.”

과연, 터너는 결코 어둡지 않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었고 그건 그의 부하 용병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슬프고 화가 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전장에서 사는 길을 택한 자가 동료의 죽음에 일일이 눈물을 흘릴 수는 없죠. 그러니까 웃는 겁니다. 웃으면서 기억해 주는 것이 저희 용병들의 동료에 대한 최고의 예의입니다.”

이 남자… 그리고 부하들도… 아깝군. 1회용으로만 쓰고 헤어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솜씨와 웃는 표정을 가진 남자들이잖은가!

“어… 그런데, 보스. 이제 우리의 계약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보아하니 이제 시작인 모양인데 우리 헬기는 모두 저 모양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당장 그게 문제는 문제로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겠지만……”

“아니, 잘 봤소. 모두 용케 격추 당하지 않고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다시 날아오를 수는 없을 것 같군.”

“…게다가 이제 연료도 얼마 없습니다. 전투는 고사하고 가까운 편의점도 못 갈 정도죠.”

과연… 계약 연장은 고사하고 집으로 돌려보내 줄 차비조차 없는 셈이군.

“으음… 미안하지만, 터너.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겠소? 당신들과의 계약도 그렇고, 뭐든 결정 되는대로 얘기해 줄 테니까.”

결국 우리끼리 ‘작전 회의’를 해야 한다는 뜻을 밝히자, 터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후 돌아섰다.

“그럼 보고를 마저……”

< 잠깐, 페트라. 이제부턴 전음으로 해.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까. >

< 알겠습니다, 천주. >

< 그리고 주변 경계는…… >

< 그 것은 이미 진행 중입니다. 은사마군이 복귀 할때 은사도객들 중 네 명을 양 쪽 절벽에 각각 두 명씩 배치해 놓고 왔습니다. 그리고 협곡의 양쪽으로는 천음마군의 수하 두 명이 배치되었습니다. >

< 흐음, 좋아. 이제 계속하지, 페트라. >

< 예, 천주. 우선 경상자들은 말 그대로 가벼운 상처이므로 당장 전투에 재투입되어도 무방하다고 사료됩니다. 또한, 추가 소집된 보천구룡대 병력들도 현재 천주의 명령을 기다리며 최초 집결지 부근에서 대기중입니다. >

쯧…! 잠시지만 내가 성급하게 ‘사망자 집단’으로 여겨 버렸었던 수하들의 무사 소식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보고에 포함되니까 기분이 조금 묘하군.

< 실은, 천주께서 갑자기 ‘지원 병력은 오지 않는다’라고 하신 대다 실제로 그들과 얼마간 연락이 두절되어 놀랐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들은 마침 ‘HT 항공 용역사’ 부근에 도착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DP의 특수부대가 용역사 본부와 외부병력간의 연락을 막기 위해 사용한 방해전파의 범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

HT가 무슨 약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HT 항공 용역사라는 건 터너가 소속된 용병부대의 위장 명칭이다.

< 제가 그런 상황을 알 게 된 것은 천주께서 전투에 임하신 이후여서 미처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천주 의 집중력을 흐릴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지만 오히려 심려를 끼쳐 드렸던 거였다면 용서를…… >

< 난 상관없어, 페트라. 나도 얼마 안가 ‘나의 수하들, 지하무림의 보천구룡대가 그렇게 어이없이 당했을 리가 없다’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의 수하들이 당했다’라는 의식과 분노를 전투가 끝날 때까지 버릴 생각도 없었어. 그러니… 그들을 만나게 되면 사과를 해야겠지. ‘멋대로 죽여서 미안하다’라고 말이야. >

내 말에 어사조들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나 페트라는 여전히 정색을 한 채 보고를 계속했다.

< 천주의 뜻에 크게 어긋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문제입니다. 다른 곳에도 동시에 DP측의 방해 공작이 진행된 것인지, 이 지역을 잘 아는 이들도 좀처럼 기동 장비를 구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마침 LA에 거주하는 지하무림인이 직접 소유한 헬기 두 대가 조달되어 일부 병력들이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만, 전투 장비가 없는 민간 헬기라고 합니다. >

< …그나마 다행이군. 부상자들을 후송할 수는 있게 되었다니 말야. >

< 아…! 이럴 때 부상자를 먼저 챙겨 주시는…… >

‘내가 무지 착한 거라기보다, 중상을 입어 의식도 없는 동료를 잊고 있던 페트라가 문제’라고 말하고 싶지만… 암튼, 페트라는 나름대로 감격한 듯 잠시 뜸을 들인 후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 그, 그렇다면… 남은 한 대만으로 강행할 생각이십니까? 물론 애초의 계획도 ‘이번 전투 도중, 천주께선 소규모 병력만을 이끌고 전장을 빠져 나와 적의 본영으로 직행하는’ 것이었음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터너의 전투 헬기를 이용하는 경우였습니다. 만약 또 적의 전투 헬기나 그에 준하는 화력의 장비와 맞닥트리게 된다면…… >

< 하는 수 없지 뭐. 헬기가 어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뺑이 좀 치며 걸어서 가는 수밖에. >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지만, 페트라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 아무래도… 다른 할 말, 다른 의견이 있는 것 같 은 표정이로군. >

< 예, 천주. 천주께선 물론 그 어떤 위기도 혼자서 극복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천주의 앞길이 조금이라도 편하도록 만드는 것은 저희 수하들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무능하게 천주의 말씀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

으음. 이 여자가 정색을 하고 있을 때는 농담도 함부로 못하겠군. 굳이 ‘내가 미쳤냐, 그랜드캐년을 걸어서 통과하게? 적을 만나면 그 적의 장비를 뺏어 타고 갈 거야.’라고 설명을 해 줘야 하나……?

< 이제 70분 정도 후면 헬기가 도착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부터도 잠시만 더 저희들에게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든 반드시 적의 본영까지 저희들이 천주를 모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

이렇게까지 나오니 더 거부하기가 미안해지는 군. 사실 나도 좀 더 내력을 회복할 여유가 필요하기도 하고 하니… 응? 잠깐! 뭐…지, 이 느낌?

< 제 계획은 집결지에 대부분 남아있는 보천구룡대 병력으로 하여금 HT를 탈환…… >

< 쉿-! 조용! >

전음에서 ‘쉿-!’은 어째 어색한… 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갑자기 대체 뭐야, 이 불길한 기분은?

< 몽몽. 너 지금 뭔가… 주변에서 스캔되는 거 없냐? >

[ …실은 조금 전부터 매우 미세하며 규칙적인 소음을 감지하여 분석 중이었습니다. ]

< 소음……? >

나는 즉시 내력을 운용해 청력을 더 높여 보았다. 그러나 나도 아직까지는 이거다 싶은 소리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 음파 패턴 분석이 어려울 정도로 미세했으며, 기본 분석으로는 자연의 소리로 분류되어 보고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시간이 갈수록 소음이 커지고 있습니다. ]

이건… 뭔지는 몰라도 하여간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몽몽이 자연의 소리로 착각했다는 건……

[ 현재의 음파 패턴 분석 결과… 소형… 다족(多足) 형태의…… ]

뭐…? 아, 이제야 내게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몽몽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이 빌어먹을 소리는……!

< 천주……? >

< 페트라! 아니 모두 잘 들어! >

나는 어사조 뿐 아니라 터너 일행에게까지 전음을 날리기 시작했다.

< 지금 즉시 무기를 챙겨! 특히 헬기 안에 폭약류 남은 거 있으면 다 끌어 모아! 양쪽 경계병들은 철수! 뭐가 보여도 쏘지마! 은사마군은 은사도객들을 대기시켜! 여기에 무슨 일이 생겨도 오지 말라고 해! 모두 서둘러! 빨리! >

어사조는 당연히 무조건 군말 없이 내 명령을 따랐고, 터너 일행들도 잠깐 어리둥절해 하긴 했으나 곧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 아, 맞다. 헬기! 모은 폭약은 놔두고 모두 헬기에 타! 일단 이 곳에서 만이라도 탈출을…… >

[ 주인님! 위험! ]

< 뭐? >

반사적으로 몽몽이 알려주는 4호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그 헬기 다리에 붙어서 마악 위로 기어올라가기 시작한 ‘벌레’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주먹만한 크기의 징그러운 거미였다.

< 명령 취소! 모두 헬기로부터 떨어져! >

그렇게 외쳤지만, 정작 나는 반대로 4호기 쪽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정글도로 거미에게 삼시전결을 날렸고, 그게 적중되자 거미는 그대로 폭탄처럼 폭발해 버렸다. 거센 충격파와 함께 불길이 솟구쳤지만 나는 호신강기를 더욱 강화하며 폭연을 뚫고 헬기 안으로 뛰어들었다. 들어감과 동시에 천의마군과 그의 제자를 양손으로 움켜잡고 다시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 와중에도 언뜻 눈에 들어 온 것은 4호기의 기체 뒤쪽에 붙어 있는 또 한 마리의 거미였다.
저 위치는…! 빌어먹을!
예상대로 그 거미는 스스로 불꽃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 그 폭발 자체는 대단한 것이 못되었지만, 나는 무사히 헬기 밖에 착지한 후에도 양손에 두 남자를 들고 정신없이 달려야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연료통에 불이 붙은 헬기가 굉음과 함께 2차 폭발을 일으켰다. 다행히 그 전에 충분히 멀어질 수 있긴 했지만… 역시 등으로 느끼는 폭염은 언제나 기분 나빴다.

< 천주! >

당황한 기색의 어사조들이 달려왔고, 나는 약간의 가쁜 숨을 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난 오늘 하루 동안 두 번이나 폭발 직전의 헬기에서 누군가를 구해내야 했던 것이다.

< 난 괜찮아. 이 둘의 상태나 좀 살펴봐 줘. >

나는 페트라에게 천의마군과 제자를 넘겨주고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 사이 다른 헬기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4호기와 같은 신세가 되어 불타고 있었다.
어찌 보면 불길로 둥그렇게 방어벽을 치게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실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저 불길이 우릴 가두어 놓은 철창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철창 너머로 나와 몽몽이 너무 늦게 알아챘던 소리가 점점 빠르게 커져오고 있었다. 사삭사삭… 혹은 사각사각…?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 모두… 무사한가? 보고해. >

< 전원 무사합니다, 천주. >

“티미가 작은 파편에 맞고 엄살 부리고 있는 거 말고는… 우리도 일단 무사합니다.”

전황마군과 터너는 그렇게 보고했고, 이어서 터너가 드물게 험상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보스. 어째서 갑자기 우리 헬기들이 저 꼴이 되어버린 거죠?”

< …아무 것도 못 본 거요? >

“예. 갑자기 헬기에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모두 피하기에 바빴을 뿐입니다. 티미 녀석이 무슨 커다란 타란튤라 거미를 봤다고 잠꼬대를 하긴 했지만……”

< 그거요, 터너. 그 거미가 범인이오. >

“…에? 뭐라…고요?”

터너는 이 사람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표정이 되어 버렸지만, 나는 그를 무시하고 모두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 다들 믿기 어렵겠지만, 그 거미들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야. 적이 보낸 거미형 살인 로봇인 거지. 그리고… 조금 전의 거미들은 척후병이자 기습조였던 것 같아. 나의 감각이 언뜻 놈들의 접근을 알아채더라도 그냥 진짜 벌레의 움직임으로 여기고 넘어가게끔 소수의 거미들만이 헬기를 먼저 노리고 침투해 왔던 거야.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린 이렇게 퇴로를 차단당한 채…… >

나는 불길 너머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 …저 징그러운 놈들에게 공격당할 처지가 된 거야. >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모은 모두의 입에서 꿀꺽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터너의 부하들 중 한 명이 불빛에 비치는 구역, 아니 어쩌면 이 협곡 안 전체에 해당할지도 모를 상황을 너무나 정확히 표현하기 시작했다.

“대, 대장! 따, 땅이… 땅이 움직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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